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1. 31. 07:10

죄에 팔린 인간

(로마서 7:14-25)

 

1. 로스앤젤레스(LA)의 할리우드 거리에 가면 유명 영화인들의 손바닥을 조형 떠서 바닥에 장식해 놓은 거리가 있다. 2000년 1월, 내가 미국에 처음 여행 와서 그곳에 갔을 때 바닥에 새겨진 유명인들의 손바닥 중 가장 먼저 찾아본 것은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의 손바닥이었다. 1998년에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패치 애덤스>를 감명 깊게 보았고, 그보다 훨씬 전인 1989년에 그가 주연한 <죽은 시인의 사회> 또한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경우는 각색을 해서 연극으로 만들어 문학의 밤에서 친구들과 공연을 하기도 했다.

 

2. <패치 애덤스>는 참 좋은 영화다. ‘패치(patch)’라는 말이 참 따뜻하다. ‘상처를 치유하다’라는 뜻을 가진 ‘patch’는 뭔가 해지고 어긋난 것을 다시 정상적으로 돌려놓는 것을 말한다. 영화 <패치 애덤스>, 주인공 애덤스는 상처받은 영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일을 한 덕에 ‘패치’라는 별명을 얻었다. 애덤스, 본인의 삶도 평탄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패치’라는 별명을 얻고 정신적인 상처까지 치료하는 좋은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의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의과대학에 입학하자 마자 그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친구들과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해나간다. 그러다 어느 날, 정신 이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혼자 갔던 여자친구가 환자에게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한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던 일이 엉망이 된 순간이었다.

 

3. 우리 인간의 삶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선한 일을 행해도 그것이 그렇게 생각만큼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 같다. 요즘에는 선한 일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선의를 가지고 누군가를 도와주었다가 오히려 해를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누군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그를 도와주기 위해 선뜻 나서지 않는다. 우리는 마음이 너무도 많이 움츠려 든 사회에 살고 있는 듯하다.

 

4. 나희덕 시인의 ‘호모 루아’라는 시를 읽었다. 고개가 끄덕여 지기도 했고, 마음이 씁쓸해 지기도 했다.

 

호모 파베르이기 전에

호모 루아, 입김을 가진 인간

 

라스코 동굴이 폐쇄된 것은

사람들이 내뿜은 입김 때문이었다고 해요

부드러운 입김 속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세균과 독소가 들어 있는지

거대한 석벽도 버텨낼 수 없었지요

 

오래전 모산 동굴에서 밤을 지낸 적이 있어요

우리는 하얀 입김을 피워 올리며

밤새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의 투명성을 믿던 시절이었어요

노래의 온기가 곰팡이를 피우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몸이 투명한 동굴옆새우들이

우리가 흘린 쌀뜨물에 죽었을지 모르겠어요

 

입김을 가진 자로서 입김으로 할 수 있는 일들

허공에 대한 예의 같은 것

 

얼어붙은 손을 녹일 수도

유리창의 성에를 흘러내리게 할 수도

후욱, 촛불을 끌 수도 있지만

목숨 하나 끄는 것도 입김으로 가능해요

참을 수 없는 악취

몇 마디 말로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지요

 

분노가 고인 침으로

쥐 80마리를 죽일 수 있다니,

신의 입김으로 지어진 존재답게 힘이 세군요

그러니 날숨을 조심하세요

입김이 닿는 순간 부패는 시작되니까요

 

* homo Ruah, ‘Ruah’는 히브리말로 ‘숨결, ‘입김’을 뜻함.

(나희덕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에서)

 

5. 왜 그럴까?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가지고 좋은 일을 해도 그 결과가 선하게 나오는 일이 드물고, 더군다나, 위의 시가 서술하고 있듯이, 우리의 입김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입김이 여러가지 악한 일을 한다.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도 있다고 한다. 시에서 표현하고 있는대로, 신의 입김(ruah)으로 지어진 존재인데, 우리의 입김은 왜 신처럼 선하지 못하고, 이렇게 악할까?

 

6. 로마서 7장의 마지막 부분은 매우 시적이다. 아주 강력한 용어들이 등장을 하고,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표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용어는 이것이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14절). 상품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팔렸도다’를 들으면, 그냥 상품을 사고 파는 정도의 이미지만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교회에 써 보낸 이 편지에서 그가 사용하고 있는 ‘팔렸도다’의 용어는 ‘노예를 사고 파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죄에게 노예로 팔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7. 현대인들은 대체적으로 노예에 대한 경험이 없다보니, 노예가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별 감흥이 없다. 노예는 단순히 다른 존재에게 속해서 그가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노예는 주권과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노예가 된다는 것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된다는 뜻 이전에,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주권과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뜻이다. 이게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한다.

 

8. 요즘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다고 아우성 치는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어서 별로 불편할 게 없어 보이는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 친다. 아우성 치다 스스로 목숨을 놓아버리는 사람도 부지기 수로 많다. 통계를 보면, 2000년 이전과 2000년 이후의 자살률을 비교하면, 2000년 이후에 자살한 사람이 훨씬 많다. 삶은 더 풍요로워진 것 같은데, 왜 사람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 치는가.

 

9. 예전에 한국에서 대학을 구분할 때는 서울,연,고대, 그리고 기타대로 구분했다. 그러다, 수도권 대학과 지방대로 구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식으로 대학을 구분하지 않는다. 한국의 대학은 의대와 기타대로 구분된다. 올 대학입시 통계를 보면 서울,연고대에 합격한 학생 중 2200여명이 등록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느 대학이든, 의대에 합격한 학생들이 등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지금 모두 ‘의사’가 되고 싶은 사회다. 왜 그럴까? 이유는 단순하다. 돈 때문이다. 현재 의사가 가장 안정된 직업이라는 생각이 편만하기 때문이다.

 

10. 그런데 실제로 의사를 하면서 행복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잘 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을 하면서 산다. 노동이 아름다우려면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잘 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건데, 노동이 힘든 이유는 우리가 돈에 팔려서 우리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 내가 별로 잘 하지 못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아닌 것 같으나, 우리가 얼마나 노예처럼 사는지 모른다. 우리의 주권과 자유는 별로 없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팔린 사람처럼, 그렇게 노예로 산다. 그래서 요즘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즐비하다.

 

11. 요즘 한국에서는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라는 방송이 인기를 얻었다. ‘어른’이라는 용어를 붙인 이유는 요즘 우리 시대에 ‘어른’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은 무슨 의미일까? 말씀과 연관해서 설명하면, ‘노예처럼 살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죄에 팔리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주권과 자유를 빼앗기지 않은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노예처럼 사는 사람을 도와주고, 죄에 팔리려고 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주권과 자유를 존중해 주는 사람이 아닐까? 김장하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돈을 벌었다면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번 건데,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뿌려 버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방송 마지막에 김장하 선생은 이런 말을 한다. “아무도 칭찬하지도 말고 나무라지도 말고 그대로 봐주기만 하라고 말하고 싶다.”

 

12.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죄에 팔렸다고 말한다. 그래서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일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선한 의도를 가지고 착한 일을 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한 일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 모든 인간이 고백하는 바다. 우리 인간의 실존이 그렇다. 그래서 바울처럼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13. 이것만큼 비참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고백이 있을까? 이것만큼 가련하지만 동시에 솔직한 고백이 있을까?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곤고하다. 뭔가 잘 살고 있는 것 같고, 뭔가 잘 하고 있는 것 같고,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늘 부족하고 죄스럽고 행복하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도 없이 절망에 빠지고 낙심한다. “What a wretched I am. Who will rescue me from this body of death?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