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1. 21. 12:46

불편한 감사

(사도행전 3:1-10)

 

1. 지난 달 들은 AP 뉴스 중에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뉴스가 있습니다. 2019년도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했을 때 미군에 의해 부모와 형제들을 모두 잃은 아기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몇 달 후 적십자에서 그 아기의 친척들을 찾아내 그 아기를 친척 집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친척들을 모르게 미 해병 대원인 아무개(Joshua Mast)가 그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법원에 입양 신청서를 냈습니다. 그리고 2021년도에 있었던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수 작전 때 그 아기와 가족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그 아무개 해병 대원은 도왔습니다.

 

2. 미국에 도착한 그 아기와 가족들은 아프간 난민을 위한 이주 센터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람들이 와서 그 아기를 데려갔습니다. 이유를 몰랐던 그 아기의 가족들은 나중에 미해병 대원이 그 아이를 입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아기의 가족들은 당황했습니다. 자신들도 모르게 아이를 입양하고 데려가는 것은 ‘유괴’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 해병대원 부부는 이 일에 대해서 이런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지키면서, 아이를 구하기 위해 훌륭하게 행동했던 것일 뿐입니다. We’ve acted admirably to save the baby, keeping with our Christian beliefs.”

 

3. 이 기사를 읽고/듣고 조금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미군 부부는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하여,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훌륭한 일이었다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것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목숨이 죽은 것은 무엇이고, 그 아이가 부모를 잃게 되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된 것은 누구의 탓일까요.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전쟁 고아를 입양해서 데려다 키우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를 일으킨 것에 대하여 회개하며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미국 정부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을까요? 아무튼, 이 기사를 접하고 오랫동안 깊은 상념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 감사절을 맞아, 아무런 거리낌없이 마냥 감사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어딘가 마음이 좀 불편합니다. 각 교회마다 풍성한 과일과 곡식으로 강단을 꾸미고 그것을 배경으로 한 사진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올라오지만, 지금 우리의 삶이 그렇게 정말 풍성한가를 돌아보면, 왠지 우리의 현실을 왜곡하고 속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설사, 부자들이나 부자 나라들에서는 아직까지 먹거리가 풍성하여 별 걱정 없이 감사절을 보낼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나, 우리가 알다시피, 기후변화 때문에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고 있고, 수많은 동물과 어류, 식물들이 멸종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가 이렇게 마냥 ‘감사’를 남발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5. ‘불편한 감사.’ 미국의 부통령을 지냈던 엘 고어가 『불편한 진실Inconvenient Truth』라는 책을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2006년입니다. 16년 전입니다. 이 책은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 고어가 말하는 ‘기후변화’의 진실을 듣고 불편해했습니다. 마음도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받아들이면 몸과 삶 자체가 매우 불편해지기 때문에, 기후변화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불편한 감정을 자아낼 뿐이었습니다. 살던 대로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죠. ‘불편한 감사’는 바로 여기에서 가져온 용어입니다. 감사절을 맞아 마냥 감사하고 싶은데, 우리의 감사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마냥 감사하기에는 세상살이가 너무 척박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돌아와 남원 사또의 악행을 밝히면서, 이런 시를 지어 내놓습니다.

 

金樽美酒 千人血(금준미주 천인혈)

玉盤佳肴 萬姓膏(옥반가효 만성고)

燭淚落時 民淚落(촉루락시 민루락)

歌聲高處 怨聲高(가성고처 원성고)

금 술통의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 접시의 좋은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구나

 

7.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면서부터 저는 이몽룡의 이 시가 자연이 인간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쓴 시처럼 느껴졌습니다.

