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2. 19. 04:54

2011 12 18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1:28-30, 5:17-20; 12:2, 3:1

제목: 복음은 마음(생각)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어떻게 다른가?)

 

시 한편을 읽겠습니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유명한 시입니다.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이 피기까지 / 김영랑)

 

이 시를 분석하기 위해서 읽은 것은 아니고요, 마지막 이 구절 때문에 읽어드린 겁니다. “찬란한 슬픔이 봄”. 우리 말로 이러한 표현을 모순형용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역설적인 표현이라고 하죠. 여기서 모순되는 단어는 찬란한슬픔입니다. 슬픔이 찬란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모순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된 표현은 엄청나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참 좋은 시적 표현이고 기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러한 모순형용
, 역설적 표현을 알지 못하면 성경의 내용이 이상하게 해석됩니다. 작게는 이렇게 몇 문장이 모순형용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크게는 성경의 전체 내용이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성경의 가장 크고 대표적인 역설적 표현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모순형용입니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그 당시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이 보기에 전혀 지혜로운 것,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그야말로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만이 당하는 처절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그러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모순형용이고 역설적인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이러한 모순형용, 역설적인 표현을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두 구절은 서로 모순됩니다. 우선 마태복음 11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그리고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중에서 5 20절 말씀만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두 개의 말씀이 서로 모순형용, 역설적이라는 것을 알려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 가르침은 우리가 흔히 산상수훈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가르침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6장에 보면 유대인들의 종교적 3대 의무(구제, 기도, 금식)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이 나옵니다. 1) 구제 할 때 은밀히 하라는 것, 2)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서 하라는 것, 그리고 3) 금식 할 때 금식하는 것을 티 내지 말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이 어떻게 종교적 의무를 감당했는지 드러내 줍니다. 이들은 구제할 때 자신들의 구제행위를 통해 영광 받으려고 나팔 불고 다녔습니다. 이들은 기도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큰 거리, 즉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데서 큰 소리로 열심히 기도하는 척 했습니다. 이들은 금식할 때 자신들이 지금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엄청나게 티 내고 다녔습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들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얼마나 열심으로 그러한 일을 감당했는지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그들의 그런 행위를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그들과 감히 말을 섞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심에 비하면 자신들은 너무도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기에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의 업적을 쌓은 데만 치중했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기준으로 삼았고, 그것으로 자신들은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고 하늘 나라에 들어간 의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즉 자신들의 의로운 행동을 구원의 근거로 삼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을 뒤쫓아 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죄해서 죄인을 만들어 버렸다는 겁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에 대한 예수님의 종합적인 평가는 마태복음 23장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서기관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란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위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23:3-7).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위선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에게서 종교적 짐을 떠안고 눌려 살고 있던 일반 서민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28-30).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일차적으로 인생의 짐이 아니라 종교적 짐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생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종교적 짐을 얹어서 가난한 자들을 못살게 구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철퇴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이렇게 쉽고 가벼운 것이라고 깨달아지는 듯 하면서도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두 번째 본문을 보면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율법사(서기관)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분명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지워 놓았던 종교적 짐을 벗겨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요즘 우리의 신앙생활로 따지자면, 예배에 열심히 참석해야 한다는 부담감, 교회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부담감, 직분에 대한 부담감, 십일조 등 각종 헌금에 대한 부담감, 윤리 도덕적인 삶에 대한 부담감 등을 덜어주시겠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왠 걸요? 오늘 말씀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것을 죽도록 지켰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서기관들)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언제는 종교적 짐을 벗겨주시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보다도 더 무거운 종교적 짐을 우리에게 지우고 계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헷갈려 하는 율법과 복음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나 지금이나 이 문제는 여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 싸움의 흔적과 결과 그리고 결론이 바울 서신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로마서는 율법과 복음의 문제 대한 최대 격전장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문제에 대한 치열한 싸움 끝에 사도 바울은 복음의 승리를 외쳤습니다. 그것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서신서가 성경이 된 겁니다. 그것이 정통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대교회에서 이미 끝나서 정통으로 인정되고 성경으로 받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율법과 복음의 문제는 끝나지 않은 미해결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집니까
?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성경(특별히 바울 서신)을 면밀히 읽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율법이 더 눈에 들어오고 몸에 익히기 쉽기 때문입니다. 율법에는 마법과 같은 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만족, 자기 성취, 자기 확대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 의라고 하는데, 이것은 말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 중앙에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와도 같습니다. 그야말로 율법에서 오는 자기 의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합니다. 그래서 이 유혹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복음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이것을 무 자르듯이 개념적으로 구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마르다에게 율법을 대입해 보고, 마리아에게 복음을 대입해서 들여다보십시오. 그 이야기를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니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1:38-42).


