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4. 22. 04:24

2011 4 20일 수요예배 설교

본문: 스바냐 2:1-3; 3:17

제목: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를 찾으라

 

스바냐는 선지자 계의 엄친아입니다. 그의 족보를 보면 입이 떡 벌어집니다. 그 유명한 히스기야 왕이 그의 고조 할아버지입니다. 선지자들 중 스바냐처럼 족보가 자세히 나온 선지자도 없습니다. 스바냐는 젊은 선지자입니다. 나라가 젊을 때는 나이 많은 이들이 나라를 이끌었지만, 이제 나라의 역사가 오래되자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예레미야, 요시야 왕 등 젊은이들을 사용하셔서 백성을 의의 길로 이끄십니다.

 

우리들은 젊은이들이 뭘 알아하고 젊은이들을 무시하기 일쑤지만 새로운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은 늙고 안일한 세대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아무 젊은이나 택해서 쓰시는 것은 아닙니다. 스바냐처럼 경건한 유산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을 들어 쓰십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은 세대를 거쳐 훈련시키시고 필요할 때 그 전통에서 자란 젊은이를 들어 쓰시는 것이지요.

 

개인적으로 스바냐를 보면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왜 저를 들어 쓰실까?’라는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은 젊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유산은 전통이 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1920년대부터 저를 쓰시려고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제 10년만 더 있으면 저희 집안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주님을 섬긴 지 100년이 됩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가슴 벅찬 일인지요?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한 시기는 유다 왕국이 멸망의 길로 들어선 때였습니다. 므낫세의 불신앙과 폭정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유다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우상숭배가 판을 치고,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고, 불의와 부패가 널려 있는 시기였습니다.

 

스바냐는 1 4절에서 6절에 유다가 어떤 죄를 하나님께 범하고 있는지를 나열합니다. 첫째, 바알종교를 통해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바알 종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다산종교로 성과 종교가 밀착된 음란한 종교였습니다. 바알숭배를 통해서 이들은 배교뿐만이 아니라 도덕적 타락의 죄도 함께 범했던 것입니다.

 

둘째, ‘그마림이 존재했었습니다. ‘그마림이란 우상숭배자 또는 우상의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즉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이끄는 제사장들이 가득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음란한 바알신을 섬기게끔 이끌었다는 것이죠. 사람들의 눈에 보기 좋고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사람들의 감성만 자극하고,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일들만 해서 부와 명성을 쌓는 제사장들이 가득했다는 뜻입니다.

 

셋째, 천체숭배입니다. 천체숭배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앗수르-바벨론 지역)에서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천체숭배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천체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신처럼 섬기는 것은 명백한 우상숭배 행위입니다.

 

넷째, 밀감, 밀감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밀곰은 요단 강 동편에 살던 암몬 사람들이 섬기던 신으로서, 솔로몬 왕 때부터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백성들을 미혹시켰습니다.

 

스바냐가 선포하기를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하나님께서 멸절하신고 합니다. “멸절하신다는 말은 카라트(karath)”를 번역한 말로 카라트자른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자들을 잘라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동화줄 타고 하늘로 오르던 나쁜 호랑이를 혼내주기 위해 동화줄이 잘라지는 것 같은 겁니다.

 

위의 네 가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자들 외에, 스바냐는 또 다른 죄를 범한 자들에게 대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곧 여호와를 배반하고 좆지 아니한 자, 즉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여호와를 찾지도 않았다는 것과 여호와를 구하지도 아니했다는 뜻이 무엇인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찾지 않았다에서 찾는다는 히브리어로 비케쉬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병들었을 때 다윗은 금식하며 밤새도록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삼하 12:16). 여기서 간구했다는 말이 비케쉬입니다. 하나님께 밤새도록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또 다윗 왕 때 3년 간 가뭄이 들었을 때,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 때 쓰인 단어도 비케쉬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면, 하나님께 기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최고의 신앙행위입니다. 현대인들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는 것을 꺼려합니다. 단순히 바쁘고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앙 때문에 기도의 자리에 나오지 않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11:6).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기도의 자리에 나오십시오. 살면서 하나님께 아뢸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알게 모르게 스바냐 시대의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1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이런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 나오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의 자리에 나아와 하나님을 찾는 것은 생명에 관한 일입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길 줄 알고, 하나님 주신 삶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자리, 기도의 자리에 나아옵니다.

