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23. 15:56

2011 5 2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베드로전서 2:2-10

제목: 무엇이 당신 삶의 주춧돌인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에는 낯선 단어들이 즐비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 단어들이 낯설다고 느끼지 못하신 분들은 복음에 대하여 도가 텄거나, 아니면 전혀 관심이 없는 분들입니다. 신령한 젖, 보배로운 산 돌,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 거룩한 제사랑, 버린 돌과 모퉁잇돌,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리고 기이한 빛 등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단어들이 즐비합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게 뭐지?’ 하고 너무 고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듯이 위의 낯선 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구절은 5절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더러 신령한 집이 되라고 하고,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교회 열심히 다니라는 건가요? 모두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되라는 말인가요? 아니면 종교적 업무를 담당하는 목회자 같은 사람만이 진정으로 신령하다는 뜻인가요? , 그런 뜻이 전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구약의 제사 제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무슨 뜻인지 파악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제사는 가장 중요한 종교 행위였습니다. 동물을 잡아서 제단에 피를 뿌리고 고기를 태워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동물을 잡아 제사를 드린 이유는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죄 때문에 죽어야 할 존재는 바로 자신인데, 동물을 대신 제물로 삼아 자기의 죄를 전가시켜 그 피를 뿌리고 살을 태워 자신의 죄를 씻었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제사 제도를 생각할 때 뭐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하고 하면서 이해가 잘 안 되실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라는 단어가 너무 세속화되고, 일상생활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라는 것을 생각할 때 기껏해야 도덕적 수준의 죄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대인들에게 는 우스갯소리에 불과합니다. 양심을 좀 닫아버리거나, 몇 푼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그렇나 세속적인, 도적적인 수준의 죄가 아닙니다. ‘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세력을 가리킵니다. 죄란 생명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가 우리 주변에 즐비합니다. 생명을 윤택하게 하고, 생명을 살린다고 하는 것들도 알고 보면 결국 생명을 초라하게 하고 생명을 파괴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망, 자기열망, 그리고 교만 등도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무한경쟁 사회도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무한경쟁 사회에 내던져진 우리들의 아이들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무한경쟁 사회에 내던져진 우리의 삶이 지치고 힘듭니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이러한 죄의 결과, 우리는 모두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죽음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게 된 겁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 구약의 제사란 바로 이렇게 죽음에 처해진 우리의 운명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꾸어 보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목사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서 생명을 중재하는 일을 합니다.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거룩한 일을 감당하는 거룩한 제사장이 될 수 있을까요? 자기희생적인 삶을 살면 될까요?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처럼 오지에 가서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지역에 가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하면서 살면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걸까요? 그렇다면, 그런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만 그리스도인이고 나머지 그런 일을 하고 싶어도 능력이 안 되거나 그런 경지의 삶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건가요?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경건한 삶, 자기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그것이 곧 절대적인 생명을 가져다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구절들을 통해서 절대적인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들어야 합니다. 요즘 성경은 6절에서 8절이 성경의 다른 부분을 인용한 것이라는 것을 잘 표시해 줍니다. 6절에서 베드로는 이사야 28 16절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를 가리켜 보배로운 모퉁잇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 베드로는 시편 111 22절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배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8절에서 베드로는 이사야서 8 14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돌이라고 하는 메타포(은유)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잇돌, 버린 돌, 부딪치는 돌, 그리고 넘어지게 하는 돌이라고 합니다. 돌은 어디에 쓰느냐, 그리고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서 그 역할이 매우 달라집니다. 집의 기둥으로 쓰이면 든든한 주춧돌이 되는 것이고, 길 가운데 버려져 있으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다치게 하는 돌이 됩니다. 예수님을 돌이라고 생각했을 때, 믿는 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모퉁잇돌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불편한 돌, 쓸모 없는 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매우 불편한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에 불과합니다. 이런 돌은 없애는 것이 낫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로마 당국, 그리고 성난 군중들은 예수를 매우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다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반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입니다. 영어로는 코너스톤(cornerstone)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영어나 한국어는 그 의미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코너스톤이나 모퉁잇돌은 왠지 구석에 놓인 별로 중요하지 않는 돌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코너스톤이나 모퉁잇돌은 주춧돌이라는 뜻입니다. 초석, 기초, 기본, 필요 불가결 한 것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초고 기본이고 기둥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의 삶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되었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귀찮아 하고 눈여겨 보지도 않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버린 돌이, 이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런 사건입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놀라운 사건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버림 받은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누구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 버려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사건이, 인류에게 절체절명의 구원의 사건, 생명을 가져다 주는 절대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 바로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 사건은 그냥 웃기는 해프닝에 불과했을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예수가 삼 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어느 한 의로운 자의 죽음에 불과했을 겁니다. 절대로 구원 사건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구원 사건이 된 것은 바로 부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부활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부활을 기껏해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라면 베다니에서 벌어진 죽은 나사로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일도 부활이라고 일컬어질 터인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일과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 살아난 일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사건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만 부활 사건이라고 합니다.

 

애석하게도 부활이 무엇인지 알려 드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부활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활의 주님을 증거할 뿐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부활이 무엇인지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만 알 수 있는 궁극적인 생명이었습니다.

 

막연하게 느껴지시나요?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시인입니다. 시인인 제가 여러분에게 시란 무엇이라고 아무리 설명한다고 해도 여러분이 시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시가 무엇인지 설명을 듣는다고 해도 당장 여러분이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의 세계로 들어온 사람만 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우리는 깨달음(각성)이라고 합니다.

 

부활은 설명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만 알 수 있는 겁니다. 부활의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넋 놓고 앉아 있으면 됩니까? 아닙니다. 부지런히, 부활의 주님에 대한 증언을 들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에 대한 증언인 성경에 귀를 기울이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면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9절이 전해주고 있는 경지입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의 경지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겁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원하시는 분은 계속해서 2절 말씀이 전하고 있듯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십시오. 세상에 나가서 생명 냄새 나는 일을 하시라는 겁니다.

 

무엇이 여러분 삶의 주춧돌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러분의 삶의 집을 지어 나가고 계십니까?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주춧돌을 삼아 신령한 집을 지어 나가십니다. 그래야 거기에 참된 생명이 깃듭니다. 그래야 거기에 생명 냄새가 납니다. 그게 살아 있는 겁니다. 그게 사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주춧돌입니다. 아멘.


* 설교를 음성으로 들으시려면 columbus.onmam.com을 이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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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16. 05:15

2011년 5 1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행 2:42, 벧전 2:19-25, 요 10:10

제목: 그리스도 공동체의 징표

 

참 마음이 훈훈합니다. 오늘 말씀은 마음을 훈훈하게 합니다. 그리고 확실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중요한 건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을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겁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확실한 징표들이 나타났습니다. 뭔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우물 안 개구리로 살면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그렇게 살다 죽습니다. 그러나 우물 밖의 세상을 맛본 사람은 절대로 우물 안 개구리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100 여 년 전 한국이 서구 문물을 받아 들이기 전 한국 사람들의 삶과 서구 문물을 받아 들인 후의 한국 사람들의 삶은 다릅니다. 사절단으로 서구 문물을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한 새로운 세계를 사람들에게 전했고 사람들은 점점 현재의 생활 방식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경험과는 또 다른 세상을 맛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갈릴리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를 맛보았습니다. 이들은 바로 그러한 세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경험한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나라는 분명 이 세상과는 달랐습니다. 그 나라는 이 세상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삶의 법칙들과는 다른 법칙들을 통해서 그 나라가 구현되었습니다. 그 나라가 어떻게 다른지,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타난 현상이 바로 우리가 읽은 42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도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가르침은 꼭 필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다른 말로 하면, 증언입니다. 증언을 들어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당 신 내리듯이 어느 순간 신이 내려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단히,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증언, 즉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그분에게만 관심을 둡니다. 당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주된 관심 거리입니다. 나의 관심을 온통 집중시키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관심이 다른데 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고백하고 있지 않은 겁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무엇이, 누가 여러분의 주된 관심거리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된 관심을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모여 교제하면서 떡을 뗍니다. 여기서 교제는 공동생활 또는 협력 관계를 말합니다. 한 주님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서로 협력 합니다. 함께 만나 예배 드리는 것 뿐 아니라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삶을 삽니다. 떡을 떼는 것은 주님의 만찬과 다름이 없습니다. 떡을 떼면서, 즉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서로가 예수님 안에서 한 식구라는 것, 그리고 한 몸이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또 한 가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된 관심을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기도하기에 힘씁니다. 기도는 세상에 대하여 눈을 감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만 집중하겠다는 신앙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기도는 이 세상에 대하여는 눈을 감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눈을 뜨겠다는 신앙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눈을 감고 기도하면서 여전히 내 앞에 계신 예수님이 안 보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온 하나님 나라가 안 보이고, 이 세상의 것들이 보인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주술입니다.

 

기도는 내 욕심을 채우는 주술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겠다고 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져서 생긴 것들입니다.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흐트러진 우리의 영혼을 모두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집중시킵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 자체 건물을 구입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거기서 모여 마음 놓고 된장국 끓여 먹으려고 교회 건물을 구입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도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시간만큼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교회 문턱이 닳도록 기도하러 드나드십시오. 기도하기 좋으시라고 교회 카펫도 쿠션을 밑에 대고 깔았습니다. 무릎 끓고 기도하거나 털썩 주저 않아서 기도해도 신체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를 했습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 전서의 말씀을 보십시오. 읽기만해도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처음 한 구절만 다시 읽어 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이는 부당하게 고난 받아도 무조건 참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당한 고난은 이미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부당한 고난에 처해질 때가 많습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고난들이 우리 삶에는 즐비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도 부당하게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부당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이 세상의 모든 부당한 것들, 즉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심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불의, 부당함, 죄를 십자가에서 심판하셨습니다. 그것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다.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부당한 고난은 십자가 위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겁니다.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삶의 문제들을 모두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그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면, 하나님께서 긍휼하게 여기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 문제를 꼭 해결해 주십니다. 그 문제와 싸워 이길 힘을 주십니다. 부당한 고난 때문에 길 잃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그 문제를 아뢸 때 잃었던 길을 찾게 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공동체는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 가운데 삽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멸망시키려 합니다. 우리의 것을 도둑질 하고, 우리를 죽이고, 결국 멸망시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무고한 희생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셔서 생명을 얻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풍성하게 살도록 하십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잠시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소모 당한다는 느낌 안 드십니까? 그러다 결국 이 세상의 삶의 끝은 죽음일 뿐입니다. 이런 세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온전치 못한 것을 온전하게 하시고, 죽음으로 끝나는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가운데 사는 부활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부당한 고난과 처절한 죽음에 찌들어 사는 우리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새로운 삶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아직 부당한 고난과 처절한 죽음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 사는 듯하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돌봄 가운데서 부활의 삶을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가지면 이 삶이 우리에게로 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징표를 확실히 세상에 보이면서 살았습니다. 징표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다 보니, 그분이 가져다 주신 새창조의 세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땅 위에서 실현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우리에게는 왜 오늘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징표가 보이지 않으냐고 반문하기 전에, 나의 삶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어 있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이 세상의 것을 심으면 이 세상의 것을 거두게 될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것을 심으면 하나님 나라의 것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심으시겠습니까? 우리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심으셔서 하나님 나라를 거두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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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9. 04:09

2011 5 8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4:13-35, 2:14a, 36-41

제목: 우리가 어찌할꼬?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두고 어리둥절해 있는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던 두 사람(글로바와 그의 아내)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던 마을 이름은 엠마오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25리쯤 떨어져 있는 마을이라고 합니다. 걸어서 넉넉잡아 3시간 정도 되는 길입니다. 3시간 정도 걸으면서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사건을 두고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한 남자가 나타나 이들과 동행을 했습니다. 이들은 이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엠마로오 가던 두 사람이 자신과 동행하던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들을 나무랄 수 있고 한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오해입니다. 이들과 동행한 예수님은 이전의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알아보기 힘듭니다. 우리의 육신의 감각이 그를 감지하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유령이거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어떠한 에너지를 뿜어내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활의 몸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새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차원으로 설명하자면, 현재 우리가 3차원의 삶을 살고 있다면 부활의 몸은 4차원의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3차원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4차원의 삶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치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엠마오로 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겁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시점이 어느 때인가를 우리는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30절과 31절의 말씀이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우리가 행하는 어떠한 의식과 닮아 있죠? , 바로 성만찬 의식입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성실하게 거행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만찬은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게 하는 통로입니다. 다시 말해, 부활의 주님의 만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부활의 주님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성만찬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자리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인식하게 되는,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겁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우리도 그와 같이 부활의 몸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몸을 입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온 맘과 몸으로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평생에 걸쳐 계속해서 묵상하고 또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라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전히 깨닫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난 후에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의 주민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베드로가 행한 설교의 핵심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보듯이, 설교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설교하면 제일 먼저 잔소리를 떠올립니다. 설교를 잔소리처럼 하는 설교자들 때문에 그렇게 설교의 위치가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설교는 증언이라는 것을 생각하시면서 설교를 들으시면 설교가 다르게 다가올 겁니다.

