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1. 16. 18:04

나는 예수와 결혼했다

(롬 7:1-6)

 

1. 작년 말(2022년 11월)에 출간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되기도 했던 『태극기와 한국교회』를 읽었다. 민주주의가 발달되면 시민들의 시위도 늘어나는 법이다. 한국의 시위 풍경을 보면 언제부터인가 민주화 진영은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하고, 보수 진영은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한다. 보수 진영, 특히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국가 상징인 태극기와 기독교 보수 진영은 무슨 연관을 지니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래서 저자는 국가상징인 태극기와 기독교의 관계사를 연구해서 그 결과를 저작물로 내어놓았다.

 

2. 역사를 돌아보는 일은 오늘의 문제가 왜 발생했고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꼭 필요하다. 역사는 과거를 공부하는 일이지만 과거에 머무는 게 아니라 미래를 열어젖히는 일이다.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점점 답답해져 가고 있다. 현실이 감옥이나 지옥처럼 느껴지면 인간은 병리적 현상을 나타낸다. 사는 것을 못 견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나 자신에게 자해하는 일을 넘어 상대방에게도 해를 끼치는 일이 급격히 늘어난다. 즉 혐오와 폭력이 늘어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에 따스함이 줄어든다. 급격히 모든 게 서늘해진다.

 

3. 서늘한 사회는 누구에게나 고통이다. 인간은 36.5도의 체온을 유지해야 하는 것처럼 마음의 온도도 일정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매우 사나워진다. 그래서 인간은 신체적으로도 36.5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거의 모든 신체 에너지를 쓰는 것처럼, 마음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모든 정신적 에너지를 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간다움이란 서로의 몸과 마음이 적정 온도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인간다움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몸과 마음의 적정 온도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다른 이의 몸과 마음의 온도를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슬픈 사회이다.

 

4. 한국의 근대사는 차갑다. 몸과 마음의 따스함이 없어 모든 사람들이 괴로웠다. 힘센 자들(나라와 민족)의 폭력이 난무했고, 약한 자들(나라와 민족)은 굴욕을 겪어야만 했다. 『태극기와 한국교회』에는 그러한 폭력과 굴욕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따스함을 안겨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태극기와 기독교였다. 국가상징으로서 태극기는 스러져가는 국가의 운명을 보듬으며 안간힘을 써서 지켜내려는 힘을 주었고, 기독교는 따스함을 잃어가는 한국인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그들의 온도를 지켜주었다. 한마디로, 태극기와 기독교는 따스했다.

 

5. 이 책은 태극기와 한국교회의 관계를 다루면서 태극기와 기독교가 지녔던 따스함이 어떻게 서서히 수그러들었는지를 추적한다. 따뜻했던 태극기가 왜 따뜻함을 잃게 되었는지, 따뜻했던 기독교가 왜 따뜻함을 잃게 되었는지, 그 슬픈 역사의 기록이다. 따스함을 잃은 것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기 마련이다. 오늘날, 따스함을 잃은 태극기와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시대착오적 행태와 구호의 현장을 지배하는 주도세력이 다름 아닌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과 신자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태극기에 대한 혐오’는 자연스럽게 ‘한국개신교에 대한 혐오’와 연동되었다… 과거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수많은 전근대와 식민지 조선인들의 가슴을 설레고 뜨겁게 했던 저 ‘십자가’와 태극기’라는 상징이, 이제는 현대의 시민사회로부터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으며 외면당하고 있다”(379-380쪽).

 

6. 책에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그 뭉클함 이면에 담긴 슬픔은 책 읽은 속도를 늦추고 잠시 멈추어 마음을 진정시키게 만든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잠시 책을 내려 놓을 수밖에 없었던 장면이 하나 있었다. 나라의 운명이 간당간당하던 1905년에 발생한 일이다. 그때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 루즈벨트가 방한한 일이 있었다. “고종황제는 일제의 국권침탈 야욕에 맞서 고군분투 중이었기에 미국 대통령 딸의 방한 소식에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앨리스 루즈벨트를 국빈급으로 환대했다”(310쪽).

 

7. 고종황제와 한국관료들은 앨리스 루즈벨트를 국빈대접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매우 무례했다. “앨리스는 방한 기간 내내 오만하고 무례하며 방종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고종을 만나는 시간, 말 위에서 승마복과 장화를 신고 시가를 피우며 나타났다. 대한제국의 황실 격식과 의전에도 장난스럽게 대응했다. 마침내 명성황후가 모셔진 홍릉을 방문했을 때에도 도착 후 정중히 예를 갖추기 보다는 능 앞에 설치된 석상에 올라타 기념 촬영하기에 급급했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와의 어떠한 외교적 대화에도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으며 수행원들과 파티와 유람만 즐기고 일본으로 떠났다”(313-314쪽).

 

8. 얼굴이 화끈거려서 책을 더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책을 내려놓고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앨리스 루즈벨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한국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방한하기 두 달 전 미국과 일본은 ‘가츠라-테프트 밀약’을 맺었고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서로 인정한 후였다. 그리고 방한 2주 전, 미국과 영국, 그리고 러시아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서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승인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 나라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던 앨리스 루즈벨트에게 한국은 우스운 존재였던 것이다.

