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6. 20. 05:34

2011 6 1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8:16-20

제목: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가 삶의 근거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교회는 성령강림절 후 첫 번째 주일을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역사가 다 드러난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난 고백을 하는 교회는 모두 이단으로 분류됩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가 이단이냐 아니냐의 첫 번째 기준이자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로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고백하느냐 아니냐 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말이 성경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처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그리고 성령”, 이런 식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을 초대교회에서는 삼위일체 교리로 발전시켰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일컫는 독특한 언어입니다.

 

삼위일체는 영어로 Trinity라고 하는데, 이는 “three persons in one nature”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본질에 세 위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본질이 무엇이냐라는 것을 밝혀야 하고, 세 위격이 무엇이냐는 것을 밝혀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이 과제는 기독교 역사에서 언제나 가장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동방정교회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주후 1054년 삼위일체 교리의 문제 때문에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이 종교적으로 분리된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정도까지 얘기하면 벌써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 뭐가 이렇게 복잡한가! 그렇다고 해서 몰라몰라하면서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는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의 삶과 신앙은 뿌리 깊은 나무가 되지 못합니다. 열심을 다해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도 세례를 베풀 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하라고 합니다. 세례는 단순한 통과의례,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그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롭게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이 타락한 세상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 그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할 수 있는 한, 피 흘리기까지 최선을 다해서 이 세상을 이겨보겠다는 굳은 결심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두 가지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이 시대에 가장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삶의 원리에 맞서는 것이 무엇인지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권력과 무한경쟁의 문제를 짚어볼까 합니다.

 

첫 번째로, 요즘 시대를 일컬어 ‘포트스 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절대 권력이 모두 부정된다는 겁니다. 일례로 예전에는 대통령의 권위에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통령도 여론에 밀려 탄핵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성역이라고 하는 성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부라고 해서, 목사라고 해서, 승려라고 해서 그 성직을 감당하고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권위를 인정 받지 못합니다. 어느 분야든지 어느 자리든지 그 자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권위가 허물어졌습니다.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보면서 ‘말세다’라고 혀를 쯧쯧 차지만,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이건 말세의 징조가 아니라 그만큼 세상이 더 평등해졌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평등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다른 무엇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나는 저 사람하고 달라”, “나는 저런 것들(things)하고 달라”, 하는 마음은 이미 나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 놓는 교만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밟고 다니는 흙하고 다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은 후에 어디로 돌아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죽은 자는 누구든지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십니까? 우리 인간은 흙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흙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 제대로 알아도 우리는 함부로, ‘나는 달라’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절대 권력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멸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십자가에 기꺼이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는 절대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하신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에서, 그리고 죽으면서까지도 상대방의 용서를 구하신 사랑의 마음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조차도 우리는 절대 권력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순종과 헌신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오는 권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인간은 절대 권력을 바라면서 살까요? 우리 인간이 얼마나 타락한 존재인가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절대 권력은 없습니다. 그건 속임수이고 헛된 꿈입니다. 순종과 헌신과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존재해야 마땅합니다.

 

두 번째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삶의 원리인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신자유주의 기본 원리는 무한경쟁입니다. 경쟁은 기본적으로 우열을 바탕으로 진행됩니다. 상대를 이기지 못하면 내가 밑으로 내려갑니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원리입니다. 이게 사람이 사는 세상인지, TV에서만 보던 동물의 세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경쟁은 사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타락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같은 가치로 창조하셨습니다. 어떤 것은 더 귀하고, 어떤 것을 덜 귀한 것이 없습니다. 자연보다 인간을 우위에 놓는 것도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인류 최초의 가정에서도 타락한 인간의 경쟁심이 살인을 불러왔습니다. 예배는 경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경쟁적으로 예배 드리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이 그것입니다.

 

경쟁이 들끓는 곳일수록 타락이 극심해지는 법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고린도 교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경쟁적으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급기야 자신들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 서로 줄을 세웠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 1:12). 이것은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가 무엇인지 조금만이라도 맛본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경쟁이라는 단어를 그의 사전에서 지워버리게 될 것입니다. 경쟁은 인간의 타락한 마음이 만들어낸 타락한 행동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백중지세입니다. 누가 누구보다 잘 난 사람이 없고, 모두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대로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야 할 형제자매입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이 세상에 저항하십시오. 경쟁해서 이기려 들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세워주십시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요 계명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의 방식입니다. 경쟁하는 자가 이기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이기는 세상이 천국입니다. 이 땅 위에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떻게 존재하시는 분인지 우리가 알아야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는 겁니다. 오늘은 권력과 경쟁의 문제를 들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삼위일체는 이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 파헤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신비가 바로 이 세상의 지식을 판가름하는 잣대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거꾸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지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파헤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뒤집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로 이 세상을 판단하고 뒤집어야 합니다. 이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비가 우리 삶의 근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알면 알수록, 우리의 삶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앞으로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이건 우리의 생명과도 같은 일입니다. 우리 삶의 근거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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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