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5. 9. 08:12

스데반 사건: 죽음에 이르는 설교

(사도행전 7:55-60)

 

1.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를 자꾸 낭만적이고 은혜롭게 읽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성경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의 상태는 ‘애통함’이어야 한다. ‘라멘트(Lament)’의 마음.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성경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면 안 되고, 내가 그 불 속에 들어가 있다는 상상력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더 간절하고 명확하게 들린다. 그래야 성경을 통해서 삶의 실질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다.

 

2. 성경을 읽을 때, 낭만적이고 은혜롭게 읽는 대표적인 이야기 중 하나가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야기다. 아마도 스데반의 모습을 묘사한 이 문장 때문일 것이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그리고 죽을 때 “성령 충만하여” 의연한 태도로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스데반 사건이 가진 의미를 좀 더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장치들이지, 실제로 스데반의 죽음이 낭만적이거나 은혜롭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죽음은 힘들고 아프다.

 

3. 스데반 사건은 사도행전 6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구제할 때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자, 구제를 좀 더 효율적으로 하고, 갈등의 요소를 좀 더 보듬고자 일곱 집사를 선출한다. 그 중에, 스데반이 있다. 그때 스데반에게는 이런 수식어가 붙는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a man full of faith and of Holy Spirit)”. 일곱 집사 중에서도 스데반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남다른 성품과 신앙을 가진 스데반의 이야기가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오게 될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4. 스데반의 이야기는 사도행전 6장 8절에서 이렇게 이어진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사도행전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 부활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하는 성경이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것, 그리고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한 것은 무슨 매직 같은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를 전한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세상은 바뀌었다. 부활 사건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이전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5. 스데반이 전하는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성경은 그들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른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갈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행 6:9). 이들을 규정해 주는 용어는 ‘헬라파 유대인’이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유대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을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말한다. (한국 사람인데, 우리처럼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 같은 것이다.)

 

6. 스데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복음)는 무엇일까? 이것은 신약성경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인데, 사도 바울도 자기 서신에서 계속해서 전한 것이다. 믿음을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자녀(백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진술이지만, 사도행전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 말은 굉장히 혐오스러운 말이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특권이 강탈당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7. 1922년,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 날을 제정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1)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히지 말아 주십시오

2) 어린 사람을 늘 갓가히 하시고 자조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3) 어린 사람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

4) 어린 사람에게 수면과 운동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십시오

5) 리발이나 목욕 가튼 것을 때맛처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6) 낫분 구경을 식히지 마시고 동물원에 자조 보내주십시오

7) 장가와 시집 보낼 생각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100년이 지난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 된 어린이에 대한 인권이다. 그러나 100년 전만 해도, 어린이에게는 인권이라는 것이 없었다. 다른 말로, 어린이는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8.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고 새로운 세상(하나님 나라)이 열린 것을 선포했을 때, 유대인들, 특별히 스데반과 관련해서는 헬라파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복음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기소한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정당한 기소는 아니다. 매우 비열한 방식으로 스데반을 기소한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들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행 6:10-13).

 

9. 스데반의 기소가 정상적인 기소가 아니었다는 것을 성경은 드러내고 있다. 아무튼,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기소한 구체적인 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율법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이다. 스데반이 율법과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것은 신성모독 죄를 말하는 것이다. 스데반이 지은 죄는 신성모독 죄였다. 성경에서 신성모독 죄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한다. 스데반이 죽을 때 돌로 쳐 죽임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공회가 스데반을 모함해서 죽인 죄목이 신성모독 죄였기 때문이다. 스데반의 죽음은 이렇게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울분을 토하게 되는 죽음이다.)

 

10. 속임수와 강제로, 억울하게 공의회에 서게 된 스데반은 의연했다. 그는 그곳에서 변론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설교를 한다. 그의 긴 설교는 사도행전 7장 전체를 장식한다. 설교를 통해서 스데반이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로, 유대인들의 기만과 불신앙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방인을 받아들였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불경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들이 하나님보다 더 크고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게 우상숭배이고, 이게 신성모독 아니면 무엇인가!

 

11. 그런데, 왜 (헬라파) 유대인들은 회개(마음을 돌이켜 복음을 받아들여, 이방인들을 자기들의 형제로 받아들이는 일)하지 않고, 분노하여 스데반을 죽였을까?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자신들의 특권의식을 무너뜨리고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죽였다. 율법과 성전은 유대인들의 특권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지니 자신들의 삶도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난 유대인들은 스데반에게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신성모독죄를 씌워 돌로 쳐 죽였다.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이루는 것을 빼앗긴 자는 포악해진다.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라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믿은 것이다. 주시는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고 믿지 않으면 우리는 포악한 괴물이 된다. 생명을 죽이고 헤쳐도 그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다.

 

12. 스데반의 죽음은 정말 안타까운 죽음이다. 희생된 거다. 칭송받을 죽음이 아니라 안타까운 희생의 죽음이다. 가해자에 의해서 피해를 당한 죽음이다. 복음 증거하다 죽어도 괜찮다는 말은 무책임한 말이다. 복음을 핑계로 사람의 생명을 사지로 몰면 안된다. 이 사건 이후로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진다. 무서워서 살아남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이건 마음 아픈 일이다.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스데반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말은 아주 못된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생명을 희생시키는 분이 아니다. 가슴 아픈 죽음 앞에서 우리는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13. 스데반의 죽음이 가슴 깊이 숙연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복음) 덕분에 우리(이방인들/유대인이 아닌 자들)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스데반처럼 행할 수 있을까?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설교(복음 전하는 일/하나님 나라 전하는 일)는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유대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였다고 전한 복음 때문에 스데반은 죽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열매는 지금 우리가 따먹고 있다. 이렇게 누군가의 핏값으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피를 흘릴 수 있을까?

 

14.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운동 덕분에 요즘 세상은 어린이 천국이 되었다. 어린이 천국은 그냥 온 게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 덕분이다. 스데반의 설교(복음전파) 덕분에 우리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그냥 우연히 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 덕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 신실한 신앙의 선배들 덕분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도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에 이르는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15. 무겁고 무서운 부르심 같지만, 너무 힘들고 어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스데반의 모습을 보면 그 일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스데반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니,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고, 그는 죽을 때 누구를 원망하거나 억울해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 충만하여 누구도 보지 못한 하나님과 그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이런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넉넉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스데반 사건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더 성숙하게 하시길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