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4. 4. 00:25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마태복음 21:1-11)

 

1. 종려주일은 사순절 마지막 일주일의 시작이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가장 절정을 이루는 시간이다. 그러나 몰입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드라마에서 가장 절정을 이루는 회차는 순간 시청률이 올라간다. 기독교인이 평소에 자기 신앙에 별로 몰입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때만이라도 신앙에 몰입하면, 큰 유익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몰입합시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예수를 바라보자!” 적어도, 사순절 동안은, 그리고 그 중에서도 고난주간만큼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

 

2. 종려주일에 읽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나귀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먼저 도달한 장소는 감람산 기슭에 있던 벳바게라는 마을이다. 이것을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저자의 의도가 있다. 성경은 굉장히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성경은 역사의 기록이면서 경전이다. 역사의 기록이 경전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역사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역사, 거기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가 거룩한 것이고, 경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3. 우리는 어떠한 사람을 ‘성인(Saint)’라고 부른다. 그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 사람 자체의 인격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성인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을 통해서, 나의 인격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믿는 자를 일컬어서 ‘성도(거룩한 무리)’라고 칭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격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부족한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4. 성경의 대표적인 예가 다윗 왕이다. 다윗 왕은 여러가지 인격적인 결함이 많았던 사람이다. 적군과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하고자 미친놈 행세도 했고, 자기의 충직한 장수 우리야의 아내를 비열한 방식으로 취하기도 했고, 자식(압살롬)과의 불화로 왕궁에서 쫒겨나기도 했고, 동고동락 했던 부하 장수(요압)와 극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다윗 왕, 다윗 왕조가 그리움의 대상이요, 회복의 목표가 된 것은, 다윗 왕을 통해서, 그리고 다윗 왕조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충만히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 왕과 다윗 왕조는 이상적인 왕과 왕조가 된 것이다.

 

5.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면서 예수님의 일행이 감람산 벳바게로 먼저 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루살렘으로 곧장 가지 않고 감람산에 들렀다 가는 여정의 동선은 다윗 왕을 연상시킨다. 다윗 왕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사무엘하 15장 이하의 말씀에 보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감람산을 넘어 나귀를 타고 피신한다. 예수님이 감람산에서부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은 무엇을 연상시키는가? 당연히 다윗의 왕의 귀환을 연상시킨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고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이다.

 

6. 벳바게 근처에 이르자, 예수님은 제자 두 명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를 풀어 데라고 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누가 ‘왜 나귀를 끌고 가오?’라는 둥의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면서 끌고 오라고 한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냥 거의 도둑질이나, 아니면 무대뽀 행동 같다. 어디에 주차 되어 있는 차를 끌고 가면서 누군가 ‘왜 당신 차도 아닌데 그렇게 마음대로 끌고 가오’라고 할 때,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면, ‘별 미친놈 다보겠네’라면서 욕을 먹을 것이다.

 

7. 조선시대 때도 교통 수단을 말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부류가 있었다. 마패를 지닌 자였다. 우리는 대개 드라마 같은 곳에서 암행어사가 마패를 가지고 다니며, ‘암행어사 출두요’ 할 때 마패를 꺼내 드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 당시에 마패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그 당시에 이렇게 남의 나귀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왕족이나 랍비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귀를 끌고 오면서 ‘주가 쓰시겠다’라고 했을 때, 이 용어를 통해서 드러내고 싶은 것은 분명하다. 예수는 다윗 왕의 자손(왕족)이고, 랍비라는 것이다. 특별이 ‘주’라는 호칭은 그리스도인에게 각별한데,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신앙의 고백이 담긴 것이다.

 

8. 나귀의 주인은 자신의 나귀를 기꺼이 ‘주께’ 내어드렸다. 이러한 행위는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지침이 된다. 우리가 우리의 소유를 주님께 기꺼이 내어 드리는 이유는 그것을 주님께서 쓰시기 때문이다. 나귀의 주인이 그 나귀를 아무리 잘 사용했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그 나귀를 사용하신 것만큼 중요하고 소중한 일을 위해서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께 내어드린 그 나귀가 얼마나 귀한 일을 했는가. 안 그랬으면 그냥 짐이나 옮겨 나르는 일꾼 역할을 했을 텐데, 주님께 내어드린 나귀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등에 태우고 예루살렘에 이르는 놀라운 일을 했다. 그 덕분에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소식이 전해진 것 아닌가.