 

베드로는 요엘서와 시편의 말씀을 들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 뒤, 36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굉장히 아이러니컬 한 진술입니다. 이스라엘은 로마 당국과 합심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죄인 취급했다는 겁니다. 인간의 눈에 보기에는 죄인이었던 예수가 하나님의 눈에는 의인이었고,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참 당황스러운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입니다. 우스개 소리로 바꾸어 말하면, 벌집을 잘못 건드린 형국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신성모독자, 정치적반역자, 미치광이라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들이 십자가의 못박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들의 주님이요, 그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메시야)였다는 겁니다.

 

이 증언을 듣고 예루살렘에 모였던 유대인들은 마음이 찔렸다고 오늘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절망스럽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이 날 했던 증언은 바로 지금도 이 자리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이 전해지고 전해져, 바로 이 시간 2011 5 8,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 장준식 목사를 통해서 또 다시 증언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가 주님이요 그리스도라는 이 증언 앞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증언이 여러분의 귀에 들리십니까? 들리신다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반응했던 유대인들과 똑 같은 반응이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는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조바심이 나야 한다는 겁니다.

 

베드로의 증언(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조바심을 내면서 물었을 때 베드로는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38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베드로는 이들에게 회개세례를 받을 것을 권면합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 대부분의 분들이 행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있는 분들은 얼마나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회개는 후회가 아닙니다.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일, 후회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 이런 것을 회개라고 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3차원, 4차원이라는 상황을 가지고 부활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듯이, 회개는 차원을 바꾸는 겁니다. 완전히 방향을 트는 것을 말합니다. 3차원의 삶을 사던 사람이 3차원의 삶을 떠나, 4차원의 삶을 살게 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자신이 살던 3차원의 삶을 고집하면서 후회해, 미안해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삶의 국면으로 들어서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여전히 이 땅의 것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두 손에 움켜 쥔 것을 그냥 쥔 채 예수님이 이 두 손에 움켜 쥔 것을 더 견고하게 움켜쥐게 만들어 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예수님을 오히려 종부리듯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건 회개가 아닙니다. 이건 회개를 가장한 욕망일 뿐입니다.

 

회개는 두 손에 움켜 쥔 것을 모두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겁니다. 내가 가던 방향으로 예수님이 따라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시는 방향으로 내가 따라가는 겁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 바로 세례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세례 의식은 단순히 기독교의 입회 의식이 아닙니다. 세례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재현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체로 살아간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세례를 받은 자의 입에서는 이러한 고백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활 공동체 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이 복음을 들은 우리들, 이 마음 속에서 조바심이 나야 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참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부활의 주님을 날마다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3. 23:46

2011 5 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벧전 1:3-9

제목: 산 소망

 

13개월 만에 무대에 섰던 김연아가 2등에 그쳐서 아쉬움을 자아냈습니다. 대중매체는 온통 아쉬웠던 김연아의 세계선수권대회 경기를 보도했습니다. 1등을 하나 안 하나 김연아는 대한민국, 그리고 지구촌의 관심거리입니다.

 

같은 날, 어느 매체는 노숙하는 아이들에 대한 보도를 냈습니다. 몇 년 전 사업에 망하고 과대망상증에 사로 잡혀 사는 아버지와 함께 어린 세 아들은 공중화장실에서 노숙하고 있었습니다. 새벽 3시가 되었는데도 이 아이들은 공중화장실 앞에서 셋이 뛰어 놀았습니다. 몇 년 째 이러고 있는 턱에 학교에 가야 할 나이인데도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보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엄마는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났습니다.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들을 버렸습니다. 취재진이 전화통화를 통해서 아이들을 다시 만나고 싶냐?’고 물어봤지만 미안하다.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 했습니다.

 

세상은 이 두 기사 중 어느 것에 더 관심을 가질까요? 물론 김연아의 세계선수권대회 참가 소식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노숙하는 아이들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김연아가 1등을 못하고 2등에 그쳐 시상대에서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김연아를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노숙하는 아이들에게는 별다른 위로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위의 두 기사 중 어느 것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화려한 조명과 사람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는 김연아의 기사와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가슴은 찡하지만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는 노숙하는 아이들의 기사와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노숙하는 아이들같은 일, 쉽게 잊혀지는 일, 그리고 관심 밖의 일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고. 과연 그 때 내가 살고 있었다면 나는 서른 세상 먹은 한 청년의 죽음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아마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성난 군중 틈에 끼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을지 모릅니다. 사실 그랬을 확률이 더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었고 내 눈으로 봤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 있어도, 내 눈으로 봤어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연약함이니까요.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지 못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되는 일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되는 일은, 우리 육신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도 증거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도 우리처럼 예수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왜 사랑했습니까? 바로 예수가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면 더 마음에 와 닿을 겁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너희가 그에게서 돈다발을 받았음이라.”

 

그런데 성경은 아쉽게도(?) 그렇게 증거하지 않고, 예수를 사랑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가운데 있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돈다발이 아닌 구원받았기 때문이라고 증거합니다.

 

사실 이렇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은 돈다발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세상 사람들은 구원에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참 그리스도인과 세속적 그리스도인이 나뉩니다. 예수 믿어서 복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즉 기복신앙을 가지고 교회 나오는 사람과 구원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과 차이를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다른지, 짧은 이 시간에 다 설명드릴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삶과 같아서 칼로 무 자르듯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무엇을 사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나누어 볼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
우리가 날마다 외는 사도신경에는 이를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일이 예수에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됩니다.

 

아무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의 죽음이 여느 사람과의 죽음과 같지 않다는 것과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자만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에게는 예수에게서 일어난 부활 사건이 똑같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믿다 죽은 자들 중에 사흘 만에 부활 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서 믿음이 성령을 통하여 역할을 하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믿음이 있다, 없다교회를 잘 나온다 안 나온다’, 이것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예수를 믿었는데도 변하지 않는 우리 삶의 실존 가운데서, 어떻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지 않느냐의 문제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믿는 자에게 그와 똑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믿는 자의 삶 속에 부활이 실증적으로 당장 일어나는 것을 아니지만, 이것을 믿고 사는 자들은 삶 속에서 다른 면에서 여느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갑니다.

 

우선 부활의 주님을 믿고 사는 자들은 부활의 주님으로 인하여, ‘산 소망을 갖게 됩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아십니까? 산 소망을 지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 밝혀 놓은 것이 바로 6, 7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산 소망을 가지고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좀 느껴지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가져다 주십니다. 죽은 소망이 아닙니다. 산 소망입니다. 사는 것처럼 살게 하신다는 겁니다. 죽은 것처럼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사는 것처럼 살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살게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산 소망을 가지지 못하고, 죽은 소망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산 소망에 온 맘과 정성을 쏟지 않고, 죽은 소망에 온 맘과 정성을 쏟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 아무리 제가 이 말씀 드려도 여전히 못 알아들으시는 분은 못 알아들으시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산 소망입니다. 그 분께서만이 산 소망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십니다. 다른 것은 죽은 소망, 썩어질 소망일 뿐입니다. 이게 깨달아지고 믿어져야 합니다.

 

무슨 소망을 품고 사십니까? 예수 믿어서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 마음에 있는 욕심 가득한 헛된 소망을 얻으려 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산 소망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가져다 주실 겁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산 소망, 구원을 가져다 주십시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4. 25. 11:52

2011 4 24일 부활 주일 예배

본문: 24:1-12

제목: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지난 금요일, 성금요일이었는데 공교롭게도 한원경 성도님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제 마음 한 구석에는 한원경 성도님께 미안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물론 제 잘못은 아닙니다만 목사로서 도의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생전에 좀 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에 참여시켜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한원경 성도님께서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는지 제가 일일이 설명드리지 않아도 대부분의 분들이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분의 삶을 꼬집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도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고 싶으셨겠습니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힘들게, 고난 가운데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행복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암병에 걸리셔서 병석에 누워계실 때 한원경 성도님은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손에 잡힐 듯이 예수님께서 앞에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본인이 병석에서 환상 중에 본 분이 예수님이라고 확신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환상 가운데 본 본인은 알고 있을 겁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한원경 성도님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삶의 복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지난 14일 목요일에 심방 갔을 때 한원경 성도님은 키모를 받고 계셔서 힘들어 하셨지만 그래도 정신도 있으셨고 정옥순 권사님이 끓여다 주신 잣죽하고 물김치를 드시면서 살 것 같다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금요일 점심 때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져서 코마 상태에 들어가셨습니다. 저하고 전도사님하고 금요일 오후에 병상 세례를 베풀려고 준비해 가지고 갔었는데 그 때는 이미 코마 상태에 들어가서 중환자실로 옮긴 상태였습니다. 그 앞에서 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그냥 가시는 한원경 성도님이 가여웠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제 평생 잊지 못할 세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정말 감사한 것은 숨이 멎기 전에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세례를 베푼 하루 뒤, 지난 16일에 한원경 성도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 상 곧바로 장례식을 올리지 못하고 일주일 후에 올렸습니다. 지난 금요일 장례식을 집례하기 위해 다운타운에 있는 한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저는 또 한번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게 허름한 장례식장은 처음 보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원경 성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온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초라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유가족의 뜻을 따라 영어로 진행을 하고 30분 이내로 짧게 장례식을 집례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한원경 성도의 죽음을 속 시원하게 애도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미 하나님 곁으로 가신 분의 애석한 이야기를 들춰내서 이 기쁜 부활 주일에 분위기를 망치고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한원경 성도는 지금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우리보다 먼저 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그분의 개인적인 삶이 어찌되었든, 그건 우리의 생각일 뿐이고 하나님 곁에 가신 그분은 우리보다 복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다만 우리는 한 사람의 죽음과 너무도 상관 없이 살아갑니다
. 한원경 성도님의 장례예배 때 오지 않은 분들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 실존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죽음과는 상관 없이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의 죽음보다 지금 나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야말로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변명처럼 장가 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이 많아한 사람의 죽음에 신경 쓸 겨를 없이 살아갑니다.

 

한 사람의 죽음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고작 그 사람과 생전에 깊은 친분이 있었던 가족들, 친지들, 또는 친구들뿐입니다. 이들도 그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으면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데, 유독 이 사람의 죽음에는 엄청난 관심을 기울입니다. 바로 예수의 죽음입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 대부분의 분들이 한원경 성도님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예배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로 상관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도대체, 예수의 죽음과 우리들의 삶이 무슨 상관이 있길래 그렇게 예수의 죽음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느 한 사람의 죽음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는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한원경 성도님의 죽음은 그냥 한 사람의 죽음일 뿐이지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무슨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죽음에 주목하고 거기에 우리의 존재를 기울이는 이유는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라는 한 사람의 죽음은 여느 사람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렇게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왜 구원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듯이, 간단하게 말씀으로 누구누구야 구원 받아라!”라고 하셔서 구원해 주시면 편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베푸시는 것일까요?

