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1. 15. 07:12

호모 프락티쿠스 (Homo Practicus/실천하는 사람들)

(로마서 2:1-16)

 

1.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로 시작하는 2장의 말씀은 율법을 소유한 것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물론 로마서의 진술을 도식적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로마교회의 정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약간의 도식적인 분석이 필요하지만, 성경이라고 하는 큰 틀에서 보면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지혜롭다. 우월감을 가진 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 또는 유대인에게만 있는 감정은 아니다. 우월감은 인간이 갖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무엇 때문에 우월감을 갖는가? 우리는 모두 상대방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는 지점이 있다.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고 살았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구원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심판받은 자들에 불과했다. 바울이 하고 있는 작업은 율법을 가진 것 때문에 이방인을 향해 가지고 있는 우월감이 얼마나 불필요한 일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고, 그로 인해 우월감을 가지게 된 유대인들이 한 일은 ‘남을 판단하는 일’이었다. 인간에게 있어 ‘법(Law)’이라는 것은 참 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예로부터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사회의 지도층에 속해왔다. 법을 다룬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보통 사람들보다 ‘남을 판단하는 일’ 하는 것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살다보면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일이 발생하는데, 유체이탈 화법이나 유체이탈 행동이 두드러져 나타나게 된다. 어떠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남을 판단하기만 하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발생한 사건과 자신을 결코 연결시키지 않고, 그 사건의 바깥에서 그저 판단하기만 한다. 한 마디로, 우월감이 고착화되면, 공감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3.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절).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을 판단하는 그 사람도 판단받는 사람과 똑같이 죄를 짓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자기중심성, 어떠한 신학자는 이것을 원죄라고 말한다.)구원을 말할 때, 한국인들은 흔히 이런 질문을 많이 한다. “이순신 장군은 천국에 갔을까요?” 예수를 모르던 시대를 살았던 이순신 장군 같은 의인이 예수를 믿지 안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런 질문이 나온다. 한국인은 이순신 장군을 의인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의인 이순신은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도 천국에 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한국인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4. ‘의로운 전쟁 이론(Just War Theory)’라는 게 있다. 기독교 윤리에서 한 때 격렬하게 논쟁이 벌어진 주제이다. 특별히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놓아 두고, 신학자들 간에 ‘의로운 전쟁’에 대한 논쟁이 아주 격렬하게 일었던 적이 있다. ‘의로운 전쟁’이라는 것이 있을까? 전쟁을 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기독교에서 의로운 전쟁(just war)을 말하는 이유는 구약성경 때문이다.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워 행했던 가나안 땅의 전쟁은 의로운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수많은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의 칼날에 죽어 갔는데,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현대에 발생하고 있는 전쟁도 ‘의로운 전쟁’의 논리에서 전쟁을 수행한다.

 

4.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영화 ‘명량’과 ‘한산: 용의 출현’에 보면 의로운 전쟁을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옳지 못하다고 판단한 한 일본 군사가 전향을 하여 이순신 편에서 조선군이 왜군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는 이순신에게 묻는다. “이 전쟁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 전쟁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의와 불의의 전쟁이다.” 한국식 할리우드 대사이다. 전쟁을 인간의 비참한 죄악으로 보지 못하고, 의와 불의로, 즉 ‘의로운 전쟁’으로 보게 되는 순간, 전쟁에서 발생하는 살생은 모두 정당한 것이 된다. 이렇게 의로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은 불멸의 의인이 되고, 그러한 의인은 반드시 천국에 가야 한다는 논리가 발생한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이순신이 단순히 예수를 믿지 않은 것 때문에 천국에 못간다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5. 전쟁이 의로울 수 있을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전쟁이 한창 중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전쟁을 하면 나라들은 그냥 전쟁을 치열하게만 하는 게 아니다. 서로 도덕적으로 비난하기 바쁘다.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면 전쟁에서 발생하는 고통들을 수습하는 일이 쉽지 않다. 전쟁에서 발생한 그 수많은 죽음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로운 일, 선한 일을 하다 죽었다는 ‘자기 의’가 없으면 인간은 전쟁에서 발생한 상흔을 감당할 수 없다. 러시아 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는 러시아 젊은이들을 선동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전쟁에서 죽은 러시아 군인들의 죄는 없어질 것이다.” 러시아 측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은 의로운 전쟁이라는 뜻이다. 정말 그런가?