 

9. 따스함을 잃으면 따스한 시선도 거두어지게 되는 법이다. 따스함을 잃어버린 한국을 향해 따스한 시선을 가질 수 없었던 앨리스 루즈벨트의 행동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따스함을 유지해야 한다. 따스함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내가 따스해야 다른 이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낼 수 있는 것이고, 따스함을 유지하고 있어야 다른 이들도 나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다움이란 이렇게 따스함을 지키는 것이다. 나의 따스함과 당신의 따스함이 공존하는 것이다.

 

10.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낸 근본적인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강한 자들(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약한 자들(유대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 때문에 교회가 따스함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 지위를 통해서 강한 자들은 사회적 지위가 시원치 않았던 약한 자들을 업신여겼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언약적 위치, 율법을 통해서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판단하고 비난했다. 서로 간에 평화 없는 것만큼 따스함을 잃는 것은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둘 사이에 잃어가는 따스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강력한 언어들을 동원하여 편지를 쓴 것이다.

 

11. 바울이 율법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이유는 율법의 조문에 묶여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 조문에 묶여 있는 것은 마치 배가 바다를 향해 힘차게 항해를 해야 하는데 항구에 밧줄로 묶여 있어 나아가지 못하는 형국과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구원하시는 능력인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한 인격(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는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인격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전히 율법(문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집중하고자 했다. 율법에 매어 있어서 예수에게로 가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러한 답답한 상황을 바울은 결혼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다.

 

12. 7장에서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결혼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여기서 남편은 율법이고, 여인은 율법에 매인 이스라엘(유대인 그리스도인)이다. 이스라엘은 율법과 결혼한 상태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인 이스라엘이 남편 율법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편이 죽는 것이다. 바울 당시 때만 해도 이혼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한 번 결혼하고 나면 정말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배우자가 죽는 경우를 제외하고서 여인이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남편을 막 죽이는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13.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죽지 않는 율법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내가 죽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4절). 사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이다. 율법은 죽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의 요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다. 인간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율법에 매인 인간은 영원히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 죄인으로 사는 것만큼 인간의 마음을 차갑게 하는 일은 없다.

 

14. 이런 측면에서 예수에게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선포는 복음이 될 수밖에 없다. 바울의 표현대로, 율법에 매인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5-6절).

 

15.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울의 비유를 다시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율법과 결혼했을 때 여인(인간)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 결혼생활을 끝낼 수 없었다. 율법은 결코 죽지 않을 존재였기 때문이다. 율법을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인생이 답답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주 의로운 방법으로 율법과의 결혼생활을 끝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게 복음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죽지 않는 율법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서,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것이다.

 

16. 율법은 자기에게 매인 존재에게 죄의 정욕이 역사하게 하여 죄를 알게 하고 죄를 짓게 하고 그래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다. 즉, 율법은 행복한 인생을 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결혼은 완전히 달랐다. 문자인 율법과 인격인 예수는 같을 수 없다.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지만, 인격인 예수는 사람을 사랑한다. 정죄 받는 인생과 사랑 받는 인생은 다르다. 정죄 받는 인생은 차갑지만, 사랑 받는 인생은 따스하다.

 

17. 로마서에서 바울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든 비유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결혼한 사람들이다. “나는 예수와 결혼했다.” 예수와 결혼한다는 것, 결혼할 정도로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온통 예수의 사랑으로 뒤덮이는 것이다. 사랑으로 뒤덮인 마음은 인간냄새가 가득하고, 시선과 손길이 따스해진다. 문자인 율법이 아니라, 이제 한 인격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선포는 이런 것이다. 세상이 더 따스해졌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깊이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18. 인간은 인격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법으로 살아가거나 다스릴 수 없다. 인간은 인격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오직 사랑으로 보듬어야 하고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 법치주의만큼 인간성을 훼손하는 것도 없다. 법이 인간 위에 있으면 인간은 불행해진다. 법은 인간 아래에서 봉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사랑이 무너지고 신뢰가 무너지면, 법만 남는 법이다.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 우리 인간의 마음을 차갑게 만드는 게 어디에 있는가. 사람 사이에 법이 들어서는 순간, 그 관계는 차가워질 뿐이다.

 

19. 세상이 어려워질수록, 인간은 마음의 따스함을 잃어간다. 『태극기와 한국교회』가 보여주고 있듯이, 세상이 어려워지니까 태극기와 십자가가 온기(따스함)를 잃어갔다. 따스함을 잃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사는 게 어렵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따스함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예수와 결혼했다”는 것을 굳게 붙드는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예수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 사랑의 온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사랑의 따스함은 절대적인 것이다. 절대적인 따스함을 지닌 사람은 세상이 어떠하든지 그 따스함을 유지할 수 있다. 나는 이 어려운 시절에 마음의 따스함을 잃지 않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이 사실에 집중한다. “나는 예수와 결혼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