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4. 25. 11:52

2011 4 24일 부활 주일 예배

본문: 24:1-12

제목: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지난 금요일, 성금요일이었는데 공교롭게도 한원경 성도님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제 마음 한 구석에는 한원경 성도님께 미안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물론 제 잘못은 아닙니다만 목사로서 도의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생전에 좀 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에 참여시켜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한원경 성도님께서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는지 제가 일일이 설명드리지 않아도 대부분의 분들이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분의 삶을 꼬집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도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고 싶으셨겠습니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힘들게, 고난 가운데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행복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암병에 걸리셔서 병석에 누워계실 때 한원경 성도님은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손에 잡힐 듯이 예수님께서 앞에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본인이 병석에서 환상 중에 본 분이 예수님이라고 확신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환상 가운데 본 본인은 알고 있을 겁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한원경 성도님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삶의 복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지난 14일 목요일에 심방 갔을 때 한원경 성도님은 키모를 받고 계셔서 힘들어 하셨지만 그래도 정신도 있으셨고 정옥순 권사님이 끓여다 주신 잣죽하고 물김치를 드시면서 살 것 같다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금요일 점심 때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져서 코마 상태에 들어가셨습니다. 저하고 전도사님하고 금요일 오후에 병상 세례를 베풀려고 준비해 가지고 갔었는데 그 때는 이미 코마 상태에 들어가서 중환자실로 옮긴 상태였습니다. 그 앞에서 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그냥 가시는 한원경 성도님이 가여웠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제 평생 잊지 못할 세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정말 감사한 것은 숨이 멎기 전에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세례를 베푼 하루 뒤, 지난 16일에 한원경 성도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 상 곧바로 장례식을 올리지 못하고 일주일 후에 올렸습니다. 지난 금요일 장례식을 집례하기 위해 다운타운에 있는 한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저는 또 한번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게 허름한 장례식장은 처음 보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원경 성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온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초라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유가족의 뜻을 따라 영어로 진행을 하고 30분 이내로 짧게 장례식을 집례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한원경 성도의 죽음을 속 시원하게 애도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미 하나님 곁으로 가신 분의 애석한 이야기를 들춰내서 이 기쁜 부활 주일에 분위기를 망치고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한원경 성도는 지금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우리보다 먼저 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그분의 개인적인 삶이 어찌되었든, 그건 우리의 생각일 뿐이고 하나님 곁에 가신 그분은 우리보다 복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다만 우리는 한 사람의 죽음과 너무도 상관 없이 살아갑니다
. 한원경 성도님의 장례예배 때 오지 않은 분들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 실존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죽음과는 상관 없이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의 죽음보다 지금 나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야말로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변명처럼 장가 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이 많아한 사람의 죽음에 신경 쓸 겨를 없이 살아갑니다.

 

한 사람의 죽음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고작 그 사람과 생전에 깊은 친분이 있었던 가족들, 친지들, 또는 친구들뿐입니다. 이들도 그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으면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데, 유독 이 사람의 죽음에는 엄청난 관심을 기울입니다. 바로 예수의 죽음입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 대부분의 분들이 한원경 성도님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예배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로 상관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도대체, 예수의 죽음과 우리들의 삶이 무슨 상관이 있길래 그렇게 예수의 죽음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느 한 사람의 죽음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는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한원경 성도님의 죽음은 그냥 한 사람의 죽음일 뿐이지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무슨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죽음에 주목하고 거기에 우리의 존재를 기울이는 이유는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라는 한 사람의 죽음은 여느 사람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렇게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왜 구원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듯이, 간단하게 말씀으로 누구누구야 구원 받아라!”라고 하셔서 구원해 주시면 편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베푸시는 것일까요?

 

물론 이 질문에 100% 정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그 이유를 100% 아십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다는 믿음을 통해서 삶의 혁명을 맞이할 뿐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고난 당하셨습니다.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고난 받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도 고난 당하는 것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고난 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고난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종의 끝이 고난이었고 죽음이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순종의 끝에 예수님께서 당한 고난을 기억하는 이유는 우리도 그렇게 고난 당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 우리가 무슨 고난 못 당해서 안달이 난 매조키스트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싶지 않아도 수많은 고난 가운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고난을 당하려고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아도 인생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고난에 직접 참여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난에 직접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고난에 대한 통념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고난은 실패한 자, 어리석은 자, 힘 없는 자, 약한 자가 받는 거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당하는 고난 앞에서 사람들은 눈물 흘리고 허무해 하고 수치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난에 직접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빛 아래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저항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고난 당하는 자는 실패한 자, 어리석은 자, 힘 없는 자, 약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통념을 갖게 됩니다. 예수의 죽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예수의 죽음이 그냥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역사를 일구어냈다는 것은 기쁜 소식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래서 이를 복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그의 제자들은 꽁꽁 숨어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그나마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와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먼발치에서 지켜본 신실한 여인들이 무덤에 누워 있는 예수님에게 향유를 바르려고 예수님이 죽은 다음날 무덤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 뿐이고 예수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여인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리고 두 천사는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여인들에게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이전부터 당신의 부활을 예언했던 것이죠. 고난과 죽음을 예언했던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부활을 예언했던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부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이 사실을 기억하고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의하면 제자들은 그 여인들의 증언을 실없는 소리 취급합니다. 우리 나라 말로 번역한 성경에는 그 의미가 잘 나타나지 않지만, 헬라어 원어를 보면 제자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정신착란 상태에서 횡설수설하는 말 정도로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고,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예수님을 자꾸 무덤 가운데, 죽음 가운데서 찾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려면, 무덤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송장 냄새 나는 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부활의 주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송장 냄새 나는 곳에서 빨리 나오십시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죽음은 더 이상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죽을 것처럼 살지 말고, 살 것처럼 죽으십시오.

 

우리가 평생 살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는 이해관계가 맺어진 만큼만 관심을 기울이면 됩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우리의 온 존재를 기울여서 관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예수님의 죽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덧입혀 집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무덤,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이 증언을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를 믿으십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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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