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5. 31. 10:51

성령의 숨

(사도행전 2:1-21)

 

1. 신약은 ‘구약의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말을 여러 번 한 기억이 있다. 구약을 잘 모르면, 신약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마음 속에 잘 와 닿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역사를 잘 모르면, 현재 우리에게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의 의미를 잘 모를 수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잘 모르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의미를 잘 모를 수 있다. 기쁨과 안타까움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연속성 속에서 생긴다. 치열하게 싸워왔던 것이 발전되고 해소된 모습을 모이면 기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안타까움과 슬픔, 때로는 분노가 차오르는 법이다. 현대인들의 마음에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밋밋해진 이유 중 하나는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역사의 흐름에 마음 둘 겨를이 없다.

 

2. 성령강림 사건이 우리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려면, 적어도 세 가지의 구약 역사(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일단, 오순절이 무슨 날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순절은 칠칠절, 맥추절이라고도 하며, 밀의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리는 농경제이다. 이후 유대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날로도 오순절을 지켰다. 오순절은 기쁨으로 가득 찬 날이다. 농사를 지어 그 첫 수확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도 기쁨이 넘치지만, 출애굽하여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는 것도 기쁨이었다. 오순절을 축제의 시간이다.

 

3. 우리가 세화하늘축제를 5월달에 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회의 설립을 축하는 의미로서이고, 둘째는 성령강림절을 앞두고 그 기쁨에 동참하기 위함이다. 오순절의 역사적 의미를 깊이 알고 있다면, 우리는 성령강림 사건이 얼마나 기쁜 사건인지 인식하게 될 것이고,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축제의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세상이 지고 있다. 성령강림절이 있는 때쯤 언제나 미국에서는 메모리얼 데이 연휴가 있어서, 성령강림의 기쁨을 모든 교우들이 교회에 함께 모여 누리는 것을 잘 못하고 있다.

 

4. 오순절 사건, 성령강림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1절). 여기서 오순절 날이 ‘이르매’는 오순절 날이 ‘꽉 찼다’는 뜻이다. 부풀어 오르는 풍선을 생각해 보면 된다. 풍선에 바람이 꽉 차면, 사람들은 긴장한다. 이제 곧 풍선이 ‘펑’하고 터질 것을 기대하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오순절 날이 ‘꽉 찼다’는 말은 오순절 날에 뭔가 사건이 ‘펑’하고 터질 것을,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가족들이 기대하고 예상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너무 기대없이 살아가는 것 같다. 신앙생활에 있어,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다. 

 

5. 오순절이 ‘꽉 차자’, 성령이 오셨다. 성령이 오신 사건은 그 자체적인 사건이 아니다. 성령의 오심 사건은 예수의 승천 사건과 한 짝을 이루고 있다. 오순절이 ‘꽉 찼을’ 때, 예루살렘에 모인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가족들이 뭔가 사건이 발생할 것 같은 기대감에 휩싸여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오순절이 꽉 찼기 때문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일 때문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이 꽉 찼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한 성령이 올 것을 기대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정말 사건이 ‘펑’하고 터졌다. 얼마나 기뻤을까.

 

6. 우리에게도 이러한 신앙의 기쁨이 있으면 좋겠다. 약속 받고 기대한 것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 ‘펑’하고 터져 올 때, 얼마나 기쁜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모두 어떠한 문제 때문에 괴로움 가운데 있는데, 또는 괴로움은 아니어도, 어떠한 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 가운데 있을 때, 실제로 우리가 소망하던 것이 삶 속에서 ‘펑’하며 터져 나올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한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소망을 주님께 두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큰 기쁨을 누리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소망을 주님께 두었기 때문이다. 주님께 소망을 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이다. 아멘!

 

7. 성령이 오신 사건은, 두 번째로, 구약의 노아의 방주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의 방주 사건이 발생하기 전 상황이 전개된다. 창세기 6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이 땅 위(지구)에는 참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사람들이 서로 평화롭게 살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고, 이 땅 위에 온갖 죄악이 가득 차길 시작했다. 얼마나 죄악이 가득 차게 됐는지, 6장 5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한탄하신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8.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 6:3). 노아의 방주 사건, 즉 땅 위에 있던 사람이 모두 멸망을 당하게 되는 사건은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멸망당한 것,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니,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 보듯이, 온 지면에 죽음이 난무했다. 이것은 굉장한 메타포다.