 

金樽美酒 千木血(금준미주 천목혈)

玉盤佳肴 萬膏(옥반가효 만수고)

燭淚落時 淚落(촉루락시 지루락)

歌聲高處 聲高(가성고처 풍성고)

금 술통의 좋은 술은 천 나무의 피요

옥 접시의 좋은 안주는 만 동물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대지의 눈물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바람wind) 소리 높구나

 

8. 땅이 우리처럼 말을 한다면, 강단에 풍성하게 쌓인 과일들과 곡식들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할까요? 풍성한 결실을 내서 참으로 감사하구나, 할까요? 인간들의 탐욕을 욕하면서 자기들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면서 재배한 과일들과 곡식들을 향해서 위와 같은 시 한 수를 지어 날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사는 매우 불편합니다. 땅이 내는 소산에서 감사 소리가 아니라 원망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백성의 고혈을 짜내 자신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며 변 사또처럼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풍성함을 서로 나누는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대지의 고혈을 짜내 자신의 식탁만 풍성하게 하는 사악한 인간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9. 본문은 우리에게 그 해답을 줍니다. (지금도 그러는 유대인들이 있지만) 성경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오전 9시, 정오, 그리고 오후 3시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 구 시’란 오후 3시를 가리킵니다. 유대인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관습에 따라, 오후 3시에 성전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 이들이 성전에 기도하러 간 것은 하루이틀 했던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을 받아 거듭난 후에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매번 가던 성전이었고, 매번 드나들던 길이었는데, 예전에는 거기에서 구걸하던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받은 이들의 눈에 이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기적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에게만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발생한 것이죠.

 

10.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기도할 때 성령이 임재하여 성령 충만하게 된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에는 무엇보다도 ‘감사’가 넘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평소 눈에 별로 들어오지도 않았고, 별로 관심도 없었던 성전 미문의 걸인에게 눈이 갔다는 겁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든,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3-4절).

 

11. 감사(thanksgiving)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감사란, 눈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감사가 넘쳤습니다. 성전으로 향하던 그들의 발걸음은 무엇보다도 감사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감사가 참된 감사였던 것은 그들이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들의 눈이 가려져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들의 눈이 뜨여져 구걸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걸하는 사람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12.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너무도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감사를 나누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자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 몇 푼 정도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준 것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보행장애자였던 그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나누어준 ‘감사’ 덕분에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구걸해서 비굴하게 먹고 살지 않아도 되고, 이제 자기 힘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됐습니다.

 

13. 저는 이렇게 다시 보행할 수 있게 된 이 사람의 인생이 정말 궁금합니다. 제가 소질 있는 작가라면 이 사람의 일생을 다룬 소설을 하나 써보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다시 자유롭게 보행할 수 있게 된 것을 잘 활용하여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꾸몄을까요? 아니면, 차라리 움직이지 못하고 구걸하면서 사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못된 사람이 되었을까요? 저는 이 사람이 자신이 받은 감사를 다른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살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받은 감사는 보통 감사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감사는 또다른 참된 감사를 낳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니까요.

 

14. 우리의 감사가 불편한 감사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감사가 온전한 감사가 되려면, 우리는 눈을 감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감사하기 어려운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면, 우리의 감사는 온전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모든 사람이 감사할 수 있을 때까지 불편한 감사, 유보된 감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 구원을 얻기까지 우리의 감사는 불편한 감사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모두’는 더 이상 인간 존재만 가리키는 것이 되지 못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대지가, 땅이, 자연이 우리 인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신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인간 존재만이 아니라, 이 대지가, 땅이, 자연이 감사할 수 있을 때까지, 인간 존재와 더불어 비인간 존재에게도 우리의 감사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15. 참된 감사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들의 감사를 보행장애인에게 흘려보냈던 것처럼, 감사는 흘러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보행장애인도 고침을 받은 후, 자신이 받은 감사를 흘려보냈을 것입니다. 자신처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도록 최선을 다해 살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자신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도록 어려운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을 것입니다. 불편한 사람이 없도록, 감사가 계속 흐르다 보면, 언젠가는 모두가 함께 감사드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감사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가리지 말고, 눈을 떠서, 우리가 주님께 받은 감사를 열심히 흘려 보내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눈이 뜨여지기를 소망합니다. 소망하지 않아도, 우리가 참된 감사 가운데 있다면, 베드로와 요한처럼 눈이 뜨여질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가 받은 감사를 흘려보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불편한 감사에 머물지 않도록, 인간 존재에게, 그리고 비인간 존재(동물, 식물, 자연)에게 선한 일을 하십시오. 친절하게 대해주고, 망가뜨리지 말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십시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