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1. 11. 05:25

세례의 의미
(로마서 6:1-14)

 

1. 수세주일. 주님께서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며,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것에 대하여 돌아보는 날이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야기는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이 가장 상세하게 그때의 상황을 전하고 있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간략하게 전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사건을 전하기 보다, 그 사건이 가지고 있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전한다. 그러니까,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은 사건을 전하는데 반해, 요한복음은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을 전한다.

 

2. 세례의 행위는 같지만, 예수님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 간에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의 세례는 영어로 ‘inauguration’과 ‘revelation’의 의미가 짙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성령의 임재를 말하고 있고, 더불어 하늘에서 들린 소리를 전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것은 그가 그리스도로 등극한 것 또는 드러난 것을 의미한다. 일종의 우주적 취임식인 것이다.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서 공식적으로 선포된 것이다. 그래서 세례 이후의 예수님의 생애를 공생애(public life)라고 부른다.

 

3. 우리는 여기서 공생애, 즉 공적인 삶에 대해서 잠시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세례 이후의 예수님의 삶이 공적인 삶인 이유는 그가 ‘보냄을 받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적인 삶(private life)에 익숙한 시대에 살다보니, 공적인 삶에 대해서 무심하거나 잘 모른다.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들은 삶 자체가 ‘공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4.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들이 받은 세례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받은 세례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잘 알려주고 있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순전히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의 운명(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어준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가 죽으면 우리도 죽는 것이고, 예수가 살면 우리도 사는 것이다.

 

5.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공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사적인 삶이란 없다. 우리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겨졌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보냄을 받은 분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과 같이 세상으로 보내졌다. ‘보냄 받은 자’로서 우리는 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아픔과 책임감을 느낀다. 남의 일이라고 신경을 끄고 손 놓고 있지 않는다.

 

6. 그런데 이러한 세례의 중요성에 비해 우리가 실제 신앙생활 속에서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에는 매우 소홀하다. 신앙이 좋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세례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세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기억과 실천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 받은 날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다반사다. 생일은 기억하는데, 세례 받은 날은 기억하지 못한다. 교회에서도 이런 문화가 잘 정착되지 못했다. 생일은 축하해 주는데, 세례 받은 날은 기억도 못할 뿐더러, 기억을 못하니까 축하도 못해준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그리고 새롭게 창조해야 할 문화는 세례 받은 날을 기억해서 서로가 생일을 축하해 주듯이 축하하는 문화이다.

 

7. 이러한 문화를 조성해 나가는 것이 왜 중요한지 우리는 로마서를 통해서 좀 더 들여다보려 한다. 로마서 6장은 ‘세례’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의미를 전달해고 있다. 그런데, 세례의 신학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바울이 쓰는 용어들은 약간 복잡하고 어렵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에서 더 나아가, 좀 무겁다. 세례를 ‘죽음’이라는 용어와 연관짓고, ‘죄’라는 용어와 연관짓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과, ‘죄’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렇다 보니,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지친다.

 

8.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이 세례에 대하여 ‘죽음’과 ‘죄’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복잡하고 무겁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전하려고 하는 세례의 의미는 한마디로 ‘인간다움’이다. 인간다움을 헤치는 가장 강력한 것은 ‘죽음’과 ‘죄’이다.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순간은 ‘죽음’과 ‘죄’를 경험하는 순간이다. 세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다시 살아서 ‘참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우리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죽음’과 ‘죄’와 함께 죽는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때(부활할 때)는 ‘죽음’과 ‘죄’가 우리와 함께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죽음과 죄가 없는, 오롯이 풍성한 하나님의 생명만이 우리와 함께 살아난다.

 

9. 인간다움의 완성과 아름다움은 더 이상 죽음과 죄가 없는 상태이다. 그러한 인간다움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통하여 일어났다고 하는 것이 복음이다. 세례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세례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12-13절). 이게 무슨 말인가? 더 이상 인간답지 못한 인생, 짐승 같은 인생을 살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우리의 인간다움을 망가뜨리는 죽음과 죄가 모두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생명을 입고 인간다움의 완성을 이룬 사람이다.

 

10.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13-15절). 이게 무슨 말인가? 이제 인간답게 살라는 뜻이다. 우리의 인격이 이제 그리스도처럼 귀한 인격이 되었고, 그리스도처럼 사랑의 능력을 지니게 되었으니, 인간답게, 인생을 아름답게 살라는 뜻이다. 우리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어버리는 순간은 죽음과 죄를 맞닥뜨리는 순간이지만, 반면에 우리 인간이 인간다움을 가장 깊이 경험하는 순간은 사랑의 순간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그야말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바울은 이것을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문장을 한 단어로 집약해서 표현하면, ‘사랑’이다. 사랑할 때 우리의 몸은 의의 무기가 된다. 모든 것을 옳게 만든다.

 

11. 수세주일.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날을 기념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세례를 돌아본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세례를 돌아보며, 우리의 인생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지금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인간답게 살고 있다면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혹시, 나의 삶을 돌아볼 때 별로 인간답지 못한 것 같다면, 왜 나의 인생은 이렇게 인간답지 못한지에 대해서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이렇게 인간답게 살고 있지 못한 이유가 나 자신에게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잘 파악해서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내가 이렇게 인간답게 살고 있지 못한 이유가 세상에 있다면, 세상을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바꿀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사람들과 연대하고 나 자신을 내어놓아야 할 것이다.

 

12. 세례 받은 우리들이 ‘인간다움’에 대하여 묵상하는 일은 요즘 같이 어려운 시대에 정말 중요한 영성이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자연재해가 심해져서 정치가 보수화되고 사람들의 마음이 날로 강퍅해져 가는 시대에, 우리는 아주 쉽게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고 ‘야만’의 시대로 들어설 수 있다. 실제로 우리에게 들려오는 세계의 소식은 그리 인간답지 못하다. 혐오 범죄가 늘어나고 정치와 경제의 양극화 심화로 인하여 사회의 곳곳에서 갈등이 폭발하고 있다. 세상이 추해지고 악해지고 있다. 인간다움에 대한 묵상이 충분하지 않으면 야만의 시대로 휩쓸려 들어갈 수 있는 위험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13. 세례 받았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눈을 뜨는 일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간다움을 입고 세상을 바라보니, 이 세상이 얼마나 인간다움을 잃고 사는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인간다움을 잃고 살았는지를 보게 되는 일이다. 인간다움을 잃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죽을 몸을 죄가 지배하도록 내어주었고, 몸의 사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그것을 몰랐던 것이지, 우리 몸의 진실이 그랬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세례를 받고 인간다움을 회복한 후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 내어주지 않고,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며 의의 무기로 내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4. 야만의 시대는 멀지 않다. 야만에 휩쓸리는 일은 매우 쉽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삶이 추해지고 악해지기 십상이다. 모두가 인간다움을 잃고 야만의 시대로 휩쓸려 가려는 이 때에, 세례를 통하여 인간다움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끝까지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 세상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  세례 받은 우리들, 짐승처럼 살지 말고, 인간답게 살자. 더 나 자신을 내어주고, 더 사랑하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증언하면서 살자. 인간다움은 구원의 지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