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30. 06:45

2011 5 2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벧전 3:13-22

제목: 희망을 노래하라!


구약성경도 그렇지만, 신약성경을 읽을 때 이 성경이 씌어진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꼭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씌어지던 당시는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는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사용합니다. 개인신상조사 같은 것을 작성할 때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것은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많은 이들이 기독교인이 되어 교회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 합니다. 사회적으로도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대접까지야 못 받아도 적어도 함부로 취급 당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기독교는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씌어지던 당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기독교인’,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하기 쉬웠고, 박해를 당하기 쉬웠고, 놀림을 당하기 쉬웠습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부끄러움 당하고, 박해 당하고 놀림을 당하면서까지 어떠한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교회 다니는 것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회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놀림을 당하고 있는데, 여기 나와서 앉아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누구든지, 존경 받는 자리, 칭찬 받는 자리, 보상 받는 자리에 서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자리가 세상으로부터 존경 받는 자리, 칭찬 받는 자리, 보상 받는 자리가 아니라,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리, 박해를 받는 자리, 놀림을 받는 자리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건 뭔가 혁명적인 일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뭔가 확실한 것을 붙잡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이치와는 정반대되는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세상의 원리와는 다른 삶을 살게 했을까요?

 

우선 우리는 이들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고난(Suffering)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이들은 미래에 시선을 집중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자신들의 미래와 자신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자들의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신앙을 종말론적인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미래라는 것이 세상이 생각하는 그러한 미래가 아닙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미래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 도달하는 시간을 말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미래입니다.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고 오는 미래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신적인 시간의 미래입니다.

 

그때가 되면, 고통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켰던 그리스도인 자신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상급을 받을 것이고, 자신들을 못살게 굴었던 박해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초대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생각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현세적인 축복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아무런 희망도 없는 자들에게는 종말론적인 신앙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신념은 이들이 박해 상황 속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진짜 삶인지 세상 사람들보다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 생각이 오늘 우리가 읽은 14절 말씀에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세상이 십자가 위에 매단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입니다. “란 나이브하게 이야기해서, “옳은 일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옳은 일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이 복된 자들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난 받기를 싫어합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고난을 받으면 그 옳은 일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셔서 그리스도로 세우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옳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고난을 가져다 준다고 해도 말입니다.

 

셋째, 이들이 고난을 감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자신들의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으니 그를 믿는 자는 무조건 고난 당해야 한다는 논리가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이들이 깨달은 사실이 있다는 겁니다. 의인이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그러한 삶 자체가 그런 삶을 사는 자에게 고통과 고난을 피하게 해주는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어떻게 예수 믿는 자들에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고 복 받아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는데, 교회를 다니는데 저렇게 흉악한 일이 일어날 수 있어?”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사는 삶,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은 축복을 보장하지만, 그렇다고 고통과 고난을 피하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고통과 고난이 불가피하게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삶, 순종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초대 기독교인들은 고난 속에서 주님이 고난 당한 것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고통과 고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고난이 다가왔을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극복하느냐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것을 배운 그리스도인은 결코 고통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종말론적인 신앙, 올바른 신념, 주님에게서 배운 의로운 삶의 원리 등으로 무장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사방으로부터 오는 고난을 두려움 없이 극복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그 당시 세상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주후 133년경 철학 교사 아리스테이데스가 로마 하드리안 황제에게 제출한 기독교를 위한 변증서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고 장사되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던 자들은 예수님이 3일 후에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황제시여, 지금 기독교인들은 그들 마음에 새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준행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과 다가오는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간음을 범하지 않으며, 거짓 증언도 일체 하지 않습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내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며 이웃을 사랑합니다. 또 공정한 입장에서 판단하며,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 우상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지 않을 일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에게 해를 끼치려 하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원수 된 자들의 유익을 위해 힘씁니다. 또 종이나 하녀, 자녀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기독교인이 되도록 설득하고, 종이나 하녀가 신앙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되면, 아무런 차별 없이 종이었던 자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또 그들은 신앙의 형제 가운데 누군가 감옥에 갇히거나 구세주의 이름으로 인해 핍박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고 그가 옥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기울입니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있고 형편도 그리 좋지 못하다면, 2-3일을 금식해서 아낀 양식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어 줍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언제라도 생명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황제여,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잘 먹고 잘 살고 사회적으로 칭찬과 부러움을 사던 초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소외 당하고, 부끄러움을 겪고 박해를 당하고 놀림을 당하던 초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희망이 없는 상황, 희망을 노래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들은 희망 가운데, 희망을 노래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들의 삶 자체는 희망 가운데 있었고, 이들의 삶 자체가 희망의 노래였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오늘 15절에서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따로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들의 삶 자체는 이들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였습니다. 이유를 묻는 자에게 이들의 삶은 곧 대답이었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인의 상황은 혁명적으로 변했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마이너러티(minority)가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놀림을 받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의를 위해, 순종한 삶을 위해 무슨, 어떠한 고난을 당하면서 삽니까? 고난은커녕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의를 위해 살고, 순종하는 삶을 산 결과고 축복이라고 선전되고 있습니다. 무슨 의로움을 보였고, 무슨 순종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번영하고 잘 되는 것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되어버렸습니다.

 

고난이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때문에 포기하는 것들에서 오는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인들(특히 기독교가 중요 종교로 자리잡고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이 겪는 고난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겪는 고난과 매우 다릅니다.

 

1) 요즘에는 교회 봉사를 위해, 예배를 위해, 해야 할 다른 활동들을 못하게 되는 것이 고난으로 다가옵니다. 2) 그리고 요즘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고난은 다음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보상이 우리가 원하는 물질적인 보상, 더 많은 친구를 지니게 되고, 더 좋은 지위나 직장을 갖게 되는 형태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초대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으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하는 사회를 향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정의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한 사회를 견디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인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불의와 불평등을 향해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부조리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고난으로 다가옵니다.

 

도대체 요즘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무엇인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고난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주제도 아닙니다. 다만, 이것 한 가지만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고난은 단순히 불편하고 억울하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고난은 희망을 노래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지만 고난이 아닙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나 즐겁게 늘 부르네~ 이 노래를 부를 때에 큰 평화 임하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마음에 품은 분은 희망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