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7. 18. 00:46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아모스 8:11-13, 골로새서 1:24-29, 누가복음 10:38-42)

 

1. 하인츠 폰 푀르스터 일리노이 공대 교수가 20여년 전에 수학 공식을 사용하여 지구 종말에 대하여 쓴 논문이 다시 회자된 기사를 보았다. 그는 인류의 인구 증가율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지구 종말의 날을 계산했는데, 그가 지목한 종말의 시간은 2026년 11월 13일 금요일이다. 4년 남았다. 하인츠 교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가 종말론적 예언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구의 무한대 팽창이 인류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일인가를 경고한 학문적 분석이었다. 하인츠 교수 뿐 아니라, 이 시대의 양심 있는 과학자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 멸망을 계속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기후변화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다른 말로, 종말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인류가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무의식적 집단 자살 상태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2. 사우디 아라비아를 방문 중인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는데, 사우디 아라비아의 빈 살만 왕세자와의 회담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요즘 물가폭등에 대한 원인에 대한 분석인데, 서방 국가에서 물가폭등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 그리고 그로 인한 에너지 공급의 차질이지만, 빈 살만 왕세자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했다. “탄소배출을 줄이려는 비현실적 에너지 정책은 에너지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 즉, 빈 살만 왕세자는 물가폭등의 원인을 서방 국가들의 친환경 정책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석유 안 쓰려는 정책들이 물가폭등을 불러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3.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하인츠 교수가 예견한 지구 종말의 날이 그대로 실현될 것 같은 분위기다. 게다가 종교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도 만만치 않다. 요즘 한국에서 신천지 활동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동안 음지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신천지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만방에 알려지게 되자 전략을 바꿔서 이제는 아예 대놓고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 방문 중 양재역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큰 싸움이 벌어져 고개를 돌려보니 어떤 장로교인 아줌마와 신천지 포교활동 중이던 신도들 간에 벌어진 싸움이었다. 장로교인 아줌마가 허망한 듯이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장로교인인데 나를 이단이라고 해?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4. 요즘 신천지에서는 신천지-보혈 서사가 유행이라고 한다. 코로나는 주님이 주신 시련이고, 그 시련을 신천지는 주님의 은혜로 잘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신천지 신도들이 제공한 혈장(피) 덕분에 코로나 치료제(백신)이 개발됐고, 그것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렸다는 서사이다. 신천지 신도들의 피는 그냥 피가 아니라 보혈이다. 생명을 살리는 보혈. 그래서 신천지는 요즘 이러한 신천지-보혈 서사를 통해서 내부결속을 다지고, 이 서사로 결속된 신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힘을 내어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5. 일본의 아베 전 총리 총격 사망 사건을 통해서 아베 집안과 통일교의 관계, 일본에서의 통일교 활동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아베 전 총리에게 총격을 가한 사람은 통일교, 즉 종교적인 이유로 그러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파악됐다. 노컷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일본에는 통일교피해대책변호사연합회가 존재하고, 그 조직을 통해서 통일교가 일본 사회에 어떠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 밝혀지고 있다. 통일교에는 영감상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영감상법이란 ‘영계의 지옥에 있는 조상들의 고통을 없애고 후손들이 안전하려면 영적능력이 있는 물건을 구매하고 헌금을 해야한다'는 교리다. 중세의 면벌부를 흉내 낸 교리 같다.

 

6. 통일교피해대책변호사협의회에서 아베 총리 피살 사건에 대하여 이러한 해석을 내놓았다. "이번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야마가미 어머니가 통일교에 빠지고 그로 인해서 가정의 모든 경제적인 것이 파탄이 나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헌금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으로 내몰았다는 분노심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통일교에서는 모든 신자들에게 가진 모든 재산을 바치라고 하는 교육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통일교 신자들은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자녀들은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이 낮구요. 그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야마가미씨도 마찬가지지만 심지어는 여러 가지 형편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교육,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도 낮고 그로 인해서 가정의 파탄을 일으키는 수많은 통일교 가정이 있습니다."

 

7. 정치, 경제, 종교, 어디를 둘러봐도, 혀를 쯧쯧 찰 수밖에 없는 종말의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만 있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종말의 소식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세상은 옛날부터 종말을 목전에 두었다. 대략 2천 7백년 전에 활동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메시지도 종말론적이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8. 곤고한 날, 애통한 날, 죽음 같은 날이 닥친다. 특별히 기근이 닥치면 그렇다. 마실 물이 없고, 먹을 양식이 없는 것만큼 종말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그러한 상황이 닥친 것에 대한 아모스의 해석은 매우 독특하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 선지자의 선포에 의하면, 종말이 닥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종말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 때문에 온다. 종말은 먼 훗날 오지 않는다. 당장 온다. 양식이 없고 마실 물이 없을 때 우리는 종말이 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종말은 당장 온다. 종말은 이미 와 있다.

