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7. 12. 22:18

선한 이웃

(누가복음 10:25-37)

 

1. 이러한 콤플렉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 – 자기가 착하다고 착각하는 사람 (또는 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예쁜 여자 콤플렉스 – 자기가 예쁘다고 착각하는 사람 (또는 예뻐야 한다는 강박관념)

믿음 좋은 콤플렉스 – 자기가 믿음이 좋다고 착각하는 사람 (또는 믿음이 좋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2.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한 이웃 콤플렉스가 있는 거 아닌가 싶다. 선한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말이다. 모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때문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처럼 들린다. 이런 것을 고려할 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우리 모두 선한 사마리아처럼 선한 이웃이 됩시다’이다.

 

3. 성경에서 이러한 정도의 교훈만 얻어도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한 이웃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요즘 기독교가 개독교니 뭐니 사회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실제적인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만큼 자선사업을 많이 하는 단체도 없다. 이는 모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덕분이다. 그리스도인은 싫으나 좋으나 선한 이웃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4. 그래도 우리가 좀 더 밀고 나가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가지는 의미를 좀 더 알아보는 게 좋겠다. 그리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본문이 처한 정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누가복음의 특징은 이방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누가는 복음이 유대 땅에만 전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다시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한 덩어리로서 ‘누가-행전’의 정체성은 다음 구절이 담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이니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5. 누가복음은 이방인에 대하여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복음이 전달되는 것의 최종 목적이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방 지역의 대표격인 사마리아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를 드시면서 이야기의 주인공을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한 것은 본문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의 청중이었던 유대인들, 특별히 율법교사에게는 매우 전복적으로 들렸다. 율법교사에게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내 가족, 내 친구, 내 민족, 내 나라 등 자기와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존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이웃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었다.

 

6.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이러한 ‘전복성’에 대하여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어느새 새로운 유대인, 새로운 바리새인이 되어 예수님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생각의 틀을 수용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차별하고 이웃의 범주와 기준을 ‘나 자신’으로 축소시켜 그 안에 갇혀 버리는, 매우 어리석고 안타까운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7.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어떤 율법교사(아주 보수적인 유대인)의 질문이었다. 누가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시험’이었다고 평가한다. 율법교사의 질문 의도가 순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 영원한 생명. Eternal Life.

 

8. 율법교사의 질문에 맞서 예수님은 그가 스스로 답을 말하도록 유도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랬더니, 율법교사는 율법교사 답게 정답을 줄줄 이야기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는 모세오경의 말씀 중 두 군데서 가져온 것이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말씀은 신명기 6장 5절 말씀이고,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은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이다.

 

9.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100점짜리 대답이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누가는 그 정황을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29절). 율법교사는 자기 의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교사는 한 가지 더 질문을 한다. 다시 말해, 율법교사는 자신이 얼마나 이 말씀을 잘 지키고 있는지, 그래서 자신은 영생을 얻는 사람이 분명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쭐한 마음으로 물은 것이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10. 율법교사의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신다. 그러면 일차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율법교사의 자기 의가 얼마나 교만한 것이고,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읽고 있는지, 그리고 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전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교사는 자기가 만든 이웃의 범주에서만 말씀을 실천했던 사람이다. 그에게 이웃이란 그저 자기와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자를 향한 자기애에 불과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에게도 해당하는 아주 심각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11.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 속에서는 여러 명이 등장한다. 강도들(몇 명인지 알 수 없다), 강도 만나서 거반 죽게 된 자,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그리고 주막 주인이다. 이 비유를 연극 무대에 올리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역할을 맡고 싶어할까? 아마도 사마리아인을 맡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강도들처럼 나쁜 사람이거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몰인정한 사람이거나, 주막 주인처럼 주변인물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강도 만나서 거반 죽게 된 자는 절대로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인에 투영하고 싶어한다.

 

12. 그러나 우리의 실제 모습은 전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강도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했던 독립투사들, 성경에 등장하는 열심당원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단순히 민족적 투쟁이 아니라 신앙적 투쟁이었다. 지금도 이런 투쟁을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성시화 운동’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 열정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으로 느껴지는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자금이 필요했고,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들은 강도 짓을 서슴지 않았다. 종교적 열정이 그 방향을 잘못 잡으면 어떤 폭력이 발생하는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드러나고 있다.