마르다율법으로 마리아복음으로 대입해서 이 이야기를 보았을 때, 율법과 복음이 어떻게 다른지 구분이 좀 가십니까? 다만 여기서 조심할 것은 열심히 일하는 것을 율법, 아무 일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복음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을 열심히 하고 안 하고는 율법이나 복음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어디에 관심이 있느냐를 염두에 두고 율법과 복음을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입해서 보셔야 합니다.

 

이것으로 조금 부족하고, 더 헷갈리고, 어려워하실지 몰라 한 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두 가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A 가정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건유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건유의 아빠, 엄마는 매우 저명한 분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저명함에 걸맞게 이들은 자녀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건유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건유가 원하는 것이나, 또는 건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낌 없이 제공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건유는 성인이 되어서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이 된 건유는 아빠 엄마를 생각할 때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저명한 아빠 엄마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신 아빠 엄마였지만 건유는 늘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자신에게 잘 해주는 것 같고, 무엇이든지 부족함 없이 채워주는 아빠 엄마였지만, 건유가 느끼기에 아빠 엄마는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그러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아빠 엄마 본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 거라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 큰 건유는 아빠 엄마한테 이렇게 불평할 때가 많았습니다. “아빠 엄마가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어요?” 건유의 아빠 엄마는 이러한 건유의 불평을 들을 때마다 당황스럽고 불쾌했습니다. 그리고 마음 속에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어떻게 키웠는데……’

 

B 가정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찬유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찬유의 아빠 엄마는 그냥 평범한 분들이셨습니다. 찬유의 아빠 엄마는 일 하느라 시간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해 찬유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지 못하면서 아들을 키웠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찬유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찬유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성인이 된 찬유는 자신을 키워주신 아빠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물론 아빠 엄마는 시간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시지는 못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럴 때마다 아빠 엄마를 원망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커서 생각해 보니, 아빠 엄마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을 모두 사주지 못하셨고,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할 수 있도록 해주시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언제나 아빠 엄마의 마음은 자신을 향해 있었다는 것을 찬유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찬유는 아빠 엄마에게 한 없이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찬유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빠 엄마에게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빠 엄마는 남들만큼 더 잘해주지 못해 마음이 더 미안했습니다.

 

율법과 복음이 어떻게 다른지 이제 좀 감이 오시는지요? A 가정은 율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고, B 가정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이 결정적으로 다릅니까? 그렇습니다. 마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 입니다. A 가정의 부모는 겉모양만 보면 마음이 자식을 향하고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그 마음이 자기 자신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B 가정은 겉모양만 보면 마음이 자식을 향하고 있지 않은 것 같으나 실상은 그 마음이 자식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적인 신앙에 충실했던 그래서 일반 서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서기관들)의 신앙을 질타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A 가정의 부모처럼 열심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으나, 실상 그 마음에는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들은 결국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자기 의를 쌓는 일에만 치중한 것입니다.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드렸으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예수님 만나서 회개한 삭케오처럼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위해서 자신의 전 재산을 절대로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죽어라 지켰지만,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안식일의 뜻은 알지 못한 채 안식일에 사람이 죽어가도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죽어가는 사람을 향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어라 구제도 하고, 기도도 하고 금식도 했지만 절대로 자신의 전 재산이나 목숨을 내놓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높아지는 일을 위해서는 영혼도 팔아 먹었으나, 그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서기관들)을 질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23:12).

