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3. 28. 14:02

2011 3 27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7:1-7, 4:5-7; 10-15

제목: 마시자! 생명의 물!

 

설교 제목을 보면 연상되는 게 있으시죠? 마시자! 코카콜라! 제가 보기에는 코카콜라 회사에서 성경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그 문구를 생각해 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말씀은 모두 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의 말씀은 므리바 물사건이라고 불리는 것이고, 요한복음은 우물가의 여인이라는 소제목들이 붙어 있는 말씀입니다.

 

물 때문에 고생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마도 한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들은 물 때문에 고생한 기억이 거의 없을 겁니다. 한국은 물과 산 좋기로 유명한 곳이고, 미국은 모든 자원이 넘쳐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전 세계가 물 부족 현상 때문에 깨끗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비상이 걸린 상태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물을 깨끗한 물을 확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에 비해서 1인당 12배 정도의 물을 더 쓴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1인당 하루에 5갤런 정도의 물을 쓴다고 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1인당 하루에 60갤런 이상을 쓴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샤워하는데만 5갤런 이상을 쓴다고 합니다. 유럽에 가면 식당에서 물을 주지 않습니다. 저도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좀 황당했습니다. 스위스에서 밥 먹으러 들어갔는데 물을 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물을 좀 달라고 했더니, 돈을 내야 하고 물보다 오히려 탄산 음료가 더 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조그만 사이다 하나 시켜서 집사람하고 홀짝홀짝 나눠 먹은 적이 있습니다. 화장실도 돈 내고 들어가야 합니다. 물이 귀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들입니다.

 

한국이나 미국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물이 풍부한 곳에서 사는 우리들은 오늘 광야에서 일어난 므리바 물 사건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물이 없어 불평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믿음 없는 사람들”, 이라며 정죄하기 십상입니다.

 

물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40일 금식기도 같은 거 할 때도 물은 꼭 먹어야 합니다. 물을 먹지 못하면 며칠 못 버팁니다. 탈진해서 죽습니다. 그러니까 신 광야,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늘어놓은 불평은 믿음의 문제라기 보다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살기 위한 부르짖음입니다. 살만하면 부르짖지 않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위협 앞에서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므리바 물 사건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믿음을 너무 관념적으로, 우리의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따로, 삶 따로?

 

믿음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닙니다. 믿음은 여가생활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존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문제입니다. 믿음이 힘을 발휘할 때는 먹고 살만한 때가 아니라, 이렇게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입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불평한 것은 믿음의 행위는 아니었습니다만,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초능력 같은 믿음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위협을 별로 받고 살지 않습니다. 생명이 실로 위험한데도 그것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명에 대한 낙관주의에 빠져 있다고 말해야 할까요?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연약하고 위태로운지를 가슴 속 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을 찾는 행위가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연약하고 위태로운지, 가슴 속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니 이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믿음의 행위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몇 번 우스갯소리로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교회 오면서 아무 일 없이 온 분이 감사헌금을 더 많이 해야 할까요? 아니면 오다가 차 사고 나서 죽을 뻔 했는데 아무 일 없이, 떨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오신 분이 감사 헌금을 더 많이 해야 할까요? 우리는 흔히 죽을 뻔한 경험을 한 경우 감사합니다는 고백과 함께 감사헌금을 더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죽을 뻔한 경험을 한 것이 더 감사한 겁니까? 아닙니다. 교회 오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교회 온 것이 더 감사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생명의 위협을 못 느끼니까, 감사가 나오지 않을 뿐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생명에 무딥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담소를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도 대화의 매개가 물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 대단한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주석이 잘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성경연구가 좀 덜 된 목사님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있는 남편도 자기의 남편이 아니라는 구절 때문에, 이 여인은 간음한 여인, 부도덕한 여인으로 낙인 찍혔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정한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 만나고 구원 받았다고 하는 메시지로 이 이야기가 전해져 왔습니다.

 

그건 이스라엘의 풍습을 몰라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이스라엘에는 계대결혼풍습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결혼했는데 남편이 죽으면 그 여인은 죽은 남편의 동생의 아내가 되는 법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서 했던 질문이 바로 이겁니다. ‘한 여인이 계대결혼풍습 때문에 7곱 형제 모두의 아내로 이 땅에서 살다가 죽었는데, 그러면 하늘에서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로 살게 됩니까?’ 이런 질문을 해서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려고 했었죠. 이 여인도 그런 풍습에 의해서 6명의 남편을 두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요즘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우리는 남을 정죄하고 뒷얘기 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도 그런 식으로 읽을 때가 많습니다. 조심해야 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살인하는 이야기, 간음하는 이야기 등, 성경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 것을 읽을 때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에 대한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 읽으면, 성경은 온갖 부도적하고 폭력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이상한 책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거에 걸려 넘어지는 분들도 많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느냐는 둥, 성경이 왜 이렇게 부도덕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느냐는 둥 말이죠.

