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26. 22:25

2011 5 25일 수요 예배 설교

본문: 23:1-8

제목: 의로운 가지에 맺힌 열매가 되라

 

흐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흐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흐름을 바꾸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지금 남유다의 흐름은 멸망입니다. 이 흐름을 바꾸어 보려고 몇 몇 선지자들이 부단하게 애를 씁니다만, 이미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흐름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자동차가 지금 낭떠러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 자동차를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자동차 안에는 사랑하는 부인과 자녀들이 타고 있습니다.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자동차를 온 몸으로 막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괴력 같은 힘이 나올 것입니다. 저 밑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탄성을 참을 수 없습니다.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굴러 떨어지는 자동차를 막아보려고 죽을 힘을 다합니다. 그러나 이미 자동차는 낭떠러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역부족입니다.

 

지금 남유다의 상황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는 남유다를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십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인 선지자가 이사야,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기록한 예레미야입니다. 이사야서는 66장이나 되고, 예레미야서는 52장이나 됩니다. 게다가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비탄에 잠겨 애가를 따로 지었습니다. 그것이 예레미야서 다음에 나오는 예레미야 애가서입니다. 이 두 선지자가 남긴 예언서의 분량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예언서의 내용 또한 최고 수준의 예언들(문학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미 남유다는 자정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유능하고 강력한 선지자들이 그들 곁에 있어도 그들은 그 예언자들의 말씀을 알아들을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만큼의 비극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요즘 한국에서는 전문직 범죄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전문직은 사회 지도층을 말합니다. 지도층이란 무슨 뜻입니까?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지도층, 즉 교수·변호사·의사·예술인 등 전문직 종사자가 저지르는 범죄가 크게 늘고 있고, 이들이 저지르는 폭행 방화 상해 절도 강간 등 강력 범죄도 증가 추세라고 합니다.

 

"나는 잡히지 않는다"는 지나친 확신이 전문직 종사자의 범죄가 증가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합니다. 사회지도층 인사가 지식이나 경험을 지나치게 믿고 완전범죄를 꿈꾼 채 강력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회 전반적으로 번져 있는 도덕 불감증이 이러한 범죄를 더 부추긴다고 합니다.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전문직 종사자들(모든 분야의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은 과도한 경쟁 속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데,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이러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올바른 방법으로 푸는 법을 몰라서 범죄의 형태 등으로 분노를 해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한 전문가(경찰대 표창원 교수)가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이는 제도권 교육이 도덕이나 인격수양 등을 다루지 못하고 경쟁 위주의 지식 전달만 강조하다 나타난 폐해다. 그리고 전문직 종사자가 사회지도층으로서의 자격을 잃어가는 증거다.”

 

이런 것이 흐름이라는 겁니다. 사실 우리도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도덕 불감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마음입니다. 게다가 과도한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들도 매한가지 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삶 가운데 갈등과 다툼만이 증폭하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자살 같은 극단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한국은 대통령에서부터 초등학생까지 누구나 자살을 저지르는, 자살 공화국이 되어버렸습니다.

 

남유다의 상황이 이보다 더 했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죄악상은 백성들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예식에 이르기까지 두루 퍼져 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나라의 지도자들이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나그네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고 힘 없는 자들을 강탈했으며 죄 없는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가 걸리지만 안으면 된다는 도덕불감증이 팽배한 것처럼, 이스라엘은 자기들 마음대로 살면서 죄를 지으면서도 성전에 나가기만 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는 이렇게 비판합니다. 예레미야서 7 4절과 9-10절 말씀을 간추려서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범죄를 보십시오. 모두 십계명에 명확하게 명기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거짓 맹세하지 말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고 있는 겁니다. 벼락을 따라가서 맞아 죽으려는 행동과 같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성전에 가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라고 외친답니다.

 

이는 도덕불감증을 넘어, 하나님 불감증에 걸린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종교적 현상으로 떨어지고 만 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여느 이방 종교처럼 죽은 신, 우상을 섬기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우상 섬기듯이 섬기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생각하시겠지만, 이는 지금 시대도 똑같이 일어나는 매우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고 믿으십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들 사세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정말 믿는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저질러집니까? 우리야 그래도 좀 나은데,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있는 세상입니까? 하나님이 없는 세상입니까? 우리는 수많은 비극을 보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는, 하나님 불감증에 걸린 죄인들이 저지르는 일들 때문에 이 세상은 슬프고도 또 슬픕니다.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가 일일이 말씀 드리지 않아도 대중매체 등을 통해서 이미 여러분들이 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미 기울어진 민족의 운명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는 죽을 힘을 다해서 자신의 민족을 구해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지금 남유다의 상황이 어떠한지 말로 해서 못 알아 들으니까 눈에 보이게끔 퍼포먼스를 해가면서 예레미야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삶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도 않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묻어 주지 않아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리라.”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 봤자, 이렇게 험한 꼴만 당하게 될 텐데 무슨 가정을 꾸리겠습니까? 남유다의 상황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이죠.

 

항아리를 장로들 앞에서 깨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레미야 19 11절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 항아리가 깨지듯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남유다가 이렇게 깨진 항아리처럼 될 거라는 겁니다.

 

이렇게 처절하게 죽을 힘을 다해, 민족을 구해보려고 퍼포먼스까지 해가면서 영적인 각성을 위해 노력하건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백성에 머물렀습니다. 예레미야서 20장에 보면,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금하는 제사장 바스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듣기 싫다는 겁니다. 이미 죄악에 빠져 부패할 대로 부패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자를 오히려 욕하고 미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의 핍박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 몸으로 전하다가 결국 이렇게 수모를 겪습니다. 예레미야서 20 2절 말씀입니다.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예레미야서를 읽다 보면 기가 막힙니다
.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게 세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온 힘을 다했지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민족의 운명, 그 흐름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의 탓이 아닙니다. 죄악의 결과일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결국 동족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는데 실패했지만, 그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획을 준비하고 계신 것을 알고 있었기 대문입니다. 하나님의 그 새로운 계획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5절과 6절이 핵심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누구에 관한 예언입니까?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은 새로운 나라를 준비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이 계획은 600년 정도 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라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한 의로운 가지인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며, 그가 이 세상에 가져오신 정의와 공의를 바라보며 구원 받은 백성으로 평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범죄가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세상이지만, 이러한 세상에 희망이 있는 것은 바로 의로운 가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의로운 가지에 맺힌 열매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마십시오. 의로운 가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딱 붙어서, 의와 평화를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 위에서 평화를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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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