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2. 14. 04:11

우리의 사역이 믿음을 일으킨다

(고린도전서 3:1-9)

 

1. ‘지구적 집단 트라우마 상태.’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트라우마를 겪게 되면, 극도의 긴장상태가 유지된다. 우리 몸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데, 공격성이 높아진다. 요즘, 미쳐 날 뛰는 것 같은 사건사고가 많은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극도의 긴장상태가 유지되니까,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공격성이 높아지고, 조그마한 트리거가 생기면 공격성이 실제 실행으로 옮겨진다. 아주 위험한 상태인 것이다. 트라우마 상태에서는 마음이 겉잡을 수 없이 혼란해진다. 불안, 걱정, 원망, 화남, 슬픔 등 다양한 감정 반응이 나타나는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공격성이 높아진 상태이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에 대한 컨트롤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시대에 인간은 말 그대로 ‘walking beast/walking bomb’가 되기 쉽다.

 

2. 좀비 드라마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The Walking Dead”를 보면, 실제로 그렇다. 그 드라마에서 무서운 것은 좀비가 아니다. 인간이다. 모든 인간이 좀비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집단 트라우마에 걸려 극도의 긴장상태로 살아간다. 공격성이 높아지고, 자신에게 생긴 여러가지 감정의 변화를 어떻게 컨트롤 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한다. 살아남은 인간들이 서로 힘을 합해서 평화롭게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하고 착취한다. 좀비가 무서운 게 아니라 인간이 무섭다. 인간은 아주 무서운 짐승이 된다.

 

3. 트라우마 상태가 되면 무력감과 불안감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잘 실행하지 못하게 된다. 몸에서 그 현상이 나타나는데, 잠을 잘 못 이루게 되고, 두통이 생기고, 소화불량이 생기고, 식욕부진이 생긴다. 몸이 자기의 역할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삶에도 큰 영향이 온다. 하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공부하던 학생은 학교에 가는 게 싫어지고, 직장생활 하던 회사원은 일 하는 게 싫어지고, 자신이 의미 있게 하던 일들에 대해서 왠지 거부감이 들면서 손을 놓게 된다. 트라우마는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기도할 수 없게 되고, 무엇보다 늘 다니던 교회마저 발걸음을 끊게 된다. 트라우마 상태에서 드는 가장 보편적인 생각은 이런 것이다. “학교 가면 뭐해.” “돈 벌면 뭐해.” “교회 가면 뭐해.”

 

4. 각종 미디어와 SNS 플랫폼이 전세계를 초연결 사회로 만들어서 지구촌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가까워졌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트라우마를 겪는다. 각종 미디어와 SNS에 올라오는 뉴스들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전혀 기쁨을 주지 못한다. 매일 보는 뉴스에서 총기관련 사건사고를 보는데, 그 뉴스를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한테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감사하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한테 언제 저런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불안하다.’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감사 헌금을 내지 않는다. 그 돈으로 총을 산다.

 

5. 이러한 시대에 자기 자신을 잘 보살피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지구적 집단 트라우마 상태’에 있다. 이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구적 집단 트라우마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발생하고 있는 ‘무력감과 불안함’의 자기장이 잘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게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고 해서 나에게 무력감과 불안함의 자기장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방사선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방사선에 조금만 노출되면 우리는 머지 않아 아주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될 위험이 높다. 마찬가지다. 지구적 집단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요즘, 무력감과 불안함 때문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 너무도 위태위태하다.

 

6. 상황은 좀 다르지만, 고린도교회는 아주 큰 혼란 가운데 있었다. “내 형제들아 클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전 1:11).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웠는데, 그곳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을 때,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파겠는가.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본인들의 상태가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말해주어야 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7.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스스로를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이 ‘신령하다’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스스로 ‘나는 믿음이 좋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며, 이렇게 뽐냈다. “나는 바울에게 속한 사람이야.” “나는 아볼로에게서 신앙을 배웠어!” “나는 게바의 제자야!” “무슨 소리들 하고 있어 정말. 나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구!”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바울은 직격탄을 날린다. “너희는 육신에 속한 자야! 너희들의 신앙은 그냥 어린 아이들의 신앙 수준 밖에 안 돼!”

 

8.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우리도 우리의 신앙 상태를 엄청 착각하면서 살고, 우리도 우리의 정신 상태를 엄청 착각하면서 산다. “착각하지 맙시다!” (소확행, 어쩔TV, 돼지런하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근자감’이라는 말이 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뜻이다. ‘나는 괜찮아. 나는 괜찮을거야.’ 우리는 이렇게 근자감을 가지고 산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가끔 근자감을 지닌 소들이 나온다. 사자가 다가오는데, 도망가지 않고 뿔을 들이대면서 사자에게 덤벼드는 소들이 있다. 대개 사자에 의해서 한 방에 제어된다. 사자가 오면 도망치는 게 상책인데, 사자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근자감’을 지닌 소는 대개 사자의 밥이 된다.)

