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2. 6. 06:52

당신의 뇌가 가장 큰 적()이다

(로마서 3:9-31)

 

1. 국민일보에 신앙상담 코너가 있다. 상담자는 은퇴한 원로 목사인데,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유명한 분이다. 어느 날 실린 상담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교회 시무장로입니다. 아들과 결혼하게 될 며느릿감이 천주교인입니다. 며느릿감이 천주교인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2022년 11월 27일) 45명이 반응 이모티콘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35명이 화난 표정의 반응 이모티콘을 남겼다. 어떻게 상담했을 것 같은가?

 

2. 신문 지면 상의 제약이 있기 때문에 상담 내용이 길지는 않다. 그 중에서 핵심적인 상담 내용을 보면 이렇다. “물론 천주교인 가운데 개인적으로 구원의 확신이나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원리를 떠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따르는 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천주교는 행위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행위 구원을 말하는 천주교인과 결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주장이자, 천주교는 행위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전형적인 한국 (보수) 개신교의 생각이 담긴 상담이다.

 

3. 1970, 80년대, 한국에서 분유가 불티나게 팔리던 때가 있었다. 남양유업은 그때 성장한 기업이다. 1970년대, 80년대 생 치고 남양 분유를 안 먹고 자란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때 우량아 선발대회를 통해서 우량아로 선정된 아기들도 많다. 물론 그 우량아들은 모두 분유를 먹고 그렇게 되었다는 광고 전략 중 하나였다. 그때에 과학적 상식은 분유를 먹여 키우면 엄마 젖을 먹여 키우는 것보다 아이가 건강하고 우람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아이의 부모들은 젖 대신 분유를 먹였다.

 

4.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과학 상식이 바뀌었다. 업데이트 되었다. 분유를 먹여 키우는 것보다, 엄마 젖을 먹이는 것이 아이의 건강이나 정서에 더 좋다는 것이 상식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소를 키울 때 항생제를 엄청 맞히기 때문에 부모들이 분유 먹이는 것을 꺼려한다. 엄마에게서 젖이 안 나오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분유를 먹여야겠지만, 엄마 젖이 나오는 이상 엄마 젖을 1년 동안 먹이다, 그 이후에는 이유식을 먹이는 방식을 택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이들의 건강과 정서에 더 좋다는 과학적 지식의 업데이트가 있기 때문이다.

 

5. 과학상식만 바뀌는 게 아니다. 신학상식, 또는 신앙상식도 바뀐다. 문제는 과학상식은 계속해서 업데이트 되는데, 교회에서 통용되는 신앙상식은 업데이트가 매우 더디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뇌는 어떠한 지식(정보)을 한 번 받아들이고 나면 좀처럼 바꾸는 게 쉽지 않다.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이유도 ‘뇌의 저항’ 때문이라는 말을 한다. 우리의 뇌는 언제나 안정을 추구한다. 뭔가 안정이 정착되고 나면 그 상태를 바꾸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변화를 일으켜야 할 때 가장 저항이 심한 신체부위는 뇌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의 가장 큰 적(enemy)은 우리의 뇌이다.

 

6. 잘못된 지식이 뇌에 한 번 들어가면, 그 잘못된 지식을 뇌에서 빼내는 일은 매우 어렵다. 몸에 밴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 것이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은 아는 만큼 행동하게 되어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 지식의 업데이트는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아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지식을 업데이트 하지 않으면 행동이 고루해진다. 인간에게 열린 마음이란 언제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소통은 열린 마음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현재 알고 있는 지식이 전부이고 진리라는 생각은 소통을 어렵게 한다.

 

7. 로마서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핵심을 담고 있지만, 로마서는 또한 기독교를 분열시키는 데 잘못 쓰이기도 한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서를 바탕으로 마르틴 루터가 만든 구호가 ‘오직 믿음’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탄생한 개신교는 ‘오직 믿음’의 구호 아래서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하도 강력하다 보니, 개신교 이외의 모든 교파는 ‘오직 믿음’에서 벗어난 구원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상담 내용에서 보듯이, 가톨릭은 행위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와는 결혼 조차 하면 안된다는 배타적인 신앙을 가진다.