 

다음으로 여호와를 구하지도 아니했다에서 구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다라쉬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간절히 알기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 24편은 성전에서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의 자격요건을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찾는(다라쉬)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비케쉬) 자로다”( 24:6).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절하게 구해야 합니다. 간절히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을 주실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어떤 일을 하는 거랑 그냥 내 맘대로 하는 거랑은 천지차이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힘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잘라버리시겠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앞 길이 꽉 막힌다는 뜻입니다. 인생이 형통이 아니라, 먹통이 된다는 뜻입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십시오. 우상숭배 했던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던 유다 백성들에게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이 임할 거라고 선포합니다.

 

원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여호와의 날은 좋은 날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물리쳐 주시는 기쁜 날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모스 이후 이사야, 스바냐, 요엘, 스가랴 같은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이 하나님의 배반한 이스라엘에게 심판과 징벌의 날이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여호와의 날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날은 좋은 날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자에게는 기쁜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로 바뀔 것입니다.

 

스바냐가 선포하는 여호와의 날을 한 번 보십시오. 스바냐서 1 14절부터 18절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파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같이 행하게 하니리,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도 멸절할 것임이니라( 1:14-18).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부패할 대로 부패한 삶을 삽니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게 오는 심판의 날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귀한 생명을 엉뚱한데 내어줍니다. 영혼을 팔아 먹습니다. 은과 금()이 자신을 구원해 줄 거라고 착각하면서 그것들은 모으는 데만 모든 정력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진노에서 구원 받을 길은 단 하나,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스바냐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에 세 가지를 행하라고 촉구합니다. 첫째로 스바냐는 먼저 여호와를 찾으라고 합니다. 둘째, 스바냐는 공의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셋째, 스바냐는 겸손을 찾으라고 합니다.

 

첫째로, 여호와를 찾으라는 말은 잘못된 길에서 회개하고 돌아와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공의를 찾으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쩨데크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바탕이 된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면서 저 하늘의 별들처럼 자손을 번창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현재 자신에게 자식조차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하나님께 대한 그 신뢰를 말합니다. “라는 것은 이렇게 관계의 개념이지, 율법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의입니다. 그러한 의를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공의라는 말은 사회적인 정의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 때는 다른 낱말이 쓰이는데 그것이 미슈파트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좀 어려울 수도 있는데, 아모스의 말씀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아모스는 아모스서 5 24절에서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라고 외쳤습니다. 이 때 공법이 미슈파트이고, 정의가 쩨다카입니다. 공법(미슈파트)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억울한 자의 누명을 풀어주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라는 뜻입니다. 힘이 세다고 돈이 많다고 거기에 넘어가서 억울한 사람을 더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공의를 찾으라는 말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말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회복되지 않으면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진노에서 피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셋째로, 겸손을 찾으라고 합니다. 겸손은 오만(교만)의 반대말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인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하는 것이 오만(교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높이고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오만(교만)입니다. 이런 생각을 품은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오만(교만)하게 굽니다. “니까짓것 필요 없어! 내가 너 없이 못살 줄 알아? 꺼져!” 이러한 오만(교만)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더불어 서로를 높여주며 살아갈 줄 모르고, 자신이 무슨 왕이 된 것처럼 사람들에게 상처 주면서 사람들을 부리면서 삽니다. 재물이 많거나, 배운 것이 많은 사람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죄입니다. 그렇다고 가난하거나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이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진 것이 없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더 강팍해지고 교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많이 가졌나 적게 가졌나, 많이 배웠냐 덜 배웠냐가 아니라, 이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셔야 하는데, 나 자신으로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오만(교만)해집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스바냐의 예언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겁니다. 여호와의 날이 어떻게 임하게 될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지금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앞으로도 별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으시고 화도 내리지 않으신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마음 놓고 죄 짓지 마십시오. 그 날이, 여호와의 날이 가깝고도 심히 빠르게 옵니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고도 심히 빠르게 온다는 것을 깨닫고 준비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바로 그날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모여서 찬송 부르면서 기도하면서 밥해 먹으면서 스트레스 풀자고 이렇게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는 자에게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 됩니다. 여화와의 날을 준비하는 자는 이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 것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나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3:17).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를 찾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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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