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2. 20. 09:58

행위에서 믿음으로

(로마서 3:27-31)

 

1. 브라질이 우리에게 승리하며 골 세러머니를 얄밉게 한 것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는데, 크로아티아에게 패한 뒤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호날두가 선발 출장을 하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도 애처로웠고, 모로코에게 패한 뒤 선수들과의 교류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라커룸으로 향하는 모습도 애처로웠다.축구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겸손이 최고의 덕목인 듯싶다.

 

2.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인 밴투의 업적은 ‘빌드업’ 축구를 대표팀에 안착시켰다는 것이다. 빌드업 축구란 공격적인 축구(골을 넣기 위한 축구)를 위해서 수비수부터 짧은 패스를 통해 차근차근 기회를 만들어가는 축구를 말한다. 요즘 축구의 트랜드이다. 더 이상 ‘뻥 축구’하는 나라는 없다.

 

3. 지난 주, E. P. Sanders 이야기를 조금 했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그 중에서 지난 주 설교를 듣고 예배당을 나서며 000 형제는 나게에 “목사님, ‘빌드업 설교’ 잘 들었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냈다. 내 설교를 잘 표현해 준 것 같다.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 그리고 더 깊은 신앙을 위해서 기초부터 다시 쌓고, 최신의 학문적 업적들을 반영한 신앙의 형성을 위해서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기도하고 격려해야 할 것들이 정말 많다. ‘뻥 축구’를 통해서 더 이상 세계 무대에서 축구를 할 수 없듯이, ‘뻥 신앙’을 통해서 더 이상 이 복잡한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켜나갈 수 없다.

 

4. 언약적 율법주의 (Covenantal Nomism), 이것은 과학계로 따지면 아인슈타인 같은 위치를 지닌, E. P. 샌더스 교수가 밝혀낸 사실이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이 용어에 모두 들어 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 이유는 구원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오해하는 것처럼, 유대교도 행위구원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의 이니셔티브,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구원의 이니셔티브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 중 그 누구도 구원 받을 사람이 없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

 

5. 로마서 3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21절이다.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 이게 복음이다. 바울 신학의 중심 (바울이 증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울은 지독한 예수 중심주의자이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다.

 

6.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유대인은 율법에 집중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은 말이고 문자이다. 이방인은 율법을 잘 모르고, 별로 상관도 없다. (미국인들이 축구를 잘 모르고 별로 감흥도 없는 것과 똑같다. 이들은 미식축구나 농구, 야구를 잘 알고 거기에 열광하지 않나.)

 

7. 바울의 증언은 기독교의 독특성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의가 한 인격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삼위일체 신학은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인격에 대한 연구다. 이것은 일종의 신앙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이라는 문자에 나타나는 것을 넘어서 이제 예수라는 ‘한 인격’에 드러난 것이다. 실리콘 밸리적으로 설명하면, 예전에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Dos’라는 것을 배워서, 컴퓨터를 작동하려면, 문자를 손으로 일일이 쳐서 넣었어야 했다. 그런데, 마이크로소트프사에서 혁신을 이루었다. 윈도우를 개발한 것이다. 손으로 문자를 일일이 쳐서 넣지 않아도 되고, 이제는 그냥 마우스로 클릭을 하면 모든 소프트웨어를 움직일 수 있다.

 

8. 하나님의 의가 율법을 넘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적) 인격에 나타났다는 것은 28절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의롭다는 ‘옳은 행동을 한다’의 의미가 아니다. 의롭다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되었다’를 뜻한다.

 

9. 이것을 자녀와 부모의 관계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자녀와 좋은 관계를 지닌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녀가 시험 성적을 잘 받아오면 자녀와 좋은 관계인가? 최근에 우리 아들이 PSAT 시험을 쳤는데, 정말 ‘우스운 성적(Not 우수한)’을 받아왔다. 우스운 성적을 받아온 우리 아들은 의롭지 못한가? 죽일 놈인가? (의롭다: 성적을 잘 받아온다.) VS (의롭다: 아버지(엄마)를 사랑한다.) 아니다. 여전히 우리 아들은 사랑스럽다. 우스운 성적을 받아온 것과 상관없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들이다. 아버지 집에 들어오면, 꼭 나와서 나랑 허그하고, 잠 자기 전에 꼭 나한테 와서 허그하고 가서 잔다. 얼마나 예쁜가? 이런 것을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다.

 

10. 율법이냐 복음이냐? 우리가 매일 논쟁적으로 대하는 용어들이다. 우리가 오해한 것은, 유대인들은 구원을 율법의 행위로 받는다는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복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도식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면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구원은 행위냐, 믿음이냐의 논쟁이 심하다. 그런데, 이게 정말 헷갈리는 것이고, 우리가 접근을 완전 잘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11. 우리는 이 논쟁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를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행위의 법은 협박으로 명령되고, 믿음의 법은 신뢰로 요청된다.” 행위의 법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가 명하는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믿음의 법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께 ‘당신이 명령하실 것을 제게 주십시오.’하고 말한다.

 

12.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문자’가 아니라 ‘인격’에 나타났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돌아보아야 한다. 문자랑 사귀는 사람은 없다. 문자는 그냥 그 문자대로 시행하기만 하면 된다. 설교시간이니까, 이런 예를 들어보자. 문자로 이렇게 써 있다고 생각해 보라. “졸지 말고 딴 생각하지 말고 설교를 열심히 들으세요!” 이것을 문자로 이해하면, 그냥 졸지 않고, 딴 생각하지 않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설교를 열심히 들으면 된다. 아니, 그냥 그런 척해도 된다. 그러면 그것은 문자를 잘 실행한 것이다.

 

13. 그러나, 인격을 향해서는 그렇게 문자적으로 실행할 수 없다. 인격은 ‘사귐’이 있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Affection(애정)’이 있어야 한다. 행위와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애정’이다. 위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다. 행위의 법은 협박으로 명령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가 명하는 것을 하라!’인 반면에, 믿음의 법은 신뢰로 요청된다. 인간이 하나님께 ‘당신이 명령하실 것을 제게 주십시오.’라는 것이다.

 

14.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라는 용어와 믿음이라는 용어의 차이를 잘 살펴야 한다. 행위라는 용어는 마치 컴퓨터 실행 용어 같다. 애정이 없다. 그냥 그것을 하면 된다.

믿음이라는 용어는 인격적인 용어이다. 사귐이 있어야 한다. 그냥 그것을 하는 게 아니라, 애정,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17. 행위에서 믿음으로!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애정(affection), 즉 사랑의 문제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구원은 뭔가? 애가 공부를 잘 하고, 부모가 뒷바라지를 잘 할 수 있는 만큼 경제력이 있는 건가? 애가 공부 잘하고, 부모가 경제력이 있으면 뭐하나? 이건 행위다. 이건 구원이 아니다. 이들에게 구원은 애정이다.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 친구 간에도 마찬가지, 우리 교회 식구들 간에도 마찬가지다.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다. 애정이 없는 것, 사랑이 없는 일을 하는 것만큼 우리를 괴롭히는 게 어디 있나.

 

18.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애정(사랑)합니다’는 말을 두 낱말로 줄인 것이다. 이것으로 설명이 부족하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애정(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인격을 형성한, 실제의 삶을 말한다. 난 너무 하나님이 좋아! 그러면, 좋아하는 사람의 행동은 그냥 보기만 해도 다르지 않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주님, 사랑합니다.

이게 저희 믿음의 전부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행위에서 믿음으로!

문자에서 인격으로!

모든 것에 애정을!

주님,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가득하게 하옵소서.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2. 6. 06:52

당신의 뇌가 가장 큰 적()이다

(로마서 3:9-31)

 

1. 국민일보에 신앙상담 코너가 있다. 상담자는 은퇴한 원로 목사인데,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유명한 분이다. 어느 날 실린 상담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교회 시무장로입니다. 아들과 결혼하게 될 며느릿감이 천주교인입니다. 며느릿감이 천주교인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2022년 11월 27일) 45명이 반응 이모티콘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35명이 화난 표정의 반응 이모티콘을 남겼다. 어떻게 상담했을 것 같은가?

 

2. 신문 지면 상의 제약이 있기 때문에 상담 내용이 길지는 않다. 그 중에서 핵심적인 상담 내용을 보면 이렇다. “물론 천주교인 가운데 개인적으로 구원의 확신이나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원리를 떠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따르는 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천주교는 행위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행위 구원을 말하는 천주교인과 결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주장이자, 천주교는 행위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전형적인 한국 (보수) 개신교의 생각이 담긴 상담이다.

 

3. 1970, 80년대, 한국에서 분유가 불티나게 팔리던 때가 있었다. 남양유업은 그때 성장한 기업이다. 1970년대, 80년대 생 치고 남양 분유를 안 먹고 자란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때 우량아 선발대회를 통해서 우량아로 선정된 아기들도 많다. 물론 그 우량아들은 모두 분유를 먹고 그렇게 되었다는 광고 전략 중 하나였다. 그때에 과학적 상식은 분유를 먹여 키우면 엄마 젖을 먹여 키우는 것보다 아이가 건강하고 우람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아이의 부모들은 젖 대신 분유를 먹였다.

 

4.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과학 상식이 바뀌었다. 업데이트 되었다. 분유를 먹여 키우는 것보다, 엄마 젖을 먹이는 것이 아이의 건강이나 정서에 더 좋다는 것이 상식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소를 키울 때 항생제를 엄청 맞히기 때문에 부모들이 분유 먹이는 것을 꺼려한다. 엄마에게서 젖이 안 나오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분유를 먹여야겠지만, 엄마 젖이 나오는 이상 엄마 젖을 1년 동안 먹이다, 그 이후에는 이유식을 먹이는 방식을 택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이들의 건강과 정서에 더 좋다는 과학적 지식의 업데이트가 있기 때문이다.

 

5. 과학상식만 바뀌는 게 아니다. 신학상식, 또는 신앙상식도 바뀐다. 문제는 과학상식은 계속해서 업데이트 되는데, 교회에서 통용되는 신앙상식은 업데이트가 매우 더디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뇌는 어떠한 지식(정보)을 한 번 받아들이고 나면 좀처럼 바꾸는 게 쉽지 않다.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이유도 ‘뇌의 저항’ 때문이라는 말을 한다. 우리의 뇌는 언제나 안정을 추구한다. 뭔가 안정이 정착되고 나면 그 상태를 바꾸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변화를 일으켜야 할 때 가장 저항이 심한 신체부위는 뇌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의 가장 큰 적(enemy)은 우리의 뇌이다.

 

6. 잘못된 지식이 뇌에 한 번 들어가면, 그 잘못된 지식을 뇌에서 빼내는 일은 매우 어렵다. 몸에 밴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 것이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은 아는 만큼 행동하게 되어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 지식의 업데이트는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아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지식을 업데이트 하지 않으면 행동이 고루해진다. 인간에게 열린 마음이란 언제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소통은 열린 마음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현재 알고 있는 지식이 전부이고 진리라는 생각은 소통을 어렵게 한다.

 

7. 로마서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핵심을 담고 있지만, 로마서는 또한 기독교를 분열시키는 데 잘못 쓰이기도 한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서를 바탕으로 마르틴 루터가 만든 구호가 ‘오직 믿음’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탄생한 개신교는 ‘오직 믿음’의 구호 아래서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하도 강력하다 보니, 개신교 이외의 모든 교파는 ‘오직 믿음’에서 벗어난 구원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상담 내용에서 보듯이, 가톨릭은 행위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와는 결혼 조차 하면 안된다는 배타적인 신앙을 가진다.

 

8. E. P. 샌더스(E. P. Sanders)라는 성서학자가 있다. 꼭 기억해 두어야 할 학자이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바울 서신을 들여보는 데 있어 1977년 이후에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바울 서신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E. P. 샌더스(E. P. Sanders) 때문이다. 그는 1977년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이라는 책을 통해서 그동안 기독교 성서학이 가지고 있었던 바울 신학에 대한 이해를 뒤집는다. 샌더스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개혁 이후에 그동안 너무 많은 학자들이 사도 바울과 유대교를 오해했다(로마서 설교, 비아토르, 48쪽). 그러한 오해는 당연히 로마서를 해석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마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율법과 복음의 대립을 상정하고, 율법과 복음 중 어떤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로 바울 서신과 신학을 축소시켰다는 것이다.

 

9. 쉽게 말해, 우리는 흔히 이런 질문을 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행위를 통해서인가 믿음을 통해서인가? 행위는 율법을 말하고, 믿음은 복음을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은혜로운 말 같으나, 이렇게 행위와 믿음을 대립적인 관계로 설정할 때 생겨나는 문제점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의 삶이 실종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더 이상의 행위(행동)는 필요 없고, 그저 천국 가는 날만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신앙을 구원의 문제로만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복음은 믿음을 통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당에 가는 구원론으로 축소될 수 없다.

 

10. 이렇게 되면, 우리는 유대교에 대한 오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유대교는 율법을 통한 행위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믿음을 통한 은혜의 종교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이 생기게 된다. 샌더스가 제동을 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발생한 시점을 기준으로 200년 전과 200년 후, 즉 400년 정도에 걸쳐 형성된 팔레스타인 유대교 문서를 모두 검토한 결과, 유대교를 행위의 종교(works-righteousness religion, 행위로 의롭게 되는 종교, 행위와 의의 종교)가 아니라 유대교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은혜에 기초한 종교라는 것을 밝혀냈고, 그는 이것을 일컬어서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고 불렀다. “율법에 순종했던 것은 언약에 들어가기 위해서(구원을 획득하는 순종)가 아니라, 은혜와 하나님의 언약적 은총을 토대로 자신의 언약적 처지(covenant standing)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로마서 설교, 비아토르, 48쪽).

 

11. E. P. 샌더스라는 성서학자 덕분에 우리는 바울서신, 특별히 로마서의 메시지를 좀 더 좀 더 완전하게, 왜곡되지 않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얼핏 읽으면 바울이 횡설수설하는 것 같은 율법에 대한 이야기, 이스라엘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서해석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바울이 율법과 복음이 마치 대립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고, 율법과 유대교의 가치를 형편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더 나아가 유대인에게 저질러진 폭력의 역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일은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기독교 신앙의 오류들이다.

 

12.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 이유는 쓴 시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는 고린도전후서를 쓴 직후, 그리고 로마서를 쓰기 직전에 쓰였고, 로마서는 갈라디아서가 쓰여진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서 쓰였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율법과 믿음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정황이 좀 다르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방인 교회였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 자체가 별 의미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믿음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는 이방인들에게 별로 감흥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3. 그러나 로마서는 정황이 달랐다. 유대교 배경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의 구성원이었다. 율법과 믿음의 상관관계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다짜고짜 율법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로마교회를 향해 바울에게 주어진 과제는 율법을 넘어선 복음의 보편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복음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얼마나 평등한지에 대한 논증 없이 이들에게 복음을 토대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도록 종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 아래에서 얼마나 평등한 존재인지를 논증한다.

 

14. 그들의 평등을 논증하는데 쓰인 개념이 바로 ‘죄’이다. 바울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우리가 여기서 조심해야 읽어야 할 것이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죄는 인간 개인의 개별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죄는 모든 인간을 억압하는 힘을 말한다. 이것은 한 개인이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죄는 작은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큰 이야기이다. 우리 눈에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지만, 어떠한 힘으로 우리 인간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고통이나 비극을 피할 수 없다. 죄의 힘은 거대하다.

 

15. 로마서 3장 10절에서 18절은 죄의 메타 내러티브 안에 있는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져 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지어낸 상황이 아니라 구약의 전도서와 시편 등에 이미 진술하고 있는 인간의 상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인생을 오래 산 사람일수록 인간이 이러한 비참한 상황에 처해져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살지만, 우리에게는 늘 고통과 아픔이 있다. 고통과 아픔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그러한 것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과 아픔을 피할 수 없다.

 

16. 죄에 대한 이러한 메타 내러티브는 우리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도와준다. 사실, 이러한 메타 내러티브는 인간의 삶에 큰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메타 내러티브가 죄의 힘에 사로잡힌 이들에 의해서 이용을 당하면 사람을 정죄하는 데 쓰이고 만다. 대개 건강하지 못한 신앙을 추구하는 이단들이 그러한 행동을 한다. 인간을 희망으로 이끌지 않고 절망으로 몰아간다. 절망의 끝에 몰려 불안해 하는 인간에게 다가가 자신이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 같지만, 실은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을 컨트롤하고, 착취하려는 속셈이 담겨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러한 술수에 희생을 당했는가.

 

17. 바울이 로마서에서 인간의 곤경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는 인간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당신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 아시오!’라고 하면서 그들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바울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 바울이 말하는 인간의 곤경을 이용하여 전도하는데 사용해 왔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당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인정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스스로를 좀 돌아보시고, 어서 빨리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실 겁니다.”

