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9. 26. 03:34

2011 9 2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출애굽기 17:1-7

제목: 하나님은 생명을 주신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앞 부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시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하루에 모든 가족이 먹을 양 만큼만 거두라고 명령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길 바라신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오늘 만나가 내리고 나면 언제 만나가 또 다시 내릴지, 솔직히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 먹을 만큼만 만나를 거두어 들이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가운데 하루 이상 먹을 치의 만나를 거두어 저장해 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저장해 둔 만나는 곧 다 썩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먹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는 단순히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더 많이 갖고 싶어합니다. 욕심도 인간이 살아가면서 너무 부리면 그렇게 좋은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심을 시험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검소하게 살기를 바라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신앙에 대한 시험이었다는 것이죠. 광야에서 하루 하루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이고 도전입니다. 인간 마음이야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일을 준비해 두는 것이 뭐가 그리 잘못된 것이겠습니까?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 진짜로 자기들 가운데 있는지 확신이 안 섰다는 겁니다. 그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셨다고 하는 만나가 눈 앞에 있긴 하지만, 그것을 내려 주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그들 눈에는 만나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에만 집착을 합니다. 만나를 거두어 들이는데만 신경을 골두한 나머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까마득한 이야기로 듣고,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만나를 필요 이상으로 모읍니다. 이미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만나 즉 먹을 것이 이들에게는 생명을 주는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은 계속해서 나타났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 눈에는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였습니다. 이들은 진실로 헷갈렸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계신 걸까?’

 

이스라엘 백성은 신광야를 떠나, 르비딤이라는 곳에 도착을 해서 캠프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곳에 물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나아와 극심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불평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15장에서도 마라라고 하는 곳에서 물이 써서 먹지 못한 것을 두고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혜를 주셔서 해결했습니다만, 이번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물을 두고 또 불평을 합니다. 이번에는 매우 극렬하게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이 불평의 이면에는 이전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모세의 반응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물을 두고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할 때 모세는 이렇게 응답을 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바로 이겁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시험입니까?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의 시험이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셨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정말로 당신을 믿는지 안 믿는지를 시험하셨는데,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말로 계신지 안 계신지를 시험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불경스러운 광경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는가?” 복음서에서도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실 때 마귀를 향해 이런 외침을 던지지 않으셨습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어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무작정, 막무가내로 믿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나약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시험은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라는 사람이 어느 날 나타나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애굽의 바로 왕과 맞서 싸워 이겨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이들은 어쨌든 바로 왕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을 가지고 희망 가운데 모세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것이 막막해져 버렸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삶에 혼란이 온 것이죠. 이들이 바로 왕을 피해서 도착한 곳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없는 광야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누구든지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커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아무리 커도 삼시 세끼 밥 먹고 살아야 하고, 믿음이 아무리 커도 가족들의 생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16 3절과 오늘 우리가 읽은 17 3절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선 16 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리고 17 3절입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생각해 보십시오. 적어도 이들이 애굽에 있었을 때에는 이렇게 광야에서 불안에 떨면서 굶주리는 것처럼 그렇게 굶주리지는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인간 취급 받지 못하고 개처럼 살았어도, 적어도 이들은 배를 채울 수 있었고 목마를 때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시겠다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무엇이 구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이들은 지금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 처해진 것 같았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지금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처한 현실입니까? 예수를 믿기로 하고 교회 다니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다가오는 현실 아닙니까?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 믿으면 모든 일이 형통하고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러면서 누군가의 전도로 교회로 따라 나서긴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셨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구원인지 모르겠다는 울림이 이 마음 속에서 들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믿음이란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의심일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일까? 내가 올바른 선택을 내린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선 이 길 위에서 우리는 수 없이 이런 의심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두렵고 떨렸습니다. 이렇게 따라 나서긴 했는데, 바로의 손에서 구원을 베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분이 또 다른 바로와 같은 신이 아닐까? 애굽의 바로 왕도 자기 자신이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꼼짝 없이 바로 왕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덕에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배불리 먹고 목마르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바로의 소모품으로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왕의 한 마리 짐승처럼, 개처럼 살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큰 맘 먹고 따라 나선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바로 왕과 같지 않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하고 계셨습니다. 애굽에서 행하셨던 10가지 재앙을 봐도 그렇고, 홍해를 가른 사건도 그렇고, 물을 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신 것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 가지고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기에는 뭔가가 부족했던 것이죠.

 

이러한 전체적인 상황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또 한 번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명하여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호렙 산에 있는 반석 위에 서서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릴 때 썼던 그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대로 합니다. 그리고 반석에서는 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물을 마시고 살아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는 것 같았던 애굽에서는 결국 기다리고 있는 것이 바로 왕으로 인한 죽음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것 같았던 광야에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것을 결정적으로 확인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 같았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참된 역사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산 것 같으나 죽은 자로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죽은 것 같으나 산 자로 살고 싶으십니까?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의심이 들 때마다 저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는 의심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죽은 것 같은 상황, 마른 뼈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가 의지하고 믿을 분은 한 분 하나님 밖에는 안 계십니다. 끝까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붙들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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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