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1. 9. 06:31

겨 묻은 개여, 똥 묻은 개를 나무라지 말라

(로마서 1:17-32)

 

1. 비슷한 속담이 두 개 있다.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란다.”라는 속담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라는 속담이다. 같은 말 같지만, 뉘앙스가 좀 다르다. 앞의 것은 ‘사람에게는 크고 작은 잘못이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어리석게 잘못의 크고 작음을 따지는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고, 뒤의 것은 ‘자신의 잘못이 더 크고 또 변변치 못한 사람이 남 흉보기를 잘한다’는 뜻이다. 앞의 것은 ‘겨 묻은 나나, 똥 묻는 너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뜻이고, 뒤의 것은 ‘못난 놈!’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앞의 것의 의미를 생각하며 본문을 들여다보려 한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평등에 관한 이야기다.

 

2. 기후변화 공부를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막연히 알고 있던 것에 대하여 정확하고 폭넓은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의 전개를 보면, 바울은 ‘올바른 지식은 올바른 행동의 전제’라는 스토아 철학 전통을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굳이 이러한 철학적 전통을 말하지 않더라도, 올바른 지식이 올바른 행동의 전제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이다. 인간은 아는 만큼 행동할 수 있다.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무모하다고 말한다. 물론 행동이 지식의 범주 안에만 갇혀 있으면 안되지만, 일차적으로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지식을 얼마간 갖출 필요가 있다. 그래야 행동을 바르게 할 수 있고, 무엇보다, 행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

 

3. 미국에 청소년 환경단체, ‘우리 어린이들의 신뢰(Our Children’s Trust/자녀들의 신뢰/자녀세대의 신뢰)’가 있다. 우리 아이들(자녀들/자녀세대)이 가진 신뢰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어른들(어른세대)이 자신들의 미래를 지켜줄 것/열어줄 것이라는 신뢰이다. 그런데, 기후변화를 보니, 그러한 신뢰가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어린이들의 신뢰’ 단체의 청소년들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의 소장은 이렇다. “미국 정부가 기후변화로 인해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지 못한 것은 헌법을 위반한 것이다!” 자녀 세대의 미래를 희망 차고 밝게 만들어 주는 것은 부모 세대의 의무이다. 이것은 도덕적 의무이기도 하지만, 법적인 의무이기도 하다.

 

4. 로마서에서 바울은 로마교회 교인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물론 이것은 실제적 소송은 아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소송이다. 영적인 소송이다. “우리 어린이들의 신뢰” 단체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처럼, 바울은 로마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나는 그 소송장이 1장 17절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5. 이 문장에서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해 어떠한 소송을 하고 있는 것 같은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의인들(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들)이 지금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소송장이다. 로마교회는 강한 자들,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약한 자들, 즉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함께 세운 공동체이다. 쉽게 말해, 로마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섞여 있는 공동체이다. 이들은 모두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 한 몸을 이루어 교회 공동체를 세운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가운데 발생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풀어나갈 때, 그 문제를 해결할 가장 중요한 열쇠는 ‘믿음’이다.

 

6. 그러나, 이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의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겼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비판했다. 믿음을 제일 원리로 생각하여 그들 사이에 있는 갈등을 해결했어야 마땅한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강한 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를 믿음보다 먼저 내세웠고, 약한 자들은 자신들의 가지고 있는 선민의식을 믿음보다 먼저 내세웠다. 그렇다 보니, 교회 공동체가 흉해졌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로마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영적인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로마교회에 소송을 제기합니다!”

 

7. 본문은 매우 문제적인 본문이다. 특별히 26절과 27절은 동성애 문제를 다룰 때 자주 소환되는 본문이다.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색깔이 달라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동성애 문제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바울의 소송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라는 속담이 가진 의미에 비추어서 본문을 들여다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로마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 번, 로마교회가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간의 갈등 말이다.