 

18. 그렇게 다그쳐서, 상대방이 죄를 고백하면, 그때 복음이 제시된다. “예수 그리스를 믿기만 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십니까?” 상대방이 믿는다고 말하면, 전도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이 정말로 값싸지는 순간이다. 구원받는 게 정말 쉽다. 이렇게 쉬운 구원을 사람들은 왜 받지 않으려고 할까. 그러면서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한다.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데, 믿음을 갖지 못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안타까워한다. 오직 믿음이 이렇게 쓰인다. 이것은 모두 로마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오류들이다.

 

19. 우리가 가진 통념, 업데이트 되지 않은 지식과는 달리, 유대교나 가톨릭이나, 행위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여전히 유대교나 가톨릭이 행위 구원을 말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직 믿음만을 말하는 개신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개신교인은 아주 쉽게 개신교 신앙을 갖지 못한 이들을 정죄한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전도대상자로 삼고 그들을 향한 포교활동에 나선다. 이미 구원받은 확신에 가득 찬 개신교인들은 존재론적 우위에 있다. 구원받은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에 비해서 우월하다. 우월한 사람은 자신보다 우월하지 못한 이들에게 구원을 선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복음은 존재론적 폭력으로 탈바꿈된다.

 

20.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막힌 담을 허물어 복음 안에서 화해를 이루고 한 몸을 이루게 끔 하기 위해 이방인의 사도로 사명감을 가지고 산 바울이 아무렴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의 우위성을 말하며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 로마서를 쓴 것일까? 그렇지 않다. 로마서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 어디에서 바울은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서 복음을 말하는 것이지, 사람들을 정죄하고 담을 쌓으려고 복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21. “당신의 뇌가 가장 큰 적이다.” 우리 뇌를 지배하고 있는 잘못된 통념들을 뇌에서 몰아내지 못하면, 인생은 자꾸 누추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누추한 뇌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좋은 사람과 불편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단 하나이다. 대화(소통)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이다. 좋은 신앙과 불편한 신앙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단 하나이다. 대화(소통)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이다. 이단이 왜 이단인가? 잘못된 것을 가르치고 실행해서? 아니다. 대화(소통)이 없기 때문이다. 대화(소통)이 없으니까, 발전이 없고,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죽고 만다. 그래서 이단은 그냥 가만히 나눠도 소멸할 수밖에 없다.

 

22. 대화(소통)가 잘 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듯, 대화(소통)이 잘 되는 신앙인이 좋은 신앙인이다. 생명은 결국 대화(소통)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성장하고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여러분의 뇌가 여러분을 한 곳에 머물러 있도록 붙잡아 두지 못하게 하시라. 부지런히 배우고, 부지런히 소통해서 성장하도록 하시라. 새롭게 발견하고 발전된 신학/신앙의 내용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하고 성숙해 가시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할 때까지,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렇게 역동적으로 사시라.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1. 29. 07:09

그리스도인의 가치

(로마서 3:1-8)

 

1. 우리가 읽고 싶은 대로 읽는 게 아니라, 바울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따라서 로마서를 읽어 내려가면, 바울이 약간 우왕좌왕 하는 듯이 느껴진다. 그리고 바울이 하는 주장은 매우 급진적이다(래디컬하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요점 중 하나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유대인이 들었을 때 매우 기분 나쁠 수 있다. 반대로, 이방인이 들었을 때 기분 좋을 수 있다.

 

2.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이 진술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으나, 그것이 그들에게 우월감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생활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우월감을 가지며 살았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도구로 쓰였을 뿐이다. 그렇게 우월감 속에서 남을 정죄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바울은 말한다.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것이지, 율법의 소유가 아니다.

 

3. 그렇다면, 여기에서 당연히 제기되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3장 1절이 바로 그 문제제기이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 그러면 유대인의 나은 점은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운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비해서 나은 점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는데, 여러가지 중에서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신 것을 첫번째로 꼽고 있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2절).

 

4.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유대인의 가치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복음 앞에서 가치의 차이가 없다. 그러면 도대체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무슨 유익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통해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며, 그들에게 지도자를 주시고, 땅을 주시고, 무엇보다 ‘복’을 내려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이가 없다고 말하니, 유대인의 입장에서 바울의 주장은 얼토당토 하지 않은(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 크나큰 핍박을 받았다.

 

5. 우리가 로마서를 읽으면서 경험하는 것은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일한 가치를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다고 유대인이 가진 고유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보니, 9장부터 11장에 걸쳐 바울은 유대인의 고유 가치와 미래에 대하여 고뇌하며 진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결론을 주는 것은 아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유대인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동족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다.

 

6. 로마서의 이 본문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가치 있는 이유는 동일한 질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무엇인가?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면 흥미를 잃고, 열심을 내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에 자신의 삶을 드리고 싶어한다.

 

7. 그러나, 우리가 본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가치가 생성되는 원리’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내린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구약성경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유대인이 얼마나 복 받은 민족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지구상에 유대인과 같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민족은 없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복을 받은 민족인데, 하나님에게 반역(revolt)하고 결국 망하는(destroyed) 그들의 모습을 본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8. 바울이 유대인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의 가치에 대해서 인정하면서도 부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무익한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유대인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보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다. 출애굽기의 가데스 바네아 사건에서 보듯이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반란을 일으켰고, 여리고성 전투 이후 아이성 전투를 하면서 탐욕을 버리지 못해 전투에서 패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 사사시대를 통해서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모습’이었다.

 

9. 그뿐만 아니다. 열왕기상하의 역사기록이 보여주듯이, 사무엘 시대 이후에 사울 왕을 세워 왕정이 시작된 이래 다윗 왕 이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 집권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고 신실한 나라를 세워간 역사가 거의 없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을 통해서 보듯이, 오므리 왕조(아합왕)와 예후왕조 등에서 보듯이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신앙은 온데간데없고, 바울과 아세라 등 우상을 섬기기에 바쁘고,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주변의 힘센 제국들을 의지하다, 의지하던 바로 그 제국에 의해서 나라가 멸망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불충과 불의의 역사이다.

 

10. 이스라엘(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사이에서 불충하고 불의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언약에 충실하시고 의로우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냥 지엽적인 이스라엘의 역사로 끝나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로 확대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보편적인 인류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불충하고 불의한 가를 그림언어로 보여주듯이 펼쳐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1. 가치는 저절로 생성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율법을 받았다고, 하나님께 다른 민족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의 가치가 천년만년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복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 안에 머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놓아둔다고 가치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가치를 계속 가치 있는 것이 되도록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12.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는 대림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I am a Christian”이라는 고백이 무슨 가치를 지니는가?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데,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유대인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역사를 보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유대인들을 판단하고 핍박했는가? 그런 것을 생각하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뒤집어서 적용되는 듯싶다. 로마서에서는 유대인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지만, 현재 우리는 동일하게 이방인의 가치가 무엇이지, 그리스도인의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이다.

 

13.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다른 데서 오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아는 데서 온다. 대림절에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서 이루신 일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림절에 네 개의 촛불을 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찬양한다. 소망, 사랑, 기쁨, 평화의 촛불이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소망을 주셨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셨고, 우리의 기쁨이 되셨고, 평화를 이루셨다.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을 묵상하면서 동일하게 그렇게 살아가는 데 있다.

 

14. 우리는 소망 가운데 있는가. 혹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낙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마음에는 소망이 더 가득한가, 아니면 낙심이 더 가득한가?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가? 혹시 우리 안에 미움이 가득한 것 아닌가? 우리는 기쁨이 충만한가? 혹시 우리는 우울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가? 불화하는 것을 보면서도 마음 아파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땅에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15. 나는 무엇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시 집중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일은 성경을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읽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은 구원은 이 세상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다. 우리는 그 가치 있는 것을 가치 있게 머물도록 하고 있는가? 아니면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 있는 삶을 굳건하게 지켜 나가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1. 21. 12:46

불편한 감사

(사도행전 3:1-10)

 

1. 지난 달 들은 AP 뉴스 중에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뉴스가 있습니다. 2019년도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했을 때 미군에 의해 부모와 형제들을 모두 잃은 아기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몇 달 후 적십자에서 그 아기의 친척들을 찾아내 그 아기를 친척 집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친척들을 모르게 미 해병 대원인 아무개(Joshua Mast)가 그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법원에 입양 신청서를 냈습니다. 그리고 2021년도에 있었던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수 작전 때 그 아기와 가족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그 아무개 해병 대원은 도왔습니다.

 

2. 미국에 도착한 그 아기와 가족들은 아프간 난민을 위한 이주 센터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람들이 와서 그 아기를 데려갔습니다. 이유를 몰랐던 그 아기의 가족들은 나중에 미해병 대원이 그 아이를 입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아기의 가족들은 당황했습니다. 자신들도 모르게 아이를 입양하고 데려가는 것은 ‘유괴’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 해병대원 부부는 이 일에 대해서 이런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지키면서, 아이를 구하기 위해 훌륭하게 행동했던 것일 뿐입니다. We’ve acted admirably to save the baby, keeping with our Christian beliefs.”

 

3. 이 기사를 읽고/듣고 조금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미군 부부는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하여,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훌륭한 일이었다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것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목숨이 죽은 것은 무엇이고, 그 아이가 부모를 잃게 되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된 것은 누구의 탓일까요.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전쟁 고아를 입양해서 데려다 키우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를 일으킨 것에 대하여 회개하며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미국 정부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을까요? 아무튼, 이 기사를 접하고 오랫동안 깊은 상념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 감사절을 맞아, 아무런 거리낌없이 마냥 감사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어딘가 마음이 좀 불편합니다. 각 교회마다 풍성한 과일과 곡식으로 강단을 꾸미고 그것을 배경으로 한 사진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올라오지만, 지금 우리의 삶이 그렇게 정말 풍성한가를 돌아보면, 왠지 우리의 현실을 왜곡하고 속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설사, 부자들이나 부자 나라들에서는 아직까지 먹거리가 풍성하여 별 걱정 없이 감사절을 보낼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나, 우리가 알다시피, 기후변화 때문에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고 있고, 수많은 동물과 어류, 식물들이 멸종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가 이렇게 마냥 ‘감사’를 남발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5. ‘불편한 감사.’ 미국의 부통령을 지냈던 엘 고어가 『불편한 진실Inconvenient Truth』라는 책을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2006년입니다. 16년 전입니다. 이 책은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 고어가 말하는 ‘기후변화’의 진실을 듣고 불편해했습니다. 마음도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받아들이면 몸과 삶 자체가 매우 불편해지기 때문에, 기후변화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불편한 감정을 자아낼 뿐이었습니다. 살던 대로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죠. ‘불편한 감사’는 바로 여기에서 가져온 용어입니다. 감사절을 맞아 마냥 감사하고 싶은데, 우리의 감사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마냥 감사하기에는 세상살이가 너무 척박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돌아와 남원 사또의 악행을 밝히면서, 이런 시를 지어 내놓습니다.

 

金樽美酒 千人血(금준미주 천인혈)

玉盤佳肴 萬姓膏(옥반가효 만성고)

燭淚落時 民淚落(촉루락시 민루락)

歌聲高處 怨聲高(가성고처 원성고)

금 술통의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 접시의 좋은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구나

 

7.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면서부터 저는 이몽룡의 이 시가 자연이 인간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쓴 시처럼 느껴졌습니다.

 

金樽美酒 千木血(금준미주 천목혈)

玉盤佳肴 萬膏(옥반가효 만수고)

燭淚落時 淚落(촉루락시 지루락)

歌聲高處 聲高(가성고처 풍성고)

금 술통의 좋은 술은 천 나무의 피요

옥 접시의 좋은 안주는 만 동물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대지의 눈물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바람wind) 소리 높구나

 

8. 땅이 우리처럼 말을 한다면, 강단에 풍성하게 쌓인 과일들과 곡식들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할까요? 풍성한 결실을 내서 참으로 감사하구나, 할까요? 인간들의 탐욕을 욕하면서 자기들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면서 재배한 과일들과 곡식들을 향해서 위와 같은 시 한 수를 지어 날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사는 매우 불편합니다. 땅이 내는 소산에서 감사 소리가 아니라 원망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백성의 고혈을 짜내 자신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며 변 사또처럼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풍성함을 서로 나누는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대지의 고혈을 짜내 자신의 식탁만 풍성하게 하는 사악한 인간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9. 본문은 우리에게 그 해답을 줍니다. (지금도 그러는 유대인들이 있지만) 성경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오전 9시, 정오, 그리고 오후 3시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 구 시’란 오후 3시를 가리킵니다. 유대인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관습에 따라, 오후 3시에 성전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 이들이 성전에 기도하러 간 것은 하루이틀 했던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을 받아 거듭난 후에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매번 가던 성전이었고, 매번 드나들던 길이었는데, 예전에는 거기에서 구걸하던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받은 이들의 눈에 이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기적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에게만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발생한 것이죠.

 

10.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기도할 때 성령이 임재하여 성령 충만하게 된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에는 무엇보다도 ‘감사’가 넘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평소 눈에 별로 들어오지도 않았고, 별로 관심도 없었던 성전 미문의 걸인에게 눈이 갔다는 겁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든,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3-4절).

 

11. 감사(thanksgiving)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감사란, 눈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감사가 넘쳤습니다. 성전으로 향하던 그들의 발걸음은 무엇보다도 감사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감사가 참된 감사였던 것은 그들이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들의 눈이 가려져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들의 눈이 뜨여져 구걸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걸하는 사람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12.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너무도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감사를 나누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자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 몇 푼 정도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준 것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보행장애자였던 그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나누어준 ‘감사’ 덕분에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구걸해서 비굴하게 먹고 살지 않아도 되고, 이제 자기 힘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됐습니다.

 

13. 저는 이렇게 다시 보행할 수 있게 된 이 사람의 인생이 정말 궁금합니다. 제가 소질 있는 작가라면 이 사람의 일생을 다룬 소설을 하나 써보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다시 자유롭게 보행할 수 있게 된 것을 잘 활용하여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꾸몄을까요? 아니면, 차라리 움직이지 못하고 구걸하면서 사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못된 사람이 되었을까요? 저는 이 사람이 자신이 받은 감사를 다른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살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받은 감사는 보통 감사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감사는 또다른 참된 감사를 낳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니까요.

 

14. 우리의 감사가 불편한 감사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감사가 온전한 감사가 되려면, 우리는 눈을 감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감사하기 어려운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면, 우리의 감사는 온전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모든 사람이 감사할 수 있을 때까지 불편한 감사, 유보된 감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 구원을 얻기까지 우리의 감사는 불편한 감사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모두’는 더 이상 인간 존재만 가리키는 것이 되지 못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대지가, 땅이, 자연이 우리 인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신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인간 존재만이 아니라, 이 대지가, 땅이, 자연이 감사할 수 있을 때까지, 인간 존재와 더불어 비인간 존재에게도 우리의 감사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15. 참된 감사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들의 감사를 보행장애인에게 흘려보냈던 것처럼, 감사는 흘러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보행장애인도 고침을 받은 후, 자신이 받은 감사를 흘려보냈을 것입니다. 자신처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도록 최선을 다해 살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자신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도록 어려운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을 것입니다. 불편한 사람이 없도록, 감사가 계속 흐르다 보면, 언젠가는 모두가 함께 감사드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감사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가리지 말고, 눈을 떠서, 우리가 주님께 받은 감사를 열심히 흘려 보내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눈이 뜨여지기를 소망합니다. 소망하지 않아도, 우리가 참된 감사 가운데 있다면, 베드로와 요한처럼 눈이 뜨여질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가 받은 감사를 흘려보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불편한 감사에 머물지 않도록, 인간 존재에게, 그리고 비인간 존재(동물, 식물, 자연)에게 선한 일을 하십시오. 친절하게 대해주고, 망가뜨리지 말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십시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1. 15. 07:12

호모 프락티쿠스 (Homo Practicus/실천하는 사람들)

(로마서 2:1-16)

 

1.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로 시작하는 2장의 말씀은 율법을 소유한 것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물론 로마서의 진술을 도식적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로마교회의 정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약간의 도식적인 분석이 필요하지만, 성경이라고 하는 큰 틀에서 보면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지혜롭다. 우월감을 가진 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 또는 유대인에게만 있는 감정은 아니다. 우월감은 인간이 갖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무엇 때문에 우월감을 갖는가? 우리는 모두 상대방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는 지점이 있다.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고 살았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구원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심판받은 자들에 불과했다. 바울이 하고 있는 작업은 율법을 가진 것 때문에 이방인을 향해 가지고 있는 우월감이 얼마나 불필요한 일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고, 그로 인해 우월감을 가지게 된 유대인들이 한 일은 ‘남을 판단하는 일’이었다. 인간에게 있어 ‘법(Law)’이라는 것은 참 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예로부터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사회의 지도층에 속해왔다. 법을 다룬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보통 사람들보다 ‘남을 판단하는 일’ 하는 것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살다보면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일이 발생하는데, 유체이탈 화법이나 유체이탈 행동이 두드러져 나타나게 된다. 어떠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남을 판단하기만 하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발생한 사건과 자신을 결코 연결시키지 않고, 그 사건의 바깥에서 그저 판단하기만 한다. 한 마디로, 우월감이 고착화되면, 공감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3.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절).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을 판단하는 그 사람도 판단받는 사람과 똑같이 죄를 짓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자기중심성, 어떠한 신학자는 이것을 원죄라고 말한다.)구원을 말할 때, 한국인들은 흔히 이런 질문을 많이 한다. “이순신 장군은 천국에 갔을까요?” 예수를 모르던 시대를 살았던 이순신 장군 같은 의인이 예수를 믿지 안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런 질문이 나온다. 한국인은 이순신 장군을 의인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의인 이순신은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도 천국에 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한국인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4. ‘의로운 전쟁 이론(Just War Theory)’라는 게 있다. 기독교 윤리에서 한 때 격렬하게 논쟁이 벌어진 주제이다. 특별히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놓아 두고, 신학자들 간에 ‘의로운 전쟁’에 대한 논쟁이 아주 격렬하게 일었던 적이 있다. ‘의로운 전쟁’이라는 것이 있을까? 전쟁을 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기독교에서 의로운 전쟁(just war)을 말하는 이유는 구약성경 때문이다.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워 행했던 가나안 땅의 전쟁은 의로운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수많은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의 칼날에 죽어 갔는데,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현대에 발생하고 있는 전쟁도 ‘의로운 전쟁’의 논리에서 전쟁을 수행한다.