 

우물가의 여인에 대한 선입견을 혹시 가지셨다면 오늘 이 시간 정정하십시오. 우물가의 여인은 부도덕한 여인이 아니라, 그냥 목말라서 물을 길러 온 여인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물가에서 물을 소재로 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목마름을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과 기가막히게 연결시킵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육적인 목마름 때문에 물을 길러 온 것이지만, 그 여인의 마음 속에는 메시아,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목마름을 채워주는 우물의 물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죠. 그가 바로 생명의 물이라는 겁니다.

 

물이 없어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물을 먹으면 갈증이 풀려 살아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또 목마릅니다. 그러면 또 불평하게 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그것을 되풀이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거나, 물이 없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어김 없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불만을 쏟아 놓고,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말씀은 이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한 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를 일이 없기 때문에 불평 불만이 생겨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순절기를 보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목마를 때 물을 간절하게 찾는 그 간절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배고픈 나의 배와 목마른 나의 목을 축이는데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당연합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를 채우고, 목을 축여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배가 고프고 다시 목이 마릅니다.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만족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불평과 불만에 휩싸이게 됩니다. 더 좋은 것을 먹고 마시기 원하게 됩니다. 그것이 충족되면 기분이 좋았다가도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색이 변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생겨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목마름이 다시 오지 않는 생명의 물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물이라고 하는 것을 매개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생수를 네게 주겠다고 했을 때, 그 여인은 물어봅니다.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니까?” 이렇게 해서 길어지는 것이 생명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로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물인 것이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므리바 물 사건에서도, 광야에서의 목마름을 채워준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육신을 지닌 우리들이 어떻게 영과 진리로 예배합니까? 이 말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우리는 예배 조차도 드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마르십니까? 배고프십니까? 무엇에 대해서 목마르시고 배가 고프십니까?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좀 채워달라고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십니까? , 간절히 바라면 하나님께서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 주실 겁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은 채워지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또 제자리로 갑니다. 끊임없는 불평 불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매개로 해서, 진짜로 우리에게 주고 싶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기 원하신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우리를 다시는 목마르거나 배고프게 하지 않는 생명의 물,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생명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고 나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차원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불평 불만 속에서 육신의 목마름을 위해서 살던 우리가, 만족함 가운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믿음의 자녀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목마름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잘 못합니다. 육신의 목마름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하는데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육신의 목마름을 채우려 합니다. 이건 열심이 아니라, 불신입니다.

 

생명의 빵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나면, 다시는 배고프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차원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불평 불만 속에서 육신의 배고픔을 위해서 살던 우리가, 만족함 가운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믿음의 자녀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배고픔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잘 못합니다. 육신의 배고픔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하는데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육신의 배고픔을 채우려 합니다. 이건 열심이 아니라, 불신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이런 질문이 생기실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물과 빵을 먹고 마실 수 있는가?” 그러면 제가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까? “여러분은 언제 물을 마시고 빵()을 드십니까?” , 목마르고 배고플 때 마시고 먹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마르고 배고프면 생명의 물이고 빵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고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언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마르고 배고픈 적이 있었습니까? 육신의 목마름 때문에, 육신의 배고픔 때문에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하나님께 매달려 본 적은 많은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마르고 배고픈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요? 간구하십시오. 이 사순절기 동안,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마르고 배고프게 해달라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생명의 물이고 빵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십시오. 그분을 만나면 여자가 물동이를 놓아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던 것처럼, 삶 속에 참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만족함이 넘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힘으로 살아갑니다. 생명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심으로, 그리고 생명의 빵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인해 솟아난 기쁨과 힘으로 살아가는 자는 복된 인생입니다. 만족하는 삶을 삽니다.

 

무슨 힘으로 살아가십니까?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가십니까? 그래서 삶이 고단하시고 피곤하십니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거기에 참된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새 힘과 새 소망이 넘쳐날 것입니다. 만족함이 넘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