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23. 15:56

2011 5 2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베드로전서 2:2-10

제목: 무엇이 당신 삶의 주춧돌인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에는 낯선 단어들이 즐비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 단어들이 낯설다고 느끼지 못하신 분들은 복음에 대하여 도가 텄거나, 아니면 전혀 관심이 없는 분들입니다. 신령한 젖, 보배로운 산 돌,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 거룩한 제사랑, 버린 돌과 모퉁잇돌,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리고 기이한 빛 등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단어들이 즐비합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게 뭐지?’ 하고 너무 고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듯이 위의 낯선 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구절은 5절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더러 신령한 집이 되라고 하고,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교회 열심히 다니라는 건가요? 모두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되라는 말인가요? 아니면 종교적 업무를 담당하는 목회자 같은 사람만이 진정으로 신령하다는 뜻인가요? , 그런 뜻이 전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구약의 제사 제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무슨 뜻인지 파악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제사는 가장 중요한 종교 행위였습니다. 동물을 잡아서 제단에 피를 뿌리고 고기를 태워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동물을 잡아 제사를 드린 이유는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죄 때문에 죽어야 할 존재는 바로 자신인데, 동물을 대신 제물로 삼아 자기의 죄를 전가시켜 그 피를 뿌리고 살을 태워 자신의 죄를 씻었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제사 제도를 생각할 때 뭐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하고 하면서 이해가 잘 안 되실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라는 단어가 너무 세속화되고, 일상생활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라는 것을 생각할 때 기껏해야 도덕적 수준의 죄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대인들에게 는 우스갯소리에 불과합니다. 양심을 좀 닫아버리거나, 몇 푼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그렇나 세속적인, 도적적인 수준의 죄가 아닙니다. ‘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세력을 가리킵니다. 죄란 생명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가 우리 주변에 즐비합니다. 생명을 윤택하게 하고, 생명을 살린다고 하는 것들도 알고 보면 결국 생명을 초라하게 하고 생명을 파괴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망, 자기열망, 그리고 교만 등도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무한경쟁 사회도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무한경쟁 사회에 내던져진 우리들의 아이들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무한경쟁 사회에 내던져진 우리의 삶이 지치고 힘듭니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이러한 죄의 결과, 우리는 모두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죽음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게 된 겁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 구약의 제사란 바로 이렇게 죽음에 처해진 우리의 운명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꾸어 보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목사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서 생명을 중재하는 일을 합니다.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거룩한 일을 감당하는 거룩한 제사장이 될 수 있을까요? 자기희생적인 삶을 살면 될까요?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처럼 오지에 가서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지역에 가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하면서 살면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걸까요? 그렇다면, 그런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만 그리스도인이고 나머지 그런 일을 하고 싶어도 능력이 안 되거나 그런 경지의 삶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건가요?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경건한 삶, 자기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그것이 곧 절대적인 생명을 가져다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구절들을 통해서 절대적인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들어야 합니다. 요즘 성경은 6절에서 8절이 성경의 다른 부분을 인용한 것이라는 것을 잘 표시해 줍니다. 6절에서 베드로는 이사야 28 16절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를 가리켜 보배로운 모퉁잇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 베드로는 시편 111 22절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배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8절에서 베드로는 이사야서 8 14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돌이라고 하는 메타포(은유)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잇돌, 버린 돌, 부딪치는 돌, 그리고 넘어지게 하는 돌이라고 합니다. 돌은 어디에 쓰느냐, 그리고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서 그 역할이 매우 달라집니다. 집의 기둥으로 쓰이면 든든한 주춧돌이 되는 것이고, 길 가운데 버려져 있으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다치게 하는 돌이 됩니다. 예수님을 돌이라고 생각했을 때, 믿는 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모퉁잇돌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불편한 돌, 쓸모 없는 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매우 불편한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에 불과합니다. 이런 돌은 없애는 것이 낫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로마 당국, 그리고 성난 군중들은 예수를 매우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다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반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입니다. 영어로는 코너스톤(cornerstone)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영어나 한국어는 그 의미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코너스톤이나 모퉁잇돌은 왠지 구석에 놓인 별로 중요하지 않는 돌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코너스톤이나 모퉁잇돌은 주춧돌이라는 뜻입니다. 초석, 기초, 기본, 필요 불가결 한 것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초고 기본이고 기둥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의 삶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되었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귀찮아 하고 눈여겨 보지도 않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버린 돌이, 이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런 사건입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놀라운 사건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버림 받은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누구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 버려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사건이, 인류에게 절체절명의 구원의 사건, 생명을 가져다 주는 절대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 바로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 사건은 그냥 웃기는 해프닝에 불과했을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예수가 삼 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어느 한 의로운 자의 죽음에 불과했을 겁니다. 절대로 구원 사건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구원 사건이 된 것은 바로 부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부활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부활을 기껏해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라면 베다니에서 벌어진 죽은 나사로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일도 부활이라고 일컬어질 터인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일과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 살아난 일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사건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만 부활 사건이라고 합니다.

 

애석하게도 부활이 무엇인지 알려 드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부활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활의 주님을 증거할 뿐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부활이 무엇인지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만 알 수 있는 궁극적인 생명이었습니다.

 

막연하게 느껴지시나요?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시인입니다. 시인인 제가 여러분에게 시란 무엇이라고 아무리 설명한다고 해도 여러분이 시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시가 무엇인지 설명을 듣는다고 해도 당장 여러분이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의 세계로 들어온 사람만 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우리는 깨달음(각성)이라고 합니다.

 

부활은 설명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만 알 수 있는 겁니다. 부활의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넋 놓고 앉아 있으면 됩니까? 아닙니다. 부지런히, 부활의 주님에 대한 증언을 들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에 대한 증언인 성경에 귀를 기울이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면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9절이 전해주고 있는 경지입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의 경지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겁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원하시는 분은 계속해서 2절 말씀이 전하고 있듯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십시오. 세상에 나가서 생명 냄새 나는 일을 하시라는 겁니다.

 

무엇이 여러분 삶의 주춧돌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러분의 삶의 집을 지어 나가고 계십니까?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주춧돌을 삼아 신령한 집을 지어 나가십니다. 그래야 거기에 참된 생명이 깃듭니다. 그래야 거기에 생명 냄새가 납니다. 그게 살아 있는 겁니다. 그게 사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주춧돌입니다. 아멘.


* 설교를 음성으로 들으시려면 columbus.onmam.com을 이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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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