 

물론 이 질문에 100% 정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그 이유를 100% 아십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다는 믿음을 통해서 삶의 혁명을 맞이할 뿐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고난 당하셨습니다.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고난 받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도 고난 당하는 것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고난 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고난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종의 끝이 고난이었고 죽음이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순종의 끝에 예수님께서 당한 고난을 기억하는 이유는 우리도 그렇게 고난 당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 우리가 무슨 고난 못 당해서 안달이 난 매조키스트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싶지 않아도 수많은 고난 가운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고난을 당하려고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아도 인생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고난에 직접 참여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난에 직접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고난에 대한 통념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고난은 실패한 자, 어리석은 자, 힘 없는 자, 약한 자가 받는 거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당하는 고난 앞에서 사람들은 눈물 흘리고 허무해 하고 수치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난에 직접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빛 아래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저항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고난 당하는 자는 실패한 자, 어리석은 자, 힘 없는 자, 약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통념을 갖게 됩니다. 예수의 죽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예수의 죽음이 그냥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역사를 일구어냈다는 것은 기쁜 소식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래서 이를 복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그의 제자들은 꽁꽁 숨어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그나마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와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먼발치에서 지켜본 신실한 여인들이 무덤에 누워 있는 예수님에게 향유를 바르려고 예수님이 죽은 다음날 무덤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 뿐이고 예수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여인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리고 두 천사는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여인들에게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이전부터 당신의 부활을 예언했던 것이죠. 고난과 죽음을 예언했던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부활을 예언했던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부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이 사실을 기억하고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의하면 제자들은 그 여인들의 증언을 실없는 소리 취급합니다. 우리 나라 말로 번역한 성경에는 그 의미가 잘 나타나지 않지만, 헬라어 원어를 보면 제자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정신착란 상태에서 횡설수설하는 말 정도로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고,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예수님을 자꾸 무덤 가운데, 죽음 가운데서 찾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려면, 무덤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송장 냄새 나는 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부활의 주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송장 냄새 나는 곳에서 빨리 나오십시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죽음은 더 이상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죽을 것처럼 살지 말고, 살 것처럼 죽으십시오.

 

우리가 평생 살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는 이해관계가 맺어진 만큼만 관심을 기울이면 됩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우리의 온 존재를 기울여서 관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예수님의 죽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덧입혀 집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무덤,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이 증언을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를 믿으십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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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4. 22. 04:24

2011 4 20일 수요예배 설교

본문: 스바냐 2:1-3; 3:17

제목: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를 찾으라

 

스바냐는 선지자 계의 엄친아입니다. 그의 족보를 보면 입이 떡 벌어집니다. 그 유명한 히스기야 왕이 그의 고조 할아버지입니다. 선지자들 중 스바냐처럼 족보가 자세히 나온 선지자도 없습니다. 스바냐는 젊은 선지자입니다. 나라가 젊을 때는 나이 많은 이들이 나라를 이끌었지만, 이제 나라의 역사가 오래되자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예레미야, 요시야 왕 등 젊은이들을 사용하셔서 백성을 의의 길로 이끄십니다.

 

우리들은 젊은이들이 뭘 알아하고 젊은이들을 무시하기 일쑤지만 새로운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은 늙고 안일한 세대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아무 젊은이나 택해서 쓰시는 것은 아닙니다. 스바냐처럼 경건한 유산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을 들어 쓰십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은 세대를 거쳐 훈련시키시고 필요할 때 그 전통에서 자란 젊은이를 들어 쓰시는 것이지요.

 

개인적으로 스바냐를 보면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왜 저를 들어 쓰실까?’라는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은 젊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유산은 전통이 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1920년대부터 저를 쓰시려고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제 10년만 더 있으면 저희 집안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주님을 섬긴 지 100년이 됩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가슴 벅찬 일인지요?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한 시기는 유다 왕국이 멸망의 길로 들어선 때였습니다. 므낫세의 불신앙과 폭정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유다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우상숭배가 판을 치고,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고, 불의와 부패가 널려 있는 시기였습니다.

 

스바냐는 1 4절에서 6절에 유다가 어떤 죄를 하나님께 범하고 있는지를 나열합니다. 첫째, 바알종교를 통해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바알 종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다산종교로 성과 종교가 밀착된 음란한 종교였습니다. 바알숭배를 통해서 이들은 배교뿐만이 아니라 도덕적 타락의 죄도 함께 범했던 것입니다.

 

둘째, ‘그마림이 존재했었습니다. ‘그마림이란 우상숭배자 또는 우상의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즉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이끄는 제사장들이 가득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음란한 바알신을 섬기게끔 이끌었다는 것이죠. 사람들의 눈에 보기 좋고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사람들의 감성만 자극하고,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일들만 해서 부와 명성을 쌓는 제사장들이 가득했다는 뜻입니다.

 

셋째, 천체숭배입니다. 천체숭배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앗수르-바벨론 지역)에서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천체숭배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천체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신처럼 섬기는 것은 명백한 우상숭배 행위입니다.

 

넷째, 밀감, 밀감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밀곰은 요단 강 동편에 살던 암몬 사람들이 섬기던 신으로서, 솔로몬 왕 때부터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백성들을 미혹시켰습니다.

 

스바냐가 선포하기를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하나님께서 멸절하신고 합니다. “멸절하신다는 말은 카라트(karath)”를 번역한 말로 카라트자른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자들을 잘라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동화줄 타고 하늘로 오르던 나쁜 호랑이를 혼내주기 위해 동화줄이 잘라지는 것 같은 겁니다.

 

위의 네 가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자들 외에, 스바냐는 또 다른 죄를 범한 자들에게 대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곧 여호와를 배반하고 좆지 아니한 자, 즉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여호와를 찾지도 않았다는 것과 여호와를 구하지도 아니했다는 뜻이 무엇인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찾지 않았다에서 찾는다는 히브리어로 비케쉬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병들었을 때 다윗은 금식하며 밤새도록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삼하 12:16). 여기서 간구했다는 말이 비케쉬입니다. 하나님께 밤새도록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또 다윗 왕 때 3년 간 가뭄이 들었을 때,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 때 쓰인 단어도 비케쉬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면, 하나님께 기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최고의 신앙행위입니다. 현대인들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는 것을 꺼려합니다. 단순히 바쁘고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앙 때문에 기도의 자리에 나오지 않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11:6).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기도의 자리에 나오십시오. 살면서 하나님께 아뢸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알게 모르게 스바냐 시대의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1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이런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 나오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의 자리에 나아와 하나님을 찾는 것은 생명에 관한 일입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길 줄 알고, 하나님 주신 삶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자리, 기도의 자리에 나아옵니다.

 

다음으로 여호와를 구하지도 아니했다에서 구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다라쉬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간절히 알기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 24편은 성전에서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의 자격요건을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찾는(다라쉬)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비케쉬) 자로다”( 24:6).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절하게 구해야 합니다. 간절히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을 주실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어떤 일을 하는 거랑 그냥 내 맘대로 하는 거랑은 천지차이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힘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잘라버리시겠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앞 길이 꽉 막힌다는 뜻입니다. 인생이 형통이 아니라, 먹통이 된다는 뜻입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십시오. 우상숭배 했던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던 유다 백성들에게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이 임할 거라고 선포합니다.

 

원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여호와의 날은 좋은 날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물리쳐 주시는 기쁜 날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모스 이후 이사야, 스바냐, 요엘, 스가랴 같은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이 하나님의 배반한 이스라엘에게 심판과 징벌의 날이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여호와의 날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날은 좋은 날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자에게는 기쁜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로 바뀔 것입니다.

 

스바냐가 선포하는 여호와의 날을 한 번 보십시오. 스바냐서 1 14절부터 18절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파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같이 행하게 하니리,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도 멸절할 것임이니라( 1:14-18).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부패할 대로 부패한 삶을 삽니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게 오는 심판의 날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귀한 생명을 엉뚱한데 내어줍니다. 영혼을 팔아 먹습니다. 은과 금()이 자신을 구원해 줄 거라고 착각하면서 그것들은 모으는 데만 모든 정력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진노에서 구원 받을 길은 단 하나,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스바냐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에 세 가지를 행하라고 촉구합니다. 첫째로 스바냐는 먼저 여호와를 찾으라고 합니다. 둘째, 스바냐는 공의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셋째, 스바냐는 겸손을 찾으라고 합니다.

 

첫째로, 여호와를 찾으라는 말은 잘못된 길에서 회개하고 돌아와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공의를 찾으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쩨데크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바탕이 된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면서 저 하늘의 별들처럼 자손을 번창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현재 자신에게 자식조차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하나님께 대한 그 신뢰를 말합니다. “라는 것은 이렇게 관계의 개념이지, 율법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의입니다. 그러한 의를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공의라는 말은 사회적인 정의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 때는 다른 낱말이 쓰이는데 그것이 미슈파트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좀 어려울 수도 있는데, 아모스의 말씀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아모스는 아모스서 5 24절에서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라고 외쳤습니다. 이 때 공법이 미슈파트이고, 정의가 쩨다카입니다. 공법(미슈파트)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억울한 자의 누명을 풀어주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라는 뜻입니다. 힘이 세다고 돈이 많다고 거기에 넘어가서 억울한 사람을 더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공의를 찾으라는 말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말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회복되지 않으면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진노에서 피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셋째로, 겸손을 찾으라고 합니다. 겸손은 오만(교만)의 반대말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인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하는 것이 오만(교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높이고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오만(교만)입니다. 이런 생각을 품은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오만(교만)하게 굽니다. “니까짓것 필요 없어! 내가 너 없이 못살 줄 알아? 꺼져!” 이러한 오만(교만)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더불어 서로를 높여주며 살아갈 줄 모르고, 자신이 무슨 왕이 된 것처럼 사람들에게 상처 주면서 사람들을 부리면서 삽니다. 재물이 많거나, 배운 것이 많은 사람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죄입니다. 그렇다고 가난하거나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이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진 것이 없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더 강팍해지고 교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많이 가졌나 적게 가졌나, 많이 배웠냐 덜 배웠냐가 아니라, 이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셔야 하는데, 나 자신으로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오만(교만)해집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스바냐의 예언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겁니다. 여호와의 날이 어떻게 임하게 될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지금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앞으로도 별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으시고 화도 내리지 않으신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마음 놓고 죄 짓지 마십시오. 그 날이, 여호와의 날이 가깝고도 심히 빠르게 옵니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고도 심히 빠르게 온다는 것을 깨닫고 준비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바로 그날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모여서 찬송 부르면서 기도하면서 밥해 먹으면서 스트레스 풀자고 이렇게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는 자에게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 됩니다. 여화와의 날을 준비하는 자는 이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 것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나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3:17).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를 찾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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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4. 12. 11:23

2011 4 10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37:1-6; 8:6-11; 11:39-44

제목: 마른 뼈가 되라!