 

9. 기후위기가 왜 닥쳤는가? 우리 인간들의 탐욕 때문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탐욕을 그치는 일이 종말을 맞이하는 일보다 어렵다. 인간은 끝끝내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종말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이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말씀의 기갈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의 육신에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탐욕에 대한 경고를 끊이지 않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인류는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종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10. 신천지나 통일교도 마찬가지다. 신천지-보혈 서사나 통일교의 영감상법 같은 교리가 왜 생겨나고 사람들은 왜 그러한 허탄한 신화에 마음을 빼앗기고 몸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기는가. 말씀의 기갈 때문이다. 마음이 곤고한 사람(건강하고 건전한 하나님의 영이 가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허탄한 신화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그리하여 신천지가 만들어내는 허탄한 신화에 마음을 빼앗기게 될 뿐 아니라, 통일교에서처럼 허탄한 일에 열심을 내게 된다.

 

11. 이러한 일은 신천지나 통일교 같은 곳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말씀의 기갈 현상은 이런 곳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정통 기독교에서도 발생한다. 이단이 별거인가. 말씀의 기갈 현상을 겪어 배고프고 목마르니까 허탄한 것으로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우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자세히 전해주고 있는 말씀이 골로새서의 말씀이다. 골로새교회에 어떤 일이 발생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골 2:4). 골로새교회에는 ‘교묘한 말로 교인들을 속이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넘어가 허탄한 것에 자기의 인생을 소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믿음 위에 굳게 선 신실한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12.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우리에게 좋은 지침을 준다. 마르다는 봉사(일함)의 대명사이고, 마리아는 침묵(멈춤)의 대명사이다. 신앙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멈추어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게(봉사) 된다.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말씀을 듣기 위해 멈추는 일과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일 중에서 말씀을 듣기 위해 멈추는 일을 우선 순위에 놓는 듯하다. 주님은 마르다보다도 마리아를 칭찬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13.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이렇게 우선순위의 관점에서 놓고 읽으면 우리는 아주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도덕적으로 더 옳은 일이고 봉사하는 일은 열등한 일처럼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옳지 못하다. 멈춤과 봉사는 동일하게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잠시 멈추는 일도 중요하고, 주님을 위하여 몸바쳐 봉사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14.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를 멈추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십계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제4계명, 즉 안식일법이다. (출애굽기 중, <우리들의 십계명>을 참고하라.) 애써 멈추지 않으면 우리는 멈추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를 분주하게 만든다. 우리는 멈추는 것을 불안해 한다. 멈추면 마치 죽을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은 쉼 없이 돌아간다. 말씀의 기갈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후위기나 또는 종교적 왜곡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씀의 기갈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씀의 기갈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르다의 영성(봉사의 영성)은 상대적으로 쉽게 도달할 수 있지만, 마리아의 영성(멈춤의 영성)에 도달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5. 우리는 쉽게 활동을 멈추지 못한다. 활동이라는 것은 관성을 가지고 있다. 관성은 하던 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던 대로 하면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면 하던 것을 멈추어야 한다. 관성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잘 하지 못한다. 힘들어 하고 어려워 하고 불편해 한다. 일례로, 팬데믹이 처음 닥쳤을 때 우리는 하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힘들어 했다. 팬데믹이 관성을 멈추어 세웠다. 그래서 우리는 관성대로 나오던 교회를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을 힘들어 했다. 그런데 몇 년 사이에 이 관성이 바뀌어 버렸다. 재택 근무하는 게 이제 관성이 되다보니, 재택 근무를 그만 두고 회사에 나가서 일하는 것을 힘들어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직원을 뽑을 때 ‘remote work available’이라는 조건을 달지 않으면 직원 채용이 힘들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교회에 나와서 대면예배 드리는 일이 힘들어졌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일이 관성화되어 이것을 멈추고, 교회 다시 나오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16. 마르다와 마르아의 이야기에서 주님께서 마리아를 더 칭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봉사의 일이 하찮은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하는 일을 우리가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멈추지 못하면 사건이 발생한다. 기후위기가 왜 발생하는가. 탐욕을 멈추지 못해서 그렇다. 하인츠 교수가 예견한 것처럼, 2000년 동안 멈추지 않고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에,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지구에 대한 착취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신천지에서 말하는 신천지-보혈 서사 같은 황당하고 허탄한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 통일교에서 말하는 영감상법 같은 허탄한 요구에 자신의 재산을 바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는 이유, 그래서 아베 총기 총격 사건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멈추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17.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는 말이 무엇을까?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몸바쳐 열심히 봉사하겠다는 뜻일까? 물론 이러한 뜻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면,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다. 이전에 살던 대로 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울 수 없다. 멈추어 서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울 겨를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냥 살던 대로 살다가 멸망하고 말 것이다.

 

18. 우리가 허탄한 것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빼앗겨 우리를 분주하게 만드는 이유는 우리가 누구인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과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붙들고 잊지 않고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허탄한 것에 마음을 몸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과 확신이 없는 사람은 존재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기 때문에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허탄한 것에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다. 이러한 사람은 사탄에게 착취당한다. 재산을 잃고 생명을 잃는다.

 

19.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생명을 그분께 맡긴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겠노라고 선언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다. 이러한 우리가 팬데믹이라는 것 때문에 주저 않아 있을 수 없다. 힘써 모이고, 함께 기도하고, 사랑의 역사를 일구어 나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 잠시 멈추어서, 우리가 멈추어서 바꾸어야 할 관성,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을 방해하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자각하고 확신하는 은혜를 간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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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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