 

13. 강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 열정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서도 발견된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자를 못 본 채 하고 피하여 지나간 것은 그들에게 인정머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맡은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불가피 하게 피 흘리고 있는 사람을 지나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이 사마리아인처럼 거반 죽게 된 자를 만졌다면, 그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며칠 간 자가격리를 해야 했고, 자신들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14. 그러나 이것 또한 종교적 열정이 불러온 폭력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의 세세한 항목(피 흘린 자를 만지면 부정해진다)에는 충실했지만, 율법(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정신(스피릿)을 읽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종교적 열정만 있고 방향을 올바로 잡지 못하면, 이렇게 폭력이 발생한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강도들을 만나 거반 죽게 된 자에게 폭력을 저지른 것이다. 이렇게 폭력은 무엇인가를 해도 발생하고, 무엇인가를 하지 않아도 발생한다. 하지만, 강도들이나 제사장과 레인인이 지닌 종교적 열정이 폭력을 불러왔다는 것은 동일하다.

 

15. 우리가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인과 동일화 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모습은 강도들이나 제사장과 레위인, 또는 주막 주인에 가깝다. 더군다나 신앙인으로서 더 그렇다. 우리는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존경 받은 신앙인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많으나, 실제로 어떠한 사건에 연루되는 것은 싫어한다. 또한, 주막 주인처럼, 연루되더라도 최대한 주변부에서 수동적으로 연루되고 만다. 사마리아인처럼 실제로 어떤 사건의 중심에 서는 것은 극도로 꺼려한다.

 

16. 그러나,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동일화를 생각해 봐야 하는 등장인물은 오히려 강도 만난 자이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많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가. 이국 땅에서 이민자로 20년 간 살면서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동일화 하는 데서 벗어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 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이겠구나.

 

17. 우리는 나 자신을 약자의 위치에 놓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사실,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 당시에 약자 중의 약자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느덧 사마리아인은 우리가 동일화 하고 싶어하는 강자처럼 그 위치가 바뀌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어려운 일을 당한 이에게 선한 일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베푸는 자가 베풂을 받는 자보다 강자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18. 그러나,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내 가족, 내 친구, 내 민족, 내 나라를 벗어나 있는 사람들을 내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을 때 그를 도와주면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율법교사도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고 “네 생각에는 누가 장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사마리아인이요!”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마지 못해 돌려서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여전히 그는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받아들 수 없었던 것이다.

 

19. 우리는 나 자신을 강자가 아닌 약자의 위치에 놓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실제로 누가복음이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더러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도덕적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강도 만난 자이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줄 참된 선한 이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다. 우리는 거반 죽게 된 자다. 우리는 구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어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20.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 강도 만난 자는 누구인가? 팬데믹을 지나면서, 강도 만난 자, 그래서 거반 죽게 된 자는 교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팬데믹 동안 교회 상황을 조사한 기관의 보고에 따르면, 코로나 이전에 비해 대면예배 회복율은 70% 정도이고, 목회자의 절반은 번아웃 상태이고, 인력이 없어 큰 교회에 비해 여러가지 활동을 못한 작은 교회들은 대부분 문을 아예 닫거나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팬데믹을 구실삼아 교회를 떠난 사람도 많고, 교회를 옮긴 사람도 많다고 한다. 내가 한국에서 방문한 모든 교회들이 팬데믹 동안 ‘거반 죽게 된’ 경험을 했고, 아직도 회복이 안 돼서 모든 목회자들이 힘들어 했다. 우리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21. 우리가 좀 더 주님께 은혜를 간구해야 할 때이고, 우리가 좀 더 힘을 내야 할 때이다. 참된 선한 이웃이신, 선한 사마리아인이신, 주님께서 강도 만난 자 같은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그래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돌보아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선한 이웃이 되어, 우리도 주님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좀 더 힘을 내서 교회를 살려야 할 때이다.

 

22. 선한 이웃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 없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는 우리 더러 선한 이웃이 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도덕적 부담을 지우시는 말씀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우리에게 직접 선한 이웃이 되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선한 이웃인 주님의 돌봄을 받아 기력을 회복해서 남은 힘이 있거든, 그 힘 가지고 우리도 주님처럼 조금이나마 어려운 이들에게 다가가서 선한 이웃이 되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선한 이웃 콤플렉스로 선한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선한 이웃이신 주님께 받은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선한 일을 하는 자가 되면 좋겠다.

 

23. 그리고 우리, 꼭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상황에 처해진 교회를 좀 더 진지하고 진실하게 돌봤으면 좋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주님의 몸이 강도를 만난 것처럼 어렵다면, 열일 제쳐 놓고 돌보는 것이 선한 그리스도인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기력을 회복하여 선한 이웃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을 내자. 선한 이웃인 주님처럼 우리도 선한 이웃이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어리석은 자 what kind of fool am I?  (0) 2022.08.09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0) 2022.07.18
겸손은 치유와 구원의 시작이다  (0) 2022.07.06
하나님을 메고 다니라  (0) 2022.05.31
가능주의자  (0) 2022.05.24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