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1. 14. 05:15

2011 11 1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사사기 4:1-7

제목: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사사기의 역사는 출애굽 직후의 사건을 담고 있지만, 사사기의 기록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행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만의 독특한 역사적 관점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일컬어 신명기사관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이 역사관이 등장을 하는데, 그 내용은 매우 단순합니다. 즉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단순해 보이지만, 이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능력으로 무엇이 순종이고 무엇인 불순종인지,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벌인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온전히 하나님의 입장에서 타당한 역사관이지, 우리 마음대로 재단할 것이 못됩니다. 우리 인간의 상식과 우리 인간의 눈을 따라 순종과 불순종, 복과 벌을 판단하면 거기에는 구원이 아니라 억압과 폭력이 난무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서 발견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십자가 처형에 처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성모독을 하는 것만큼 불순종한 행동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만 보더라도 소위 신명기사관이라는 것이 단순해 보이긴 해도 그렇게 단순한 역사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자신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잊어버리셨는가?” 나라가 망하고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 왔다는 이 사실은 명백히 벌이었습니다. 그들이 붙들었던 신명기사관에 의하면 그들이 이렇게 수치스러운 포로의 벌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바벨론 포로생활은 분명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시고 잊으셨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희망을 찾고 싶었습니다. 온 존재를 다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믿고 싶었습니다. 물론 자신들이 믿는다고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대로 움직여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아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죠. 이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사사시대에서 발견합니다. 사사시대의 역사를 면밀히 관찰해 보니 그때도 지금과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을 때, 절망에 빠져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간절히 바라고 울부짖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역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일정한 패턴(Sin-Downfall-Outcry-Redemption)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저버립니다. (Sin) 2. 주님께서 그들을 적군의 손에 넘겨버리십니다. (Downfall) 3.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며 울부짖습니다. (Outcry) 4.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적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평강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Redemption)

 

신명기사관에 의해서 씌어진 대표적인 성경이 사사기서와 열왕기서입니다. 사사기서와 열왕기서를 비교해 보면 쌍둥이 같습니다. 사사에서 왕으로 그 주인공만 바뀔 뿐이지 결국 사사기서나 열왕기서나 위의 네 패턴 속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굴러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신명기사관에 의해서 역사를 바라봤던 포로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왜 이렇게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 것이죠.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저버렸나이다.”

 

사사기서와 열왕기서는 그것을 면밀하게 보여줍니다.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범죄했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저버렸는지 보여줍니다. 이렇게 들춰내면 자신들에게 수치 밖에 안 될 역사를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움을 당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를 저 깊은 곳에서부터 되돌아 보기 위함입니다. 병을 감추면 치유 할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진단해야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이들이 왜 이렇게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있는지, 부끄럽지만 자신들의 모습을 발가벗길 때 이들은 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말씀도 자신들의 수치를 드러내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위에서 말한 패턴의 첫 번째 부분에 해당됩니다. 이어서 읽어봅니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손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위 패턴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이어서 읽어봅니다.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위 패턴의 세 번째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위 패턴의 네 번째 부분에 해당됩니다. 패턴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은 간략하게 묘사되지만, 네 번째 부분은 길게 묘사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들을 어떻게 구원해주시는지를 보이기 위함입니다. 이 부분이 사사기를 이루고 있는 각 이야기들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구원해주셨는지 자세하게 기록하는 이유는 흥미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읽으면서 재미 있으라고 그렇게 자세하게 흥미진진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거기에서 희망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무슨 희망입니까?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우리가 울부짖을 때, 즉 참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 구원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신명기 사관을 바탕으로 역사를 기록하면서 이들은 희망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결국 이들은 치부를 드러냄으로 부끄러움을 당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구원의 희망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고통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부르짖음은 보통 부르짖음이 아니라 온 존재가 구원을 갈망하면서 부르짖는 영혼의 울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시편 123편에서 발견합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지금 우리가 읽은 이러한 시편의 울부짖음은 아무에게서나 나오는 가벼운 울부짖음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나오는 영혼의 울림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당신에게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면서 당신의 백성이 고통 가운데서 영혼의 울림을 통해 당신을 찾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가벼운 일이 아니라, 모든 영혼을 걸어야 하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벼운 외침이 아니라, 온 영혼을 걸고 외치는 울부짖음 속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겁니다. 그러한 영혼의 울림이 나올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겁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가 보는 성경의 역사는 이스라엘이 결국 그 죄의 악순환을 끊어내지 못하고 망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의 역사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역사는 온 인류의 역사를 대표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온 인류는 스스로 죄의 악순환을 끊어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고통 가운데 처해진 상태로 멸망하고 마는 것일까요?

 

우리가 오늘도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 나와 바라보는 저 십자가는 이 질문에 대답합니다. ‘아니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망 가운데 처해져 멸망 받을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새로운 희망을 얻은 새생명의 존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온 인류를 고통 가운데 처하게 하는 죄의 악순환을 십자가에서 끊어내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죄의 악순환을 끊어내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악순환 가운데 처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싸우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싸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우리는 연약한 존재라 죄와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싸우기 위해서 저 전장에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모여서 이렇게 예배 드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며 찬양하고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를 자꾸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죄와 맞서려 하지 마십시오. 죄와 대항해서 이기겠다는 교만을 버리십시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멸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구원 받았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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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