 

오늘 우리가 읽은 세 개의 본문 말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어 있는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죽었다, 산다! 한 마디로,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사실, 잘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죽었다 살아난다는 것이 진짜 가능할까?’ 이런 의심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창세기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무에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요한계시록은 새로운 생명, 즉 새하늘과 새땅이 창조되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일컬어, “생명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숨쉬고 살고 있으면서도 생명, 즉 살아있다고 느끼기보다는 죽음, 즉 죽어 있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별별 행동을 다 합니다. 자신의 삶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일수록 주목 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을수록 주목 받고 싶어합니다. 납득할 수 없는 행동과 말을 통해서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 인간 세상이 지니고 있는 아픔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겔서를 보십시오. 얼마나 죽음이 가득 차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를 보여주셨습니다. 마른 뼈가 가득하다는 말은 죽음으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상황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환상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 있는 상황입니다. 마른 뼈는 그들의 삶이 절망 자체요, 죽음 자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이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 온통 죽음으로 가득 찬 이야기들 뿐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들었을 때 예루살렘 주민들은 배고픔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삶의 보금자리가 파괴되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절망 가운데서 적군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짐승처럼 남의 나라에 끌려왔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생명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온통 사방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마른 뼈의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죽어 누워 있는 것 밖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물론 에스겔이 본 마른 뼈 골짜기만큼 대량의 죽음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이 온 우주를 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른 벼 꼴짜기에서 발견하는 죽음이나 요한복음의 나사로의 죽음이나 그 본질은 똑같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뭉뚱그려서 표현 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 지진 쓰나미로 인해서 2만 여명이 죽었습니다만, 그건 쓰나미로 인해 2만 여 명이 죽은 한 사건이 아니라, 2만 여 가지의 사연을 가진 2만여 가지의 죽음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2차 대전 때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도 마찬가지 입니다. 6백만 명 정도가 학살되었다고 보고되고 있는데, 아우슈비츠라는 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6백만 가지의 죽음의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얼마나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건들입니까? 우리는 TV 매체나 역사교과서를 통해서 이러한 일들을 접해서 남의 일 같아 별로 신경 안 쓰고 살아가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숨이 콱 막히는 사건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 누구도 나사로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오셨다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지 않으셨고, 결국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 예수님의 탓은 아니지만 오빠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지 않은 예수님이 원망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이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죽지 않게는 할 수 있지만, 죽은 후에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혹시 살아나더라도 마지막 날에, 즉 부활의 때에 살아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지금 당장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거라는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후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방문해서 그들을 위로하며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의 입술에서는 엄청난 고백이 나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믿음의 고백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향해 엄청난 일을 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일입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4)이나 지나서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들의 진짜 모습입니다. 아무리 꾸미고 아무리 향수를 뿌려도 가려지지 않는 인간의 본래의 냄새입니다. 죽음의 냄새가 얼마나 지독합니까? 사는 동안도 그 죽음의 지독한 냄새를 펄펄 풍기면서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살고 있으니까 생명 냄새를 더 풍겨야 할 사람인데, 그렇지 못하고 살고 있는데도 죽음의 냄새를 더 풍기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생명보다 죽음과 더 가깝게 지냅니다. 참으로 비통한 인간 현실입니다. 나사로처럼 송장 냄새 펄펄 풍기면서 죽어 누워 있는 것 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에스겔이 본 마른 뼈 골짜기 환상이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보고 있는 현실이나 모두 죽음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그래서 에스겔도 절망하고 있고, 마르다와 마리아도 눈물에 젖어 있습니다. 이렇게 인생이 끝나는 것 같습니다. 이게 인생이라고 허무에 젖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까지가 믿는 이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이나 똑같이 보는 우리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 골짜기를 보여주시면서 단순히 이것을 보고 너희의 현재 상태를 좀 보아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상태는 이렇게 마른 뼈가 가득한 죽음의 상황이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런 마른 뼈까지도 생명을 입히실 수 있는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 말라는 희망을 전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마른 뼈 골짜기를 보여주시면서 질문하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이에 대해 에스겔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성경이 점잖게 기록하고 있어서 그렇지, 에스겔의 대답은 점잖은 대답이 아닙니다. 절망과 공포가 가득 한, 그리고 짜증이 가득 한 대답입니다. 한 마디로 볼멘 소리입니다. “제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은 천지창조 때 하시듯이 마른 뼈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무덤에 누워 있는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른 뼈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 겁니다. 그랬더니, 나사로가 죽음에서 일어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대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도대체 깨달아지거나 믿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마른 뼈에 살이 붙고 생기가 넣어져 살아나고,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 무덤에서 나오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막 일어납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이에 대해 우리는 너무 쉽게 긍정해 버립니다. 성경에서 그런가 보다 하니까 그렇다고 생각하고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믿음 있는 것 같지만, 믿음의 전혀 없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의 실제를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에 싸여 생명을 간구하는 능력이 상실됐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에 눈이 번쩍 뜨여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증언을 한 번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죽음의 일 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을 하는 자들은 그 너머에 있는 생명과 평안을 봅니다. 그러면 육신을 가지 우리가 어떻게 육신 너머에 있는 영의 일, 생명과 평안을 볼 수 있습니까?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안에 품을 때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즉 하나님의 영,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되고,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온통 생명을 보게 됩니다. 온통 생명의 일만 보는 우리의 삶 속에는 당연히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게 되겠죠.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삶의 상황이 마른 뼈 같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참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않고 생명을 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절호의 기회 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한 기회입니다. 우리는 그저 마른 뼈로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거기에 살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기에 생기를 불어 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그냥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어려우세요? 힘드세요? 죽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십시오. 그러면 생명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보입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생명을 보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생명을 보니까,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자처럼 생기가 넘치게 살아갑니다. 어깨를 좀 펴십시오.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살을 붙이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이 복음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십시오. 마른 뼈 같은 우리의 삶에 생명이 넘쳐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4. 5. 11:58

2011 4 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9:1-12, 5:8-14

제목: 보이면 안 그런다!

 

레슬링 선수와 소방수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소방수가 이깁니다. 왜요? 소방수는 물불 안 가리니까요! 그러면 소방수와 눈 먼 사람(장님)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눈 먼 사람(장님)이 이깁니다. 왜요? 보이는 게 없으니까요!

 

제가 설교 시간에 이러한 농담은 잘 안 하는데요. 단순히 웃겨드리려고 이 말씀 드린 건 아니고요. 우스갯소리 할 때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웃고 즐기지만 남의 신체적 장애를 빗대어서 하는 말은 늘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픈 부분을 가지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경각심을 좀 드리고자 일부러 이러한 농담을 택해 보았습니다. 농담할 때도 정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보지 못하는 자들보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고, 보는 자들은 빛으로 나아온 겁니다.

 

요한복음에는 두 부류의 대조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나면서부터 눈 먼 자이고, 다른 사람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눈 먼 자는 나면서부터 어둠 가운데 살았습니다. 눈 먼 것까지 힘겨운데,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살아야 했습니다. 눈멂은 이 사람에게 인생 전체에 새겨진 주홍글씨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이나 신체장애는 죄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신체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죄인이 되는 것이죠. 

 

종교는 이처럼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 곳곳에서 폭력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종교적 폭력이 가해지면 사람들은 저항하지 못합니다. 이 사람도 저항하지 못하고, 평생 자기 자신을 죄인 취급하면서 낮고 낮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길 가시던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이 사람을 돌아보셨습니다. 함께 가던 제자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종교적 관습에 젖어 있었습니다. 맹인으로 난 것은 본인이든 부모이든, 누구든지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 저렇게 맹인으로 난 것은 그 누구의 죄도 아니다! 저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위대한 일을 보아라!” 예수님은 질병이 죄의 결과라는 그 당시의 통념을 뒤집으셨습니다. 물론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경우도 있지만, 모든 것을 그렇게 몰아 넣는 것은 불합리한 종교적 폭력에 불과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혹시 질병에 걸렸거나 자기 신변에 우환이 생기면 우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싸인인가?’ 그런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죄책감에 싸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좀 잘못된 것이 있다 싶으면, 하나님께 나아와 자비와 긍휼을 구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죄의 깊이보다, 우리의 죽음의 깊이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는 말할 수 없이 깊습니다.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고,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아주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맹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일컬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전해주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빛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건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갑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의 눈 뜸을 의심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부모까지 불러다가 확인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바리새인은 그 사람의 눈 뜸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눈 뜸에 대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습니다. 보십시오. 맹인은 계속해서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바리새인들에게 진술합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바리새인들은 질문합니다. “그 사람(예수)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답답한 맹인은 이렇게 합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 말에 격분해서 바리새인들은 눈 뜬 그 사람에게 욕을 하면서 말합니다.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랬더니, 눈 뜬 사람이 한탄하면서 말합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러면서 눈 뜬 사람은 그 사람,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으면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다가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납니다.

 

이 일을 듣고 예수님은 그 눈 뜬 사람을 만나 위로해주십니다. 그를 당신의 제자 삼으시고,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예수를 알아보았고, 눈을 뜨고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보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까? 이렇게 다시 질문해 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 우리가 말로는 예수님이 보인다 안 보인다 어느 쪽이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이 장성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사람은 맹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몸에 익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게 몸에 익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이 눈을 뜨면, 마냥 좋기만 할까요? 제가 지금 눈 뜨지 말고 그냥 맹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떠야죠, 병이 나아야죠.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눈을 뜨고 병이 낳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가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보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이제 우리도 빛 가운데서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입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눈을 떴는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빛의 자녀로 살지 못할 거면 오히려 눈을 그냥 감고 사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필연적으로 빛의 자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이는데, 어떻게 안 그럽니까?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맹인이 눈을 뜬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와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하고 병든 것들을 고쳐주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지긋지긋한 질병도 좀 나았으면 좋겠고, 지긋지긋한 경제적 어려움에서도 좀 벗어났으면 좋겠고, 예수님의 은혜로 남편, 부인, 자녀 등 가족이 모두 잘 되었으면 좋겠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보기 원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 욕심을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맹인처럼 행동합니다. 어둠에 휩싸여서 어두운 일을 합니다.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일들을 서슴없이 합니다. 왜요? 맹인이니까, 예수님이 안 보이니까 그렇게 삽니다. 마음이 어둡고 행동이 어둡습니다. 남을 헤칠 생각만 하고, 남을 헐뜯을 생각만 하고, 남을 미워할 생각만 하고,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울 생각만 합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낼 생각만 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킬 생각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이면, 안 그럽니다. 예수님이 보이는데 어떻게 그럽니까? 내 눈 앞에 보이는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는데, 어두운 마음이 들고 어두운 행동을 할 겨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이면 안 그럽니다. 예수님이 보이면, 에베소서 5 9절 말씀처럼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형제와 자매를 어떻게 도와줄까 만 생각하고, 형제 자매의 허물을 어떻게 덮어줄까 만 생각하고, 형제 자매를 어떻게 용서할까를 생각하고,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하면서 자기 자신을 감출 줄 알고,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할 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내가 지금 예수님을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세상을 보고 있는 건지.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면 답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보이며 안 그럽니다. 어둠의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보고 있는데, 예수님이 보이면 빛 가운데 거해서, 빛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진리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그러면 빛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빛의 열매를 맺으려 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빛의 열매가 삶 속에서 맺히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비추이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설교를 음성으로 듣고 싶으시면 교회 홈페이지를 방문해 주십시오.
columbus.onmam.com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4. 2. 03:42

2011 3 31일 목요찬양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53: 1-12

제목: 구원은 왜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오는가?

 

신앙생활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살면서 이 질문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구원은 왜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오는가?” 무조건 믿는 신앙을 맹신이라고 하는데,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맹신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수많은 질문들을 불러일으킵니다. 모든 질문에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믿음의 조건에는 질문들이 넘쳐나야 합니다.

 

오늘 질문에는 세 개의 키워드가 있습니다. “구원, 그리스도, 그리고 고난입니다. 각각의 키워드가 너무도 큰 주제라서 우리의 일생을 다 바쳐도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교만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질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일어나는데,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일생을 바쳐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아니라서 질문에 답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찾아내기에는 우리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만큼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숨쉬고 사는 것이 기적이고 은혜입니다. 이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는데도, 그것을 온전히 파악할 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깎아 내려서 인간 존재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가 어떤지를 온전히 파악해야만 정확하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간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온전한 삶을 일구어 나갈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아는 사람은 그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자기를 못 본다는 것이죠. 그래서 김연아 같은 피겨스케이팅의 1인자도 자기 자신을 살펴줄 코치가 필요한 겁니다. 코치의 말을 잘 따라서 자신의 문제점을 보안해 나갈 때 더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것이죠. 여기서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이 갈립니다. 교만은 마음이 완악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눈과 귀를 닫는 것이고, 겸손은 마음이 부드러워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서 눈과 귀를 열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못 견뎌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분노가 표출되고 증오가 표출됩니다. 결국 그 마음이 실제적인 죄를 낳게 만드는 것이죠.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고 삽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는 것을 내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변화와 새로움 속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킵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 그리스도, 고난의 신비를 다 알고 있는 듯이 신앙생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구원, 그리스도, 고난은 하나님과 관련된 신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종말에 스스로 드러내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절대로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3 12절에서 이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오늘은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고난이라는 주제에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는 이들도 당연하게 고난 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은 꼭 고난을 당해야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고난 없이 우리이게 구원을 베푸실 수는 없는 건가요?