 

4.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영화 ‘명량’과 ‘한산: 용의 출현’에 보면 의로운 전쟁을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옳지 못하다고 판단한 한 일본 군사가 전향을 하여 이순신 편에서 조선군이 왜군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는 이순신에게 묻는다. “이 전쟁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 전쟁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의와 불의의 전쟁이다.” 한국식 할리우드 대사이다. 전쟁을 인간의 비참한 죄악으로 보지 못하고, 의와 불의로, 즉 ‘의로운 전쟁’으로 보게 되는 순간, 전쟁에서 발생하는 살생은 모두 정당한 것이 된다. 이렇게 의로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은 불멸의 의인이 되고, 그러한 의인은 반드시 천국에 가야 한다는 논리가 발생한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이순신이 단순히 예수를 믿지 않은 것 때문에 천국에 못간다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5. 전쟁이 의로울 수 있을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전쟁이 한창 중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전쟁을 하면 나라들은 그냥 전쟁을 치열하게만 하는 게 아니다. 서로 도덕적으로 비난하기 바쁘다.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면 전쟁에서 발생하는 고통들을 수습하는 일이 쉽지 않다. 전쟁에서 발생한 그 수많은 죽음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로운 일, 선한 일을 하다 죽었다는 ‘자기 의’가 없으면 인간은 전쟁에서 발생한 상흔을 감당할 수 없다. 러시아 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는 러시아 젊은이들을 선동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전쟁에서 죽은 러시아 군인들의 죄는 없어질 것이다.” 러시아 측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은 의로운 전쟁이라는 뜻이다. 정말 그런가?

 

6. 전쟁이 발발하면 서로 의로운 전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의(justice)는 매우 상대적인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고 있고, 서방과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고,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고 있고, 한국과 북한이 대립하고 있지만, 서로가 총칼을 겨누고 서로의 생명을 빼앗는다면, 의로운 전쟁 같은 것은 아예 없다. 내 편에서 생각하면 상대편이 죽일 놈이지만, 상대편이 생각하면 내가 죽일 놈인 것이다. 이것을 누가 판단하겠는가? 당연히 모두 하나님은 자기 편이라고 생각할 것이지만, 의로운 전쟁의 논리는 전쟁에서 발생한 수많은 악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은 천국에 갔을까?’ 같은 질문은 매우 허무한 것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순신 장군은 왜적을 물리친 영웅이고 의인이지만, 그가 죽인 일본 젊은이들은 무엇인가? 그들도 모두 그들의 부모들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하는 자식들이다. 전쟁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 의로운 전쟁은 없다.

 

7. 남을 판단하는 일이 고착화되면 이렇게 끔찍한 일이 발생한다. 자기는 의인이고, 남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좋은 일만 일어나야 하고 혹시 나쁜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뭔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남에게는 심판이 임해야 하고 그에게 발생한 나쁜 일은 죄에 대한 심판일 뿐이라고 아주 쉽게 정죄해버리고 만다. 이것만큼 공감능력을 상실한 상황도 없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같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4절). 좀 더 쉽게 풀어 번역한 것으로 보면 이렇다. “더구나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그 크신 자비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니 될 말입니까?” 남을 판단하는 자들의 특징은 자신에게 발생한 나쁜 일은 별거 아니고, 다른 이에게 발생한 나쁜 일은 심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은 나쁜 일을 벌여도 심판을 받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에 불과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8. 남을 판단하고, 우월감을 갖는 것은 좋지 못하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남을 판단하고 우월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선을 행하는 것이다. ‘꾸준히 선을 행하는 일’, 이것은 어려운 일인가? 인류의 역사를 보면, 전쟁 뒤에는 언제나 종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종교가 원래 그런 것일까? 종교는 전쟁을 부추기고 전쟁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일까? 우리는 이 지점에서 늘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아우슈비츠의 비극 뒤에는 종교가 있었다. 기독교 국가였던 독일은 유대인들을 미워했다.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것이다. 이게 신앙인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으니, 그 원수를 그리스도인들이 갚아야 하는 것일까? 전혀 아니다. 하지만, 나치의 선동은 독일인들에게 먹혀 들어갔다. 600만명의 대학살이 발생한 아우슈비츠 비극은 독일인이 가진 종교심과 우월감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쉽게 말해서, 나치는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그 일을 자행했던 것이다.

 

9.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서구사회는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고, 종교와 철학의 메시지를 다시 그 근본에서부터 성찰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유대인 프랑스 철학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다. 그렇다 보니, 타자(others)를 잘 보지 못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를 발전시키는데, 유대인 학자답게 구약성경의 윤리를 보편화시키는 데 노력한다. 그가 발전시킨 ‘타자의 윤리’는 다음의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나를 죽이지 말라. You shall not kill me.” 이것은 죽음이 난무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견한 종교/철학 윤리이다. 상대방의 눈에서 우리는 이 절실한 요청을 발견해야 한다. “나를 죽이지 말라.” 이 강력한 눈빛을 발견한 사람은 결코 상대방을 죽일 수 없다. 인류의 이 보편적인 윤리를 발견한 사람은 상대방을 죽이려고 손에 들었던 무기를 다시 땅바닥에 내려놓게 될 것이다. 꾸준히 선을 행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상대방, 타자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말씀과 같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10. 바울이 말하고 있는 깊은 신학적/인간학적 진리는 이 한 마디에 담겨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For God does not show favoritism)”(11절). 여기서 외모는 ‘잘생기고 못생기고’의 뜻이 아니다.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그러한 것을 가리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진술한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헬라인)이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하지 않으신다. 그러면서 바울은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율법을 가졌고, 율법을 들은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중요한 것은, ‘율법의 실행(practice of the law)’에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11. 유대인들이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서 우월감을 가진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가졌고 율법을 들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사실의 의미가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를 폭로한다. 율법을 가졌고, 율법을 들은 것은 결코 특권이 될 수 없다. 율법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이나 양심에 율법에서 말하는 ‘정의(justice)’를 심어 놓으셨다. 그래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본성이나 양심에 따라 얼마든지 선한 일, 의로운 일을 할 수 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14-15절).

 

12.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이다. 율법을 가지고 있고 율법을 들었다는 것은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율법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도 본성과 양심에 따라 얼마든지 율법의 요구를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율법을 가졌다면 그 율법을 가진 것에 만족하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율법을 가지지 않았어도 본성과 양심에 따라 율법의 요구를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이방인들이 있다. 율법의 요구를 실천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냐, 아니면 그것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이냐, 이렇게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율법과 본성과 양심에 새겨진 율법의 요구를 실천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13. 기독교인들도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어리석은 일을 수행할 수 있다. 복음을 가졌고 복음을 들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복음을 가졌다는 것, 복음을 들었다는 것, 그래서 믿음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요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은 판단하면서 살아가는가. 자기들은 의롭고, 다른 이들은 불의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들이 자행하는 못된 일들은 모두 ‘의로운 전쟁(just war)’인양 얼마나 사실을 왜곡하는가. 이러한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여전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을 가졌고, 복음을 들어, 믿음을 가진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오! 믿음은 실천의 동의어일 뿐이오!”

 

14. 성산 장기려 박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운영하고자 일생 헌신한 의사였다. ‘돈이 있으면 치료비를 내시고, 없으면 그냥 가세요’라는 식의 병원 운영이었다. 그러다 보니까 간혹 돈이 있는 사람들도 욕심을 내어 거짓말을 할 때도 있었다. 하루는 옷도 멀쩡하게 입고, 손에 다이아반지까지 낀 사람이 치료를 다 받고 난 뒤에 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장기려 박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없다면 할 수 없지요. 그냥 가시죠.”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서무과 직원이 박사님에게 손짓 눈짓으로 그 사람의 손가락을 보시라고 한다. 그 환자가 돌아간 후 장기려 박사가 말했다. “나도 보았지. 그러나 돈이 없다고 하는 사람 한둘을 의심하다 보면 진짜 가난한 환자도 의심하게 되지.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과 자기 양심은 못 속인다네.” (한겨레 신문에서 가져옴)

 

15. 장기려 박사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 일화에 등장하는 ‘다이아반지를 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복음을 들은 우리들, 마치 다이아반지를 낀 것처럼 우월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는 멀쩡하면서, 건강이 있고 능력이 있고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호모 프락티쿠스. 실천하는 사람들. 손과 발이 좀 더 부지런하게 움직인다는 뜻이다. 손과 발이 좀 더 선해진다는 뜻이다.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지 말고, 이웃을 섬기는 자리에 있으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호모 프락티쿠스이다.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섬기는 사람들이다.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세상은 실천하는 사람들을 통해 변화되고, 교회는 실천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부흥한다. 리-바이벌(revival, 다시 살아남)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1. 9. 06:31

겨 묻은 개여, 똥 묻은 개를 나무라지 말라

(로마서 1:17-32)

 

1. 비슷한 속담이 두 개 있다.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란다.”라는 속담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라는 속담이다. 같은 말 같지만, 뉘앙스가 좀 다르다. 앞의 것은 ‘사람에게는 크고 작은 잘못이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어리석게 잘못의 크고 작음을 따지는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고, 뒤의 것은 ‘자신의 잘못이 더 크고 또 변변치 못한 사람이 남 흉보기를 잘한다’는 뜻이다. 앞의 것은 ‘겨 묻은 나나, 똥 묻는 너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뜻이고, 뒤의 것은 ‘못난 놈!’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앞의 것의 의미를 생각하며 본문을 들여다보려 한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평등에 관한 이야기다.

 

2. 기후변화 공부를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막연히 알고 있던 것에 대하여 정확하고 폭넓은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의 전개를 보면, 바울은 ‘올바른 지식은 올바른 행동의 전제’라는 스토아 철학 전통을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굳이 이러한 철학적 전통을 말하지 않더라도, 올바른 지식이 올바른 행동의 전제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이다. 인간은 아는 만큼 행동할 수 있다.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무모하다고 말한다. 물론 행동이 지식의 범주 안에만 갇혀 있으면 안되지만, 일차적으로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지식을 얼마간 갖출 필요가 있다. 그래야 행동을 바르게 할 수 있고, 무엇보다, 행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

 

3. 미국에 청소년 환경단체, ‘우리 어린이들의 신뢰(Our Children’s Trust/자녀들의 신뢰/자녀세대의 신뢰)’가 있다. 우리 아이들(자녀들/자녀세대)이 가진 신뢰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어른들(어른세대)이 자신들의 미래를 지켜줄 것/열어줄 것이라는 신뢰이다. 그런데, 기후변화를 보니, 그러한 신뢰가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어린이들의 신뢰’ 단체의 청소년들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의 소장은 이렇다. “미국 정부가 기후변화로 인해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지 못한 것은 헌법을 위반한 것이다!” 자녀 세대의 미래를 희망 차고 밝게 만들어 주는 것은 부모 세대의 의무이다. 이것은 도덕적 의무이기도 하지만, 법적인 의무이기도 하다.

 

4. 로마서에서 바울은 로마교회 교인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물론 이것은 실제적 소송은 아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소송이다. 영적인 소송이다. “우리 어린이들의 신뢰” 단체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처럼, 바울은 로마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나는 그 소송장이 1장 17절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5. 이 문장에서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해 어떠한 소송을 하고 있는 것 같은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의인들(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들)이 지금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소송장이다. 로마교회는 강한 자들,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약한 자들, 즉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함께 세운 공동체이다. 쉽게 말해, 로마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섞여 있는 공동체이다. 이들은 모두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 한 몸을 이루어 교회 공동체를 세운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가운데 발생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풀어나갈 때, 그 문제를 해결할 가장 중요한 열쇠는 ‘믿음’이다.

 

6. 그러나, 이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의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겼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비판했다. 믿음을 제일 원리로 생각하여 그들 사이에 있는 갈등을 해결했어야 마땅한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강한 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를 믿음보다 먼저 내세웠고, 약한 자들은 자신들의 가지고 있는 선민의식을 믿음보다 먼저 내세웠다. 그렇다 보니, 교회 공동체가 흉해졌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로마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영적인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로마교회에 소송을 제기합니다!”

 

7. 본문은 매우 문제적인 본문이다. 특별히 26절과 27절은 동성애 문제를 다룰 때 자주 소환되는 본문이다.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색깔이 달라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동성애 문제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바울의 소송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라는 속담이 가진 의미에 비추어서 본문을 들여다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로마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 번, 로마교회가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간의 갈등 말이다.

 

8. 바울은 인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현실을 ‘고통’이라는 한 단어를 통해서 표현하는 반면에, 바울(기독교)은 인간의 현실을 ‘죄’라는 한 단어를 통해서 표현한다. 고통과 죄, 그냥 듣기만 해도, 인간의 현실은 비참하다. 불교나 성경에서 표현하는 인간의 현실 외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인간의 현실을 경험하면서 그 현실을 표현할 수 있는 한 단어는 무엇이 있을까? 죽음, 한, 허무, 부조리 등이 떠오른다. 아무튼,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현실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것 같다.

 

9. 바울은 왜 로마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며, 살가운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이렇게 처참한 인간의 현실에 대해서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바울은 사디스트인가? 로마교회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은 것인가? 일면식도 없는 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이렇게 처참한 인간의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너무 예의 없는 행동처럼 느껴진다. 한 번 생각해 보라. 누군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나에게 와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 뒤, 갑자기, 내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일장 연설하듯이 늘어놓는다고 생각해 보라.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10. 사실, 우리가 전도할 때, 이러한 실수를 많이 저질렀다. 특별히 (한국에서 한 때 유행했던) 사영리 같은 것을 가지고 전도할 때, 인사를 나눈 뒤 첫 번째 하는 말이 이런 것 아니었나? “당신은 죄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상대방을 다그친다. “네 죄를 인정하렸다!” 상대방이 죄를 인정할 때, 그때 복음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서, 죄인인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당신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도를 했다. 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러한 전도 방식이 얼마나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드는 전도방식이었는지, 반성해 본다.

 

11. 로마교회 사람들은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이 그들을 전도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기 전에, 그들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인정하라고, 이렇게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을 또다시 전도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렇게 인간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 주구장창 일장 연설을 하고 있는 것일까?

 

12. 여기에서 바로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라는 속담이 필요하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겼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비판했다. 쉽게 말해서, 서로 자신들이 잘났다고 교만하게 군 것이다. 이렇게 자기가 더 잘났다고 교만을 떠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메타인지라고 한다. 헤겔은 이렇게 메타인지를 할 수 있는 존재를 ‘대자적 존재’라고 표현했다. 한자어라서 말이 어려운데, 개념은 쉽다. 내가 나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13. 인간은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니, 그러한 능력을 발휘할 때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물이나 식물과 인간이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물이나 식물은 ‘즉자적 존재’이다. 자기 자신으로만 머물러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메타인지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메타인지가 가능하다. 가능하지만, 실제로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이나 식물 같은 존재들이 많다. 메타인지가 부족한 사람을 만나면 참 어렵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즉,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을 한 발짝 물러나 돌아볼 줄 알아야 하고, 그러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친교를 하는 일도 중요하다. 내가 메타인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좋은 친구다.