 

6. 전쟁이 발발하면 서로 의로운 전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의(justice)는 매우 상대적인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고 있고, 서방과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고,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고 있고, 한국과 북한이 대립하고 있지만, 서로가 총칼을 겨누고 서로의 생명을 빼앗는다면, 의로운 전쟁 같은 것은 아예 없다. 내 편에서 생각하면 상대편이 죽일 놈이지만, 상대편이 생각하면 내가 죽일 놈인 것이다. 이것을 누가 판단하겠는가? 당연히 모두 하나님은 자기 편이라고 생각할 것이지만, 의로운 전쟁의 논리는 전쟁에서 발생한 수많은 악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은 천국에 갔을까?’ 같은 질문은 매우 허무한 것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순신 장군은 왜적을 물리친 영웅이고 의인이지만, 그가 죽인 일본 젊은이들은 무엇인가? 그들도 모두 그들의 부모들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하는 자식들이다. 전쟁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 의로운 전쟁은 없다.

 

7. 남을 판단하는 일이 고착화되면 이렇게 끔찍한 일이 발생한다. 자기는 의인이고, 남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좋은 일만 일어나야 하고 혹시 나쁜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뭔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남에게는 심판이 임해야 하고 그에게 발생한 나쁜 일은 죄에 대한 심판일 뿐이라고 아주 쉽게 정죄해버리고 만다. 이것만큼 공감능력을 상실한 상황도 없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같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4절). 좀 더 쉽게 풀어 번역한 것으로 보면 이렇다. “더구나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그 크신 자비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니 될 말입니까?” 남을 판단하는 자들의 특징은 자신에게 발생한 나쁜 일은 별거 아니고, 다른 이에게 발생한 나쁜 일은 심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은 나쁜 일을 벌여도 심판을 받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에 불과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8. 남을 판단하고, 우월감을 갖는 것은 좋지 못하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남을 판단하고 우월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선을 행하는 것이다. ‘꾸준히 선을 행하는 일’, 이것은 어려운 일인가? 인류의 역사를 보면, 전쟁 뒤에는 언제나 종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종교가 원래 그런 것일까? 종교는 전쟁을 부추기고 전쟁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일까? 우리는 이 지점에서 늘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아우슈비츠의 비극 뒤에는 종교가 있었다. 기독교 국가였던 독일은 유대인들을 미워했다.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것이다. 이게 신앙인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으니, 그 원수를 그리스도인들이 갚아야 하는 것일까? 전혀 아니다. 하지만, 나치의 선동은 독일인들에게 먹혀 들어갔다. 600만명의 대학살이 발생한 아우슈비츠 비극은 독일인이 가진 종교심과 우월감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쉽게 말해서, 나치는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그 일을 자행했던 것이다.

 

