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9. 28. 03:31

불평등을 허물려면

(로마서 13:8-10)

 

1. 영어 이름의 ‘Meg’는 ‘Margaret(마~거,렛)’의 줄임말이고, ‘진주(pearl)’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진주는 Meg라고 이름을 지었으면 딱 미국식 이름이 되는 것이다.) 영어 이름의 ‘Jo’는 독립적인 이름이기도 하고, ‘Joanna, Joanne, Jody and Josephine’이나 ‘Joseph’의 줄임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God is gracious)’의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 이름의 ‘Beth’는 ‘Elizabeth’의 줄임말이고, ‘집(house)’라는 뜻이다. 영어 이름의 ‘Amy’는 프랑스, 라틴어에서 온 이름이고, ‘Beloved’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랑이 듬뿍 담긴 이름이다.

 

2. Meg, Jo, Beth, Amy는 루이자 메이 올컷(Louisa May Alcott)의 소설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다.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68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매사추세츠 주에 사는 마치(March) 가족의 네 자매의 성장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너무 유명한 소설이라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었고, 세계명작소설 리스트에 올라가 있어, 어린 시절 이 책을 읽어보았으나, 남자인 나로서 여자 아이들 이야기가 재미있게 다가올 리 없었다. (요즘 다시 읽으면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다시 읽고 싶다.)

 

3. 요즘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한국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바로 이 소설을 모티브로 만든 드라마이다. 물론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드라마의 구성 중 소설에서 따온 것들이 눈에 많이 띈다. 세 자매의 캐릭터도 그렇고, 원래는 네 명의 자매였다는 설정도 그렇다. 그리고 자매들의 성장 과정을 그린 것도 그렇다. 그런데,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 드라마를 쓴 작가의 집필 의도이다. 드라마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듣길 원할까? 사랑도 아니고, 복수도 아니고, 모험도 아니고… 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우리 사회 곳곳에 돈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흐른다. 그런 사회의 영혼은 어떤 모습일까? 돈에 대한 우리들의 욕망은 어디에서 왔을까? 오늘도 우리는 돈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꿈을 꾸었나? 그런 것들을 쓰려고 했다.”

4. 2천년 전 로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해 쓰여진 <로마서>는 2천년이 지난 21세기 우리 시대에 무슨 메시지를 던지는 것일까? 조금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을 읽으면서 이러한 질문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2천년 전에 쓰여진 이 고문서가 지금 나의 삶에,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몇 주에 걸쳐 로마서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로마교회에는 큰 갈등이 있어 평화가 없었는데, 그 갈등의 원인은 ‘강한 자들’이라고 불리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약한 자들’이라고 불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간의 다툼 때문이었다.

 

5.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강한 자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들이 실제로 로마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먹는 문제나 절기를 지키는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약한 자들’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들은 실제로 로마 사회에서 별볼일 없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 없었고 절기를 지키는 문제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6. 이들은 동일하게 ‘그리스도인’이라 불렸지만, 그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문화적 배경은 너무도 달랐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익숙했고 율법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몰랐고 율법을 존중하지 않았다. 이렇게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집단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를 이루어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높은 지위’에 기대어, 즉 자신들이 가진 힘에 기대어 힘없는 유대인들을 업신여겼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가진 ‘특권’, 즉 자신들이 가진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와 율법에 근거하여 이방인들을 판단했다. 사람을 업신여기는 부류와, 사람을 판단하는 부류가 한 공동체에서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바울은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고자 로마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다.

 

7. 로마서에 전개되는 모든 이야기들은 로마교회에 발생하고 있는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목회적 호소다. 본문도 그러한 배경 속에 있다. 바울은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모두에게 호소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 사실 남을 사랑하는 이는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이 말은 율법을 잘 아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나, 율법을 잘 모르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매우 적합한 접근이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율법의 조항을 일일이 열거하고 드러내지 않더라도, 율법이 담고 있는 그 정신을 담아내는데 있어 두 부류 모두에게 설득력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8. 우리는 지금 로마서를 거꾸로 읽고 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로마서를 앞에서부터 읽었다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용어보다 ‘죄’, 또는 ‘죽음’이라는 용어를 먼저 만났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로마서를 거꾸로 읽은 덕분에 교리 같은 딱딱한 내용을 먼저 만난 것이 아니라 ‘뵈뵈’와 같은 사람을 먼저 만난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서는 거꾸로 읽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만약 죄나 죽음을 먼저 만났다면, 우리의 마음은 더 무겁고 어두웠을 지 모른다. 하지만 죄나 죽음보다 사랑을 먼저 만나면, 그 이후에 죄와 죽음을 만나더라도 우리의 밝고 생기 넘치는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다.

 

9.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 너무 멋진 말이다. 이것만큼 우리 시대를 날카롭게 꼬집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2천년 전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에 살아 역사할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 시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는 빚이 무엇인가? 돈에 대한 빚이다. 얼마전 나온 한겨례 신문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가계 부채가 GDP(국내총생산) 대비 104%에 이른다. 전세계 1위다. 가계부채비율이 국내총생산을 넘어서는 것은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유일하다. ‘영끌’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사람들은 돈을 빚지고 집이든 땅이든 ‘부’를 소유하려고 한다.