 

13. 바울이 비참한 현실을 말하는 것은 정죄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로마서를 잘못 읽으면 비참한 현실을 진술한 말씀이 인간을 정죄하는 데 잘못 쓰인다. 우리는 수없이 많이 그러한 순간을 목격했다. 정죄를 당한 인간은 의기소침해지고, 그 정죄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렇게 정죄하고 있는 사람에게 포로가 되기 십상이다. 착취는 그러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발생한다. 우리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말하는 본문을 가지고 인간을 정죄하는데 쓰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를 쉽게 정죄하는 나쁜 사람들의 술수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14. 바울이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말하는 것은 정죄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나는 원래 이런 놈이야’, 이런 자괴감이나 자포자기에 빠지게 하려는 게 아니라, ‘그렇지 나는 원래 존귀한 사람이지, 그러니 힘을 내야지’,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컨텍스트에서, 서로를 정죄하고 있는 강한 자들이나 약한 자들이 존재론적으로 얼마나 평등한 존재인지를 메타인지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말하고 있는 맥락은 정죄가 아니라, 평등이다. 바울에게서 이 말을 들은 로마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렇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상대방을 업신여기겠어. 내가 무슨 자격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겠어. 우리의 존재가 다 이렇게 평등한데. 우리가 다 불경과 불의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인데. 저 사람이나 나나, 오십보 백보지 뭐. 겨 묻은 내가 무슨 자격으로 똥 묻은 개를 나무라겠어.”

 

15. 바울은 본문에서 왜 이렇게 인간의 현실이 비참하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아는 지식을 태초부터 주셨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공경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흉한 일, 비참한 현실이 로마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다. 바울이 본문에서 열거하고 있는 악습(29-31절)과도 같은 일이 로마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를 업신여기고 비판하는 일, 본인들이 스스로 인식을 하고 있지 못해서 그렇지, 인간의 비참한 현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 안에서 여전히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지금 바로 그 현상에 대해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16. 로마교회 공동체 안에서 왜 그렇게 흉한 일이 발생했는가? 바울이 말하는 매우 일반적인 인간의 비참한 현실이 발생한 원인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사회적 지위의 우월성, 자신이 가진 선민의식의 우월성이 믿음보다 먼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통렬한 지적이고 소송이고,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주는 메타인지의 선물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로마서를 읽을 때 바울의 정서를 세심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 정죄의 정서로 읽으면 안 되고, 사랑의 정서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바울은 지금 로마교회 성도들을 정죄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들의 모습을 조금 돌아보십시오!’(메타인지)

 

17. 로마서를 성경으로 받아들여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바울의 애정 어린 소송은 로마교회를 향한 소송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에게 하는 소송으로 다가온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구원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의인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무슨 일을 해결하려 할 때든지, 그 모든 것의 원리는 믿음이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일이 진리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the truth will set you free)”(요 8:32)고 할 때, 그 뜻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일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이다. 이 말이 어느 대학교에 걸려 있다 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학문적 성과를 통해서 얻게 된 지식이 우리를 자유케 해준다’는 뜻으로 오해되고 왜곡되기도 하지만, 진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것이다. 지식이 진리가 아니라 존재가 진리다. 하나님이 진리다.

 

18. 우리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즉, 진리가 드러나도록 살고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며 살아가는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가? 그렇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영광송(doxology)이어야 한다. 지금, 로마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혹시 그러한 것은 아닌가? 나 자신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메타인지가 필요하다. 바울은 우리에게 애정 어린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겨 묻은 개여, 똥 묻는 개를 나무라지 말라.” 비참한 현실을 직면하여,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살아야지, 서로에게 악한 일을 저지르면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일이 우리 삶 속에 일어나도록,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다. 그것이 로마교회의 평화요, 곧 우리의 평화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0. 25. 07:39

바울과 나

(로마서 1:1-7)

 

1. 로마서의 첫 번째 단어는 ‘바울’이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바울, 종, 그리스도 예수 순으로 단어가 배열되어 있다. 한국어는 거꾸로 되어 있다. 바울은 지금 로마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교회와 친분이 없었다. 로마에 가본 적도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겸손을 보이는 것이다. 겸손과 더불어서 자기 자신의 역할(신분)을 명확하게 표명하는 것이다. 바울은 종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2. 종(둘로스)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비천한 용어가 아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에서 말하는 종은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바울이 말하는 종은 신학적 신분(하나님과 연관된 신분)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는 두 존재를 중재하는 중재자가 있다. 대표적으로, 모세가 있다. 일반적으로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때 그 중재자를 ‘종’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바울이 자신을 ‘종’이라고 부를 때의 뉘앙스는 사회적 신분으로서의 노예계급을 나타내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를 중재하는 자로서의 ‘종’을 말하는 것이다.

 

3. 바울은 자기 자신을 소개하면서, ‘사도’(아포스톨로스) 라는 용어를 쓴다. 사도는 ‘messenger’라는 뜻을 가진다. 뭔가(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바울이 가지고 온 메시지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다. ‘복음’(유앙겔리온)은 기쁜 소식이나 기쁜 소식을 낳은 업적을 말한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종, 사도, 복음에 잇대어서 소개를 한 뒤, 곧바로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4. 하나님의 복음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약속된 것이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데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신의 사도직이 구약의 예언자들, 특히 이사야 선지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체적 역사 속에서 나타난 인물로 소개하려는 것이다.

 

5. 로마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로마교회의 구성원인 강한 자들(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약한 자들(유대인 그리스도인)의 긴장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이 구체적인 정황과 긴장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로마서를 읽으면, 바울이 하는 말의 뜻은 산으로 간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겼다. 요즘 말로 개무시했다. 그런데, 그러한 태도를 지닌 강한 자들이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진지하게 듣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바울은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를 잇는 사도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약한 자들의 구체적 역사) 역사의 맥락 가운데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쉽게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6. 복음은 근거 없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강한 자들이 업신여기고 있는 약한 자들의 구체적 역사 속에서 전해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약한 자들은 의기양양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약한 자들이 강한 자들을 향해 우월감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이 약한 자들만의 복음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강한 자들, 즉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시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5-6절).

 

7. 복음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와, 유대인(유대인의 역사)을 거쳐, 유대인이었던 예수 안에 나타났고, 사도들의 중재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 전체적인 과정은 은혜(카리스)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이다. 그러면, 이방교회였던 로마교회가 가져야할 마음 가짐은 무엇이겠는가? 존중과 감사이다. 로마교회는 우선 사도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약한 자들(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복음을 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복음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전해졌는지를 말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마음에 존중과 감사를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8. 복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복음이 믿음을 견인한다. 하나님의 선물은 구원을 가져다 준다. 우리는 구원을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당 가는 것’으로 자꾸 축소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구원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그냥 죽는 날 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 있는 순간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물은 그게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생명을 풍성하게 한다. 그게 구원이다. 깨끗한 공기, 깨끗한 물, 맑은 하늘, 좋은 친구, 일할 수 있는 직장, 가족, 아름다운 자연 풍경, 이뿐 아니라 나의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주는 좋은 말들, 이 모든 것이 구원이다. 즉,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다.

 

9. 바울이 로마교회에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인사말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를 꼽으라고 하면, ‘믿어 순종하게 하다’를 꼽고 싶다.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 듯하면서도 모른다. 믿음에 대한 이해 중 가장 최악은 믿음을 ‘자기 확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심/욕망을 담아 믿음에 대해서 말하는 데 익숙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욕망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의 욕망과 전혀 상관이 없다. 믿음은 하나님의 복음(은혜, 계시)에 대한 반응이다. 믿음에는 우리의 욕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복음)가 먼저 일으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10. 바울은 믿음을 순종(복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순종이나 복종이라는 말은 현대인에게 매우 거슬리는 용어이다. 한국어로 성경이 번역될 때 현재 한국사회와는 크게 다르게 그때는 유교적인 문화가 한국사회를 훨씬 깊게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의 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 순종(복종)은 위계질서 가운데서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게 보이는 반응을 뜻한다. 특별히, 자녀가 부모의 말에 순종(복종)하는 것은 미덕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위계질서가 무너진 사회에서 순종(복종)이라는 말은 매우 위압감을 준다. 그래서 용어를 조금 변경할 필요가 있다. 순종(복종) 보다는 ‘존중’이라는 용어가 요즘 시대에 더 적합한 용어 같다.

 

11. 사실, 예전의 유교 문화, 위계질서가 확고한 문화에서 순종(복종)도 ‘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자녀가 부모를 ‘존중’하는 것은 순종(복종)하는 것이다. 종이 주인을 ‘존중’하는 것은 순종(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유교문화가 지배하는 위계질서 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니, 용어를 고쳐, ‘존중’으로 쓰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즉, 믿음은 존중이다. (김근수, 로마서 주석 , 25쪽) 믿음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을 생각과 의지를 없애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이해가 안 되면, 무조건 믿으라.”는 말을 너무도 많이 들었다. 그렇다 보니, 믿음은 이성과 상관없는 몰지각한 행위로 오해 받기도 한다.

 

12. 아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존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와 생각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신앙은 상호 존중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중하신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리에게 복음을 주실 때, 우리를 무시한 상태에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존중해서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존중해서 받는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존중이 담겨 있다. 이 말은 바울이 로마교회에 바라는 것은 ‘존중’이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로마교회 교우들이 바울 자신을 존중해 줄 것을 바랬다. 더불어, 바울은 로마교회 교우들이 복음을 존중하기를 바랬다. 그래야, 서로 업신여기고 비판하던 사이가 서로 존중하는 사이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13.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종 무례한 사람을 본다. 일방적으로 말하고, 일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본다. 이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믿음은 존중을 불러온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대하여 존중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존중하는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상호 존중이 없는 신앙은 매우 험악하고, 상호 존중이 없는 교회에는 평화가 없다. 로마교회가 딱 그랬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가 바른 믿음을 갖길 원했다. 즉,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이 서로 존중하길 원했다. 복음에 의하여, 서로 존중하게 될 때, 평화가 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14. 로마서를 읽으며, 우리는 바울의 자리에 ‘나’를 놓아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것과 같이, 로마교회도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요 교회이기 때문이다. 요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왜 교회를 다니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고, 교회를 다녀도 소속감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토대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자기 정체성이 약한 것은 토대가 약한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이 겪는 총체적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약물 의존이 많은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왜 사는 지 모르겠으니, 자기 정체성이 약해져 약물에 의존한다. 이것은 아주 큰 사회적 문제다.)

 

15.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가장 먼저, ‘바울’이라는 단어를 배치했다. 그리고 바울을 규정하는 용어로 종,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사도를 배치했다. 우리는 ‘나(내 이름을 배치하고)’ 그 다음에 나를 규정할 수 있는 어떠한 용어를 배치하겠는가? 바울이 자기 자신을 규정할 때, 종, 예수 그리스도, 사도 등의 용어를 이름 뒤에 배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복음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복음을 온 마음으로 존중(믿음)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을 둘러싼 종과 사도의 정체성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존중할 것이고, 그 존중은 서로 존중하는 평화의 상태로 이끌 것이고, 그 복음을 전하는 자로 따로 구별되어 부름 받았다는 자기 정체성 안에서 삶을 재구성할 것이다.

 

16. 바울과 나. 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도로 규정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누구로 규정하는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교회’로 모인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실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 바울과 똑 같은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나는, 누구인가?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0. 19. 03:01

약속의 말씀이 중요해

(로마서 9:1-13)

 

1. 바그너 음악을 좋아하세요? 바그너 음악은 아주 문제적이죠. 그래서 바디우나 지젝 같은 철학자들이 바그너의 음악이 가진 정치적 의미들을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바그너는 위험한가, 북인더갭, 2012) 바그너를 말하면 히틀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그너는 히틀러가 최애한 독일의 음악가였죠. 멘델스존도 독일의 음악가였는데, 히틀러는 멘델스존을 미워했습니다. 그가 유대인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죠. 얼마나 미워했는지, 멘델스존의 동상을 쓰러뜨리고, 그의 유산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할 정도였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히틀러는 바그너를 최고의 영웅으로 추켜세웠습니다. 바그너는 순수 독일 사람이었고 그의 음악은 독일인의 정신을 고취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바그너의 음악은 선동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2. 로마서를 살펴보면서 바그너와 히틀러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로마서에는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유대인들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11장이 바로 그 문제를 다루고 있죠. 사실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유대인들이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다 보니, 그들의 성공에 관심을 두고, 그들처럼 성공하고 싶은 마음에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두기도 합니다만(특별히 그들의 하브루타 교육법),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되든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관심사항이 아닙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유대인이라는 민족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일이 시간 낭비 같아 보입니다.

 

3.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데, 바로 로마서에서 바울이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하여 엄청난 고뇌와 번민을 하고 있는 본문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9장 1절을 보면, 바울은 무언가 비장한 말을 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바울은 심장에 슬픔과 번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심장에 슬픔과 번민을 가지고 있다, 라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벌렁입니다. 얼마나 답답할까, 불쌍합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러한 상태에 처해 본 적 있으신가요?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가득해서, 답답해 죽을 것 같은, 그런 일 말이죠. 그러한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혹시 그러한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심장을 가볍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4. 왜 바울은 자신의 심장에 슬픔과 번민을 가득 안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주 괴상한 일이 발생했는데,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사람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죠. 유대인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죠. “왜 유대인 대부분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복음을 전하면서 바울에게 이 문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문제였는지,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가득하여 숨을 못 쉴 지경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할 수 있을 지, 뾰족한 아이디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5. 우리는 그냥 이 문제를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거라고 말이죠.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를 제2의 이스라엘이라고 칭하면서, 하나님께서 촛대를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옮기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주 손쉬운 해결법이죠. 그런데, 로마서를 보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거의 소설을 쓰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왜곡하는 일이죠. 바울은 결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 걸쳐,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다룹니다.

 

6.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로마서의 본문은 매우 복잡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유대인이 아닌 내가 왜 이렇게 지루한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흥미를 전혀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부분이 우리에게 불필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이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지나치게 이스라엘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그릇된 시선을 갖거나, 또는 이스라엘과 그릇된 관계를 맺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로마서의 본문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배우면 됩니다. (특별히, 이 부분은 로마 교회의 컨텍스트에서,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7. 우리가 읽은 본문과 관련해서 논의 좁혀,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이나 일상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 우리는 기도를 배웁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저주를 받기까지 자신의 혈족인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가득하여 답답한데,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심장이 답답한 일이 있는데, 기도를 안 하는 게 이상한 겁니다. 답답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한 것이죠.

 

8.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문제는 바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바울은 가는 곳마다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유대인들에게 벌어진 일은 회개와 믿음이 아니라 바울을 향한 뭇매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바울을 구박했습니다. 죽일 정도로 구박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이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의 심장에는 슬픔과 번민이 쌓여갔습니다.

 

9.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쌓였다고 해서, 모두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그렇게 속상한 일이 있는데도, 기도하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보면, ‘기도하는 행위’ 자체도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셔야 할 수 있는, 거룩한 일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고 허락하신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겠죠. 그래서 기도는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가득할 때,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10. 여러분의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쌓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쌓이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발걸음이 기도의 자리를 향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그토록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쌓이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마다 유대인들로부터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도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그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만 한다면, 우리의 삶은 후퇴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심장에 슬픔과 번민을 쌓아 놓지 마십시오. 기도의 자리에 나아와 그 슬픔과 번민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께서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11. 둘째로, 이스라엘이 가진 특권이 오히려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이러한 특권을 가진 나라, 민족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특권 때문에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큰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특권, 능력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면, 우리가 가진 특권과 능력은 오히려 저주라는 것입니다.

 

13. 우리는 자녀들에게 특권과 능력을 물려주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래서 좋은 학군에서 교육시키고 싶어하고,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입히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우월한 위치에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인생을 사는, 남부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것은 참 알 수 없습니다. 특권과 능력을 가지면, 인생이 잘 풀릴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을 뿐더러, 내가 가진 특권과 능력이 오히려 나의 발목을 잡거나 인생을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딱 그랬다는 것이죠. 이것은 바울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정통 유대인으로서 가말리엘 문하생이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에 아주 열심이었는데, 바울이 가진 바로 그러한 특권이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4.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즉 자신의 모든 특권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알기도 작정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깨달았던 것은 그가 가진 모든 인간적인 특권은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모두 잠정적인 능력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생명을 맡기고 인생을 맡긴다는 것은 도박처럼 불안하고 불안정하고 의롭지 못하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는 것을 바울은 깨달았기 때문에, ‘오직 예수(Only Jesus)’를 외쳤던 것입니다.