 

9. “주가 쓰시겠다” 할 때 믿음으로 내어드린 우리의 소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어떠한 위대한 일을 하게 될 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렇게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주님, 주가 쓰시겠다 말씀하시면 순종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내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사용하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주님을 믿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저에게 말씀해 주옵소서. 나귀를 내어드린 그 사람처럼, 저도 내어드리겠습니다. 주님 영광 받으옵소서! 아멘.”

 

10.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사야 62장의 말씀과 스가랴 9장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언의 성취’라는 뜻이다. 우발적 사건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발생한 구원 사건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삶이 성경에 잇대어 있어야 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다. 우리가 매일 성경을 진중하게 들여다보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그 숨결로 숨을 쉬며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우발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구원 사건인 것을 선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11. 되는 대로 사는 우발적인 삶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삶은 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삶은 매 순간이 구원 사건이다. 삶이 구원 사건이라는 뜻은 무엇인가?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친다는 뜻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담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자의 삶은 아무도 못 말린다. 담대한 마음, 즉, 용기 있는 자의 삶은 아무도 못 건드린다. 이렇게 놀라운 삶은 ‘예언의 성취’가 있는 삶, 즉 말씀에 잇대어 있는 삶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기의 삶을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12.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구원 사건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5절 말씀이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마 21:5). 이사야서는 예수님 사건(메시아 사건)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구약 성경이다. 이사야 61장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당에서 읽은 대표적인 말씀이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13. 이사야 60장~63장은 특별히, 여호와의 종(메시아)을 통해서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선포에 대한 말씀이 실려 있다. 스가랴서도 마찬가지다. 시온의 딸, 즉 예루살렘의 주민, 즉, 이스라엘에게 선포된 말씀이다. 다윗 혈통의 왕이 등장함으로써 하나님이 다윗과 맺으셨던 언약대로 다윗 왕조가 회복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이렇게 이사야서와 스가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드러내 준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예수가 바로, 여호와의 종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실, 다윗의 왕의 자손, 메시아라는 것이다.

 

14. 하지만, 자기의 삶이 예수님처럼 성경에 잇대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반응은 다르다. 자기의 삶이 성경에 잇대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환호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그러나, 자기의 삶이 성경에 잇대어 있지 않는 사람들은 시큰둥하게, 그냥 이렇게 예수를 말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마 21:11).

 

15.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성경에 잇대어 있어 예언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서로가 서로의 삶을 알아보는 것의 관건은 ‘우리의 삶이 어디에 잇대어 있는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의 삶은 그냥 우발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16. 예수의 삶이 우발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예언의 성취요 구원 사건이라는 것을 깊이 알았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깊이 사랑했다.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갔고, 죽은 후에도 그 무덤에 찾아갔다. 그러나, 예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 즉,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살지 못했던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그의 죽음을 헛된 죽음으로 조작하려고 술수를 썼다. 예수는 정확하게 예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고난을 당했다.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17. 이해할 수 없고, 불필요한 고통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고, 정확하게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삶의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그냥 우발적으로 서로 만나고 대하고 사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회복해야 할까?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는 것이다. 나의 삶이 우발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잇대어 있는 삶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18. 우리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자. 나는 얼마나 성경을 가까이 하고 있는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있어야 한다는 개념(신앙)을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려고 읽고 있는가. 나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살도록 권면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삶, 그리고 가족의 삶, 또한 만나는 모든 이들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과 잇대어서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있는가. 정확하게 사랑한다는 것, 정확하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말씀에 잇대어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지 못할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을 안겨주게 된다.

 

19. 삶이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관계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나 스스로에게. 부부 관계 속에서,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누군든지와의 관계 속에서. 고통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우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서 생각해 보라. 그러려면, 우선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찾으려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예언의 성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성경에 잇대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구원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발적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살라. 그럴 때 우리는 정확하게 사랑하게 된다.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반대로, 정확하게 사랑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