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2. 20. 10:02

사랑이 열어주는 미래

(로마서 5:1-11)

 

1. 로마서를 전체적으로 보면, 바울은 과거, 현재, 미래 시점에서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를 말한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세계적 명작을 쓴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형에게 이런 편지를 쓴 적이 있다. “형, 인간과 인생의 의미를 연구하는데 꽤 진척을 보이고 있어. 인간은 신비 그 자체야. 우리는 이 신비를 풀어야 해. 그러기 위해 평생을 보낸다 하더라도 결코 시간을 허비했다고 할 수 없을 거야. 인간이고 싶기 때문에 나는 이 수수께끼에 골몰하고 싶어.”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밝히고 있는, 복음에 근거한 인간론은 매우 중요하다.

 

2. 로마서에서 복음(새로운 소식 / 기쁜 소식)은 3장 21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그 하나님의 의는 자연이나 율법 같은 것이 아니라, 한 인격(person) 안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 한 인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사실, 이것 때문에 우리 인간은 ‘인간과 인생’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바울이 하나님의 의가 율법에 드러난 것을 다시 확인한다고 했다거나, 하나님의 한 의가 ‘자연’에 나타났다고 말했다면, 우리는 율법과 자연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복음 선포는 그렇지 않았다. 바울은 한 인격/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한 의가 드러났다고 선포하고 있다.

 

3.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한 의가 드러난 그 인격,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인격’에 드러났다는 것이다. 인격에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의에 다가서는 방법은 관찰이나 연구, 또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사랑을 통한 교제’ 밖에 없다. 여기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4.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소식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계속해서 제시하고 있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에 근거해서 이것을 설명하면,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율법에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 노력했다. 그런데, 율법은 그 자체로 ‘인격’이 아니고 그냥 문자이기 때문에 정현종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사람이 오는 어마어마한 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마어마한 것을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의가 한 인격에 나타났다고 한다는 것, 즉 하나님 자신이 우리 인간에게 왔다는 것이다. 

 

5. 편지가 왔을 때, 우리는 그 편지를 읽고 그 편지에 말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따르거나 아니면 못 본 척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편지가 온 게 아니라, 그냥 그 편지를 쓴 사람이 직접 우리에게 대면하여 왔다고 생각하면, 편지와 왔을 때와는 다른 상황이 연출될 수밖에 없다. 한 인격이 우리에게 오면, 그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존재의 일부가 우리에게 오는 것과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오는 것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복음은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왔다는 선포이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인격과 인격이 대면했을 때의 용어, 즉 관계의 용어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6. 본문의 1절 말씀은 전형적인 관계의 용어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이전 시간(지난 주)에 말했듯이, ‘믿음’도 관계적인 용어이다. 인격적인 용어이다. 사귐이 있어야 한다. 그냥 그것을 하는 게 아니라, 애정,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애정 관계,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주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저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말뿐인 고백이 아니라 진실한 고백, 진짜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7. 이처럼, 1절에 등장하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할 때의 ‘화평’도 관계적인 용어이다. ‘화평’이란 ‘상대방과 잘 지내는 것’이다. 인격적인 상대와 잘 지내지 못하는 것만큼 인간을 힘들게 하는 것도 없다. 사람과 사람이 잘 지내지 못하는 사회일수록 대체 인격이 늘어난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선진국’들은 풍요를 이루긴 했지만, 인간 관계 측면에서는 삭막해지기 일쑤다. 개인주의가 강해지고, ‘돈’이 모든 것의 매개가 되기 때문에 진실한 우정의 관계를 맺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의 체제에서, 부자가 될수록, 부자 나라가 될수록, 사람들은 외로움이 늘어간다.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대체 인격이 필요한데, 그래서 부자 나라, 사람들이 외로울수록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이다.

 

8. 그러므로, 하나님의 한 의가 ‘인격’에 나타났다는 것을 복음으로 듣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화평’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원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잘 지내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교제’를 통해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별로 좋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모순일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자신이 ‘반려견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배고플 때마다 ‘개고기’를 사 먹는 것과 같은, 모순적인 일이다.