 

사디스트’, 그리고 메조키스트라는 말을 알고 계시는지요? 정신병적 증상을 일컫는 전문 용어입니다. ‘사디스트는 상대방에게 가학적인 행동을 할 때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메조키스트는 사디스트와는 반대로 가학적인 행동을 당할 때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용어를 빌어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평가해 보면, 메조키스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학적인 행동, 즉 고난을 당할 때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견디어 낼 때 오히려 믿음이 큰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하게 기억하십시오. ‘고난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정신병적인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고난은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 당해야만 무슨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만약 고난이 정당한 것이고 필수적인 것이라면,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겠습니까? 그런 것 묻지 않고, 그냥 고난의 길로 곧바로 가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겁니까? 이건 죄와 연결이 됩니다. 오늘 말씀 중 5절 말씀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이것도 조심해서 알아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을 말하는 것은 우리를 죄인 만들어서 우리를 죄책감에로 밀어 넣기 위함이 아닙니다. 죄책감을 지게 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도 기독교 신앙을 심리학적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나쁜 짓입니다. ‘허물과 죄는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실상을 드러내는 신학적인 용어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허물과 죄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 상태를 일컬어 4절 말씀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질고는 질병을 의미합니다. 슬픔은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오는 아픔을 말합니다. 질병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현대 의학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하지만, 사실 감기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의학은 허술합니다. 그냥 조금 생명을 연장시키거나 약간 완화시켜 줄 뿐이지 우리 인간에게 문득 찾아오는 질병의 늪을 완전히 제거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 상황입니다. 슬픔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 많은 슬픔을 당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복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자식을 잃었을 때, 또는 부모님을 잃었을 때 우리는 슬픔에 잠깁니다. ? 우리의 힘으로 자식을, 부모님을 되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슬픔에 잠기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 상황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러한 우리의 한계 상황인, 질고(질병)와 슬픔을 대신 지신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 상황을 대신 지시고 그 한계 상황을 넘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이 죄 된 세상은 서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승하던지, 이 죄 된 세상이 승하던지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고난 당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성육신 신학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죄 많은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런 불가능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불가능 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말씀은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십시오. 2절 말씀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이 땅의 기준에 맞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당장 한국에서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과 미국에서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타락한 마음이 어떻게 우리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하나님 나라에서 온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도는 3절 말씀처럼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귀하게 여김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이 죄 된 세상이 그리스도를 고난으로 몰아넣었다는 뜻입니다. 고난이 필수여서 그리스도가 고난 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이 우리의 죄악이 그리스도를 고난 당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이 나빠서,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면이 있다는 것이죠.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 발생한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긍휼히 여기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허물과 죄악을 담당시키셔서 그것을 지고 십자가에 오르게 하시고, 거기에서 허물과 죄악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생명, 부활을 주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약간 고난의 신비가 손에 잡히시는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메조키스트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심리학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도 마시고, 죄책감에 휩싸이지도 마십시오. 고난에 저항하시고, 죄책감에 저항하십시오.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지, 고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부활의 몸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몸을 입은 거룩한 백성이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죄인처럼 비굴하게 살지 말고, 의인으로 당당하게 사십시오.

 

심리적인 수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가장 큰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구원이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보다도 더 비참하게 죽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고난의 신비를 심리적인 차원으로 떨어뜨리지 마십시오. 고난의 신비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을 넘어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말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말 할 수 없는 그 은혜에 잠겨 기뻐하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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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3. 28. 14:02

2011 3 27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7:1-7, 4:5-7; 10-15

제목: 마시자! 생명의 물!

 

설교 제목을 보면 연상되는 게 있으시죠? 마시자! 코카콜라! 제가 보기에는 코카콜라 회사에서 성경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그 문구를 생각해 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말씀은 모두 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의 말씀은 므리바 물사건이라고 불리는 것이고, 요한복음은 우물가의 여인이라는 소제목들이 붙어 있는 말씀입니다.

 

물 때문에 고생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마도 한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들은 물 때문에 고생한 기억이 거의 없을 겁니다. 한국은 물과 산 좋기로 유명한 곳이고, 미국은 모든 자원이 넘쳐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전 세계가 물 부족 현상 때문에 깨끗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비상이 걸린 상태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물을 깨끗한 물을 확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에 비해서 1인당 12배 정도의 물을 더 쓴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1인당 하루에 5갤런 정도의 물을 쓴다고 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1인당 하루에 60갤런 이상을 쓴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샤워하는데만 5갤런 이상을 쓴다고 합니다. 유럽에 가면 식당에서 물을 주지 않습니다. 저도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좀 황당했습니다. 스위스에서 밥 먹으러 들어갔는데 물을 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물을 좀 달라고 했더니, 돈을 내야 하고 물보다 오히려 탄산 음료가 더 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조그만 사이다 하나 시켜서 집사람하고 홀짝홀짝 나눠 먹은 적이 있습니다. 화장실도 돈 내고 들어가야 합니다. 물이 귀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들입니다.

 

한국이나 미국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물이 풍부한 곳에서 사는 우리들은 오늘 광야에서 일어난 므리바 물 사건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물이 없어 불평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믿음 없는 사람들”, 이라며 정죄하기 십상입니다.

 

물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40일 금식기도 같은 거 할 때도 물은 꼭 먹어야 합니다. 물을 먹지 못하면 며칠 못 버팁니다. 탈진해서 죽습니다. 그러니까 신 광야,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늘어놓은 불평은 믿음의 문제라기 보다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살기 위한 부르짖음입니다. 살만하면 부르짖지 않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위협 앞에서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므리바 물 사건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믿음을 너무 관념적으로, 우리의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따로, 삶 따로?

 

믿음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닙니다. 믿음은 여가생활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존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문제입니다. 믿음이 힘을 발휘할 때는 먹고 살만한 때가 아니라, 이렇게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입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불평한 것은 믿음의 행위는 아니었습니다만,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초능력 같은 믿음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위협을 별로 받고 살지 않습니다. 생명이 실로 위험한데도 그것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명에 대한 낙관주의에 빠져 있다고 말해야 할까요?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연약하고 위태로운지를 가슴 속 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을 찾는 행위가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연약하고 위태로운지, 가슴 속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니 이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믿음의 행위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몇 번 우스갯소리로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교회 오면서 아무 일 없이 온 분이 감사헌금을 더 많이 해야 할까요? 아니면 오다가 차 사고 나서 죽을 뻔 했는데 아무 일 없이, 떨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오신 분이 감사 헌금을 더 많이 해야 할까요? 우리는 흔히 죽을 뻔한 경험을 한 경우 감사합니다는 고백과 함께 감사헌금을 더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죽을 뻔한 경험을 한 것이 더 감사한 겁니까? 아닙니다. 교회 오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교회 온 것이 더 감사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생명의 위협을 못 느끼니까, 감사가 나오지 않을 뿐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생명에 무딥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담소를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도 대화의 매개가 물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 대단한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주석이 잘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성경연구가 좀 덜 된 목사님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있는 남편도 자기의 남편이 아니라는 구절 때문에, 이 여인은 간음한 여인, 부도덕한 여인으로 낙인 찍혔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정한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 만나고 구원 받았다고 하는 메시지로 이 이야기가 전해져 왔습니다.

 

그건 이스라엘의 풍습을 몰라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이스라엘에는 계대결혼풍습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결혼했는데 남편이 죽으면 그 여인은 죽은 남편의 동생의 아내가 되는 법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서 했던 질문이 바로 이겁니다. ‘한 여인이 계대결혼풍습 때문에 7곱 형제 모두의 아내로 이 땅에서 살다가 죽었는데, 그러면 하늘에서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로 살게 됩니까?’ 이런 질문을 해서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려고 했었죠. 이 여인도 그런 풍습에 의해서 6명의 남편을 두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요즘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우리는 남을 정죄하고 뒷얘기 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도 그런 식으로 읽을 때가 많습니다. 조심해야 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살인하는 이야기, 간음하는 이야기 등, 성경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 것을 읽을 때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에 대한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 읽으면, 성경은 온갖 부도적하고 폭력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이상한 책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거에 걸려 넘어지는 분들도 많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느냐는 둥, 성경이 왜 이렇게 부도덕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느냐는 둥 말이죠.

 

우물가의 여인에 대한 선입견을 혹시 가지셨다면 오늘 이 시간 정정하십시오. 우물가의 여인은 부도덕한 여인이 아니라, 그냥 목말라서 물을 길러 온 여인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물가에서 물을 소재로 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목마름을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과 기가막히게 연결시킵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육적인 목마름 때문에 물을 길러 온 것이지만, 그 여인의 마음 속에는 메시아,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목마름을 채워주는 우물의 물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죠. 그가 바로 생명의 물이라는 겁니다.

 

물이 없어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물을 먹으면 갈증이 풀려 살아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또 목마릅니다. 그러면 또 불평하게 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그것을 되풀이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거나, 물이 없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어김 없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불만을 쏟아 놓고,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말씀은 이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한 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를 일이 없기 때문에 불평 불만이 생겨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순절기를 보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목마를 때 물을 간절하게 찾는 그 간절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배고픈 나의 배와 목마른 나의 목을 축이는데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당연합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를 채우고, 목을 축여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배가 고프고 다시 목이 마릅니다.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만족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불평과 불만에 휩싸이게 됩니다. 더 좋은 것을 먹고 마시기 원하게 됩니다. 그것이 충족되면 기분이 좋았다가도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색이 변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생겨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목마름이 다시 오지 않는 생명의 물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물이라고 하는 것을 매개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생수를 네게 주겠다고 했을 때, 그 여인은 물어봅니다.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니까?” 이렇게 해서 길어지는 것이 생명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로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물인 것이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므리바 물 사건에서도, 광야에서의 목마름을 채워준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육신을 지닌 우리들이 어떻게 영과 진리로 예배합니까? 이 말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우리는 예배 조차도 드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마르십니까? 배고프십니까? 무엇에 대해서 목마르시고 배가 고프십니까?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좀 채워달라고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십니까? , 간절히 바라면 하나님께서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 주실 겁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은 채워지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또 제자리로 갑니다. 끊임없는 불평 불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매개로 해서, 진짜로 우리에게 주고 싶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기 원하신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우리를 다시는 목마르거나 배고프게 하지 않는 생명의 물,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생명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고 나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차원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불평 불만 속에서 육신의 목마름을 위해서 살던 우리가, 만족함 가운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믿음의 자녀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목마름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잘 못합니다. 육신의 목마름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하는데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육신의 목마름을 채우려 합니다. 이건 열심이 아니라, 불신입니다.

 

생명의 빵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나면, 다시는 배고프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차원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불평 불만 속에서 육신의 배고픔을 위해서 살던 우리가, 만족함 가운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믿음의 자녀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배고픔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잘 못합니다. 육신의 배고픔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하는데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육신의 배고픔을 채우려 합니다. 이건 열심이 아니라, 불신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이런 질문이 생기실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물과 빵을 먹고 마실 수 있는가?” 그러면 제가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까? “여러분은 언제 물을 마시고 빵()을 드십니까?” , 목마르고 배고플 때 마시고 먹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마르고 배고프면 생명의 물이고 빵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고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언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마르고 배고픈 적이 있었습니까? 육신의 목마름 때문에, 육신의 배고픔 때문에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하나님께 매달려 본 적은 많은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마르고 배고픈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요? 간구하십시오. 이 사순절기 동안,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마르고 배고프게 해달라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생명의 물이고 빵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십시오. 그분을 만나면 여자가 물동이를 놓아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던 것처럼, 삶 속에 참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만족함이 넘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힘으로 살아갑니다. 생명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심으로, 그리고 생명의 빵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인해 솟아난 기쁨과 힘으로 살아가는 자는 복된 인생입니다. 만족하는 삶을 삽니다.