 

15.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자신에게도 그렇고,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그렇고, 특권과 능력을 갈망하고 물려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물려주십시오. 여러분이 가지려고 하는 특권과 능력,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특권과 능력은 우리에게, 우리 자녀들에게 구원이 되지 못합니다. 특권과 능력이 오히려 가장 귀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가진 특권은 이 세상 어느 민족 누구에게도 없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그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방 나라에서 받아들인 것보다 훨씬훨씬 적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고, 우리의 자녀들도 그렇고, 하나님의 은혜 자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최고의 특권이고 능력인 것을 믿으십시오.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전하십시오.

 

16. 셋째,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약속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 약속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받기를 간구하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중요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것의 중요성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8명의 자녀 중, 오직 한 명, 이삭만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다. 세 명의 부인(사라, 하갈, 그두라) 중 오직 한 명, 사라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받은 사라가 이삭을 낳았고, 약속의 말씀으로 태어난 이삭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받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역전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17. 우리는 살아가느라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 노력이 우리를 복된 삶으로 이끌어주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압니다. 도대체 복된 인생, 행복한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해, 그냥 그렇게 일상에 치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말씀은 무엇이 복된 인생인지 정확하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은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받으려고 간절한 마음을 품은 적이 있으십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떠한 결단을 내려야할지, 우리는 대개 막막한 가운데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본토진척 아비의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른 이유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그 일을 감당하면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끝까지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18.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께 긍휼히 여겨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주님께 자비를 구하며,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라고, 약속의 말씀을 간구하십시오. 성경을 읽는 가운데, 기도하는 가운데, 예배드리는 가운데, 찬양하는 가운데, 봉사하는 가운데, 친교 나누는 가운데, 주님이 어떠한 시간에 어떠한 방식으로 약속의 말씀을 전해주실지 모릅니다. 약속의 말씀을 간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말씀을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하십시오. 약속의 말씀 한 마디가 우리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19. 세 가지를 꼭 기억하세요. 첫째, 기도의 자리에 나오십시오. 심장에 슬픔과 번민이 쌓일 때 기도의 자리에 나오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세요. 둘째, 우리가 가진 특권과 능력이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기억하면서, 구원 자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삶의 지혜임을 잊지 마세요. 셋째,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약속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우리의 인생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그 한 말씀만 있으면, 인생은 역전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사모하기를 마치 로또에 당첨되는 것처럼 사모하십시오. 아니 그보다 더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0. 10. 11:53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는 주님이시다

(로마서 10:1-15)

 

 1.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우리에게는 평화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평화가 없습니다. 연일 들려오는 뉴스를 들으면, 어떤 긴장감이 몰려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마겟돈(armerggedon/아머게른)’이라는 용어를 쓰며 임박한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고, 실제로 우크라이나-러시아 간의 전쟁은 더 격렬해지고 있어 푸틴 대통령이 수세에 몰려 핵 버튼을 누를지 모르는 긴장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러시아나 미국이나 방사선 치료제인 요오드를 대량 구입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2. 전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의 위협 속에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조차도 인플레이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비율이 93%에 이른다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44%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는 작년보다 30여% 오른 수치랍니다. 이제 정말 어디 나가서 외식하는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베트남 쌀국수 한 그릇 먹는 것도 부담입니다. 치솟는 물가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점점 움츠러들기만 합니다.

 

3. 그뿐만 아닙니다. 각 나라마다 보수와 진보 세력의 극렬한 대립 속에서, 각 나라마다 보수 정권이 들어서고 있는 실정입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가 서로 견제하고 협력해서 더 좋은 나라를 위해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일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현재 정치 풍토는 그렇지 못합니다. 핵전쟁의 위협과 경제적 불안정, 그리고 정치적 극한 대립 속에서 결국 고통받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사는 게 어려워지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보수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포용(embrace)과 베풂(generosity)은 사라지고, 배제(exclusion/discrimination)와 자기챙김(selfishness)만 늘어납니다. 배제와 자기챙김으로 인해 누군가는 차별당하고 버림당하기 마련입니다. 누가 그러한 험한 일을 당하겠습니까? 약자들입니다.

 

4. 이러한 때에 신앙을 갖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본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하여, 그리스도인 됨에 대하여 깊은 묵상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쉽게, 신앙을 갖는다는 것을, 배제와 자기챙기에서 소외되지 않고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쉽게 말하면, 다른 이들이 굶을 때 굶지 않는 것, 다른 이들이 전쟁으로 죽어나갈 때 죽지 않는 것, 다른 이들이 보호받지 못할 때 보호받는 것 등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5. 신앙을 갖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이기적인 것이라면, 이 어려운 세상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신앙인,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이들이 굶을 때 내가 굶지 않는 것을 감사하는 게 아니라 굶고 있는 자들을 위해서 내가 가진 빵을 나누는 것이겠죠. 다른 이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고 있을 때 나는 삶아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멈추어 세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겠죠. 다른 이들이 보호받지 못할 때 나는 안전하다는 것에 감사하는 게 아니라,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안전을 내어놓는 것이겠죠.

 

6. 시대가 어려울수록, 시대가 악할수록, 예배와 기도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악함은 우리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어려운 시대에, 악이 창궐한 시대에 마음을 강퍅하게 하거나 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선하신 주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간구하고, 이 시대의 악함에 물들지 않도록 우리를 하나님께 내어놓는 일입니다. 예배의 자리만큼, 기도의 자리만큼 악에서 먼 자리도 없습니다. 예배의 자리만큼, 기도의 자리만큼 선에게 가까운 자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대가 어려울수록, 시대가 악할수록, 예배와 기도의 자리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7.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것은 바울 서신에 계속해서 면면히 흐르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이것을 줄기차게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는 아주 실제적인 문제였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생긴 갈등은 보통 갈등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를 보면, ‘원수, 막힌 담’ 등이 있습니다. 원수 같은 사이, 막힌 담이 있어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에 무슨 평화를 바라겠습니까?

 

8.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그 당시 사람들이 들었을 때 코웃음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과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죠. 원수를 사랑하라. 바울도 똑같은 복음을 전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막힌 담을 허물라. 이 복음은 예나 지금이나, 굉장히 전복적입니다. 쉬운 말로,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코웃음 치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취급받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힘든데, 무슨 원수를 사랑합니까? 천사 같던 아이가 청소년기만 되면 천하의 원수가 되는데,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가당키나 합니까?

 

9. ‘원수, 막힌 담’ 이런 용어는 사람들 간에, 또는 존재들 간에 있는 극한 대립을 말할 때 쓰이는 용어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인간과 자연 사이에, 극한 대립이 있어 서로가 서로에게 악을 저지르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 지옥 같은 일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그러한 악함을 치유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복음의 역할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원수, 막힌 담’과 같은 용어를 써야할 극한 갈등을 해결하려면, 로마교회의 구성원들이, 강한 자들이나 약한 자들이나 누구든지, 복음을 더 굳게 붙드는 수밖에 없다고 강변합니다.

 

10. 복음을 붙든다는 것은 예수의 영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의 영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믿음에 대해서 엄청난 강조를 합니다. 본문에서도 ‘믿음’이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은 9절과 10절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교회 사람들에게 구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천국 가는 것이겠습니까? 그건 너무 구원을 탈맥락화시키는 것입니다. 로마교회의 구원은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사이에 평화가 내리는 것입니다. 둘이 더 이상 싸우거나 서로를 무시하거나(업신여기거나) 판단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화평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 그러한 구원이 임하기 위해서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복음에 더욱 붙들리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11. 믿음을 갖는다는 것, 복음에 붙들린다는 것, 예수의 영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여전히 신앙인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예수의 영(스피릿)이 충만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런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거리두기가 해제된 덕에, 지난 주에 많은 학교들이 축제를 벌였습니다. 학교 축제들 가운데 연세대학교의 ‘아카라카를 온누리에’와 고려대학교의 ‘입실렌티’가 유명한데, 그들의 축제가 화제였습니다. 연대생들은 ‘아카라카’를 한 번 참석하고 나면 애교심, 즉 연세의 스피릿이 증가합니다. 고대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실렌티에 참가하고 나면 고대의 스피릿이 증가합니다. 그래서 학교가 지향하는 가치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모교를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그야말로, 연대 스피릿, 고대 스피릿이 그들 안에 생기는 것입니다. 스피릿이 있고 없고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연대나 고대의 스피릿이 없는 사람은 전혀 감흥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피릿을 가진 사람은 마음 가짐도 다르고 행동도 다릅니다. 

 

12.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의 영(스피릿)이 충만하기를 바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스피릿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는 주님이시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교회 성도들만의 스피릿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스피릿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고백하며 마음 속에서 찌릿찌릿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다함께 고백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는 주님이시다!” 이 땅의 모든 이들이 이 고백을 하면서 마음 속에 찌릿찌릿한 경험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이 이처럼 전쟁과 당쟁 속에서 평화를 잃어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고 악한 일을 펼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평화이시고, 원수들이 서로 사랑하게 하시는 능력이시며, 막힌 담을 허무시고 둘을 하나 되게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13.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하는 복음의 스피릿을 갖는 것은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이라면, 부부 간의 갈등도 복음 안에서 풀어나가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부부가 함께 예수의 스피릿, 예수의 영이 충만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만큼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게, 부부 간에 있는 미운 마음이라든지 막힌 담을 허물어낼 수 있는 방법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전 한 남자가 직원이 동료 여직원을 스토킹 하다가 결국 살인을 저지른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들을 둔 부모들이 반성을 많이 했죠. 우리는 흔히, 딸자식 둔 부모들에게 딸들을 잘 간수하라고 말하지만, 이건 틀린 말이라는 겁니다. 아들을 둔 부모들이 아들 교육을 잘 시켜야 하는 것이죠. 여러가지 구조상, 남자들이 정신 차리고 잘 해야 합니다.)

 

14. 남자들이 잘 해야 합니다. 남편이 잘 해야 합니다. 남자들이 예수의 영이 충만해야 합니다. (물론 여성들도, 아내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남자들이 예수의 영이 충만해야 가정도, 이 사회도 평안합니다. 토요일 새벽기도회에 남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팬데믹 전에는 남자들이 토요일 새벽기도회에 더 많이 나왔는데, 팬데믹 지나면서 풍경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남자들이 예수의 영이 충만하면, 가정도 평안하고, 교회도 부흥합니다. 사회도 안녕해지고요. 여성분들, 남편들 바가지 긁을 때 돈 많이 벌어오라(술먹지 말라, 골프치지 말라, 게임하지 말라, 정신 좀 차리라)고 바가지 긁지 마시고, 토요일에 교회 가서 기도하라고 바가지를 긁으세요. 아니면, 남편을 데리고 오시던지요.

 

15. 삶이 어려울수록, 세상이 어려울수록, 세상이 악할수록, 신앙인은, 그리스도인은 예배와 기도의 자리에 나와서 예수의 영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가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삶, 생명에 예수의 영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할 때, 마음이 뜨거워지길 바랍니다. 바래서 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를 내어 주어, 어려운 시절에 배제와 자기챙김에 휘말려들지 않고, 포용과 베풂(나눔)의 삶을 잃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며 막힌 담을 허무는,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9. 28. 03:31

불평등을 허물려면

(로마서 13:8-10)

 

1. 영어 이름의 ‘Meg’는 ‘Margaret(마~거,렛)’의 줄임말이고, ‘진주(pearl)’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진주는 Meg라고 이름을 지었으면 딱 미국식 이름이 되는 것이다.) 영어 이름의 ‘Jo’는 독립적인 이름이기도 하고, ‘Joanna, Joanne, Jody and Josephine’이나 ‘Joseph’의 줄임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God is gracious)’의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 이름의 ‘Beth’는 ‘Elizabeth’의 줄임말이고, ‘집(house)’라는 뜻이다. 영어 이름의 ‘Amy’는 프랑스, 라틴어에서 온 이름이고, ‘Beloved’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랑이 듬뿍 담긴 이름이다.

 

2. Meg, Jo, Beth, Amy는 루이자 메이 올컷(Louisa May Alcott)의 소설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다.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68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매사추세츠 주에 사는 마치(March) 가족의 네 자매의 성장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너무 유명한 소설이라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었고, 세계명작소설 리스트에 올라가 있어, 어린 시절 이 책을 읽어보았으나, 남자인 나로서 여자 아이들 이야기가 재미있게 다가올 리 없었다. (요즘 다시 읽으면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다시 읽고 싶다.)

 

3. 요즘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한국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바로 이 소설을 모티브로 만든 드라마이다. 물론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드라마의 구성 중 소설에서 따온 것들이 눈에 많이 띈다. 세 자매의 캐릭터도 그렇고, 원래는 네 명의 자매였다는 설정도 그렇다. 그리고 자매들의 성장 과정을 그린 것도 그렇다. 그런데,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 드라마를 쓴 작가의 집필 의도이다. 드라마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듣길 원할까? 사랑도 아니고, 복수도 아니고, 모험도 아니고… 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우리 사회 곳곳에 돈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흐른다. 그런 사회의 영혼은 어떤 모습일까? 돈에 대한 우리들의 욕망은 어디에서 왔을까? 오늘도 우리는 돈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꿈을 꾸었나? 그런 것들을 쓰려고 했다.”

4. 2천년 전 로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해 쓰여진 <로마서>는 2천년이 지난 21세기 우리 시대에 무슨 메시지를 던지는 것일까? 조금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을 읽으면서 이러한 질문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2천년 전에 쓰여진 이 고문서가 지금 나의 삶에,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몇 주에 걸쳐 로마서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로마교회에는 큰 갈등이 있어 평화가 없었는데, 그 갈등의 원인은 ‘강한 자들’이라고 불리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약한 자들’이라고 불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간의 다툼 때문이었다.

 

5.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강한 자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들이 실제로 로마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먹는 문제나 절기를 지키는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약한 자들’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들은 실제로 로마 사회에서 별볼일 없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 없었고 절기를 지키는 문제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6. 이들은 동일하게 ‘그리스도인’이라 불렸지만, 그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문화적 배경은 너무도 달랐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익숙했고 율법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몰랐고 율법을 존중하지 않았다. 이렇게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집단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를 이루어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높은 지위’에 기대어, 즉 자신들이 가진 힘에 기대어 힘없는 유대인들을 업신여겼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가진 ‘특권’, 즉 자신들이 가진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와 율법에 근거하여 이방인들을 판단했다. 사람을 업신여기는 부류와, 사람을 판단하는 부류가 한 공동체에서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바울은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고자 로마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다.

 

7. 로마서에 전개되는 모든 이야기들은 로마교회에 발생하고 있는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목회적 호소다. 본문도 그러한 배경 속에 있다. 바울은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모두에게 호소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 사실 남을 사랑하는 이는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이 말은 율법을 잘 아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나, 율법을 잘 모르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매우 적합한 접근이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율법의 조항을 일일이 열거하고 드러내지 않더라도, 율법이 담고 있는 그 정신을 담아내는데 있어 두 부류 모두에게 설득력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8. 우리는 지금 로마서를 거꾸로 읽고 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로마서를 앞에서부터 읽었다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용어보다 ‘죄’, 또는 ‘죽음’이라는 용어를 먼저 만났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로마서를 거꾸로 읽은 덕분에 교리 같은 딱딱한 내용을 먼저 만난 것이 아니라 ‘뵈뵈’와 같은 사람을 먼저 만난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서는 거꾸로 읽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만약 죄나 죽음을 먼저 만났다면, 우리의 마음은 더 무겁고 어두웠을 지 모른다. 하지만 죄나 죽음보다 사랑을 먼저 만나면, 그 이후에 죄와 죽음을 만나더라도 우리의 밝고 생기 넘치는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다.

 

9.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 너무 멋진 말이다. 이것만큼 우리 시대를 날카롭게 꼬집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2천년 전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에 살아 역사할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 시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는 빚이 무엇인가? 돈에 대한 빚이다. 얼마전 나온 한겨례 신문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가계 부채가 GDP(국내총생산) 대비 104%에 이른다. 전세계 1위다. 가계부채비율이 국내총생산을 넘어서는 것은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유일하다. ‘영끌’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사람들은 돈을 빚지고 집이든 땅이든 ‘부’를 소유하려고 한다.

 

10. 위에서 본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작가의 집필 의도에서 보았듯이, 요즘 젊은이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 복수에 대한 이야기, 모험에 대한 이야기보다 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세상이 온통 돈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그 이외에 다른 이야기는 모두 허황된 이야기이고 쓸데없는 시간낭비로 취급당한다. 실로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지는 시대가 결코 아닌, 돈의 빚을 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한 우리 시대에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말라”는 이 말씀은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11. 바울은 왜 로마교회를 향해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말하는 것일까? ‘빚지다’라는 말은 빚을 갚으라는 말이 아니라, 빚진 사람처럼 생각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사랑의 빚을 졌다는 것은 사랑이 서로에게 ‘의무’라는 뜻이다. 바울은 어떻게 하면 로마교회에 있는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판단하는 상황 속에서 이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은 ‘복음’에 충실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1장부터 11장이다. 그리고 그 복음에 기대어 서로 평화롭게 지낼 것을 권면하는 것이 12장 이후의 말씀이다.

