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1. 28. 06:20

2011 1127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64:1-9

제목: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하나님

 

삶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기다림이 있네.

우리네 삶은 시작부터

기다리고 있다는 말로 위로 받고
기다려 달라는 부탁하며 살아가네.
봄을 기다림이

꽃으로 피어나고
가을을 기다림이
탐스런 열매로 익어가듯

삶의 계절은
기다림은 고통, , 그리움이지 않은가?
기다림은 생명, 희망이지
.

우리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인데

어느 날인가?
기다릴 이유가 없을 때

떠나는 것이 아닌가?

우리네 가슴은 일생을 두고

기다림에 설레이는 것

기다릴 이유가 있다는 것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용혜원)

 

삶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위의 시와 관련해서 대답한다면, 삶이란 기다림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곳이 교회이고, 여기 모인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기다림과 깊은 연관이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참으로 권태로울 것입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공통으로 쓰는 것은 태양과 달의 상관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달력이지만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기대와 오심,그리고 고난과 죽으심 부활하심, 그리고 승천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교회의 달력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은 태양도 아니고 달도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교회력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으로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마디로 정리해서,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기다리면서 하는 모든 일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일종의 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시 중에서 제 가슴에 가장 와 닿는 구절은 제 2연입니다.

삶의 계절은
기다림은 고통, , 그리움이지 않은가?
기다림은 생명, 희망이지.

이 시를 쓰신 용혜원이라는 분은 목사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기다림에 대해서 매우 신학적인 해석을 토대로 이 시를 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경험이 없는 일반 사람들에게 삶의 계절, 기다림은 그저 고통, , 또는 그리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기다림이란 바로 생명, 희망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경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다림이란 생명, 희망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사야서는 굉장히 광범위한 선지서입니다. 그것을 오늘 이 짧은 시간에 다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핵심만 이야기하자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담긴 40장 이후의 이사야서의 주제는 희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림절 첫 번째 주일에 이 부분을 우리는 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의 주제가 바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사야 선지자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느냐입니다.

 

사실, 오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이야기 할 수 있고, 또 이야기 해야 하는 것은 희망 밖에는 없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절망적일수록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듣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희망이 어떤 희망이냐는 것입니다. 희망도 희망 나름입니다. 거짓말로 드러난, 그야말로 더 절망에 빠지게 할 거짓 희망이냐, 아니면 진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진짜 희망이냐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서 엄청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그 옛날 다윗 왕조를 통해서 누리던 영광을 다 잃어버리고, 성전 파괴는 물론이요, 땅까지도 빼앗겨 버리는 비통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한마디로 삶의 근거를 모두 잃어버린 처지가 된 것입니다. 사실, 저부터도 삶의 근거를 모두 잃어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이 없어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난 때문에 고생을 해 보신 분들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 삶의 근거를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은 사실 가난 때문에 겪는 고생을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일제시대를 겪으신 분은 어쩌면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 이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쓰신, “백범일지라는 책을 보면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이 어떠한 고난을 겪었는지, 어떻게 우리 민족의 삶의 근거가 일제에 의해서 파괴되었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간접적인 이해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무튼, 절박한 상황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구원의 손길을 내밀면서 하소연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탄원기도라고 부릅니다. 우리도 살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탄원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도, 절망적인, 그리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는 탄원기도가 저절로 나오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탄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탄원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위의 시 구절을 이용해서 다시 표현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탄원하는 것은 고통, , 그리움의 수준에 머물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의 탄원은 생명, 희망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는 분인데, 그 하나님의 강림 앞에서는 산들도 진동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떨지 않을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이렇게 경험합니까? 요즘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이러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이해가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와 공의를 행하는 자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 얼마나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사느냐가 문제이고, 얼마나 공의를 행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와 공의를 행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선대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6절 말씀이 전합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공의를 행하고 살지 않는 모습을 그려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다음 7절은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앙망하지 못하는가를 그려 보여 줍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어떠한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여기에 선 저도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삶이 어떠한지를 일깨워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십니까? 여기에서 자유로우십니까? 당당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을 앙망합니까? 여기서 앙망한다는 말은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을 운영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사십니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내 시간에 맞추어서, 그리고 내 뜻에 맞추어서 내 삶을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살지 않다가, 7절 말씀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지 않고 살다가”, 이렇게 망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공의를 행하면서 사십니까? 구약성경에서 공의는 단순히 옳은 일을 말하지 않고, 언제나 약한 자와 결부해서 공의를 설명합니다. 소외된 자, 가난한 자, 약한 자, 억압받는 자를 얼마나 돌보면서 살아가느냐의 문제와 공의는 엮여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돌보려면, 나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고는 절대 그런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살아가는 이유가 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주변의 어려운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착취의 대상이 될 뿐이지, 섬김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 자, 그런 자는 공의를 행하지 않는 자입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행한 모든 일은 사람들을 아프게만 했지, 사람들을 이롭게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6절의 말씀대로, 무늬만 의로울 뿐이지 실상은 더럽고 시들어 버린 잎사귀와 같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이스라엘이 지금 망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살지 않고, 공의를 행하지 않고 살다가 절망적인 상황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이 순간에 결코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절망 가운데 있을지라도, 희망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8절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이것은 매우 결정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해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희망입니까?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 그것도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작품(Masterpiece)라는 사실입니다. 작품은 작가의 인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작품은 작가를 말해줍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희망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절망과 고통의 상황 속에서 부정한 자와 같이 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로움으로 우리를 다시 의롭게 해주실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9절에서 이렇게 탄원합니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엄청난 탄원입니다. 이러한 탄원을 듣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을 수 없으실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는 진흙입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은 창조주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넘어서는 말입니다. 토기장이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에 따라 우리를 빚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인격이 우리 안에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인격이 우리의 죄 때문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것을 회복시키는 힘은 우리의 의로운 행동이나 우리의 의로운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내 의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를 구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낸 창조물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이요,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그분께서는 창조의 완성을 위해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완성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을 맞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더딜지라도, 기다리면서 고통스러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생명과 희망을 늘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입니다. 주의 백성은 주님을 앙망하는 자요, 공의를 행하는 자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과 희망 가운데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주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 아니겠습니까?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