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16. 05:15

2011년 5 1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행 2:42, 벧전 2:19-25, 요 10:10

제목: 그리스도 공동체의 징표

 

참 마음이 훈훈합니다. 오늘 말씀은 마음을 훈훈하게 합니다. 그리고 확실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중요한 건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을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겁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확실한 징표들이 나타났습니다. 뭔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우물 안 개구리로 살면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그렇게 살다 죽습니다. 그러나 우물 밖의 세상을 맛본 사람은 절대로 우물 안 개구리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100 여 년 전 한국이 서구 문물을 받아 들이기 전 한국 사람들의 삶과 서구 문물을 받아 들인 후의 한국 사람들의 삶은 다릅니다. 사절단으로 서구 문물을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한 새로운 세계를 사람들에게 전했고 사람들은 점점 현재의 생활 방식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경험과는 또 다른 세상을 맛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갈릴리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를 맛보았습니다. 이들은 바로 그러한 세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경험한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나라는 분명 이 세상과는 달랐습니다. 그 나라는 이 세상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삶의 법칙들과는 다른 법칙들을 통해서 그 나라가 구현되었습니다. 그 나라가 어떻게 다른지,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타난 현상이 바로 우리가 읽은 42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도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가르침은 꼭 필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다른 말로 하면, 증언입니다. 증언을 들어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당 신 내리듯이 어느 순간 신이 내려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단히,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증언, 즉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그분에게만 관심을 둡니다. 당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주된 관심 거리입니다. 나의 관심을 온통 집중시키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관심이 다른데 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고백하고 있지 않은 겁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무엇이, 누가 여러분의 주된 관심거리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된 관심을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모여 교제하면서 떡을 뗍니다. 여기서 교제는 공동생활 또는 협력 관계를 말합니다. 한 주님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서로 협력 합니다. 함께 만나 예배 드리는 것 뿐 아니라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삶을 삽니다. 떡을 떼는 것은 주님의 만찬과 다름이 없습니다. 떡을 떼면서, 즉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서로가 예수님 안에서 한 식구라는 것, 그리고 한 몸이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또 한 가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된 관심을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기도하기에 힘씁니다. 기도는 세상에 대하여 눈을 감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만 집중하겠다는 신앙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기도는 이 세상에 대하여는 눈을 감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눈을 뜨겠다는 신앙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눈을 감고 기도하면서 여전히 내 앞에 계신 예수님이 안 보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온 하나님 나라가 안 보이고, 이 세상의 것들이 보인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주술입니다.

 

기도는 내 욕심을 채우는 주술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겠다고 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져서 생긴 것들입니다.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흐트러진 우리의 영혼을 모두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집중시킵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 자체 건물을 구입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거기서 모여 마음 놓고 된장국 끓여 먹으려고 교회 건물을 구입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도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시간만큼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교회 문턱이 닳도록 기도하러 드나드십시오. 기도하기 좋으시라고 교회 카펫도 쿠션을 밑에 대고 깔았습니다. 무릎 끓고 기도하거나 털썩 주저 않아서 기도해도 신체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를 했습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 전서의 말씀을 보십시오. 읽기만해도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처음 한 구절만 다시 읽어 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이는 부당하게 고난 받아도 무조건 참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당한 고난은 이미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부당한 고난에 처해질 때가 많습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고난들이 우리 삶에는 즐비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도 부당하게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부당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이 세상의 모든 부당한 것들, 즉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심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불의, 부당함, 죄를 십자가에서 심판하셨습니다. 그것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다.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부당한 고난은 십자가 위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겁니다.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삶의 문제들을 모두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그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면, 하나님께서 긍휼하게 여기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 문제를 꼭 해결해 주십니다. 그 문제와 싸워 이길 힘을 주십니다. 부당한 고난 때문에 길 잃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그 문제를 아뢸 때 잃었던 길을 찾게 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공동체는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 가운데 삽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멸망시키려 합니다. 우리의 것을 도둑질 하고, 우리를 죽이고, 결국 멸망시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무고한 희생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셔서 생명을 얻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풍성하게 살도록 하십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잠시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소모 당한다는 느낌 안 드십니까? 그러다 결국 이 세상의 삶의 끝은 죽음일 뿐입니다. 이런 세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온전치 못한 것을 온전하게 하시고, 죽음으로 끝나는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가운데 사는 부활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부당한 고난과 처절한 죽음에 찌들어 사는 우리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새로운 삶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아직 부당한 고난과 처절한 죽음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 사는 듯하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돌봄 가운데서 부활의 삶을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가지면 이 삶이 우리에게로 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징표를 확실히 세상에 보이면서 살았습니다. 징표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다 보니, 그분이 가져다 주신 새창조의 세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땅 위에서 실현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우리에게는 왜 오늘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징표가 보이지 않으냐고 반문하기 전에, 나의 삶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어 있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이 세상의 것을 심으면 이 세상의 것을 거두게 될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것을 심으면 하나님 나라의 것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심으시겠습니까? 우리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심으셔서 하나님 나라를 거두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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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