 

12.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은 서로 평등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이들은 서로 자신들이 저들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강한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위, 힘에 기대어 그런 생각을 했고, 약한 자들은 자신들의 가진 특권에 기대어 그런 생각을 했다. 이들 사이에는 엄연한 ‘불평등’이 존재했다. 평등이란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동등하게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강한 자들은 자신들의 가진 힘에 기대어 약한 자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약한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특권에 기대어 강한 자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서로가 평등하지 않다고 불평등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여러분은 모두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평등한 인간입니다!’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을까?

 

13. 앞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복음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1~11장에서 바울은 ‘죄’와 ‘죽음’의 이야기를 한다. 사람은 평등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것은 ‘죄’와 ‘죽음’을 대면할 때이다. 지위고하/특권의 유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죄인다. 이 말은 ‘너는 죄인이야!’라고 상대방을 정죄하려는 말이 아니라, 서로 자신들이 잘났다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얼마나 평등한 인간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 앞에서는 지위고하/특권의 유무는 아예 소용이 없다. 모두 죽는다. 모든 사람이 가장 평등해지는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다.

 

14. 그러나, 죄와 죽음의 순간만 인간이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실, 죄와 죽음의 순간에만 인간이 평등해진다면, 이것은 좀 억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인생이 너무 불쌍하지 않는가.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것,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 이것은 매우 진리이나, 매우 인간을 슬프고 아프게 만드는 진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준다. 우리 인간이 평등해지는 순간이 또 있는데, 바로 서로 사랑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믿음의 순간이다. 즉, 믿음과 사랑은 인간에게 평등을 가져다 준다.

 

15.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돈에 대한 이야기라는 통렬한 사실 앞에서, 젊은이들은 왜 돈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듣고 싶어할까를 묻는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사회에서 지독한 불평등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이들이 사회에서 경험하는 지독한 불평등을 이겨내는 해결책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시피, 돈이 많으면 사회에서 불평등을 경험하는 일은 피할 수 있겠으나, 남들에 비해 돈이 많은 것 자체가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남들보다 돈이 많다는 것 때문에 돈 없는 자들을 차별하고 그들을 평등하지 않게 대하는 것은 자신의 특권인양, 비뚤어진 사고구조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즉, 불평등을 허물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16.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을 너무 낭만적으로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울이 로마교회 교우들에게 이 말씀을 전할 때, 이 말은 전혀 낭만적인 말이 아니었고, 듣는 이들 입장에서도 전혀 낭만적인 말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아주 실제적인 갈등이 존재했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사이엔 막힌 담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교회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이었다. 얼굴 맞대고 사는 이웃이었다. 얼굴 맞대고 사는 이웃 사이에 ‘막힌 담’이 놓여 있다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바울은 말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은 서로 이웃이지만, 서로에게 악한 일을 저질렀다. 서로 업신여기고 판단했다.

 

17. 로마교회에 만연했던 불평등을 해소하는 길은 그들이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평등을 해소하기에는 어딘가 좀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죄와 죽음을 떠올리며 불평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왠지 서글퍼보인다. 하지만, 바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더 좋은 길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 외에 빚을 지지 않는 것이다. 정말 너무도 인간적인(또는 너무도 복음적인), 인간의 품위와 인격을 세워주고 지켜주는 놀라운 방식이다.

 

18. 가계부채가 하늘을 찌르는 듯이 높은 이 시대에, 사회에서 경험하는 지독한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돈에 빚지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시대에,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시대를 따뜻하게 보듬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빚지고 사는 인생, 지긋지긋하지 않나? 돈 버느라 날려버린 내청춘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 돈 때문에 내쉰 한숨, 돈 때문에 흘린 눈물을 생각하면 우리의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나? 우리는 언제쯤 돈의 빚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게 죽음을 통해서만 그럴 수 있는 거라면, 우리의 삶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19. 불평등을 허물려면, 세상이 가르쳐주는 돈에 빚지며 사는 것에 대하여 당당히 ‘No’를 외치며,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을 믿어야 한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이다. 돈이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불평등을 해결한다. 사랑하면, ‘너와 나’는 동등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사랑하면 서로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일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진리

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성취되도록 노력하며 이러한 세상을 상상하고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상대방에게 사랑의 빚을 진 것처럼 사랑하십시오. 십자가 위에서 사랑으로 불평등을 허물어버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그렇게 하십시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 이것은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9. 19. 13:32

로마서 3.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로마서 15:1-7)


1. 바울 신학 연구(로마서)의 권위자 중 한 명인 비벌리 가벤타가 쓴 로마서에 대한 대중적 안내 책자인 <로마서에 가면>을 보면, 로마서에 충분히 머물라고 조언한다. 그래야 로마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충분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현대인들이 가장 못하는 것 중의 하나가 ‘충분히 머무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구석구석 보는 일을 시간 낭비라 생각하거나 지루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현대인의 습관은 ‘관광’이라는 여행 상품에 녹아 들어 있다. 아무리 좋은 곳에 가도 우리는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그래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피곤함과 ‘그곳에 다녀왔다는 약간의 만족감과 우월감’ 뿐이다.

 

2. 충분히, 오래, 머문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를 내어준다는 뜻일 거다. 자기를 내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변화를 이룰 수 없다. 로마서에, 좀 더 넓게 말해, 성경에 충분히, 오래, 머무는 일은 단순히 시간을 거기에 쓰라는 말이라기 보다, 자기 자신을 로마서에, 성경에 내어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 현대인들이 잘 하지 못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에 대한 숭배’, ‘개인의 우상화’가 깊이 뿌리내려진 현대 사회에서 ‘자기를 내어준다’는 말은 그 개념 자체를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이 말을 이런 식으로 알아들을 것이다. ‘나를 팔라는 뜻인가? (우리는 로마서에 오래 머물면서 구석구석 살펴볼 것이다.)

 

3. 인간이 가장 쓸쓸함(lonely feeling/마음이 외롭고 허전하다)을 느끼는 때는 (상대방/사람들/공동체로부터) 이해 받지 못할 때이다. 쉽게 얘기하자면,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줄 때 가장 섭섭하고 쓸쓸하다. 예수님의 인생도 그랬지만,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의 인생이 그랬다. 바울은 쓸쓸했다.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것에 대해서, 사람들로부터, 특별히 동족인 유대인(그리스도인)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했다. 바울이 일평생 사역을 하면서 많은 동역자를 만나서 위로를 받았지만, 그의 마음 한 켠은 언제나 쓸쓸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서도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사람, 특별히 인정받기를 가장 바랐던 한 사람(그게 아버지든, 어머니든, 누구든)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바울은 동족/부형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4. 15장 후반부에 보면, 로마에 직접 방문하고 싶은 바울의 소망과 더불어 예루살렘 방문 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특별히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 계획에 대해서 기도 부탁을 한다.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라면서 간절히 기도 부탁을 한다. 이것은 참 간곡한 기도이고, 쓸쓸한 기도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예루살렘을 방문하려 했던 것일까?

 

5. 로마서는 AD 56년경에 쓰였다. 이제 쉰 살이 넘어선 바울은 지중해 동쪽 지역 선교를 끝내고, 지중해 서쪽 지역 선교를 하면서 인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지중해 동쪽 지역 선교를 하면서 바울은 유대인 동족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에게서나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서나 똑같았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대하여 적대감이 심했다. 그리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선교 방식에 대해서 별로 좋은 마음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지중해 동쪽 지역을 선교할 때 바울은 유대인들과 계속해서 아주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바울이 극심한 갈등 중에 선교를 그만 두지 않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바울이 자신의 편지 곳곳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없었다면 선교를 진작에 그만 두었을 것이다.

 

6. 15장 후반부에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에 가난 자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얼마를 연보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참 훈훈하구나’라며 그냥 지나칠 지 모르지만,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일단, 이방인들의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받아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로마서에서 발생한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갈등에서 보았듯이, 이방인들의 구제 헌금은 유대인들이, 그것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넙죽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방인들의 헌금은 마치 이방신에게 드린 제물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이 주는 구제 헌금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이방신에게 드린 제물을 먹는 것과 같았다.

 

7. 게다가,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 지옥의 불쏘시개 정도로 쓰이면 될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전하고 다니는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이방인의 멸망, 특별히 로마 제국의 잔혹한 멸망을 외치고 다녀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판에, 오히려 이방인의 구원을 전파하고 다니는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일제 시대 때 어떤 목사가 일본 사람들에 대하여 구원을 전파하고 다녔다고 해보라. 그러면 독립 운동하는 사람들이나 일반 한국 사람들에게 그 목사가 좋게 보일 리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였던 것이다. 피해자 측이 가해자에 대한 구원을 외치는 사람에 대하여 고운 시선을 갖는 것은 쉽지 않은 법이다.

 

8. 바울은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방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모은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는 일은 매우 중차대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기 보다 자신이 직접 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에 가서 그곳의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싶어했다. 만약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이방인들의 헌금을 흔쾌히 받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헌금이 전달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동안 그토록 노력해 왔던, ‘막힌 담’이 허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방인 사역이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9. 예루살렘에 이방인들의 헌금을 전달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기에 한 사람의 동역자로부터라도 기도를 더 받고 싶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에게도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애달픈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바울이 경험하고 있는 쓸쓸함을 느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로마서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일이라면, 우리는 바울의 사역을 위해서 함께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매우 긴장하고 궁금해할 것이다. 과연,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교회들의 구제 헌금을 기쁨으로 받았을까?

 

10. 로마서는 이러한 긴장감이 흐르는 시기에 쓰여진 편지이다.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내 놓고, 바울은 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런데 사도행전(21장 이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인하여 체포된다. 바울의 바람과 기도대로 일이 잘 진행되지 못한 듯하다. 이방인들의 구제 헌금은 예루살렘 공동체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된다. 로마로 압송되어 갔을 때 로마 교회는 이미 뵈뵈를 통해서 바울의 편지를 받아본 후였다. 그럼 우리는 어떤 기대를 가질 수 있을까? 바울의 편지를 받아본 로마 교회 공동체가 바울이 편지에서 복음을 따라 권면한 대로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화평을 이루어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바울을 도와 스페인 선교를 했을까?

 

11. 아닌 것 같다. 사실 이게 마음 아프고 안타까운 장면이다. (성경을 읽을 때 이렇게 정서적으로 읽는 일(정서적 성경읽기)은 굉장히 중요하다. 감정의 교차가 있어야 성경이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 <나의 사랑하는 책> 찬송가에서 어머니의 성경읽기를 자식이 기억한다. 어머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의 신앙이 위대한 이유다. 우리는 그 장면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가?) 만약 로마교회가 바울이 편지에서 권면한 대로 화평을 이루어 바울의 스페인 선교를 도왔다면,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스페인 선교를 한 것까지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바울의 스페인 선교와 그의 말년 인생에 대해서 아무런 기록도 하고 있지 않다. 굉장히 열린 결말을 맺고 있다.

 

12. 로마서를 읽어 나갈 때, 바울에 대한 이러한 파토스(감정적 호소)를 느끼지 못하면, 로마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굉장히 수사적으로 쓰고 있지만(이성적으로 쓰고 있지만), 그 뒤에 흐르는 정서는 굉장히 감정적인 호소이다. 로마 교회에 화평이 있어야,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자신의 인생 말년의 마지막 사역 목표인 스페인 선교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서는 절실하다. 교리서가 아니라, 로마 교회 공동체를 온 힘 다해 설득하고 있는 호소문이다.

 

13. 본문은 ‘강한 자들’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바울은 자신을 ‘강한 자들’과 동일시한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바울은 혈통으로는 베냐민 지파로서 엄연한 유대인이었지만, 바울은 자기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다는 소명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강한 자들’,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동일시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즉 ‘강한 자들’은 로마에서 ‘약한 자들’에 비해서 훨씬 지위가 높았다. 그들에겐 힘이 있었다. 힘 있는 자가 마음을 악하게 먹으면 힘 약한 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힘 있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내에서 악한 마음을 먹으면 힘이 약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차별을 받고 억압받으며 교회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14.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에서 ‘약점’은 ‘약한 자들’이 열등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법이다. ‘자기를 기쁘게 한다’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다. 강한 자들은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보통,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강한 자가 되고 싶어한다.) 이것은 ‘자기에게 좋을 대로 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지위가 있다고, 힘이 있다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한다.

 

15. 바울은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지 말라고 말하며, 그 이유를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시킨다. 그리스도께서 만약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며,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지 않고 고난을 감당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을 내가 대신 다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힘 있는 자들이 행동할 때는 반드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덕을 세우다는 ‘교회를 세우다, 공동체를 세우다’의 뜻이다. 덕이란 무엇인가를 허무는 게 아니라 세우는 것(upbuilding)이다. 우리는 무너뜨리는 사람인가, 세우는 사람인가. 덕 있는 사람은 세우지 무너뜨리지 않는다.

 

16.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4절). 바울의 이방인 선교 사역에 얽힌 괴로움과 쓸쓸함을 안다면, 이 구절은 정말 짠하게 들려올 수밖에 없다. 바울에게 성경은 구약성경이었겠으나, 바울은 이방인 선교 사역을 감당하면서 당하는 고통 가운데서 성경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이방인 선교 사역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내가 목회를 그만두지 않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목회 사역을 하는 이유는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인내할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인내와 위로와 희망을 준다. 그래서 성경은 정말 소중하다.

 

17. 바울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은 5절부터 7절에 담겨 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5-7절). 로마교회 성도들은 인내와 위로와 소망(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을 때’ 가능한 일이다.

 

18.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못하는 것이 ‘인내’이다. 참지 못한다. 기다리지 못한다. ‘내가 왜 참아!’하면서 폭발하기 일쑤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목말라 하는 것이 ‘위로’이다. 위로 받고 싶어 몸부림을 친다. 위로에 목말라 엉뚱한 것에 빠져 목숨과 생활(삶)을 잃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없는 것이 ‘희망’이다. 희망 없이 산다. 그렇다 보니,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소비하면서 산다. 남아나는 게 없다. 희망이 없으니 영혼까지 탈탈 털어서 오늘 끝장내고 만다.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19.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결국 로마교회 공동체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여기에 있다. ‘강한 자들’,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나, ‘약한 자들’ 곧 유대인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으면 된다. 이거 너무 당연한 결론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리고 너무나 쉬운 결론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처럼 보이고, 너무나도 쉬운 일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 1세기 초대교회에서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일이었을 것 같은 ‘그리스도 예수 본받기’, 쉽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초대교회로 돌아가라!’는 말은 굉장히 어리석은 구호이다.

 

20. 우리의 신앙,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그리고 이 구절을 진지하게 묵상해 보자.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너희도 서로 받으라!” 너무나도 당연하고 쉬운 일 같으나,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하고 있지 못하는 일이다. 왜 1세기 로마교회 공동체는 이것을 하지 못했으며, 왜 우리는 여전히 이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로마서는 그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 이유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9. 12. 18:10

로마서 2. 업신여기는 자, 비판하는 자

(로마서 14:1-12)

 

1. 성경이 시대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성경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친절하지 못하다. 구약성경 중 열왕기상하를 읽을 때도 가장 헷갈리는 것은 왕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면서 남유다 왕과 북이스라엘 왕에 대한 지시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잘 알고 있지 못한 이들은 남과 북 왕조의 이야기가 얽히고 설켜 있는 이야기 구조가 굉장히 헷갈린다. 현대인들이 열왕기상하를 읽으면서 잘 분별해야 하는 것은 누가 남유다 왕이고, 누가 북이스라엘 왕인지 구분해 가면서 읽는 것이다.

 

2. 신약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이 쓰여진 시기에 따라서 차례대로 배열되어 있으면 좀 더 쉽게 다가올 텐데, 신약성경도 쓰여진 시기와 상관없이 뒤죽박죽 배열되어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굉장히 헷갈리게 만든다. 바울서신 중에 로마서가 가장 먼저 배열되어 있지만, 로마서보다 고린도서, 데살로니가서, 갈라디아서 같은 것이 먼저 쓰여졌다. 또한, 바울서신을 읽을 때는 사도행전과 함께 읽어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3.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 즉 사도들이 예수님의 승천 이후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다녔는지를 기록한 책이지만, 실상 들여다보면, 베드로와 바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에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13장 이후부터는 바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도행전 28장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사도행전 다음에 로마서가 나온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굉장히 헷갈리고, 로마서의 메시지를 오해할 소지가 있다. 로마서는 사도행전 28장에서의 바울 사역을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 로마서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들여다보기 전에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을 먼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 이하에 보면, 바울은 베드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좋은 말로 표현을 해서 그렇지, 좀 거칠게 표현하면, 바울은 베드로를 욕하고 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갈 2:11).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서 무슨 잘못을 한 듯하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바울은 베드로를 만나 면전에 대고 욕을 했다. 도대체 베드로는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갈라디아서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베드로는 매우 비겁한 짓을 했다. 안디옥에서 이방인(이방인 그리스도인)과 함께 밥을 먹다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인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보낸 어떤 이들이 안디옥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는 급히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리를 피했다.

