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8. 9. 18:46

하늘에 마음을 둔 사람

(누가복음 12:22-34)

 

1. 탐심은 ‘구원을 자기 힘으로 이루려고 하는 자기 구원의 욕망’이라고 했다. 몇 가지 살피고 넘어가야할 단어들이 있다. 첫번째로, 염려(메림나테)다. ‘염려’란 어떤 대상에 대해 괴로움을 느낄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이고, 깊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염려에 대한 말씀은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도 이렇게 전한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염려가 안 좋은 것은 염려로 인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이 눈에 안 들어온다는 것이다.

 

2. 두번째로, 근심(메테오로스)이다. 근심은 높이 매달려 발을 디딜 데가 없기에 느끼는 걱정과 혼란을 뜻한다. 근심이라는 용어는 먹고 입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스스로 해결하려 드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염려와 근심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염려와 근심은 삶의 질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을 악한 것에 내어주도록 이끈다. 생명을 악한 것에 내어주는 사람은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있다가 서서히 악한 것에 마음과 생명을 내어주게 된다. 결국, 염려와 근심은 가장 하지 말아야 할 못된 짓, 다른 이의 생명에 해를 가하는데 이르게 된다.

 

3.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염려와 근심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이유는 염려와 근심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뿐더러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 악한 길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악은 하나님이 감당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날마다 이렇게 고백한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그리스도인은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는 사람들이다. 염려와 근심은 필연적으로 악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4. 우리가 좀 더 자세히 풀고 넘어가야 할 용어가 있다. 누가복음 12장 25절과 26절의 말씀에 나오는 ‘자(페퀴스)’라고 하는 용어이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여기서 사용된 ‘자’라는 용어는 시편 39편 5절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된 용어이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시편 39:5).

 

5. ‘자’는 규빗을 가리킨다. 한 뼘 길이는 규빗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도량형으로 바꾸면,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길이다. 길이를 적용해서 해석하면, “너희 중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50센티미터라도 더 할 수 있으냐”이다. 키를 50센티미터 더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히브리어의 특징 중 하나는 공간적 단위로 시간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렇게 해석해야 옳다. “너희 중 누가 염려함으로 그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있느냐”이다. 먹을 것, 입을 것에 관한 걱정으로 수명을 늘릴 수 없다. 그러므로 목숨과 몸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근심하는 일은 무의미한 것이다.

 

6. 본문에서 가장 강력하지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은 이것이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1절).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새의 경우를 통한 논증과 수명의 경우를 통한 논증, 그리고 들풀의 경우를 통한 논증을 들어서 ‘하물며 논리’를 통해 목숨과 몸이 먹는 것과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하니, 먹는 것과 입는 것에 대해서 염려와 근심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7.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언뜻 보면 굉장히 은혜로운 말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간다. ‘먹고사니즘’은 쓸데없는 것이니까, 그런 거 다 내팽개치고 그냥 교회 일만 열심히 하면서 교회에서 살라는 뜻인가?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대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면 그냥 주구장창 교회일만 소중히 여기고 다른 일들은 대충대충 하라는 뜻인가? 그래도 먹고 사는 일에 지장이 없는 것일까? 그렇게 살면 엘리야처럼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뜻인가?

 

8. 누가복음은 기본적으로 가난한 자, 소위 사회적 약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복음서이다. 그렇다고 누가복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그저 하나님 나라만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먹을 것 입을 것 다 공급해 주시니까 그냥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베어 있는 말이긴 하지만, 굉장히 현실에 대해서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인 속담이기도 한다.

 

9.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자포자기한 현실에 대하여 강력한 저항이요 희망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을 것, 입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이 말 속에는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하여 아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통찰과 소망이 담겨 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모든 이들이 먹는 것과 입는 것 때문에 하는 염려와 근심에서 놓임(구원)을 받게 된다.

 

10. 구약성경에서 율법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율법이 잘 지켜지면 사회적 약자들이 보호받기 때문이고, 율법 정신이 지켜지면 그 누구도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염려와 근심을 하지 않고, 모든 이들이 더불어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키는 문제는 단순히 종교적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문제고,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모든 이들이 더불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 28:12).

 

11.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임재는 이렇게 나타난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33절). 팔아야 나눌 수 있는 것은 부동산이다. 집이나 땅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토지에 관한 율법의 정신이 담겨 있는데, 유대인들에게 땅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분배를 통해서 소유하게 된 자신의 땅 외에 다른 이들의 땅을 더 소유할 수 없으며, 만약 다른 이의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이것을 희년(Jubilee)라고 한다.

 

12. 누가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구제(charity)’는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차원의 일이 아니다. 성경의 구제는 단순히 자기의 소유 중 얼마를 떼어서 자기보다 못한 이들을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다. 성경의 구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이러한 구제는 하늘에 마음을 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신령한 행위이고 믿음의 행위이다. 구제는 사회적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 그 근원에서부터 해결하게 해 주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이다.

 

13. 사실, 복음서의 말씀은 너무도 전복적이라, 우리 시대에 이 말씀을 온전히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다. 기독교 인구가 줄어드는 원인이 여러가지 있으나, 사람들은 대개 교회 구성원(목회자나 성도들)의 부조리를 그 일차적인 원인으로 지적한다. 그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나 정확하지는 않다.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나? 다른 말로 해서, 일차적으로 “땅(집)은 하나님의 것이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나? 그래서 자기에게 분배된 땅이나 집 외에 다른 땅이나 집에 대한 탐욕을 버릴 수 있나? 게다가, 혹시 어떤 이유로 다른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땅이나 집을 자신이 가지고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그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원래 주인(또는 땅이나 집이 없는 이)에게 되돌려줄 수 있나?

 

14. 이러한 일은 교회의 구성원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전복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시대에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는 단순히 교회 구성원의 부조리 때문이라고, 모든 쇠퇴의 원인이 교회 자체에 있는 양 손가락질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누가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구제(charity)’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누가 자기의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사람이 있는가? 다른 말로, 땅이나 집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필요 이상의 땅이나 집을 아낌없이 내어놓아 땅이나 집이 없어 염려와 근심 가운데 사는 이들을 구제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32절). 왜 제자들을 향해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할까? 당연하다. 일단 이렇게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구제하려는 자 자체가 적고, 그렇게 산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더 많은 땅과 더 많은 집을 소유하기에 혈안인데, 자기 혼자서 땅과 집을 팔아서 구제하는 일은 매우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건가.

 

16. 이 말씀을 나누고 있는 우리들조차도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에 대해서 아주 냉소적인 마음을 갖거나 불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게 가능해? 이러다 나만 오히려 가난해지는 것 아니야? 이러다 나만 바보 되는 거 아니야? 나는 이 말씀을 선포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살라고 강요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이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부족한 지를 말씀에 비추어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땅에 있는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하늘에 있지 못한 지를 보았으면 한다.

 

17.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죄책감을 주려는 게 아니다. 죄책감을 발생한 문제, 당면한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다. 죄책감만 갖는 이들은 그냥 죄책감 속에서 생명을 소진하고 말 것이고, 인생을 한 발자국도 전진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모습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탐심을 물리치는 것, 즉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 하는 욕심을 내려 놓는 것, 그리고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는 것, 즉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 다른 말로 해서, 모든 이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악한 것에 생명을 빼앗기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 것 때문에 아직도 세상에는 가난이 끊이지 않아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우리의 믿음의 분량만큼 더 좋은 세상,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면 좋겠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하늘에 마음을 둔 사람이 되어가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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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