 

무슨 힘으로 살아가십니까?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가십니까? 그래서 삶이 고단하시고 피곤하십니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거기에 참된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새 힘과 새 소망이 넘쳐날 것입니다. 만족함이 넘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3. 21. 07:35

2011 3 20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3:1-4, 4:1-5

제목: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평생을 이야기해도 다 이야기하지 못할,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교만과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부터 먼저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불안합니다. 진리가 아니라서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신비라서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확실해서 불안합니다. 그리고 이 확실함이 오직 한 사람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걸려 넘어집니다.

 

성경에 보면, 오늘 제목에 나오는 거듭남이라는 말도 나오고, 의라는 말도 나오고, 구원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성경은 온통 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듭남, , 그리고 구원은 모두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로 구원의 여러 다른 낱말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거듭남이란 무엇인가구원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겁니다.

 

그런데 이 구원이라는 것도 그 실체를 우리가 잘 알지 못합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안다고 떠벌리는 자들은 구원이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구원은 완성품이 아니라, 되어져 가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창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실체를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 구원이라는 것도, 한 사람의 운명에 걸려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니까 좀 답답하신가요? 구원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정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속 시원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 그 누구도 구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구원을 완전하게 담지하고 있는 분에게로 이끌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이 무엇인지 아시고, 그 분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모든 삶을 거는 겁니다.

 

영국이나 일본에 가보신 적이 있는지요? 그 나라에 가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자동차가 달리는 방향입니다. 한국이나 미국 등 대부분의 나라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자동차들이 달립니다. 우리는 운전석이 왼쪽에 있지만, 그들은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왼쪽에 앉아 오른편 도로를 달리지만, 그들은 오른쪽에 앉아 왼편 도로를 달립니다. 헷갈리시죠? 우리처럼 왼쪽에 앉아서 오른쪽 도로를 달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 영국이나 일본에 가서 운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횡단보도 건너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왼쪽을 먼저 바라보도록 훈련받습니다. 그런 상태로 영국이나 일본에 가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는 차에 치어 사고 당하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영국이나 일본에서는 왼쪽에서 차가 달려오지 않고, 오른쪽에서 달려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국이나 일본에서는 외국인 관광객 중에 그러한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이나 일본에 가면 횡단보도 바닥에 어김없이 이런 글자가 써 있습니다. “Look right, 오른쪽을 보시오.”

 

바울이 쓴 로마서의 수신자들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로마의 제사법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율법에 물든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횡단보도 건너는 습관과 똑 같은 것이지요. 도로는 건널 때 왼쪽을 바라보도록 어려서부터 훈련 받은 사람들이 도로를 건너면서 오른쪽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을 들어 구원의 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여겨진 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하고 있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의로워져야 구원 받습니다. 의가 곧 구원입니다. 이게 곧 거듭남입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질문 드리겠습니까? 의로워지기 위해서, 거듭나기 위해서, 구원 받기 위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그 무엇이 우리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면 그것으로 의로워진다고 생각했고, 그들은 스스로 구원받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자기 의를 통해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구원이란 자기 몫이 됩니다.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임금이 되는 것이죠. 자기가 받을 몫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랑스러워 합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게 신앙생활 합니다. 제가 이렇게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주일 예배 나오면 구원 받나요? 십일조 생활 잘 하면 구원 받나요? 아침에 졸린 눈 비비면서 어려운 가운데 아침 기도회 꼬박꼬박 잘 나오면 그것으로 우리가 구원 받나요? 그것이 의로운 행동인가요? 이런 거 잘 하는 사람은 괜히 신앙이 좋아 보이고 의로워 보이고 위대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거 잘 못하는 사람들은 괜히 신앙이 없어 보이고 스스로 자격지심을 갖습니다. 이런 거 잘 하는 사람은 이런 거 잘 못하는 사람을 얕잡아 보고 정죄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런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백보나 오십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라는 거죠.

 

지금 제가, 예배 생활, 그리고 십일조 생활 잘 하시는 분들을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스스로를 구원 받은 백성이라고 스스로 의로운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유대인들처럼 율법에 얽매여 율법으로 의롭게 되어 자기 의로 구원 받으려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구원이 그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너무 거기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이 말을 듣고, 예배를 소홀히 해도 되는구나, 십일조 생활 안 해도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아직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의로움은 우리의 거듭남은 그런데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이게 무엇인지 알아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은 니고데모라는 유명한 율법학자가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하여야 거듭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은 것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똑 같은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물과 성령으로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바로 이 뜻입니다. 구원이란, 거듭남이란,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행위 때문에, 즉 아브라함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5절의 말씀처럼 일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임금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포도원에 일찍 와서 장시간 일 한 일꾼이나, 일이 끝나가기 한 시간 전에 와서 일한 일꾼이나 똑 같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이게 바로 임금(구원)은 일한 일꾼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구원)을 주는 주인(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은 인간이 어떻게 타락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반역하고 폭력과 죄 가운데 살게 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1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당신에게 반역하고 폭력과 죄 가운데 있는 당신의 피조물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자손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복을 내리시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복이란 출생능력, 생명, 성공, 행복, 그리고 명성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상태를 봐서는 이것이 사실 불가능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곳 가나안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땅을 얻습니까? 세상은 이방인에게 늘 차갑습니다. 우리 미국 이민자들도 미국에 와서 우리의 소유를 얻기 위해 얼마나 피땀 흘려 일 해야 했습니까? 옛날엔 더 했습니다.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는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생식능력을 상실한 나이에 도달했습니다. 생리적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자손을 번창시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는데, 이제 늙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복을 내려주셔 봐야 남겨줄 자손도 없는 마당에요.

 

하나님은 이런 상태에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흑암과 같은 상태에 있었던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셨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와 같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복주셨듯이,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과 자손, 그리고 복을 내리셔서 그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온 세상에 미치도록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당신의 피조물을 향한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내려주시고, 의를 베풀어 주시고, 거듭남의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죄 많은 우리에게 나의 사랑을 받아 줄래라고 묻지 않으시고, 먼저 찾아오셔서 당신의 사랑을 폭포수처럼 부어 주십시오. 그 사랑이 바로 저 십자가에 걸려 있습니다. 저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와서 그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거듭남이란 바로 그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바로 그 사랑을 힘입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그 사랑에 온 존재를 다해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결과가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예배로, 우리의 헌신으로, 우리의 찬송으로, 우리의 기도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에게 복을 내리셨을 때, 아브라함 혼자 그 복을 누리라고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내리신 복은 아브라함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그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내려가는 복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받은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은 자에게만 내려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은 자와 연관된 모든 피조물들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할 때 옵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고. 구원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오히려 거기에 걸려 넘어지게 될 겁니다. 그냥 십자가만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서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믿음으로 받으십시오. 그 은혜로 신앙생활 하십시오. 그래야 십자가에서 받은 사랑을 우리의 이웃에게 아낌 없이 흘려 보낼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해서 임금으로 받은 구원은 아까워서 남에게 나눠주지 못합니다. 더 지키고 더 자랑하려고만 들죠. 그러나,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주어진 은혜는 아낌 없이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조차도 욕심부리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온전히 깨달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사랑을 아낌 없이 나누어 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거듭남이, 우리의 의가, 우리의 구원이 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분에게만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폭포수처럼 여러분의 삶 가운데 쏟아질 줄로 믿습니다. 그 은혜로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설교를 음성으로 듣고 싶으시면 아래 사이트를 방문해 주세요!
columbus.onmam.com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3. 14. 14:03

2011 3 1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15-17; 3:1-7

제목: 예스, , 예스

 

지난 수요일, 참회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우리는 사순절에 들어섰습니다. 사순절은 40일을 의미합니다. 참회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주일은 빼고 40일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영적 훈련의 기간입니다.

 

부활절은 어떻게 정해지는지 아십니까? 춘분이 지나 오는 보름달 후 첫 번째 주일이 부활절 입니다. 춘분은 대개 3 21일쯤 됩니다. 그 후 보름달이 얼마나 빨리 뜨느냐에 따라서 부활절이 빨리 오느냐 좀 늦게 오느냐 결정되는 것이죠. 올해 같은 경우는 춘분인 3 21일을 지나, 보름달이 뜨는 날이 4 17일이기 때문에, 보름달이 뜬 그 날 이후 첫 번째로 맞는 주일이 4 24일이기 때문에 부활절이 4 24일로 정해진 것이죠. 이 법칙만 알면 매년 부활절이 언제인지 스스로 계산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참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서 광야에서 보낸 시간이 40년이고,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셔서 금식하시며 하나님을 만난 기간이 40일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마귀의 유혹이 왔습니다. 교회가 40일을 정해 사순절로 지키는 이유는 예수님의 40일 간의 영적 훈련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는 인류 최초의 유혹이 들어있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고,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시는 부분을 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창세기의 말씀만 읽었고, 복음서의 말씀은 대부분의 분들이 너무 잘 아시는 이야기라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창세기의 말씀과 복음서의 말씀이 엮여 선포될 것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복 주신 후 어떻게 우리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죄는 미스터리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떻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왜 죄가 당신의 창조세계에 들어오게 놓아두셨는지, 등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창세기가 이런 것들에게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약간의 이해를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창세기는 우리에게 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들어온 것은 미스터리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미스터리는 신비인데, 이는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체가 아직 파악되지 않았고, 파악되어 가는 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비는 종말론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종말에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생명의 신비도 드러날 것이고, 죄의 신비도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현재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무시하거나 등한히 할 것이 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그것에 대한 실체를 알아가도록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이야기와 복음서의 이야기는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결론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정황은 이렇습니다. 우선 창세기에서 보면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를 꼬드겨서 하나님을 거역하게 합니다. 뭔가 솔깃한 것을 인간에게 던져주어서 그것을 덥석 물게끔 합니다. 그런데 사탄이가 제시하는 솔깃한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대항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매력적인 것이죠.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는 일이었습니다. 뱀의 형상을 한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말하며 꼬드깁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유혹은 바로 하나님처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은 바로 이 마음 때문에 생겨나는 겁니다. 피조물로 살기보다 인간은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삽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생각조차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잘못 설정하는 겁니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는 분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건 우리 인간의 타락한 마음이 만들어내는 잘못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복된 인간입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통해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벗어난, 이탈한 그야말로 추악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복 가운데서 사는 복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피조물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도 차버리고, 하나님의 영역 밖으로 빠져 나가서 살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인생이 고달프고 죄 가운데 어그러지는 것이죠.

 

오늘 설교 제목이 예스, , 예스인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긍정하는 것이 첫 번째 예스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복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무한한 복을 내리셔서 복되게 하신 존재입니다. 이게 바로 예스입니다. 이 복을 무한히 받으면서 사는 인간이 첫 번째 예스에 해당하는 인간입니다.