 

5. 베드로만 이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전도한 바나바조차도 베드로와 동조하여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를 급하게 떴던 것 같다. 바울은 베드로의 이 모습이 전혀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며 베드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다시 한 번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6. 바울이 베드로에게 화가 나서 욕을 퍼붓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힘주어 말하는 것에 대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도행전으로 가야 한다. 사도행전 15장에는 굉장히 중요한 공의회(Church Council)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이렇게 공의회를 열게 된 이유는 15장 1절 이하에 나온다. “어떤 사람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7. 초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기독교의 유대화’ 문제였다. ‘그리스도인(follower of Christ)’이라는 말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 11장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데, 안디옥에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모여 안디옥 교회를 세우고 함께 지냈을 때, 그곳 사람들이 이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안디옥은 이방 지역이었고, 이방인들이 주된 멤버들이었던 교회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큰 시련이 닥치는데, 그것은 교회 바깥에서 온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온 시련이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이다. 이 핍박은 황당하게도, 복음의 핍박이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요구했던 것이다. “너희가 만약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거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이 되라!”

 

8. 이것은 이방인 전도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복음에서 벗어난 요구였다.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완강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으며, 이방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그리고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하여 세운 이방 지역의 교회마다 찾아다니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뒤엎는 일들을 했다. “바울이 가르친 것은 거짓이다. 너희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바울 서신을 들여다보면, 온통 이 문제이다. 갈라디아서도 그렇고, 고린도전서도 그렇고, 로마서도 그렇고, 중요한 바울서신들은 바로 이것에 대한 싸움이다.

 

9. 이 문제는 초대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을 예루살렘에 모이게 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있었던 첫 번째 공의회였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진다. 그 결정문을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는 베드로나 바울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였다)가 읽는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행 15:19-21).

 

10. 예루살렘 공의회의 판단은 한 마디로,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있어 율법을 준수할 필요가 없고, 유대인이 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악한 일들만 피하면 된다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공의회가 그렇게 결정했어도, 보수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율법의 행위들을 하지 않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멀리했고, 그들에게 계속해서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했다. 그래야만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복음을 율법의 행위들과 집요하게 결부시켰다.

 

11.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은 율법의 행위들과 복음을 연관시켜 구원을 말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가는 곳마다 골머리를 앓았다. 그리고 그 문제는 로마 교회에서도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로마서의 본문은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로마서에는 ‘강한 자들’에 대한 교훈과 ‘약한 자들’에 대한 교훈이 번갈아 가면서 나온다. 이러한 구조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을 모르면, 로마서의 메시지를 완전히 놓치고 엉뚱한 해석을 낳게 된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이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에게 번갈아 가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로마서가 눈에 들어온다. 이 구조를 기억하는 것은 로마서 이해에 있어 필수적이다.

 

12. 14장 1절의 말씀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여기에 두 주체가 등장한다. 하나는 ‘믿음이 연약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당연히 ‘약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너희’는 그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강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먹는 것’과 ‘절기를 지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울서신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아는 것은 로마서뿐만 아니라 바울서신 전체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하다.

 

13.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율법을 지키라”고 말하고, 바울서신에 자주 등장하는 ‘율법의 행위들’은 율법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강요하는 율법의 행위들은 세 가지이다. ‘음식정결법(먹는 문제/무엇을 먹을 것인가)’, ‘절기법/안식일 지키는 문제’, 그리고 ‘할례’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도행전 16장에 등장하는 ‘디모데’다. 디모데의 엄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이방인)이었다. 디모데는 사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를 데리고 선교 여행을 떠나려 할 때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유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한다. 또한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데리고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아주 큰 소동을 겪게 된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오해하길,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드로비모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일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들에 의해 고발을 당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바울은 체포되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로마로 압송된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한 사람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14. 교회의 일상생활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을 심하게 유발시킨 것은 ‘먹는 일’과 ‘절기를 지키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의 삶의 터전은 로마가 점령한 이방 도시들이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방 도시들에는 이방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방 신전에 바쳐진 음식들은 제의가 끝난 후 그 도시의 시민들이 나누어 먹었다. 이게 문제가 된 것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코셔 음식만 먹었다. 이방신에게 드려진 음식은 절대 먹지 않았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이방신에게 드려진 음식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음식이었지, 다른 의미를 갖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에서 이 두 부류는 이 문제 때문에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식탁을 공유하기 힘들었다. (너랑 같이 밥 안 먹어!)

 

15. 본문은 이렇게 먹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2-3절).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어떤 사람은 ‘강한 자들’을 가리키고, 믿음이 연약하여 채소만 먹는 자는 ‘약한 자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지금 두 부류에게 동일하게 교훈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어서 절기에 관해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5절). 여기서,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어떤 사람은 ‘약한 자들’이고,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어떤 사람은 ‘강한 자들’을 가리킨다.

 

16.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가?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서로를 업신여기고, 비판하는 자들 사이에 무슨 평화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교회에서 발생하는 일이라면, 이러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평화가 없는 교회는 그 자체로 악한 교회일 뿐 아니라 덕이 없는 교회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는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할 수 없는 교회로 보인다는 것이다.

 

17. ‘업신여기다’는 헬라어의 ‘엑수테네오’를 번역한 말이다. 좀 더 쉬운 말로 ‘멸시하다’는 뜻이다. “어떤 이를 지위나 장점이나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대하고, 고려 대상도 되지 않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말”이다(요즘 말로 개무시하다는 뜻). ‘비판하다’는 헬라어 ‘크리노’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사람이나 사물을 판단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정죄한다는 뜻”이다(요즘 말로 꼴깝떤다는 뜻). (스캇 맥나이트) ‘업신여기다’와 ‘비판하다’는 말의 뜻을 보면서, 로마 교회를 한 번 떠올려 보라. 참담하지 않은가? 교회가 두 부류로 나뉘어서, 이 부류는 저 부류를 업신여기고 있고(개무시하고 있고), 저 부류는 이 부류를 비판(정죄)하고 있는(꼴깝떨고 있는) 모습 속에서 무슨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가.

 

18. 이러한 두 부류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6-8).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이다. 그런데, 어떤가, 이게 단순히 개인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다가오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극명하게 갈등을 겪고 있는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자신의 삶 속에 있는 극명한 갈등을 해결할 마음도 없고 관심도 없으면서,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것’이라고 은혜 받고 마는 것은 말씀을 사사롭게 만드는 일이다.

 

19. 안디옥에서 베드로는 야보고가 보낸 유대인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더라도 결코 이방인들과 나누는 식사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안 되는 거였다.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은 아마도 매우 강경한 보수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정말로 복음에 붙들린 사도였다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했던 보수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맞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지켜주었어야 한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식사 도중에 자리를 피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뻘쭘하고 황당했을까. 이 사건 때문에 아마도 교회를 떠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20. 우리가 삶 속에서(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든, 어디서든) 경험하게 되는 갈등들을 보면서, 우리가 그 갈등들을 해결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그 갈등을 해결해 나갈 때, 로마서의 말씀은 우리를 잠시 멈추어 세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알려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평강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나니…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17-19, 23b).

 

21. 우리가 어디에, 어느 자리에 있는지, 업신여기는 자가 되거나 비판하는 자가 되기보다, 믿음을 따라 의와 평강과 희락을 생각하고,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들에게도 칭찬받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면 좋겠다. 존재하는 자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하지 말고(존재하는 자를 존재로 인정하는 첫걸음은 문안 인사 나누는 것 / 사람을 보면 인사를 하라), 내가 곧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존재하는 자를 존귀하게 여기고,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화평과 덕을 세우는, 즉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화평케 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9. 9. 07:36

[로마서와 한국교회]

 

요즘 한국교회를 보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신랄하게 비판하는 '약한 자들(유대인 그리스도인)'이 된 듯합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특권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특권 의식을 가질 수 있는 구체적 물증은 '토라'였습니다. 토라를 통해 그들은 선민의식을 가졌고, 그 특권을 이용하여 그 특권을 공유하지 못한 '이방인 그리스도인(강한 자들)'을 비판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토라 준수를 강요하고, 특별히 음식정결법과 안식일, 할례의 준수를 통해서 이스라엘 회중에 들어와야 구원을 받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바로 이러한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들고,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고, 경계 바깥에 있는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 이들이라는 이상한 이분법을 통해 자신들의 특권을 주장하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바울은 "당신들이 틀렸소!"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를 보면, 바울에게 비판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는 '실패한 유대인'이 되려는 듯합니다. 성경(또는 복음)을 '토라'로 전락시켜 자신들이 토라를 가졌기에 특권층이고, 그 특권 의식을 앞세워 도덕적 정죄에 앞장서면서 위선에 빠져버린 듯합니다. 그들이 위선자인 것은 안과 밖을 경계짓는 몇 가지의 율법만 준수할 뿐, 율법 전체를 신실하게 지키려는 생각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에 등장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행위들은 음식정결법, 절기(안식일), 그리고 할례입니다. 그들은 이 세 가지를 지키는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유대인이냐 아니냐, 즉 구원받았느냐 아니냐를 구분 지었습니다. 이 행위들은 그들의 신실함을 표시한다기 보다 그냥 자신들을 다른 이들과 구분짓는 경계 표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경계 표시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함으로 그들도 자신들의 경계 안에 들어와야 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줄곧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구분짓는 경계 율법(행위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술담배 문제, 제사문제, 주일성수 문제 등이었다가, 최근에는 동성애 문제, 종교다원주의 문제 등으로 그 이슈가 바뀌었습니다. 성경이, 또는 복음이 '토라'화 되면, 경계 지으려는 행위들이 계속해서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이라는 것이 '행위들'로 축소되어 바울이 그토록 바로잡고자 했던 '율법과 복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발목이 잡혀 초등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딱 그 수준으로 전락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게 경계 짓고 구분 지어 사람들을 정죄하는 한국교회를 생각하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가 다음과 같이 경계를 짓는다면, 굉장히 기분 나쁠 것입니다.

 

E.P. Sanders(E.P. 샌더스)의 '바파유(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출간 이후, 바울 신학은 이전에 보던 방식으로 더이상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샌더스의 연구에 따라, 유대교도 행위의 종교가 아니고 은혜의 종교라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시대에, '은혜'를 말하면서도 결국 그 은혜와 믿음을 '행위'로 다시 환원시켜 온갖 경계들을 만들어내는 한국교회의 후진성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우리 시대의 과제입니다.

 

본인이 다니고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에게 'E.P 샌더스'를 아느냐고 한 번 물어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 샌더스의 '바파유'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어떨까요. 또한 샌더스가 바파유를 통해서 기독교가 바울 신학, 유대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어떤 통념을 뒤집었는지를 물어보면 어떨까요. 본인 교회의 담임목사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그 교회를 계속 다녀도 괜찮을 것이고, 그러나 담임목사가 샌더스를 알지도 못하고, '바파유'가 뭔지도 모르고, 샌더스 이후의 바울 신학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른다면, 그 교회를 계속 다닐지 말지 한 번 고민해 보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특정인이나 저서를 기준으로 해서 담임목사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그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아닌지 판단한다면, 굉장히 기분 나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마치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처럼 복음과 율법의 행위들을 연관시켜, 사람들을 판단하고 경계 짓는 일에 너무 열중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 이름 외에 어떤 것도 알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은 바로 이 복음에 있는 것인데, 왜 우리는 여전히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하며,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나누고, 마치 자신들은 구원을 보장받은 사람들 인양 자신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경계 짓고 몰아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아직도 복음이 온전히 전해지지 못해서 그런 듯합니다.

 

한국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입니다. 한국인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한국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인 한국교회가 바울의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2의 이스라엘(유대인)이 되려 하지 말고, 신실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 한국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행위들을 통해 경계 짓는 신앙을 구사하지 말고, 은혜를 사모하여 성령의 법을 통해 온 우주 만물을 품에 안아 사랑과 믿음으로 교회를 세워가길 소망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9. 9. 06:10

로마서 1: 서로 문안하라

(로마서 16:1-16)

 

1. 로마서는 편지다. 2000년 전, 편지는 지금처럼 우편 배달부가 대신 배달해 주는 체계가 아니었다. 신뢰할 수 있는 인편을 통해 자신의 편지를 전달했다. 로마서는 바울이 썼지만, 그것을 로마교회에 전달한 인물은 ‘뵈뵈(Phoebe)’이다. 로마서가 편지라를 것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편지는 구체적인 발신자가 있고, 구체적인 수신자가 있다. 그리고 편지는 구체적인 내용을 다룬다. 즉, 편지를 쓴 사람은 수신자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의견을 표출하고, 그 의견을 통해서 수신자가 겪는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2. 로마서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교회가 당면한 삶의 정황을 먼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바울 당시 로마는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제국이었지만, 그곳에 자리 잡은 로마교회는 매우 보잘것없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로마교회는 한 덩어리의 교회가 아니었으며, 3~5개 정도의 가정교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당시 교회는 지금처럼 한 처소에서 다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몇 명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각 가정에서 삼삼오오 모였다. 3~5개 정도의 가정교회 구성원을 모두 합하면, 100명에서 최대 200명 정도의 그리스도인이 로마교회를 구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몇 명 안 되는 구성원이 모인 교회였지만, 그 안에서 발생한 문제는 굉장히 다이내믹하고 해결하기 쉽지 않았다. 로마교회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 부류는 로마교회를 세운 유대인 그리스도인(Jewish Christian)이었고, 다른 부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Gentile Christian)이었다. 유대인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로마교회는 처음에 유대인이 가진 문화 중심으로 교회가 운영되었다. 그러다, AD 49년경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우스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추방을 당한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18장 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유대인들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4. 사도행전 18장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유대인 추방 명령 때문에 브리스길라(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그곳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함께 사역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침 생업도 같아서 바울과 이들 부부는 함께 일하며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그곳에서 사역하는 일에 서로 잘 협력할 수 있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바로 그 시절에 고린도 근처에 있는 항구도시 겐그레아에서도 이들은 사역을 했고 그때 세워진 겐그레아 교회에서 뵈뵈를 만났을 거로 추측한다. 그러니까, 바울과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 그리고 뵈뵈는 꽤 특별한 인연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5. 몇 년 후, 추방령을 내렸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네로가 황제에 등극을 했고, 네로 황제는 클라우디우스가 시행했던 유대인 추방령을 취소한다. 그러자 로마를 떠났던 유대인 그리스도들은 다시 로마로 돌아왔고, 로마교회를 지키고 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다시 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추방당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를 떠나 있는 동안에 시작된다. 유대인 중심으로 로마교회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에서 떠나 있는 동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형성했던 교회 문화를 없애 버리고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교회 문화를 구축해 놓았던 것이다.

 

6. 게다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로마에서 오랜 세월 터를 잡아 살아온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추방당했다 다시 돌아온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신분에는 차이가 존재했다. 추방되었다 돌아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은 미미했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 또한 낮아졌다. 무엇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에 다시 합류했을 때 그들을 가장 괴롭힌 문제는 율법 준수의 문제였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떠나 있는 동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의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두 부류 간에는 갈등이 끊이질 않았고 둘 사이에는 깊은 골이 생겼다.

 

7. 로마서에는 로마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두 부류를 각각 지칭하는 명칭이 나온다. 강한 자들(the strong)과 약한 자들(the weak)이다. 누가 강한 자들이고, 누가 약한 자들일까?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강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약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정확히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르는 명칭은 아니다. 이방인 중에서도 약한 자들의 부류에 끼는 사람들이 있었고, 유대인 중에서도 강한 자들의 부류에 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나누는 기준은 율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율법을 준수하고 구약성경의 내러티브 안에 존재하기를 원했던 이들은 약한 자들의 부류에 속했고, 율법과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내러티브에 별 감흥이 없는 이들은 강한 자들의 부류에 속했다. (한국교회의 술담배 문제를 생각해 보라.)

 

8.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로마서에서 율법에 대한 이야기가 첨예하게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정황 때문이다. 율법이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두 부류가 평화를 이루는데 있어 율법의 문제를 넘어서지 않고는 해결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율법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매우 달랐기 때문에 두 부류 사이에는 긴장이 멈추질 않았다. 한 마디로, 평화가 없었다. 이 두 부류의 이러한 긴장 관계를 떼어 놓고 로마서에서 벌이고 있는 율법 논쟁을 읽으면 안된다.

