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0. 25. 23:27

2011 10 2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신명기 34:1-12

제목: 무엇이 죽어야 하는가?

 

죽음의 사진 3 , 아기의 죽음, 로마시대 사람들의 죽음, 가다피의 죽음

 

지금 보여드린 죽음의 사진 3장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도 모세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10절이 전하고 있듯이,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절대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 이후에 등장한 그 어떤 선지자도 모세의 명성에는 필적하지 못했습니다. 이적을 많이 베풀었기로 유명한 엘리야 선지자도 모세와 같은 반열에 올라서지 못했습니다. 큰 학자요 선지자였던 이사야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세 이후에 모세와 필적할만한 명성을 가진 사람은 다윗 왕 정도입니다. 그것도 그가 왕으로서 그러한 명성을 가진 것이지 선지자로서 그런 명성을 지녔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모세처럼 다윗이 하나님을 대면한 것도 아닙니다.

 

모세만큼 인생을 파란만장하게 산 사람도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고비를 넘겼고 죽을 때까지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이스라엘의 둘 도 없는 영도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모세가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고생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계기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다 보면 고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받는 고생 때문에 우리가 영웅심리에 사로잡힐 수는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받은 고생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모세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궁극적인 사명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면서 모세는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고,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세의 수고와 고생이 하나님 앞에서 가 되지 못했습니다. 만약 모세의 수고와 고생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었다면, 모세는 그것을 빌미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요구했을 겁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수고했는데 그것을 봐서라도 나를 가나안 땅에 드리셔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받아 주지 않으셨을 겁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였던 모세가 사실 그렇게 공치사 할 생각도 안 했을 겁니다. 모세의 인생의 목적은 가나안 땅 입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하나님과 대면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면하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과 대면한 사람들은 절대로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예수님의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을 따라 변화산에 올랐을 때 거기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면서 그곳에 눌러 앉아 있기를 청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영적인 체험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느보 산에 있는 비스가 봉우리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나안 땅을 보여주십니다.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뿐, 그곳에 들이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었을 때(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소천이라고 합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은 것이죠. 하나님의 사람은 죽을 때도 그냥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습니다.) “나이가 백이십 세였으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고합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해서 모세가 건강했다는 뜻이고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충분했다는 뜻입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기력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자동차를 빗대어서 설명하면, 폐차시켜야 할 정도로 노쇠하고 망가져서 폐차시긴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쌩쌩한 차, 아직도 10년은 더 탈 수 있는 차를 그냥 폐차시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질문이 한 가지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는가?’입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모세보다 여호수아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동안 모진 훈련을 받은 여호수아를 배려해서도 아닙니다. 모세가 미워서도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모세가 므리바 물 사건 때 자기의 의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드러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입성하지 못했다고 알고 있지만, 실은 그것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정말 그 이유 때문이라면 오히려 하나님이 옹졸하게 보일 뿐입니다. 겨우 그 이유 때문에 그토록 사랑하는 당신의 종, 그리고 그렇게 수고한 종을 내치신다는 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주권을 운운한다고 해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일은 온전히 새로운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했던 겁니다. 일종의 패러다임 쉬프트입니다. 이전 것이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전 것의 대명사가 바로 모세입니다. 그 모세가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전 것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온전히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전 것인 모세를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 모세를 온전히 보내게 하기 위해서 30일 동안 애곡하게 하십니다. 30일은 단순히 모세의 죽음을 슬퍼하는 기간이 아니라, 모세, 즉 이전 것을 떠나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다음 단계로 온전히 접어들기 위해서는 이전의 것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죽여야 합니다. 일례로, 20대가 되었는데 아직도 10대처럼 옷을 입고 다니고 행동하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어른이 되었다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 한 남자와 또는 한 여자와 가정을 꾸렸다면 이제 부모의 그늘에 벗어나야 합니다. 아직도 부모 밑에서 응석부리는 어린아이처럼 군다면, 온전한 가정을 꾸밀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런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소소한 것들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존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시간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기로 정하셨습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님이시고 하나님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인하여 여러분은 구원 받았습니까?

 

예수 믿기로 정했다면, 우리의 삶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우리들에게는 이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삶의 방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이미 하늘 나라에 가 있는 것처럼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섰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 때 가졌던 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아무리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하늘 나라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버려야만 합니다. 필요 없는 것들이니까요.

 

제가 이 시간 그러한 것들이 무엇인지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거나, 알아 가는 중입니다.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며 솔직해집시다. 다만 알고 있으면서도 알아 가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거나, 아직까지 이전 것을 버리기 아까워서 그냥 내 삶 안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겠습니까? 모세를 죽이고 살리는 건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하는 당신의 주권을 가르쳐 주고 싶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는 철저하게 믿고 따라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납득되지 않게 비상식적으로 당신의 주권을 남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모세의 죽음이 헛되지 않는 것은 바로 그의 죽음을 통해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으로 보게끔 온 정성을 다해 가르시고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저 십자가에서 봅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도래한 새로운 시대를 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시대, 은혜의 시대, 새창조의 시대, 새로운 피조물의 시대, 종말의 시대를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을 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시대에 필요하지 않는 것들 을 나의 삶에서 지워버릴 것입니다. 그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삶 속에서 무엇이 죽어야, 다음 단계로 접어들 수 있을지 우리는 날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삶 속에서 무엇이 죽어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떠나 보내기 위해 애곡하십시오. 그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온전히 떠나 보내고 새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를 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십시오. 성령께서 도우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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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