바이블 오디세이 I2011. 9. 12. 04:11

2011 9 1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18:21-35

제목: 용서는 권세다

 

오늘 본문은 용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용서는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공헌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의 지표가 되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한 마디로 용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 받는 것도 서툴고, 용서 하는 것은 더더욱 서툽니다. 인생을 살면서 용서 받지 못하고 살았거나, 용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더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경험과 이성을 모두 뛰어넘습니다. 우리의 육체의 법을 뛰어 넘어 새로운 인생,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우리가 얼마나 받아들였느냐, 얼마나 깨달았느냐의 정도에 따라서 나의 삶을 붙들고 있는 분노와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언제나 교회의 대변인 역할을 합니다. 그의 질문은 그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질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용서는 세 번까지 하고 그 이상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 번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세 번까지 용서하라니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려고 노력해 보신 분은 잘 아실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랍비들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는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랍비들과는 다를 것을 예상하고,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하고 물었던 겁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완전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시는 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의 질문에 칭찬을 받을 거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상상할 수 없었던 용서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것을 숫자적으로 계산하면, 490번입니다. 그러나 이는 문자적으로 용서를 490번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일곱이 유대인들에게 완전수임을 고려할 때 이는 무제한적인 용서를 가리킵니다.

 

말은 멋있어 보입니다. 대인배 같아 보입니다. “무제한으로 용서하라!”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와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천국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용서를 빗대어서 하신 이 천국의 비유는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임금입니다. 다른 부류는 임금의 종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류는 종들의 동료입니다.

 

임금의 종들은 임금에게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 규모가 일만 달란트라고 합니다. 우리가 탈랜트라고 하는 그 달란트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쓰는 화폐 단위와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와 닿지 않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단위인가를 알고 나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실 겁니다.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 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1달란트는 6,000명의 하루 품삯입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100불로 치면, 1달란트는 60만불입니다. 한국돈으로는 6억정도가 되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 종이 임금에게 빚진 것이, 1달란트가 아니라, 1만 달란트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계산이 안 되니까, 쉽게 다시 설명하면, 한 사람이 평생 60만불(6) 정도 모을 수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게 1달란트입니다. 이것을 1만 번 해야 갚을 수 있는 빚입니다. 우리가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1만번을 다시 태어나 평생동안 모으고 또 모아야 갚을 수 있는 규모의 빚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한 마디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죄를 빚의 개념으로 바꾸어서 설명하시는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이처럼 우리 힘으로는 청산할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니다. 조금 유식한 말로, 실존이라고 합니다. 우리 존재의 본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종에게 임금은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합니다. 임금은 사실 이 종이 그 돈을 갚으나 갚지 않으나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거 없다고 임금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거 없어도 임금은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임금의 이 명령 앞에 어쩔 도리가 없는 종은 임금 앞에 바짝 엎드려 애원합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로서 다 갚으리이다.” 이렇게 바짝 엎드린 종의 모습이 애처로웠던 임금은 그 종의 모습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임금이 종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 외에는 종이 빚을 갚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장면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에게 빚는 자기의 동료를 만납니다. 그리고 낯을 변하여 동료의 멱살을 잡고 자기에게 진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종의 동료가 그에게 진 빚은 백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했습니다. 백 데나리온의 빚은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해서 갚을 수 있는 정도의 빚입니다. 사실 이것도 그렇게 만만한 규모는 아닙니다. 그런데 종이 임금에게 진 빚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종은 잔인합니다.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를 잡아다가 옥에 가둡니다. 이 일을 본 동료들이 이 일을 임금에게 가서 고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임금은 노하여 그 종을 잡아 들여 이렇게 훈계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임금은 그 종을 옥에 가둡니다.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종은 임금의 용서를 악용한 나쁜 사람입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 사람을 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악용의 대상이 아닙니다. 책임을 회피하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이 이것을 악용합니다. ‘성경에서 죄를 용서하라고 했는데, 당신은 기독교인이면서 어찌 성경말씀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이요!’ 그렇게 되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무슨 감옥이 필요하겠습니까? 죄짓는 족족,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의 죄를 사하노라!’하고 풀어주면 되죠?

 

죄의 값은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서에서도 보면 다윗 왕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서 죄를 범합니다.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자신의 충실한 장수, 우리야를 최전방으로 내몰아 전사시킵니다. 그리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잘 자랍니까? 아닙니다. 죄 값은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래 내 종 다윗아 내가 너를 용서하마하면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죄 값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나은지 얼마 안 돼서 죽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값을 그렇게 혹독하게 치릅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안 좋은 일들이 죄값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죄의 숙명론에 빠지는 것도 건전한 신앙은 아닙니다.

 

죄의 값은 치러야 합니다.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이건 죄 지은 쪽이 가져야 할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마음으로부터해야 합니다. 이것이 잘 되지 않으면, 결국 나만 다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이 만든 밀양이라는 영화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연이 주연을 맡은 영화인데, 신정론과 용서의 문제를 절묘하게 그린 영화입니다.

 

서울에서 남편을 잃은 이신애(전도연 분)는 그와의 추억이 담긴 밀양에 내려와 아들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아들마저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 슬픔을 극복하려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신앙으로 잘 극복해서 살아가는 듯 합니다. 시간이 한 참 지나, 이제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교회 성도님들의 격려와 도움에 힘 입어 그에게 용서를 건네러 교도소에 갑니다. 너무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인 범인을 대면했습니다. 용기 있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아들을 죽인 범인이 오히려 감옥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신애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범인의 말인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사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이신애는 그 순간 실성합니다. 그의 마음에 드는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어!!” 이신애는 모든 신앙을 다 잃어버리고, 그때부터 교회를 헤집어 놓는 악녀로 변합니다.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그 사람(자신의 아들을 죽인 그 악마같은 죄인)을 먼저 용서한 하나님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우리의 온 존재를 통해서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 위에서 하는 신앙생활이란 용서가 우리 삶의 근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 삶 가운데 있는 것 중에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이 아니라, “용서입니다.

 

이 세상은 이 있어야 권세 있는 자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돈이 곧 권세인 세상인 것이죠.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영혼까지도 팔아 먹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돈을 쓰면서 권세를 누리려고 합니다. 이건 이 세상이 주는 헛된 욕망에 불과합니다.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우리는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사는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모든 믿는 이들에게 용서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용서는 권세가 아니라,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세상이 부끄러워하는 그것으로 우리 인류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이죠.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고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봤자, 그 돈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권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의 권세입니다. 용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의 권세를 받은 자만이 용서 할 수 있습니다. 그 권세를 왜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이 얼마나 큰 권세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는 분들은 아직 돈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지닌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권세, 헛된 권세를 부리지 마십시오. 하늘 나라의 권세, 영원한 권세인 용서의 권세를 부리십시오. 용서의 권세를 누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 나라의 시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백을 예배 때마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