 

열심히 안 해서 문제 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안 해서 예수님께 질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열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가지고 있는 자기 의에 대한 마법 같은 매력입니다. 율법에 매료된 사람은 자기 의를 쌓기에 여념이 없어집니다. 자기 만족과 자기 성취, 자기 확대에 휩싸이게 됩니다. 스스로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됩니다. 스스로의 의로움으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너희 의가 율법사(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도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좀 더디더라도 방향만 잘 잡는다면 문제 없다는 뜻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사와 바리새인처럼 열심으로 하되 올바른 방향을 향해 가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율법사와 바리새인처럼 열심을 내되 자기 의를 위해서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도록 주일을 지키십시오. 그러나 자기 의를 위해서 지키지 마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십시오. 여러분, 헌금 많이 하십시오. 주님이 쓰시겠다 하면 전 재산이라도 바치십시오. 전 재산이 뭡니까? 목숨이라도 내 놓으십시오. 그러나 자기 의를 위해서 하지 마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십시오. 이렇게 주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놓는 믿음의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16:25). 구제도, 기도도, 금식도 할 수 있는 한 많이, 열심을 다해 하십시오. 그러나 자기 의를 위해서 하지 마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십시오.


삭케오를 보십시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났더니, 이전에는 자기 의를 위하여, 즉 자기 자신을 위하여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되어서 동족들에게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아가면서까지 악착같이 세금을 걷었는데, 이후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재산 절반을 내어놓고, 강제로 빼앗은 재산은 네 배를 더해서 돌려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바로 삭케오의 마음에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안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없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서기관들) 같으면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껏해야 남들에게 강제로 빼앗았던 부분만 겨우 내 놓았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복음의 차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의 말씀은 우리를 삭케오처럼 결단케 합니다. 물론 이 결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온전히 깨달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겠죠. 예수님이 누구인지 히브리서의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2:2). 히브리서는 이러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권면하는지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1). 우리 말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번역됐지만, 영어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Fix your thoughts on Jesus.” 이는 생각을 예수님에게 고정시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란 이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지 못하면, 우리의 하는 모든 일을 율법적인 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일, 나의 의를 쌓는 일 밖에는 되질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열심이 그렇게 자기 의를 위한 허무한 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쌓은 귀한 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로 성화되려면 우리의 마음이 단단하게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음과 십자가와 못을 나누어 주고, 마음을 십자가(예수님)에 고정시키는 퍼포먼스를 한다.)

 

너희 의가 율법사(서기관)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듣지 마십시오. 율법을 잘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이시니,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부터 우리는 실천해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십시오.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강제로 십자가를 졌던 것처럼, 나오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나와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 거룩하게 예물을 드리십시오. 거룩한 마음으로 하나님 주시는 직분을 사모하십시오(‘그까짓 것’, 이거 좋은 생각 아닙니다). 하나님 섬기는데, 이왕이면 하나님께 귀한 직분을 받는 것, 얼마나 영예롭습니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무흠하게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하나님 믿는다 하면서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오히려 조롱당합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사십시오.

 

그러나 이러한 율법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이나 율법사(서기관)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복음으로 무장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보다 더 나은 의는 그들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할 때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덧입을 때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의를 덧입지 않으면(칭의), 아무리 바리새인이나 율법사처럼, 아니 그들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덧입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되어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되어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으나, 그의 행실의 열매를 보면 압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다라는 야고보서의 가르침도 그래서 우리는 새겨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신앙과 복음신앙이 이렇게 헷갈리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속해서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아무쪼록 이렇게 마음을 예수님께 고정시키셔서 예수님의 의를 덧입는 참된 복음 가운데 사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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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