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9. 04:09

2011 5 8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4:13-35, 2:14a, 36-41

제목: 우리가 어찌할꼬?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두고 어리둥절해 있는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던 두 사람(글로바와 그의 아내)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던 마을 이름은 엠마오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25리쯤 떨어져 있는 마을이라고 합니다. 걸어서 넉넉잡아 3시간 정도 되는 길입니다. 3시간 정도 걸으면서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사건을 두고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한 남자가 나타나 이들과 동행을 했습니다. 이들은 이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엠마로오 가던 두 사람이 자신과 동행하던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들을 나무랄 수 있고 한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오해입니다. 이들과 동행한 예수님은 이전의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알아보기 힘듭니다. 우리의 육신의 감각이 그를 감지하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유령이거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어떠한 에너지를 뿜어내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활의 몸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새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차원으로 설명하자면, 현재 우리가 3차원의 삶을 살고 있다면 부활의 몸은 4차원의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3차원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4차원의 삶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치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엠마오로 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겁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시점이 어느 때인가를 우리는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30절과 31절의 말씀이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우리가 행하는 어떠한 의식과 닮아 있죠? , 바로 성만찬 의식입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성실하게 거행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만찬은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게 하는 통로입니다. 다시 말해, 부활의 주님의 만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부활의 주님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성만찬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자리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인식하게 되는,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겁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우리도 그와 같이 부활의 몸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몸을 입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온 맘과 몸으로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평생에 걸쳐 계속해서 묵상하고 또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라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전히 깨닫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난 후에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의 주민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베드로가 행한 설교의 핵심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보듯이, 설교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설교하면 제일 먼저 잔소리를 떠올립니다. 설교를 잔소리처럼 하는 설교자들 때문에 그렇게 설교의 위치가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설교는 증언이라는 것을 생각하시면서 설교를 들으시면 설교가 다르게 다가올 겁니다.

 

베드로는 요엘서와 시편의 말씀을 들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 뒤, 36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굉장히 아이러니컬 한 진술입니다. 이스라엘은 로마 당국과 합심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죄인 취급했다는 겁니다. 인간의 눈에 보기에는 죄인이었던 예수가 하나님의 눈에는 의인이었고,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참 당황스러운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입니다. 우스개 소리로 바꾸어 말하면, 벌집을 잘못 건드린 형국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신성모독자, 정치적반역자, 미치광이라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들이 십자가의 못박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들의 주님이요, 그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메시야)였다는 겁니다.

 

이 증언을 듣고 예루살렘에 모였던 유대인들은 마음이 찔렸다고 오늘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절망스럽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이 날 했던 증언은 바로 지금도 이 자리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이 전해지고 전해져, 바로 이 시간 2011 5 8,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 장준식 목사를 통해서 또 다시 증언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가 주님이요 그리스도라는 이 증언 앞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증언이 여러분의 귀에 들리십니까? 들리신다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반응했던 유대인들과 똑 같은 반응이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는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조바심이 나야 한다는 겁니다.

 

베드로의 증언(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조바심을 내면서 물었을 때 베드로는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38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베드로는 이들에게 회개세례를 받을 것을 권면합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 대부분의 분들이 행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있는 분들은 얼마나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회개는 후회가 아닙니다.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일, 후회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 이런 것을 회개라고 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3차원, 4차원이라는 상황을 가지고 부활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듯이, 회개는 차원을 바꾸는 겁니다. 완전히 방향을 트는 것을 말합니다. 3차원의 삶을 사던 사람이 3차원의 삶을 떠나, 4차원의 삶을 살게 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자신이 살던 3차원의 삶을 고집하면서 후회해, 미안해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삶의 국면으로 들어서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여전히 이 땅의 것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두 손에 움켜 쥔 것을 그냥 쥔 채 예수님이 이 두 손에 움켜 쥔 것을 더 견고하게 움켜쥐게 만들어 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예수님을 오히려 종부리듯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건 회개가 아닙니다. 이건 회개를 가장한 욕망일 뿐입니다.

 

회개는 두 손에 움켜 쥔 것을 모두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겁니다. 내가 가던 방향으로 예수님이 따라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시는 방향으로 내가 따라가는 겁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 바로 세례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세례 의식은 단순히 기독교의 입회 의식이 아닙니다. 세례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재현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체로 살아간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세례를 받은 자의 입에서는 이러한 고백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활 공동체 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이 복음을 들은 우리들, 이 마음 속에서 조바심이 나야 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참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부활의 주님을 날마다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