 

, 그런데 미스터리하게도 예스가운데 살아가던 인간에게 시험이 옵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 가운데서 만족하며 살아야 할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는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이런 상황입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가 시장에 가서 거위 한 마리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다음날 거위가 낳은 알을 가져다가 요리 해 먹으려고 거위 집에 갔는데, 가서 보니 거위가 낳은 알이 그냥 알이 아니라 황금알이었습니다. 너무도 신이 농부는 아내를 불러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거위는 하루에 한 개씩 매일 아침 황금알을 낳았습니다. 그 덕분에 농부 부부는 점차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부 부부는 서로 말하기를, 하루에 한 개씩만 황금알을 낳으니까 감질 난다는 겁니다. 한꺼번에 많은 황금을 손에 넣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생각하기를 거위의 배를 가르면 거기에는 수 많은 황금이 들어 있을 거고, 그것을 차지하면 감질나게 하루에 한 개씩 황금알을 가질 필요 없이 한 번에 엄청난 부자가 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농부 부부는 칼을 가져다가 거위의 배를 가릅니다. 물론 거위는 죽었죠. 그러나 거위의 배를 들여다 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거위도 잃고, 황금도 못 찾고, 아무런 이득도 없이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만 마음을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예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은혜가 족합니다. 한 눈 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한 눈 팔게 하는 유혹들이 엄청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이 타락의 순간이고 죄악에 빠지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유혹이 만만치 않습니다. 너무 매력적인 것들입니다. 우리의 욕망을 모두 채워줄 수 있는 것 같은 것들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온 유혹도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된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께 제시된 사탄의 유혹도 매우 매력적입니다. 1.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2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천사들이 네가 땅에 닿기도 전에 너를 받들어 줄 것이다. 3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 이게 다 뭡니까? 하나님처럼 되라고 하는 유혹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겁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우쭐해지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의존해서, 그것으로 만족해서 산다는 뜻이지, 하나님처럼 스스로 복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유혹 받습니다. 스스로 대단한 존재가 된 양 행동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 믿으니까 그 어떤 물리적 법칙이나 자연 법칙이 자신을 비켜 간다고 생각하고 안일하게 대처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큰 코 다칩니다. 나한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예수 믿는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하면서 오히려 시험에 듭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인간이 되는 법, 그리고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광야에서 시험 당하시는 것과 똑 같은 시험이 왔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남은 구원하면서 자신은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고 하는 비아냥거림이 들려왔습니다. 우리 상식에서도 십자가에서 핵폭발과 같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사건, 그리고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어가던 예수를 바라보면서 조롱하던 사람들이 알아듣고 볼 수 있도록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났으면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더 잘 믿었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십자가에서는 그 어떤 신적인 힘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한 인간의 무력한 죽음만이 십자가에 걸려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신 것입니까?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겁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만족하는 법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러한 모습은 분명 사탄이에게 가 됩니다. 사탄이에게 눈을 돌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 모습 자체가 하사탄이에게 가 되는 것이죠. 그래야, 처음 우리에게 내려졌던 복, 하나님께 향했던 예스가 우리의 삶 속에 지속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바로 이것을 훈련하는 기간입니다. 태초부터 우리에게 내려진 복은 끝까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복을 차버리게 끔 만드는 사탄의 유혹, 죄악이 끊임 없이 우리에게 몰려듭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더욱더 힘차게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그 유혹에 대해서 를 외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 예스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사순절기 동안 예수님처럼 우리도 광야에서 영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순절기의 영적인 훈련이 우리를 부활의 기쁨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사탄이에게 예스하면 하나님께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스하면 사탄이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예스, , 예스의 인생을 사십시오. “예스, 예스, 의 인생은 버리십시오. 끝까지, 어떤 유혹의 상황, 시련의 상황에서도 하나님 붙들어서 예스, , 예스의 복된 인생을 사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3. 6. 23:02

2011 3 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17:1-9

제목: 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에서 살라!

 

예수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신인가? 예수라는 이름은 지난 2천 년 동안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수많은 질문거리를 주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단하게,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2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갈릴리지역에서 주로 활동을 했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라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믿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끊임없이 예수는 누구인가?”를 질문해왔습니다. 기독교회가 내린 최고의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는 참 사람이고, 참 하나님이다. Vere Homo, Vere Deus. 이 말은 50%는 인간이고, 50%는 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물들 중에는 그런 존재가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 말은 100% 인간, 100% 신이라는 뜻입니다. AD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확정된 교리입니다. 이후로,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모두 이단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각각 성탄절기와 주현절기를 통해서 선포해왔습니다. 우리는 별로 생각 없이 성탄절기와 주현절기를 보내지만, 사실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교회력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즉 참 사람됨을 증거합니다. 어떻게 증명합니까? 예수는 여느 사람들처럼 여자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여기에 물론 신성을 증명하는 요소가 가미됩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긴 태어나는데,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동정녀탄생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인성이 성탄절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제 예수의 신성이 주현절기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주현절기는 동방박사의 이야기와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세례식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리고 오늘, 주현절기가 끝나면서 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또 듣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해서 주현절기는 이 음성을 듣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 음성을 듣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신성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예수의 신성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오늘, 산상변모사건을 전해주고 있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의 하나님 됨을 깊이 묵상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저자의 진술에 의하면, 오늘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수난 예고를 하신 뒤 엿새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이 장면은 분명히 구약의 두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르는 장면과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처럼 시내산에 오르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 즉 율법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도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고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예수께서 높은 산에 올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전해진 하나님의 의와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예언이 바로 예수에게서 성취될 거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곳에 갔던 세 제자는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희한한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형되는 장면입니다.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리고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제자들의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신적인 영광을 체험하고 모두 두려워 떨었습니다. 모세도 그랬고, 에스겔도 그랬고, 다니엘도 그랬고, 신적인 영광을 체험하고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베드로는 횡설수설하면서 예수님께 제언을 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우리도 중요한 장면,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은 비디오나 사진으로 담아두려고 합니다. 옛날에는 그러한 장치들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풍습에는 그것을 저장하는 장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절기입니다. 일례로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을 우리가 비디오나 사진에 담아두는 것처럼 담아둡니다.

 

이스라엘에는 장막절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들은 이 절기를 통해서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생활 한 것을 기념했습니다. 광야에서 텐트를 치며 생활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죠. 광야생활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위대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기간이었죠.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께 초막을 셋 지어서 여기에 있자고 하는 것은 바로 장막절에 지었던 그 텐트를 의미합니다. 유대인의 절기중, 이 장막절(초막절)이 가장 큰 절기였는데, 이것을 통해서 베드로는 변모사건을 기념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주님, 기념 사진 하나 찍어 놓죠!” 정도가 될 겁니다.

 

이런 가운데 놀라운 일이 연속하여 벌어집니다. 갑자기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구름은 신적표상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는 구름이 몰려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임했다는 뜻입니다. 구름 속에서,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라고 하십니다.

 

이 장면이 굉장히,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말로만 듣던 모세와 엘리야를 여기에서 보다니! 우리도 말로만 듣거나 TV에서만 보던 인물을 직접 보았을 때 얼마나 신기하고 흥분됩니까? 게다가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절대적인 인물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있는 예수님을 일컬어 속된 말로 땡잡았다!”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가 진짜 땡 잡은 겁니까?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있는 예수님이 땡 잡은 겁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땡 잡은 겁니까? 지금이야 우리는 모세와 엘리야가 땡 잡은 것이라는 걸 알지만, 이 사건이 일어날 때만해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땡 잡은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 아직까지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실히 그리고 온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사라졌습니다. 엘리야도 사라졌습니다. 그들 눈 앞에 여전히 서 계신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고,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일으켜 세워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신 것은 부활을 연상시킵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 부활 사건이 바로 구원 사건입니다. 그것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에게도 변모사건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빛에서 보지 않으면, 변모 사건도 그 빛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있은 뒤, 베드로가 어떻게 이 변모사건을 증거하고 다녔는지, 그리고 이 변모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는 베드로후서 1 16절 이하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그들은 분명히 이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음성이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 드리며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들려야 합니다. 이 음성을 들은 여러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들려진 이 음성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과 똑같이 들은 분은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예수를 메시야로, 예수를 구원자로, 예수를 주님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이 음성이 안 들리는 분들은 여전히 예수가 누구인지 몰라 불신앙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겁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사실,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내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백합니다. 성찬을 통해서 눈에 보이게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찬식 때 단순히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습니다. 내 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요, 내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고백입니다. 내 살과 내 피가, 내 살이 아니고 내 피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살이고 그리스도의 피인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부활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변모사건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은 이제 내 몸과 내 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로 삽니다. 오늘 말씀 제목처럼 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겁니다. 그게 나에게 의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이제 이번 주 수요일에 있는 참회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기가 시작됩니다
. 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시간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간을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 눈 앞에 다가온 사순절을 진지하게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절기, 그 시간을 진지하게 지키십시오. 그것이 바로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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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2. 28. 23:41

2011 2 27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49:8-16a; 마태복음 6:24-34

제목: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생

 

여러분, 앞으로 몇 년 더 사실 것 같습니까? 유엔이 2008년도에 발표한 세계인구현황 보고서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평균수명은 남자 75.9, 여자 82.5세입니다. 미국의 평균수명은 남자 76.9, 여자 81.4세 입니다. 우리는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니까 미국의 평균수명에 맞추어서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게 될까를 계산하면 됩니다. 이건 평균입니다. 여기서 더 사시는 분도 계시고 덜 사시는 분도 계시겠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평균수명이 OECD 나라 중에 하위 그룹에 속한다는 겁니다. 의학이 가장 발달된 나라가 미국인데, 그것에 비해 수명은 별로 길지 못하다는 거죠. 그 이유에 대해서 두 가지의 원인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담배와 비만입니다. 세계에서 담배를 가장 많이 피우는 나라가 미국이고, 비만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가 미국이랍니다. 담배와 비만 앞에서는 뛰어난 의학기술도 다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미국은 담배 소비량을 줄이는 일에, 그리고 비만 인구를 줄이는 일에 투자를 많이 하게 될 거라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원래부터 담배랑 술이랑은 안 친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 걱정이 없습니다. 제가 신령해서 담배랑 술이랑 안 친한 건 아니구요, 집안 내력이 그렇습니다. 몸에서 별로 받지를 않습니다. 게다가 목회자 가정이라는 영향도 분명 있구요. 그런데 배가 많이 나와서 걱정입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몸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았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10kg이 넘게 살 쪘습니다. 기본적으로 걸어 다니지를 않으니까, 살이 찌더라구요. 한국 같은 경우는 일부러 운동을 하지 않아도 걸어 다니는 일이 많아서 살 찔 겨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따로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지 않으면 걸어 다닐 일이 별로 없어서 운동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살이 찝니다. 게다가 기름진 음식이 넘쳐나는 나라이다 보니, 살이 안 찔래야 안 찔 수가 없습니다. 정말 조심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 옛말에 인명은 제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인데 성경말씀과 통합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거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하나님께서 거두실 때까지 잘 보존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내 몸을, 내 목숨을 내가 스스로 단축시키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내 스스로 내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생명을 맡긴 인생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을 스스로 해하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도 보면, ‘그 연수를 다하다 죽는 것이 복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연수를 다 누리기 위해서 건강 관리에 신경을 좀 써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한다는 건, 거창한 일만을 주의 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건강을 보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주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건강을 해쳐가면서 까지 무슨 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담배나 술 같은 거, 건강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들은 삼가시고, 비만을 피하기 위해서 운동도 좀 열심히 하십시오. 건강한 사람이 자기 일도 잘 하는 거고, 건강한 사람이 가정도 잘 돌볼 수 있고, 건강한 사람이 직장생활도 할 수 있는 거고, 건강한 사람이 주의 일도 잘 감당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리스도인에게 건강은 웰빙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로까지 나가는 겁니다. 본인의 건강을 위해서 하나님께 늘 기도 드리시고, 건강을 위해서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오늘 말씀이 건강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수명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말이 나온 김에 건강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기대수명이라는 것을 갖고 삽니다. 뭐 사실 인생이라는 것이 내일 일은 난 몰라요이지만, 우리는 전체적으로 현재 안정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기대수명을 갖고 거기에 맞추어 인생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남자 같은 경우는 76세 정도가 평균수명이니까, 저 같은 경우 기대수명이 38년 정도 되네요. 제가 현재 서른 여덟 살이니까, 살아온 날 만큼 딱 그만큼만 더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겠구나 예상하고 인생을 설계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계산해 보십시오. 여자는 81세 정도가 평균수명이니까 거기에 맞추어 기대수명이 얼마나 되시는지 계산해 보시면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는가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갑자기 서글퍼지시나요? 사실 우리는 앞으로 살 날이 별로 안 남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면서 삽니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계산 속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면 얼마나 인생이 허무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것. 죽을 걸 생각하지 않고, 살 것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 얼마나 은혜입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사야서 본문에서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 것을 생각하면서 살지 못하고, 언제 죽을지 몰라 불안에 떨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처한 현실이 지금 우리의 현실처럼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바벨론에 나라가 망해 남의 나라 땅에 포로로 잡혀와 불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삶의 토대가 아무 것도 없어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렇게까지 생각했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만큼 불안하고 힘든 일도 없습니다.