 

8. E. P. 샌더스(E. P. Sanders)라는 성서학자가 있다. 꼭 기억해 두어야 할 학자이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바울 서신을 들여보는 데 있어 1977년 이후에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바울 서신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E. P. 샌더스(E. P. Sanders) 때문이다. 그는 1977년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이라는 책을 통해서 그동안 기독교 성서학이 가지고 있었던 바울 신학에 대한 이해를 뒤집는다. 샌더스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개혁 이후에 그동안 너무 많은 학자들이 사도 바울과 유대교를 오해했다(로마서 설교, 비아토르, 48쪽). 그러한 오해는 당연히 로마서를 해석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마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율법과 복음의 대립을 상정하고, 율법과 복음 중 어떤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로 바울 서신과 신학을 축소시켰다는 것이다.

 

9. 쉽게 말해, 우리는 흔히 이런 질문을 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행위를 통해서인가 믿음을 통해서인가? 행위는 율법을 말하고, 믿음은 복음을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은혜로운 말 같으나, 이렇게 행위와 믿음을 대립적인 관계로 설정할 때 생겨나는 문제점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의 삶이 실종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더 이상의 행위(행동)는 필요 없고, 그저 천국 가는 날만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신앙을 구원의 문제로만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복음은 믿음을 통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당에 가는 구원론으로 축소될 수 없다.

 

10. 이렇게 되면, 우리는 유대교에 대한 오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유대교는 율법을 통한 행위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믿음을 통한 은혜의 종교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이 생기게 된다. 샌더스가 제동을 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발생한 시점을 기준으로 200년 전과 200년 후, 즉 400년 정도에 걸쳐 형성된 팔레스타인 유대교 문서를 모두 검토한 결과, 유대교를 행위의 종교(works-righteousness religion, 행위로 의롭게 되는 종교, 행위와 의의 종교)가 아니라 유대교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은혜에 기초한 종교라는 것을 밝혀냈고, 그는 이것을 일컬어서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고 불렀다. “율법에 순종했던 것은 언약에 들어가기 위해서(구원을 획득하는 순종)가 아니라, 은혜와 하나님의 언약적 은총을 토대로 자신의 언약적 처지(covenant standing)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로마서 설교, 비아토르, 48쪽).

 

11. E. P. 샌더스라는 성서학자 덕분에 우리는 바울서신, 특별히 로마서의 메시지를 좀 더 좀 더 완전하게, 왜곡되지 않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얼핏 읽으면 바울이 횡설수설하는 것 같은 율법에 대한 이야기, 이스라엘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서해석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바울이 율법과 복음이 마치 대립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고, 율법과 유대교의 가치를 형편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더 나아가 유대인에게 저질러진 폭력의 역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일은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기독교 신앙의 오류들이다.

 

12.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 이유는 쓴 시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는 고린도전후서를 쓴 직후, 그리고 로마서를 쓰기 직전에 쓰였고, 로마서는 갈라디아서가 쓰여진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서 쓰였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율법과 믿음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정황이 좀 다르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방인 교회였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 자체가 별 의미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믿음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는 이방인들에게 별로 감흥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3. 그러나 로마서는 정황이 달랐다. 유대교 배경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의 구성원이었다. 율법과 믿음의 상관관계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다짜고짜 율법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로마교회를 향해 바울에게 주어진 과제는 율법을 넘어선 복음의 보편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복음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얼마나 평등한지에 대한 논증 없이 이들에게 복음을 토대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도록 종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 아래에서 얼마나 평등한 존재인지를 논증한다.

 

14. 그들의 평등을 논증하는데 쓰인 개념이 바로 ‘죄’이다. 바울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우리가 여기서 조심해야 읽어야 할 것이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죄는 인간 개인의 개별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죄는 모든 인간을 억압하는 힘을 말한다. 이것은 한 개인이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죄는 작은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큰 이야기이다. 우리 눈에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지만, 어떠한 힘으로 우리 인간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고통이나 비극을 피할 수 없다. 죄의 힘은 거대하다.