 

10. 위에서 본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작가의 집필 의도에서 보았듯이, 요즘 젊은이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 복수에 대한 이야기, 모험에 대한 이야기보다 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세상이 온통 돈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그 이외에 다른 이야기는 모두 허황된 이야기이고 쓸데없는 시간낭비로 취급당한다. 실로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지는 시대가 결코 아닌, 돈의 빚을 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한 우리 시대에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말라”는 이 말씀은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11. 바울은 왜 로마교회를 향해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말하는 것일까? ‘빚지다’라는 말은 빚을 갚으라는 말이 아니라, 빚진 사람처럼 생각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사랑의 빚을 졌다는 것은 사랑이 서로에게 ‘의무’라는 뜻이다. 바울은 어떻게 하면 로마교회에 있는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판단하는 상황 속에서 이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은 ‘복음’에 충실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1장부터 11장이다. 그리고 그 복음에 기대어 서로 평화롭게 지낼 것을 권면하는 것이 12장 이후의 말씀이다.

 

12.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은 서로 평등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이들은 서로 자신들이 저들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강한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위, 힘에 기대어 그런 생각을 했고, 약한 자들은 자신들의 가진 특권에 기대어 그런 생각을 했다. 이들 사이에는 엄연한 ‘불평등’이 존재했다. 평등이란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동등하게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강한 자들은 자신들의 가진 힘에 기대어 약한 자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약한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특권에 기대어 강한 자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서로가 평등하지 않다고 불평등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여러분은 모두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평등한 인간입니다!’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을까?

 

13. 앞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복음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1~11장에서 바울은 ‘죄’와 ‘죽음’의 이야기를 한다. 사람은 평등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것은 ‘죄’와 ‘죽음’을 대면할 때이다. 지위고하/특권의 유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죄인다. 이 말은 ‘너는 죄인이야!’라고 상대방을 정죄하려는 말이 아니라, 서로 자신들이 잘났다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얼마나 평등한 인간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 앞에서는 지위고하/특권의 유무는 아예 소용이 없다. 모두 죽는다. 모든 사람이 가장 평등해지는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다.

 

14. 그러나, 죄와 죽음의 순간만 인간이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실, 죄와 죽음의 순간에만 인간이 평등해진다면, 이것은 좀 억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인생이 너무 불쌍하지 않는가.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것,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 이것은 매우 진리이나, 매우 인간을 슬프고 아프게 만드는 진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준다. 우리 인간이 평등해지는 순간이 또 있는데, 바로 서로 사랑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믿음의 순간이다. 즉, 믿음과 사랑은 인간에게 평등을 가져다 준다.

 

15.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돈에 대한 이야기라는 통렬한 사실 앞에서, 젊은이들은 왜 돈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듣고 싶어할까를 묻는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사회에서 지독한 불평등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이들이 사회에서 경험하는 지독한 불평등을 이겨내는 해결책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시피, 돈이 많으면 사회에서 불평등을 경험하는 일은 피할 수 있겠으나, 남들에 비해 돈이 많은 것 자체가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남들보다 돈이 많다는 것 때문에 돈 없는 자들을 차별하고 그들을 평등하지 않게 대하는 것은 자신의 특권인양, 비뚤어진 사고구조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즉, 불평등을 허물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16.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을 너무 낭만적으로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울이 로마교회 교우들에게 이 말씀을 전할 때, 이 말은 전혀 낭만적인 말이 아니었고, 듣는 이들 입장에서도 전혀 낭만적인 말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아주 실제적인 갈등이 존재했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사이엔 막힌 담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교회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이었다. 얼굴 맞대고 사는 이웃이었다. 얼굴 맞대고 사는 이웃 사이에 ‘막힌 담’이 놓여 있다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바울은 말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은 서로 이웃이지만, 서로에게 악한 일을 저질렀다. 서로 업신여기고 판단했다.

 

17. 로마교회에 만연했던 불평등을 해소하는 길은 그들이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평등을 해소하기에는 어딘가 좀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죄와 죽음을 떠올리며 불평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왠지 서글퍼보인다. 하지만, 바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더 좋은 길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 외에 빚을 지지 않는 것이다. 정말 너무도 인간적인(또는 너무도 복음적인), 인간의 품위와 인격을 세워주고 지켜주는 놀라운 방식이다.

 

18. 가계부채가 하늘을 찌르는 듯이 높은 이 시대에, 사회에서 경험하는 지독한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돈에 빚지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시대에,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시대를 따뜻하게 보듬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빚지고 사는 인생, 지긋지긋하지 않나? 돈 버느라 날려버린 내청춘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 돈 때문에 내쉰 한숨, 돈 때문에 흘린 눈물을 생각하면 우리의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나? 우리는 언제쯤 돈의 빚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게 죽음을 통해서만 그럴 수 있는 거라면, 우리의 삶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19. 불평등을 허물려면, 세상이 가르쳐주는 돈에 빚지며 사는 것에 대하여 당당히 ‘No’를 외치며,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을 믿어야 한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이다. 돈이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불평등을 해결한다. 사랑하면, ‘너와 나’는 동등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사랑하면 서로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일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진리

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성취되도록 노력하며 이러한 세상을 상상하고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상대방에게 사랑의 빚을 진 것처럼 사랑하십시오. 십자가 위에서 사랑으로 불평등을 허물어버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그렇게 하십시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십시오. 이것은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