 

9. 복음을 믿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구원 받았는가. 그런데 혹시 화평하지 못하고 잘 지내지 못하고 있는 가까운 사람, 이웃이 있는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하나님께 회개하며 자비를 간구하라. ‘인격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한 ‘인격’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을 우습게 여기는 행동이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구원인데, 그 화평이 가족들과, 친구들과,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화평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즉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며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 이 시간, 잠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평이 있는 것처럼, 우리와 이웃들(그것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혹시 화평치 못한 사람이 있다면) 사이에도 화평이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10. 로마서 5장에서 가장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은 3~4절의 말씀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을 인내를, 인내는 연단은,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한 해를 돌아볼 때, 자신에게 닥친 환난이 무엇이었는가. 환난의 경험이 없었다면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환난이 닥쳤을 때, 우리는 즐거워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고! 환난이 닥쳤는데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바보/미친 사람/치매 걸린 사람’ 밖에 없다. (요즘엔 동네에 바보가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지 않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동네에는 바보가 한 명씩은 있었다. 바보가 동네를 돌아다녀도 전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 사람을 서로 돌봐주고 아껴주었다. 예전에 비하면, 세상이 발전한 것 같으나, 이런 관계적 측면에서 보면, 세상은 오히려 후퇴했다.)

 

11.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환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환난을 일찍 겪은 사람은 철이 좀 일찍 들고, 환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철이 좀 없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인 한, 우리는 살아가면서 환난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환난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둑처럼 우리에게 임한다. (화살을 맞은 사람 중에 가장 미련한 사람은 누구인가. 화살에 맞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화살을 빨리 빼고 치료 받는 것이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은 ‘누가 나한테 화살을 쐈어’라고 하면서 분노와 원한만 키우는 사람이다. 그것은 나중에, 치료받고 완쾌된 이후에 차근히 생각해 보아도 괜찮다.)

 

12. 바울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복음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화평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이 받았고, 받고 있고, 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환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다. 환난 중에서도 그 환난 때문에 인생이 무너지거나 실패하지 않고,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오히려 그 환난 속에서 인내를 키우고, 연단을 받고, 소망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랑을 충만이 받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충만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 환난을 이긴다. 죄 가운데 있던 비참한 인간의 미래를 열어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바울은 그래서 인간은 과거에 하나님 없이 사는 불의한 존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우리의 미래가 아름답게 열렸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13. 우리는 바울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지금 우리 인간을 정죄하고 있는 게 아니다. “너는 죄인이야. 너는 원래 죄인이야!” 바울이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지, 인간이 얼마나 가망 없는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되었다. 드러났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가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때는 좋을 때가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바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즉 우리 인간의 처지가 별로 좋지 않았을 때에,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14. 그래서,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 즉 미친 사람처럼 환난을 당했는데도 싱글벙글한다는 뜻이 아니라, 환난을 당했어도 그것 때문에 무너지거나 넘어지거나, 그래서 인생을 망치고 허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환난을 이겨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언제 닥칠 지 모르는 인생의 환난을 대비하는 길은 단 하나이다. 충만이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이다. (공부 잘 하는 사람이 환난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사랑 많이 받는 사람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환난을 극복한다.) 위에서 본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에서 보았듯이, 사람을 ‘환대’할 줄 알고, 사람에게 ‘환대’받는 사람이 환난을 이겨내고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5.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자신의 모든 소설에서 이 질문을 하고, 그 해답을 찾고 있다. 정현종 시인도 ‘방문객’이라는 시를 통해서 동일한 것을 묻고,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소중한 로마서에서 바울은 말한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든, 우리의 현재가 어떠하든, 상관없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언제나 밝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신다. 그래서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은 너무도 자명하다. 사랑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열어가라(많이 사랑받겠습니다!). 또한, 사랑으로 이웃의 미래를 열어주라(많이 사랑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환대가 넘치는 사랑의 삶이기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