 

9.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노아의 방주 사건을 뒤집는 이야기이다. 사람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돌아온 사건이다.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성령강림 사건은 이것을 뒤집는 사건이다. 성령강림 사건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사건이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리라!” 이것을 우리가 잘 아는 용어로 바꾸면, “임마누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할렐루야! 성령강림 사건은 단순히 성령이 오신 사건이 아니라, 이렇게 역사를 뒤집는 사건이다. 놀랍지 않은가?

 

10. 다른 것은 차치해 두고, 성령이 오셨을 때, 확연하게 발생한 일이 있다. 사도행전은 그것을 2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니라.” 그리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다른 언어들로 말하는 것을 들은 군중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행 2:6-8).

 

11. 이것은 분명히 구약 성경의 다음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 성령이 사람을 떠났을 때 사람들 사이에 발생한 일은 오해와 미움과 죽음이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없고 그냥 육신만 남으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죄’가 흘러 넘쳤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다시 함께 하니 육신을 넘어선 뭔가 새로운 존재가 됐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던 오해와 미움과 죽음이 물러가고, 그 사이에 이해와 사랑과 생명이 넘쳐났다. 그렇다. 성령강림 사건은 바벨탑 사건을 뒤집는 사건이다. 불통에서 소통으로 바뀐 사건이다.

 

12. 성령강림 사건은 단순히 성령이 오신 사건이 아니다. 역사를 뒤집어 엎는 사건이다. 땀 흘려 지은 농사의 수확물을 거두는 것과 같은, 출애굽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면서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은, 기쁨이 넘치는 사건이고, 노아의 방주 사건을 뒤집어 엎는 사건이고, 바벨탑 사건을 뒤집어 엎는 사건이다. 불통, 그로 인한 죄와 사망이 물러가고, 소통, 그로 인한 사랑과 생명이 넘치는 사건이다. 성령강림절은 기독교의 단순한 절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새로운 역사를 행하신 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날을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 역사가 뒤집혔다. 천지가 개벽했다.

 

13.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가 삶에서 고통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불통 때문이다. 말이 안 통하는 거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니, 상대방에 대하여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나라와 나라가 서로 이해를 못하니, 상대 나라에 대하여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소통하지 못하고, 불통만 늘어나니, 서로 미워하고, 서로 싸우고, 서로를 죽인다. 내가 나를 죽이고, 내가 상대방을 죽이고(사람이든 자연이든), 나라가 나라를 죽인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죄가 넘치는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는. 그래서 사는 게 너무 힘들다.

 

14.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종교적 구호가 아니다. 바로 나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다는 것이다. 구원이 실제로 임했다는 뜻이다. 삶의 역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역사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성령을 받은 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사도행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모인 만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다. 하나님의 큰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신 일이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바꾸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없는 육신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은 새사람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불통 가운데 서로 미워하고 죽일 것이 아니라, 소통 가운데 서로 사랑하고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옛사람으로 살지 말고 새사람으로 살라는 것이다.

 

15.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강림사건이 역사를 어떻게 뒤집어 놓은 것인지를 안다면, 특별히 죄와 죽음이 만연했던 노아의 방주 사건과 불통과 교만과 죄악이 만연했던 바벨탑 사건이 어떻게 뒤집어졌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기쁨 가운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떠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아버지의 영), 그리스도의 영(아들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사람답게 어디에 있던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떠한 존재와든지, 소통하고, 사랑하고, 생명이 넘치는 삶을 일구어 가라. 싸우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파괴하지 말고, 폭력을 행사하지 말고, 사랑으로 보듬고, 무한히 용서하고, 깊이 이해하고, 생명을 풍성하게 나누라. 이것이 바로 더 이상 육신으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숨을 쉬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성령의 숨을 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길!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