 

9. 바울신학과 로마서는 개신교인들에게는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신학과 로마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서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바울의 신학과 로마서의 내용을 아주 면밀하게 살펴왔다. 최신 연구에 의하면, 로마서를 읽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로마서를 거꾸로 읽는 것이라는 제안이 있다(스캇 맥나이트). 로마서를 1장부터 정방향으로 읽어 나가면 놓치게 되는 것이 있는데, 로마서가 편지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는 교리서가 아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1장부터 정방향으로 읽어 나가면, 로마서는 바울이 기독교 신학을 정교하게 다듬은 교리서처럼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로마서가 편지라는 것을 망각하게 되고, 편지라는 것을 망각하게 되는 순간, 로마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왜곡되기 쉽다는 것이다.

 

10.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로마서는 16장부터 거꾸로 읽어 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16장부터 거꾸로 읽어 나갈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어떠한 교리적 선언(doctrines)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리고 공동체이다. 우리는 뵈뵈라 불리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먼저 만나게 되고, 곧바로 로마교회 공동체의 일원들(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이거다. 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복음이지, 사람을 어떠한 교리에 맞춰 재단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문안하는 것이다. 서로가 문안한다는 것, 안부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상대방을 내 삶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귐이 없으면, 그 어떤 장대한 교리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11. 로마서에서 뵈뵈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가본 적이 없다. 로마교회는 로마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교회이지, 예수님의 열 두 제자나, 바울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전혀 아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가본 적도 없고, 그곳의 구성원 중 몇몇만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 그 교회의 구성원들을 만나본 적이 없다. 즉, 그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나눈 적이 없다. 그래서 로마서는 편지 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조심스러운 말투와 격식을 갖춘 말투로 되어 있다. 이런 분위기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 특별히 빌립보서나 고린도전후서와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바울은 빌립보서나 고린도전후서에서는 그곳의 구성원들과 친밀한 교제를 했던 터라, 감정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그러한 감정의 호소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로마교회의 구성원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에게 감정적인 호소를 하는 일은 별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적이지 못하다.

 

12. 뵈뵈는 ‘로마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들고 로마에 왔다. 아마도 뵈뵈는 겐그레아를 떠나 로마에서 살려고 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뵈뵈는 로마교회의 교인들 앞에서 바울의 편지를 낭독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가진 여인이었다. 뵈뵈가 어떻게 바울의 편지를 낭독하느냐에 따라서 로마교회를 향한 바울 사역의 성패가 달렸던 것이다. 뵈뵈라는 이름의 뜻은 ‘타이탄의 여인’이라는 뜻이다. 이름에서 벌써 이방인이라는 게 나타난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에서 왔고, 그곳의 일꾼이었다. 한국어로는 일꾼이라고 번역했지만, 영어로는 servant 또는 deaconess로 번역한다. 우리가 잘 아는 말로,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였다.

 

13. 한국교회에서 집사(servant, deaconess/deacon/일꾼)라는 호칭은 장로나 권사 되기 전 단계의 직분 이미지가 강하지만, 성경에서 집사의 원래 뜻은 ‘교회의 사역을 공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교회의 공직자’라는 뜻이다. 지금도 공직자로 세워지려면 여러가지 도덕적 성품이나 지도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처럼, 뵈뵈가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였다는 것은 그가 교회 공동체로부터 그리스도인다운 성품이나 지도력의 은사를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집사 직분에는 이렇게 인정과 책임이 담겨 있는 것이다. (공무원, 공무수행)

 

14. 게다가 바울이 뵈뵈를 일컬어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라고 명확히 말하는 이유는 바울에게 있어 뵈뵈는 단순히 한 교회의 일꾼이 아니라 자신의 동역자라는 의미를 담고자 함이다. 뵈뵈는 그냥 집사가 아니었다. 바울의 동역자였다. 바울에게 아볼로나, 두기고, 디모데, 에바브로, 디도 같은 동역자가 있었듯이, 뵈뵈는 바울에게 이들과 같은 존재였다. 그뿐 아니었다. 뵈뵈는 “여러 사람과 바울”의 후원자였다. 그 당시 로마 문화에서 ‘후원자’라는 뜻은 매우 명예로운 호칭이었다. 바울에게 뵈뵈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뵈뵈가 바울의 편지를 로마교회에 전하는 사람인 것이다. 로마교회는 뵈뵈를 자매로 받아들여야 할 의무를 갖게 된다. 바울이 뵈뵈를 그들에게 추천했기 때문이다. 이제 뵈뵈는 로마교회에 머물며, 바울의 메시지를 생동감 있게 전하게 될 것이다. 바울의 사역은 뵈뵈에게 달렸다. (로마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그래서, 뵈뵈에 빙의하듯이 전해야 한다. 나는 뵈뵈다.)

 

15. 바울의 뵈뵈 천거에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는 온통 ‘문안’에 대한 것이다. 스물 대여섯 명의 이름이 나열되고, 거명되는 이름 외에도 그들을 둘러싼 이들에 대한 문안이 계속 이어진다. 인사를 나누는 이 장면에서 계속 반복되는 두 개의 용어가 있다. 하나는 ‘문안하라(greet)’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이다. 이들이 서로 나누는 문안 인사는 일반 사람들의 문안과는 다르다. 이들의 문안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문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권면을 아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이 편지를 로마교회에 보내게 된 이유를 알면 문안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16. 여기에서 열거되는 이름들을 볼 때 우리는 구분을 잘 하지 못한다. 우리가 보기에 모두가 그냥 이국적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 열거된 이름들은 그 사람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인지, 이방인 그리스도인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누가 유대인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이방인 그리스도인인지 구별하는 작업은 단순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하지 않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이 두 부류 사이의 갈등을 생각하면 바울이 이들에게 서로 문안하라고 말하는 것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17. 마지막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서로 갈등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의 건강함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서로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고 있는가, 아닌가. 서로 간에 평화가 없으면 서로 문안할 수 없다. 하지만 서로 문안하는 것은 서로 간에 평화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18.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첫 번째 원칙은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고, 그리고 서로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는 것이다. 문안하는 일은 내가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집중한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람의 삶을 보듬고 있다는 뜻이다. 진실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는지, 어떤지, 궁금할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안부를 묻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새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19. 우리 교회의 정황을 돌아볼 때, 로마교회보다는 훨씬 평화롭다. 우리는 로마교회처럼 극렬한 대립 가운데 있지도 않고,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문안하라’는 말씀을 지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주류교회들이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동성애 문제 때문에 두 부류로 나뉘어 첨예한 대립을 함으로써, 교회가 분열의 아픔을 계속 겪고 있다. 최근 UMC 교회도 주류교회 중 마지막으로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는 중이다. GMC 교단이 새로 출범해서 UMC에 소속되어 있던 많은 교회들이 UMC를 떠나 GMC로 옮기고 있다. 우리는 적어도 이런 풍랑 가운데 있지 않으니, ‘서로 문안하라’는 말씀을 좀 더 잘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0.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 ‘서로 문안하라!’ 이 말씀을 삶 속에서 실제로 실행에 옮겨보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문안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제애, 자매애는 교회 공동체의 기초이다. 기초가 튼튼해야 건물을 잘 지을 수 있듯, 신앙의 기초가 튼튼해야 교회 공동체가 든든히 세워지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해 보자. (이번 주에 적어도 한 사람에게 카톡이나 전화해서 안부를 물어보자. 내가 먼저. 특별히 오랫동안 안부를 묻지 못했던 교회 지체에게 안부를 물어보자. 그리고 목사의 안부 연락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만 말고, 목사에게 먼저 안부를 물어오는 형제자매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안부 묻는 일은 어떤 한 사람에게 지워진 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 된 교회 공동체 모든 구성원에게 지워진 사역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8. 29. 13:22

은혜 받은 자가 사는 법

(예레미야 2:4-13, 누가복음 14:7-14)

 

1.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특별한지, 그 특별함을 나타내는 용어가 등장한다.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이라는 말과 “그의 소산 중 첫 열매”라는 말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은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에 빗대어 말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사랑을 말할 때는 ‘헤세드’라는 말을 떠올려야 한다. 헤세드는 ‘언약적 사랑’을 말한다. 사랑이라는 개념이 매우 사적인 감정 차원에서만 통용되는 우리 시대에 ‘헤세드’가 무엇인지 체감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적 사랑과 대비되는 공적 사랑이라는 말로 헤세드를 다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공적 사랑이라는 말도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아무튼 헤세드란 감정에 기초한 사랑이 아니라 언약에 기초한 사랑이다.

 

2. 하나님과 언약적 사랑 안에 거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정말 큰 은혜이다. 헤세드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안에 거하게 된 것이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의 헤세드의 첫 열매였다. 첫 번째 것은 언제나 특별하고 귀한 법이다. 성경에 보면, 첫 번째 열매(그것이 자식이든 곡물이든)는 하나님의 것으로 따로 구별하였다. 그만큼 거룩함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장자는 다른 자식들에 비해 두 배의 유산을 물려 받기도 했다.

 

3. 장자의 축복을 사모하는 일은 참 복되고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기 때문이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생물학적 장자는 르우벤이었지만, 실질적 장자는 요셉이었다. 창세기 후반부를 장식하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장자의 축복을 받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했던 요셉은 결국 자신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열 두 지파의 반열에 올려 놓는다. 장자가 받는 두 배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얼마나 복되고 즐거운 일인가.

 

4. 열왕기하에 등장하는 엘리사도 스승 엘리야에게 ‘갑절의 능력’을 구했다.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에게 갑절의 능력을 구한 것은 엘리사가 엘리야보다 갑절의 능력을 보유해서 더 큰 이적과 기적을 행사하고 싶다는 욕심이 아니다. 엘리야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선지자 생도 집단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 중 엘리야의 뒤를 이어 엘리야의 사역을 그대로 잇는 선지자는 한 명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엘리사는 바로 자신에게 그 자리를 물려 달라고 한 것이다. 즉, 엘리사는 엘리야로부터 장자의 복을 간구했던 것이다. 장자의 복을 간구했던 엘리사는 끈질기었다. 끝까지 엘리야 곁을 지켰다. 그래서 엘리사는 결국 갑절의 능력, 곧 장자의 복을 받는다. 아이들에게 성경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장자의 축복을 받도록 권면하는 일은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그리고 마땅한 신앙교육이다.

 

5. 모세 5경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은총)를 크게 입은 사람들인지 자세하게 보여준다. 이런 나라와 민족이 없다. 부럽다. 그런데, 열왕기상하를 지나 선지서에 이르면 그토록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나라와 민족이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는지, 이해도 안 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향해 성토는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토록 받은 이스라엘이 어쩌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버렸는가,이다. (이 주제는 로마서에서도 지속되어 언급될 정도로 불가해한 사건이다.)

 

6.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이끌어가시는 대화의 요점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묻는다. “너희 조상들이 나에게서 무슨 불의를 발견했다는 것이냐?” 즉,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적 사랑에 소홀한 적이 있었느냐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아무것도 없다’이다.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주 세심하게 돌보셨다.

 

7.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두 가지 행동을 폭로하고 있다. 첫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이다. 둘째, 그들이 헛된 것을 따라 가서 헛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둘은 긴밀히 엮여 있다. 헛된 것을 따라 가려다 보니,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묶여 복된 존재였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헛된 것을 좇아가니, 그들의 존재가 헛된 존재가 된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헛된 것’이라는 용어는 전도서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헤벨’이라는 용어와 같다.

 

8. 마음 아프고 속상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복된 존재였다. 하나님과 헤세드의 사랑을 맺은 존재고, 더군다나 장자의 복을 받은 존재였다. 한 마디로 something special한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은 받은 복을 차버리고 나와 헛된 존재, nothing의 존재로 전락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들에게 벌어지는 일이다. 나 자신, 또는 내 배우자, 자녀들, 부모, 형제, 친구, 이웃 등, 하나님을 떠나 ‘헛된 것’을 좇아가 ‘헛된 존재’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즐비하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이들. 내가 그렇게 될까봐, 또는 누군가 그렇게 된 것을 보면서, 마음 아프고 속상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9. 예레미야 2장 13절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이들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있는 상태는 ‘악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악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상태를 말한다. 악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을 방해한다. 시련과 고통이 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지 못하는 게 악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지 않은 악인은 형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는 의인은 시련과 고통을 당할 수 있다.

 

10.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다는 것은 ‘생수(생명)의 근원’을 버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이들이 행하는 일은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것’이다. 스스로 웅덩이를 판다는 것은 자신이 이룬 성취에 기대어 스스로 구원을 이루겠다는 탐심을 말한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사람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탐심에 갇힐 수밖에 없다.

 

11. 누가복음은 이러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자, 다른 말로, 은혜 받지 못한 자는 자기 힘을 자랑하며 산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누가복음을 들여다보자.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때로 참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특별히, 질병을 가지고 있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경 읽는 행위가 더 고통일 때가 있다. 누가복음 14장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배경은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떡 잡수실 때”이다. 성경에서 안식일은 늘 갈등의 원인이 된다. (왜 그런지, 로마서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12. 안식일에 바리새인 지도자 집에서 떡 잡수실 때 수종병 든 자가 있어 예수님은 그를 고치신다. (늘 그랬듯이) 당연히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고통스러운 것은 율법에 신실한 사람들이 병자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물론 그들도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율법에 신실한 사람들(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질병과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았다. 질병과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게 되면 그들이 질병과 장애로 고통 당하는 것은 죄에 대한 마땅한 벌이기 때문에 결코 긍휼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13. 이러한 이야기가 성경에 나온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질병과 장애를 가진 이들이 알게 모르게 죄책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병과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이들은 알게 모르게 스스로 안도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질병과 장애를 가진 이들을 차별하는 시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차별적 시선을 가득 품고 산다. 질병과 장애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질병과 장애가 있는 것을 괴로워 하거나, 또는 질병과 장애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질병과 장애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문제 있다고 여기는 차별적 시선을 가진 우리 자신이 문제다.

 

14. 우리가 성경을 매우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읽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을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읽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죄책감이 쌓이고 차별적 시선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질병과 장애가 ‘죄’라는 주제와 엮여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질병과 장애를 가진 자들에게는 매우 불쾌한 것이다. 반대로, 질병과 장애가 없는 이들은 자신들이 ‘죄’라는 주제와 엮여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에 안도의 숨을 쉬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바래시인들이 했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주여, 제가 저들과 같지 않은 것에 감사하나이다!” 이 얼마나 불경한 기도인가.

 

15. 나는 은혜를 받지 못한 자와 은혜 받은 자와의 결정적인 차이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데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 14:12-14).

 

16. 성경에서는 안식일과 더불어 ‘밥 먹는 일’이 계속해서 트러블 메이커로 등장한다. (이것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로마서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잔치는 단순한 잔치가 아니다. 밥 먹는 일이다. 음식정결법에 대한 것이다. 정결법에 의하면, 부정한 것은 입에 대지 말아야 하고, 부정한 사람들과는 함께 밥을 먹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잔치를 베풀거든,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위에서 말한 것에 의하면,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은 죄의 결과로 그렇게 된 이들로서 이들은 부정한 자들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밥 먹는 일은 정결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칭 의인들은 이들과 함께 밥을 먹지 않았다.

 

17. 성경을 읽으면서 매우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기도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들을 완전히 새롭게 바로 잡아 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죄책감과 차별적 시선을 말끔하게 거두어 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의인들아, 죄인들과 밥 같이 먹어라!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이냐. 네 생각에 너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런 네가 죄인이다. 너희들이 정죄하는 그 죄인들이 오히려 의인들이다. 그들은 너희들처럼 스스로를 의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18. 역설적인 말이지만, 은혜 받지 못한 자는 자기 힘을 자랑하며 산다. 다른 말로, 자기 스스로 의인이라고,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내가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은혜 받은 사람이고, 내가 의인이 아니면 누가 의인이냐고 스스로 만족하며 자기를 자랑하며 산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죄책감에 휩싸이지 않고, 그리고 더불어 차별적인 시선을 전혀 갖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정죄할 수 있겠는가.

 

19.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만큼 복된 인생은 없다. 하나님은 생수(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서 절대로 스스로 웅덩이를 파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예배이다.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되, 장자의 복 받기를 사모하라. 다른 욕심은 부질없는 것이나 하나님께 장자의 복 받기를 바라는 욕심은 거룩한 것이다. 이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있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그들이 생수(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사는 법을 기억하라. 부질없는 죄책감을 갖지 말고, 알량한 차별적 시선을 버리라. 질병, 장애, 이런 것들을 죄와 결부시켜 생각하지 말라. 그런 개념 자체를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삶 속에서 지워버리라. 성경이 혹시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들거든 오히려 성경을 태워버리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인 것을 기억하라. 그러니, 은혜 받은 자로, 서로 사랑하며 살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