9.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서구사회는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고, 종교와 철학의 메시지를 다시 그 근본에서부터 성찰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유대인 프랑스 철학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다. 그렇다 보니, 타자(others)를 잘 보지 못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를 발전시키는데, 유대인 학자답게 구약성경의 윤리를 보편화시키는 데 노력한다. 그가 발전시킨 ‘타자의 윤리’는 다음의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나를 죽이지 말라. You shall not kill me.” 이것은 죽음이 난무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견한 종교/철학 윤리이다. 상대방의 눈에서 우리는 이 절실한 요청을 발견해야 한다. “나를 죽이지 말라.” 이 강력한 눈빛을 발견한 사람은 결코 상대방을 죽일 수 없다. 인류의 이 보편적인 윤리를 발견한 사람은 상대방을 죽이려고 손에 들었던 무기를 다시 땅바닥에 내려놓게 될 것이다. 꾸준히 선을 행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상대방, 타자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말씀과 같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10. 바울이 말하고 있는 깊은 신학적/인간학적 진리는 이 한 마디에 담겨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For God does not show favoritism)”(11절). 여기서 외모는 ‘잘생기고 못생기고’의 뜻이 아니다.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그러한 것을 가리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진술한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헬라인)이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하지 않으신다. 그러면서 바울은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율법을 가졌고, 율법을 들은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중요한 것은, ‘율법의 실행(practice of the law)’에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11. 유대인들이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서 우월감을 가진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가졌고 율법을 들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사실의 의미가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를 폭로한다. 율법을 가졌고, 율법을 들은 것은 결코 특권이 될 수 없다. 율법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이나 양심에 율법에서 말하는 ‘정의(justice)’를 심어 놓으셨다. 그래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본성이나 양심에 따라 얼마든지 선한 일, 의로운 일을 할 수 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14-15절).

 

12.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이다. 율법을 가지고 있고 율법을 들었다는 것은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율법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도 본성과 양심에 따라 얼마든지 율법의 요구를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율법을 가졌다면 그 율법을 가진 것에 만족하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율법을 가지지 않았어도 본성과 양심에 따라 율법의 요구를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이방인들이 있다. 율법의 요구를 실천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냐, 아니면 그것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이냐, 이렇게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율법과 본성과 양심에 새겨진 율법의 요구를 실천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13. 기독교인들도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어리석은 일을 수행할 수 있다. 복음을 가졌고 복음을 들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복음을 가졌다는 것, 복음을 들었다는 것, 그래서 믿음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요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은 판단하면서 살아가는가. 자기들은 의롭고, 다른 이들은 불의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들이 자행하는 못된 일들은 모두 ‘의로운 전쟁(just war)’인양 얼마나 사실을 왜곡하는가. 이러한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여전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을 가졌고, 복음을 들어, 믿음을 가진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오! 믿음은 실천의 동의어일 뿐이오!”

 

14. 성산 장기려 박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운영하고자 일생 헌신한 의사였다. ‘돈이 있으면 치료비를 내시고, 없으면 그냥 가세요’라는 식의 병원 운영이었다. 그러다 보니까 간혹 돈이 있는 사람들도 욕심을 내어 거짓말을 할 때도 있었다. 하루는 옷도 멀쩡하게 입고, 손에 다이아반지까지 낀 사람이 치료를 다 받고 난 뒤에 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장기려 박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없다면 할 수 없지요. 그냥 가시죠.”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서무과 직원이 박사님에게 손짓 눈짓으로 그 사람의 손가락을 보시라고 한다. 그 환자가 돌아간 후 장기려 박사가 말했다. “나도 보았지. 그러나 돈이 없다고 하는 사람 한둘을 의심하다 보면 진짜 가난한 환자도 의심하게 되지.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과 자기 양심은 못 속인다네.” (한겨레 신문에서 가져옴)

 

15. 장기려 박사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 일화에 등장하는 ‘다이아반지를 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복음을 들은 우리들, 마치 다이아반지를 낀 것처럼 우월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는 멀쩡하면서, 건강이 있고 능력이 있고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호모 프락티쿠스. 실천하는 사람들. 손과 발이 좀 더 부지런하게 움직인다는 뜻이다. 손과 발이 좀 더 선해진다는 뜻이다.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지 말고, 이웃을 섬기는 자리에 있으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호모 프락티쿠스이다.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섬기는 사람들이다.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세상은 실천하는 사람들을 통해 변화되고, 교회는 실천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부흥한다. 리-바이벌(revival, 다시 살아남)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