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3. 23:46

2011 5 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벧전 1:3-9

제목: 산 소망

 

13개월 만에 무대에 섰던 김연아가 2등에 그쳐서 아쉬움을 자아냈습니다. 대중매체는 온통 아쉬웠던 김연아의 세계선수권대회 경기를 보도했습니다. 1등을 하나 안 하나 김연아는 대한민국, 그리고 지구촌의 관심거리입니다.

 

같은 날, 어느 매체는 노숙하는 아이들에 대한 보도를 냈습니다. 몇 년 전 사업에 망하고 과대망상증에 사로 잡혀 사는 아버지와 함께 어린 세 아들은 공중화장실에서 노숙하고 있었습니다. 새벽 3시가 되었는데도 이 아이들은 공중화장실 앞에서 셋이 뛰어 놀았습니다. 몇 년 째 이러고 있는 턱에 학교에 가야 할 나이인데도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보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엄마는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났습니다.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들을 버렸습니다. 취재진이 전화통화를 통해서 아이들을 다시 만나고 싶냐?’고 물어봤지만 미안하다.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 했습니다.

 

세상은 이 두 기사 중 어느 것에 더 관심을 가질까요? 물론 김연아의 세계선수권대회 참가 소식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노숙하는 아이들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김연아가 1등을 못하고 2등에 그쳐 시상대에서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김연아를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노숙하는 아이들에게는 별다른 위로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위의 두 기사 중 어느 것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화려한 조명과 사람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는 김연아의 기사와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가슴은 찡하지만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는 노숙하는 아이들의 기사와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노숙하는 아이들같은 일, 쉽게 잊혀지는 일, 그리고 관심 밖의 일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고. 과연 그 때 내가 살고 있었다면 나는 서른 세상 먹은 한 청년의 죽음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아마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성난 군중 틈에 끼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을지 모릅니다. 사실 그랬을 확률이 더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었고 내 눈으로 봤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 있어도, 내 눈으로 봤어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연약함이니까요.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지 못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되는 일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되는 일은, 우리 육신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도 증거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도 우리처럼 예수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왜 사랑했습니까? 바로 예수가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면 더 마음에 와 닿을 겁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너희가 그에게서 돈다발을 받았음이라.”

 

그런데 성경은 아쉽게도(?) 그렇게 증거하지 않고, 예수를 사랑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가운데 있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돈다발이 아닌 구원받았기 때문이라고 증거합니다.

 

사실 이렇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은 돈다발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세상 사람들은 구원에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참 그리스도인과 세속적 그리스도인이 나뉩니다. 예수 믿어서 복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즉 기복신앙을 가지고 교회 나오는 사람과 구원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과 차이를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다른지, 짧은 이 시간에 다 설명드릴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삶과 같아서 칼로 무 자르듯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무엇을 사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나누어 볼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
우리가 날마다 외는 사도신경에는 이를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일이 예수에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됩니다.

 

아무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의 죽음이 여느 사람과의 죽음과 같지 않다는 것과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자만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에게는 예수에게서 일어난 부활 사건이 똑같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믿다 죽은 자들 중에 사흘 만에 부활 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서 믿음이 성령을 통하여 역할을 하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믿음이 있다, 없다교회를 잘 나온다 안 나온다’, 이것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예수를 믿었는데도 변하지 않는 우리 삶의 실존 가운데서, 어떻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지 않느냐의 문제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믿는 자에게 그와 똑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믿는 자의 삶 속에 부활이 실증적으로 당장 일어나는 것을 아니지만, 이것을 믿고 사는 자들은 삶 속에서 다른 면에서 여느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갑니다.

 

우선 부활의 주님을 믿고 사는 자들은 부활의 주님으로 인하여, ‘산 소망을 갖게 됩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아십니까? 산 소망을 지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 밝혀 놓은 것이 바로 6, 7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산 소망을 가지고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좀 느껴지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가져다 주십니다. 죽은 소망이 아닙니다. 산 소망입니다. 사는 것처럼 살게 하신다는 겁니다. 죽은 것처럼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사는 것처럼 살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살게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산 소망을 가지지 못하고, 죽은 소망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산 소망에 온 맘과 정성을 쏟지 않고, 죽은 소망에 온 맘과 정성을 쏟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 아무리 제가 이 말씀 드려도 여전히 못 알아들으시는 분은 못 알아들으시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산 소망입니다. 그 분께서만이 산 소망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십니다. 다른 것은 죽은 소망, 썩어질 소망일 뿐입니다. 이게 깨달아지고 믿어져야 합니다.

 

무슨 소망을 품고 사십니까? 예수 믿어서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 마음에 있는 욕심 가득한 헛된 소망을 얻으려 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산 소망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가져다 주실 겁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산 소망, 구원을 가져다 주십시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