 

9. 우리는 지금 굉장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괜찮지 않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정신도 괜찮지 않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직격탄을 날린 것처럼, 나도 직격탄을 날려보자면, 요즘 많은 신앙인들이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유튜브를 통해서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교류가 있고,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만, 나와 전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은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위로 받았다, 나는 신앙이 괜찮다는 착각만 불러 일으킬 뿐이다.

 

10. 우리는 괜찮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자감’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주 낮은 자세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아주 기초로 돌아가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일 중에 하나는 아주 기초적인 일부터 안 된다는 것이다. 밥을 먹어야 하는데, 밥 먹기를 싫어 한다. 사람들과 교제를 해야 하는데, 사람 만나기를 싫어한다. 몸을 좀 써야 하는데, 몸 쓰는 것을 귀찮아 한다. 이런 기초적인 일부터 되지 않으니까, 더 중요하고 큰 일들을 하는 것은 꿈도 못 꾼다.

 

11. 고린도교회가 그랬다.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되지 않았다. 그러니 더 큰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은 꿈도 못 꾸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2). 그러면서 바울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한다. 3장 3절이하의 말씀을 풀이해서 말하면 이런 것이다. ‘누구는 바울에게 속했다고 말하고, 누구는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믿음에는 문제가 없다고 뽐을 내지만, 서로 그렇게 시기와 분쟁을 하고 있으니, 아볼로에게 속했네, 바울에게 속했네,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바울에게 속했네, 아볼로에게 속했네,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와 아볼로가 행한 것을 그대로 배우라. 우리는 그저 각각 받은 은사에 따라서 봉사의 일을 한 것이고, 우리의 봉사를 통해 너희들의 믿음이 자라난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12. 여기서 우리들에게 실제적으로 중요한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5절이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아볼로와 바울은 사역자였다. 사역자(minister)는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몸을 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아볼로와 바울이 사역을 했기 때문이다. 봉사를 했기 때문이다. 몸을 썼기 때문이다. 사역은, 봉사는, 몸을 쓰는 일은 믿음을 일으킨다. 믿음은 사역으로, 봉사로, 몸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13. ‘일으킨다’라는 말을 좀 더 풀이하면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믿음이 생기게 한다 (없던 것이 있게 됨)

2) 믿음이 자라게 한다 (있는 것이 더 풍성)

3) 믿음이 다시 서게 한다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난다)

 

14. 몸(사역, 봉사)을 써야, 믿음이 생긴다. 몸을 써야 믿음이 자란다. 몸을 써야 시들했던 믿음이 다시 선다. 신앙이 괜찮지 않은 이 시대에 우리는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몸을 써야 한다. 몸을 써서 예배당에 오는 것을 해야 한다. 몸을 써서 기도하는 것을 해야 한다. 몸을 써서 성경을 읽는 일을 해야 한다. 몸을 써서 어떤 봉사라도 한 가지 해야 한다. 일례로, 유튜브로 여러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일은 아주 손 쉽다. 그냥 틀어 놓고 듣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나, 성경을 펴고 읽는 일은 쉽지 않다. 좀 더 적극적으로 몸을 써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몸을 쓰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거나, 자라거나, 다시 서지 않는다. 몸을 쓰지 않고 하는 일은 그저 착각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몸을 쓰지 않고 운동을 해보라. 그러면 나는 착각할 것이다. 나는 건강해. 그런데 정말 그런가?

 

15. 교회 일은 아주 작은 것도 크고 거룩한 일이다. 하다못해, 주보를 접는 일, 주보를 나누어 주는 일도 크고 거룩한 일이다. 출애굽기 성막 이야기를 보면, 아무나 주의 일을 할 수 없었다. 택하심을 받은 사람만 할 수 있었다. 나는 주일 준비를 하면서 방송 장비를 셋업하고, 헌금함을 옮겨 놓으면서 출애굽기의 성막 이야기를 늘 떠올린다. 그러면, 카메라 삼각대를 설치하는 일, 강대상을 옮기는 일, 마이크를 설치하는 일이 정말 다르게 다가온다.

 

16.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유언처럼 들리는 법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것은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유품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나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정체성을 가진다면, 교회에서 하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것이 유언처럼, 유품처럼 들리고 느껴질 것이다. 그게 믿음 아닌가?

 

17. 괜찮지 않은 시대에, 우리는 거창한 일을 할 수 없다. 괜찮지 않은 시대에, 우리가 우리의 신앙, 그리고 우리의 삶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지키려면, 아주 작은 것부터 몸으로 하는 게 중요하다. 사역, 봉사, 이런 거창한 말 말고, 그냥 몸으로 하는 일이 중요하다. 와서 주보라도 접으라. 와서 주보라도 나누어 주라. 와서 교회 마당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라도 주우라. 와서 미디어팀 장비 설치하는 것이라도 거둘라. 와서 부엌 냉장고 정리라도 하라. 와서 친교실에 식탁 의자라도 설치하라. 일찍 와서 오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라도 하라. 우리의 사역이 믿음을 일으킨다. 몸을 움직이는 것. 몸으로 뭔가라도, 아주 조그마한 것이라도 하는 것. 그것이 이 괜찮지 않은 시대에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린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