 

15. 로마서 3장 10절에서 18절은 죄의 메타 내러티브 안에 있는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져 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지어낸 상황이 아니라 구약의 전도서와 시편 등에 이미 진술하고 있는 인간의 상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인생을 오래 산 사람일수록 인간이 이러한 비참한 상황에 처해져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살지만, 우리에게는 늘 고통과 아픔이 있다. 고통과 아픔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그러한 것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과 아픔을 피할 수 없다.

 

16. 죄에 대한 이러한 메타 내러티브는 우리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도와준다. 사실, 이러한 메타 내러티브는 인간의 삶에 큰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메타 내러티브가 죄의 힘에 사로잡힌 이들에 의해서 이용을 당하면 사람을 정죄하는 데 쓰이고 만다. 대개 건강하지 못한 신앙을 추구하는 이단들이 그러한 행동을 한다. 인간을 희망으로 이끌지 않고 절망으로 몰아간다. 절망의 끝에 몰려 불안해 하는 인간에게 다가가 자신이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 같지만, 실은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을 컨트롤하고, 착취하려는 속셈이 담겨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러한 술수에 희생을 당했는가.

 

17. 바울이 로마서에서 인간의 곤경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는 인간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당신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 아시오!’라고 하면서 그들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바울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 바울이 말하는 인간의 곤경을 이용하여 전도하는데 사용해 왔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당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인정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스스로를 좀 돌아보시고, 어서 빨리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실 겁니다.”

 

18. 그렇게 다그쳐서, 상대방이 죄를 고백하면, 그때 복음이 제시된다. “예수 그리스를 믿기만 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십니까?” 상대방이 믿는다고 말하면, 전도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이 정말로 값싸지는 순간이다. 구원받는 게 정말 쉽다. 이렇게 쉬운 구원을 사람들은 왜 받지 않으려고 할까. 그러면서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한다.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데, 믿음을 갖지 못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안타까워한다. 오직 믿음이 이렇게 쓰인다. 이것은 모두 로마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오류들이다.

 

19. 우리가 가진 통념, 업데이트 되지 않은 지식과는 달리, 유대교나 가톨릭이나, 행위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여전히 유대교나 가톨릭이 행위 구원을 말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직 믿음만을 말하는 개신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개신교인은 아주 쉽게 개신교 신앙을 갖지 못한 이들을 정죄한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전도대상자로 삼고 그들을 향한 포교활동에 나선다. 이미 구원받은 확신에 가득 찬 개신교인들은 존재론적 우위에 있다. 구원받은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에 비해서 우월하다. 우월한 사람은 자신보다 우월하지 못한 이들에게 구원을 선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복음은 존재론적 폭력으로 탈바꿈된다.

 

20.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막힌 담을 허물어 복음 안에서 화해를 이루고 한 몸을 이루게 끔 하기 위해 이방인의 사도로 사명감을 가지고 산 바울이 아무렴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의 우위성을 말하며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 로마서를 쓴 것일까? 그렇지 않다. 로마서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 어디에서 바울은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서 복음을 말하는 것이지, 사람들을 정죄하고 담을 쌓으려고 복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21. “당신의 뇌가 가장 큰 적이다.” 우리 뇌를 지배하고 있는 잘못된 통념들을 뇌에서 몰아내지 못하면, 인생은 자꾸 누추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누추한 뇌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좋은 사람과 불편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단 하나이다. 대화(소통)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이다. 좋은 신앙과 불편한 신앙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단 하나이다. 대화(소통)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이다. 이단이 왜 이단인가? 잘못된 것을 가르치고 실행해서? 아니다. 대화(소통)이 없기 때문이다. 대화(소통)이 없으니까, 발전이 없고,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죽고 만다. 그래서 이단은 그냥 가만히 나눠도 소멸할 수밖에 없다.

 

22. 대화(소통)가 잘 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듯, 대화(소통)이 잘 되는 신앙인이 좋은 신앙인이다. 생명은 결국 대화(소통)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성장하고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여러분의 뇌가 여러분을 한 곳에 머물러 있도록 붙잡아 두지 못하게 하시라. 부지런히 배우고, 부지런히 소통해서 성장하도록 하시라. 새롭게 발견하고 발전된 신학/신앙의 내용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하고 성숙해 가시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할 때까지,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렇게 역동적으로 사시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