 

포로생활 가운데 이렇게 삶이 흔들리고, 존재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오늘 위로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은혜가 필요한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것이고, 구원이 필요한 날에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포로생활 가운데 삶이 흔들리고 존재가 흔들려서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이 때가 은혜의 때이고 구원의 날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백성이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죽여도 하나님께서 죽이시는 것이고, 살려도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해야 하는 일,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딱 한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이죠. 바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것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1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불신앙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여인도 자식을 잊지 않고 긍휼이 여기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버릴 수 있고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여인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비교도 안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이것을 아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생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생.

 

이것을 절대적으로 믿으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생인 것을 온 삶을 통해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승리가 바로 부활입니다. 죽음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백성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또 하나의 본문인 마태복음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의 삶이 구분되어 나옵니다. 이방인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만 섬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니다. 재물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음식이나 의복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생이 어디에 놓여져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방인은 인생이 재물과 염려에 놓여 있습니다. 재물이 하나님이고, 염려하느라 몸을 상합니다. 염려는 지나치게 거기에 집착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딴 데 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만 집중합니다. 삶이 굉장히 심플합니다. 깔끔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분주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것과 같은 포로생활을 많이 겪습니다. 즉 삶의 토대를 잃어버리는 일을 자주 경험합니다. 직장을 잃게 되거나, 사업이 잘 안되거나, 자식이 속을 썩이거나, 부부 사이에 금이 가거나, 친구와 틀어지거나, 가족과 불화가 있거나, 또는 건강을 잃게 되는 등 삶의 토대를 잃어버리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이건 낭만적인 일이 아니고, 모두 우리의 삶을 흔드는 현실이고, 우리의 마음을 후벼 파는 아픈 일들입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이해 못하는 가슴 아픈 일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가 은혜의 때이고 구원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과 /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는 상관 없는 이방인이 이 때 갈라집니다.

포로생활과 같은 일을 겪을 때, 그 때가 바로 은혜의 때이고 구원의 날이기 때문에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은 구별되게 하나님을 붙듭니다. 꼭 그래야 합니다. 구별의 원리를 붙들어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는 겁니다. 성경을 찬찬히 잘 보십시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 어떠한 것을 받으시는지요? 구별된 것만 받으십니다. 거룩한 것만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지난 주에 제가 설교를 통해서 거룩이란 무엇인가를 말씀 드렸습니다. 구별된 것이 거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것을 놓치고 삽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놓치고 삽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구원 사건이 됩니까?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에 당하신 그 날도 예수님 오른편과 왼편에는 강도들이 함께 처형당했습니다. 그런데 왜 오른편, 왼편의 십자가 처형은 개죽음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구원 사건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하나님께서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같은 행위도 구별된 것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인도 드리고 아벨도 드렸습니다. 드린 행위는 같았지만, 구별된 것을 드렸느냐에서 차이가 났습니다.

 

여러분, 장 목사가 여러분에게 왜 중요합니까? 세상에 다른 목사도 많은데, 왜 여러분은 장 목사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장 목사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까? 제가 잘생겨서요? 제가 힘이 세서요? 제가 공부 많이 해서요? 제가 목회자가 25명이나 되는 집안 출신 목사라서요? 제가 3대째 목사라서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장 목사를 구별하셔서 여러분께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 외에 여러분께서 저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저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여러분에게 보내신 담임목사에게서 말씀의 은혜를 받으려고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담임목사 말씀에는 은혜 못 받으시면서, 본인에게 구별되어 보냄 받은 목회자가 전혀 아닌 분들, 설교 씨디나 기독교 방송 같은 것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건 은혜가 아니라 영적인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합니다. 그걸 은혜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어야 건강해지는 겁니다. 외식하면 내가 맛있는 거 골라먹을 수 있으니까 그때는 맛있을지 몰라도 결국 외식은 몸을 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여러분에게 보내신 담임목사의 말씀에 은혜 받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들의 영혼이 강건해지고 여러분들에게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제가 왜 여러분을 위해서 밤낮으로 기도하고, 말씀과 양육을 위해서 불철주야로 수고해야 합니까? 그래야 먹고 사니까요? 저는 여러분이 내는 헌금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예화). 제가 여러분을 위해 수고하는 이유는 여러분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저에게 붙여주신 거룩한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가 왜 이 교회에서 헌신하고 봉사합니까?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세우신 거룩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내 발로 걸어 들어온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이 교회로 보내셨기 때문에 거룩하게 헌신하고 봉사하는 겁니다. 자기 발로 걸어 들어오신 분들은 자기 발로 걸어 나가시겠지만,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이 교회로 보냄 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분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헌신하고 봉사할 것입니다.

 

구별의 은혜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가슴 속 깊이 깨달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별해서 드리십시오. 헌금도 돈 있으면 드리고 돈 없으면 안 드리고 그러지 마시고, 구별해서 드리십시오. 제가 지금 헌금 얘기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지금 구별의 은혜를 말씀 드리는 겁니다. 목사가 헌금 얘기 하더라고 시험에 들거나 험담하지 마십시오. 괜히 엉뚱하게 걸려 넘어지지 마십시오. 헌금은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구별이 중요합니다. 1불을 드리더라도 두 렙돈을 구별해 드려서 예수님께 칭찬 받았던 과부처럼 그렇게 구별해서 드리십시오. 드릴 헌금이 없을지라도, 구별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십시오.

 

특별히 제가 예배와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은데요, 시간 있으면 기도하고 시간 없으면 기도 하지 않고 그러지 마시고, 시간을 구별해서 기도하십시오. 많은 분들이 교회의 공적인 예배 시간과 기도 시간을 쉽게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의 공적인 예배 시간과 기도회 시간은 교회의 형편과 각자 개인의 형편에 맞추어 우리 인간들이 정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구별해서 거룩하게 세우신 이 교회에 하나님께서 구별해서 정해주신 예배 시간이고 기도회 시간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해 주신 그 시간에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그 시간을 사모하고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정말 불가피하게 그 시간을 지키지 못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됩니까? 모두 마음의 문제이지요. 정말 불가피하게 그 시간을 못 지키시는 분들은 자신의 형편에 맞게 기도하되, 꼭 시간을 따로 떼어 구별해서 기도 시간을 정해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이방인은 구별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구별되게 행동합니다. 무엇이든지 구별되게 하나님께 드립니다. 시간 있으면, 마음 내키는 대로, 그렇게 드리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무엇을 하든지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구별된 것을 받으시고 그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생! 예수 그리스도의 핏물로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생은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더 구별되게 행동합니다. 힘들고 어려운데 잠이 옵니까? 보따리 싸서 구별된 장소인 성전에 와서 밤새 기도해야죠! 힘들고 어려운데 왜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보내신 담임목사에게 기도 부탁을 안 합니까? 힘들고 어려운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은혜와 구원을 베푸시려는 예배 시간과 기도 시간을 외면할 수 있습니까? 열 일 제쳐 놓고 머리 디밀어야죠!

 

왜 그래야 하는 줄 이제 깨달으셨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이 교회 나와라, 목사한테 잘 해라, 헌금 해라, 예배 잘 드려라, 아침 기도회 왜 안 나오냐? 등 시시콜콜한 잔소리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런 말씀 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말씀, 어렵고 힘든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는 영적 원리를 말씀 드린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때, 하나님의 구원의 날에 받는 은혜와 구원은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만이 누리를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처럼 아무렇게나 드리지 마시시오. 제발.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드려야 할, 구별된 것을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그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회복해 주시고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생입니다. 아멘.


* 사실, 이번 주 설교는 제 스타일의 설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많은 은혜를 받으시더군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 주일설교였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기분을 묘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교인들과 이제 성령 안에서 교감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제 교인들이 알아듣더군요. 이 설교를 들으면서 교인들이 많이 울더라구요. 무슨 감동적인 스토리가 들어 있는 설교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이 설교를 통해 '구별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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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2. 21. 00:11

2011 2 20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레위기 19:1-2, 9-18, 마태복음 5:38-48

제목: 거룩이란 무엇인가?

 

오늘 말씀의 중심 구절은 레위기 19:2절 말씀의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와 마태복음 5 48절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입니다. 거룩은 영어로 “Holiness”라고 하고, 온전은 영어로 “Perfection”이라고 합니다. 이는 서로 다른 말 같지만,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지, 우리 인간에게는 별로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당신에게나 어울리는 말을 우리에게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먼저 레위기의 말씀은 그 배경을 먼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과 매우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고 나서, 광야에 있을 때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이들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이들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은 광야에서의 삶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미래의 삶을 꿈꾸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겁니다. 현재를 본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본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거룩은 구별된 삶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구별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별은 선택되었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해져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특권의식 개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별되었으니까 특권의식을 갖고 자기 의에 따라 마음대로 하고 살아도 된다는 뜻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구별되었다는 것은, 그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구별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성경은 성도라고 칭합니다.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세상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완벽하기 때문에 거룩한 무리,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공자님의 제자들이 더 잘합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이나 윤리와는 상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목적이 아니라,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도덕과 윤리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매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은 거룩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렇게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겁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일로 바뀌었는데,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별하셔서 부활시키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날인 주일은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세상 사람들처럼 일요일(주일)은 그냥 쉬는 날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배 드리러 오는 시간이 쉬는 날에 나를 귀찮게 하는 시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배가 쉬는 날 쉬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이건 거룩한 주일을 전혀 모르고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에,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날이기 때문에 주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처럼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일요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구별하신 하나님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실 수 있을 겁니다. 성전은 왜 거룩한 장소입니까?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장소이기 때문에 거룩한 겁니다. 거룩한 시간에, 거룩한 장소에서 예배 하는 거룩한 백성! 모두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것들입니다. 시간이 중요하고, 장소가 중요하고, 사람이 중요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것들이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해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거룩한 주일에, 거룩한 성전에서,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은혜입니까?

 

십자가가 왜 거룩합니까? 십자가는 원래 전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범죄자 중에 가장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범죄가 가장 추악합니까? 최근에 뉴스를 보니까, 별 일이 다 있습니다. 아버지가 세 살 먹은 아들은 때려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의심 때문에 평소에 세 살 먹은 아들을 매일 때렸답니다. 상상이 안 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세 살 먹은 아들을 때려 죽였습니다. 추악하죠? 또 반대로 이런 일도 있습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집안 어른한테 받은 세뱃돈을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지 않는다고 아들이 아버지를 때려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추악하죠?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추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처형시키던 형틀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자리가 바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이상 십자가를 추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거룩한 것이 십자가라고 증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구별하셔서, 십자가를 택하셔서 하나님께서 바로 그 추악한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인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별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좀 이 마음 속에 들어오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백성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면서 구별된 자로서, 구별된 땅에서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레위기 말씀의 내용을 보면, 한 마디로 올바른 이웃관계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웃과 이런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모두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9 17절 말씀에 형제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18절 말씀에 네 자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본문이 마태복음 5 45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요 자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레위기 말씀을 가족이라는 범주, 그리고 나 자신이라는 범주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한 말씀입니다. 가족이 굶고 있는데, 내가 굶고 있는데 밭에 있는 이삭을 모두 거두어 갈 수 없습니다. 가족 것인데, 내 것인데 도적질 할 수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억압하고 착취할 수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저주하거나 그 앞에 장애물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미워할 수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원수를 갚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가족과 나 자신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에게나 저지를 수 있는 것들이지, 가족이나 나 자신의 범주 안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진다는 뜻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고 그들과 관계 맺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햇볕을 악인이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비추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농사, 즉 먹고 사는 일에 꼭 필요한 비를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똑같이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악인에게나 의인에게나 똑같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고 우리가 왜 그렇게 하시냐고, 하나님은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건 그야말로 불신앙이요, 하나님에 대한 거역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면서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5 4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사는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을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법칙을 거스르고 하늘 나라의 법칙을 이 땅에 펼치면서 살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십자가 공동체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렸듯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십자가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룩한 구원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은혜를, 그 십자가의 능력을 사모하기만 하면 됩니다. 거룩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사모하면, 그 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 덧입혀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해지는 겁니다. 거룩한 삶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가장 크게 나타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사모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도덕과 윤리가 내 안에 자리잡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 붙들고 거룩한 백성이 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