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2. 20. 09:58

행위에서 믿음으로

(로마서 3:27-31)

 

1. 브라질이 우리에게 승리하며 골 세러머니를 얄밉게 한 것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는데, 크로아티아에게 패한 뒤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호날두가 선발 출장을 하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도 애처로웠고, 모로코에게 패한 뒤 선수들과의 교류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라커룸으로 향하는 모습도 애처로웠다.축구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겸손이 최고의 덕목인 듯싶다.

 

2.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인 밴투의 업적은 ‘빌드업’ 축구를 대표팀에 안착시켰다는 것이다. 빌드업 축구란 공격적인 축구(골을 넣기 위한 축구)를 위해서 수비수부터 짧은 패스를 통해 차근차근 기회를 만들어가는 축구를 말한다. 요즘 축구의 트랜드이다. 더 이상 ‘뻥 축구’하는 나라는 없다.

 

3. 지난 주, E. P. Sanders 이야기를 조금 했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그 중에서 지난 주 설교를 듣고 예배당을 나서며 000 형제는 나게에 “목사님, ‘빌드업 설교’ 잘 들었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냈다. 내 설교를 잘 표현해 준 것 같다.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 그리고 더 깊은 신앙을 위해서 기초부터 다시 쌓고, 최신의 학문적 업적들을 반영한 신앙의 형성을 위해서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기도하고 격려해야 할 것들이 정말 많다. ‘뻥 축구’를 통해서 더 이상 세계 무대에서 축구를 할 수 없듯이, ‘뻥 신앙’을 통해서 더 이상 이 복잡한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켜나갈 수 없다.

 

4. 언약적 율법주의 (Covenantal Nomism), 이것은 과학계로 따지면 아인슈타인 같은 위치를 지닌, E. P. 샌더스 교수가 밝혀낸 사실이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이 용어에 모두 들어 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 이유는 구원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오해하는 것처럼, 유대교도 행위구원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의 이니셔티브,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구원의 이니셔티브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 중 그 누구도 구원 받을 사람이 없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

 

5. 로마서 3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21절이다.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 이게 복음이다. 바울 신학의 중심 (바울이 증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울은 지독한 예수 중심주의자이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다.

 

6.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유대인은 율법에 집중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은 말이고 문자이다. 이방인은 율법을 잘 모르고, 별로 상관도 없다. (미국인들이 축구를 잘 모르고 별로 감흥도 없는 것과 똑같다. 이들은 미식축구나 농구, 야구를 잘 알고 거기에 열광하지 않나.)

 

7. 바울의 증언은 기독교의 독특성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의가 한 인격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삼위일체 신학은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인격에 대한 연구다. 이것은 일종의 신앙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이라는 문자에 나타나는 것을 넘어서 이제 예수라는 ‘한 인격’에 드러난 것이다. 실리콘 밸리적으로 설명하면, 예전에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Dos’라는 것을 배워서, 컴퓨터를 작동하려면, 문자를 손으로 일일이 쳐서 넣었어야 했다. 그런데, 마이크로소트프사에서 혁신을 이루었다. 윈도우를 개발한 것이다. 손으로 문자를 일일이 쳐서 넣지 않아도 되고, 이제는 그냥 마우스로 클릭을 하면 모든 소프트웨어를 움직일 수 있다.

 

8. 하나님의 의가 율법을 넘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적) 인격에 나타났다는 것은 28절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의롭다는 ‘옳은 행동을 한다’의 의미가 아니다. 의롭다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되었다’를 뜻한다.

 

9. 이것을 자녀와 부모의 관계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자녀와 좋은 관계를 지닌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녀가 시험 성적을 잘 받아오면 자녀와 좋은 관계인가? 최근에 우리 아들이 PSAT 시험을 쳤는데, 정말 ‘우스운 성적(Not 우수한)’을 받아왔다. 우스운 성적을 받아온 우리 아들은 의롭지 못한가? 죽일 놈인가? (의롭다: 성적을 잘 받아온다.) VS (의롭다: 아버지(엄마)를 사랑한다.) 아니다. 여전히 우리 아들은 사랑스럽다. 우스운 성적을 받아온 것과 상관없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들이다. 아버지 집에 들어오면, 꼭 나와서 나랑 허그하고, 잠 자기 전에 꼭 나한테 와서 허그하고 가서 잔다. 얼마나 예쁜가? 이런 것을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다.

 

10. 율법이냐 복음이냐? 우리가 매일 논쟁적으로 대하는 용어들이다. 우리가 오해한 것은, 유대인들은 구원을 율법의 행위로 받는다는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복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도식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면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구원은 행위냐, 믿음이냐의 논쟁이 심하다. 그런데, 이게 정말 헷갈리는 것이고, 우리가 접근을 완전 잘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11. 우리는 이 논쟁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를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행위의 법은 협박으로 명령되고, 믿음의 법은 신뢰로 요청된다.” 행위의 법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가 명하는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믿음의 법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께 ‘당신이 명령하실 것을 제게 주십시오.’하고 말한다.

 

12.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문자’가 아니라 ‘인격’에 나타났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돌아보아야 한다. 문자랑 사귀는 사람은 없다. 문자는 그냥 그 문자대로 시행하기만 하면 된다. 설교시간이니까, 이런 예를 들어보자. 문자로 이렇게 써 있다고 생각해 보라. “졸지 말고 딴 생각하지 말고 설교를 열심히 들으세요!” 이것을 문자로 이해하면, 그냥 졸지 않고, 딴 생각하지 않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설교를 열심히 들으면 된다. 아니, 그냥 그런 척해도 된다. 그러면 그것은 문자를 잘 실행한 것이다.

 

13. 그러나, 인격을 향해서는 그렇게 문자적으로 실행할 수 없다. 인격은 ‘사귐’이 있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Affection(애정)’이 있어야 한다. 행위와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애정’이다. 위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다. 행위의 법은 협박으로 명령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가 명하는 것을 하라!’인 반면에, 믿음의 법은 신뢰로 요청된다. 인간이 하나님께 ‘당신이 명령하실 것을 제게 주십시오.’라는 것이다.

 

14.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라는 용어와 믿음이라는 용어의 차이를 잘 살펴야 한다. 행위라는 용어는 마치 컴퓨터 실행 용어 같다. 애정이 없다. 그냥 그것을 하면 된다.

믿음이라는 용어는 인격적인 용어이다. 사귐이 있어야 한다. 그냥 그것을 하는 게 아니라, 애정,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17. 행위에서 믿음으로!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애정(affection), 즉 사랑의 문제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구원은 뭔가? 애가 공부를 잘 하고, 부모가 뒷바라지를 잘 할 수 있는 만큼 경제력이 있는 건가? 애가 공부 잘하고, 부모가 경제력이 있으면 뭐하나? 이건 행위다. 이건 구원이 아니다. 이들에게 구원은 애정이다.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 친구 간에도 마찬가지, 우리 교회 식구들 간에도 마찬가지다.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다. 애정이 없는 것, 사랑이 없는 일을 하는 것만큼 우리를 괴롭히는 게 어디 있나.

 

18.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애정(사랑)합니다’는 말을 두 낱말로 줄인 것이다. 이것으로 설명이 부족하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애정(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인격을 형성한, 실제의 삶을 말한다. 난 너무 하나님이 좋아! 그러면, 좋아하는 사람의 행동은 그냥 보기만 해도 다르지 않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주님, 사랑합니다.

이게 저희 믿음의 전부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행위에서 믿음으로!

문자에서 인격으로!

모든 것에 애정을!

주님,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가득하게 하옵소서.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