 

8. 바울은 인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현실을 ‘고통’이라는 한 단어를 통해서 표현하는 반면에, 바울(기독교)은 인간의 현실을 ‘죄’라는 한 단어를 통해서 표현한다. 고통과 죄, 그냥 듣기만 해도, 인간의 현실은 비참하다. 불교나 성경에서 표현하는 인간의 현실 외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인간의 현실을 경험하면서 그 현실을 표현할 수 있는 한 단어는 무엇이 있을까? 죽음, 한, 허무, 부조리 등이 떠오른다. 아무튼,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현실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것 같다.

 

9. 바울은 왜 로마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며, 살가운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이렇게 처참한 인간의 현실에 대해서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바울은 사디스트인가? 로마교회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은 것인가? 일면식도 없는 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이렇게 처참한 인간의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너무 예의 없는 행동처럼 느껴진다. 한 번 생각해 보라. 누군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나에게 와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 뒤, 갑자기, 내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일장 연설하듯이 늘어놓는다고 생각해 보라.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10. 사실, 우리가 전도할 때, 이러한 실수를 많이 저질렀다. 특별히 (한국에서 한 때 유행했던) 사영리 같은 것을 가지고 전도할 때, 인사를 나눈 뒤 첫 번째 하는 말이 이런 것 아니었나? “당신은 죄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상대방을 다그친다. “네 죄를 인정하렸다!” 상대방이 죄를 인정할 때, 그때 복음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서, 죄인인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당신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도를 했다. 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러한 전도 방식이 얼마나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드는 전도방식이었는지, 반성해 본다.

 

11. 로마교회 사람들은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이 그들을 전도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기 전에, 그들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인정하라고, 이렇게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을 또다시 전도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렇게 인간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 주구장창 일장 연설을 하고 있는 것일까?

 

12. 여기에서 바로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라는 속담이 필요하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겼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비판했다. 쉽게 말해서, 서로 자신들이 잘났다고 교만하게 군 것이다. 이렇게 자기가 더 잘났다고 교만을 떠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메타인지라고 한다. 헤겔은 이렇게 메타인지를 할 수 있는 존재를 ‘대자적 존재’라고 표현했다. 한자어라서 말이 어려운데, 개념은 쉽다. 내가 나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13. 인간은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니, 그러한 능력을 발휘할 때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물이나 식물과 인간이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물이나 식물은 ‘즉자적 존재’이다. 자기 자신으로만 머물러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메타인지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메타인지가 가능하다. 가능하지만, 실제로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이나 식물 같은 존재들이 많다. 메타인지가 부족한 사람을 만나면 참 어렵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즉,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을 한 발짝 물러나 돌아볼 줄 알아야 하고, 그러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친교를 하는 일도 중요하다. 내가 메타인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좋은 친구다.

 

13. 바울이 비참한 현실을 말하는 것은 정죄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로마서를 잘못 읽으면 비참한 현실을 진술한 말씀이 인간을 정죄하는 데 잘못 쓰인다. 우리는 수없이 많이 그러한 순간을 목격했다. 정죄를 당한 인간은 의기소침해지고, 그 정죄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렇게 정죄하고 있는 사람에게 포로가 되기 십상이다. 착취는 그러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발생한다. 우리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말하는 본문을 가지고 인간을 정죄하는데 쓰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를 쉽게 정죄하는 나쁜 사람들의 술수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14. 바울이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말하는 것은 정죄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나는 원래 이런 놈이야’, 이런 자괴감이나 자포자기에 빠지게 하려는 게 아니라, ‘그렇지 나는 원래 존귀한 사람이지, 그러니 힘을 내야지’,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컨텍스트에서, 서로를 정죄하고 있는 강한 자들이나 약한 자들이 존재론적으로 얼마나 평등한 존재인지를 메타인지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말하고 있는 맥락은 정죄가 아니라, 평등이다. 바울에게서 이 말을 들은 로마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렇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상대방을 업신여기겠어. 내가 무슨 자격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겠어. 우리의 존재가 다 이렇게 평등한데. 우리가 다 불경과 불의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인데. 저 사람이나 나나, 오십보 백보지 뭐. 겨 묻은 내가 무슨 자격으로 똥 묻은 개를 나무라겠어.”

 

15. 바울은 본문에서 왜 이렇게 인간의 현실이 비참하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아는 지식을 태초부터 주셨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공경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흉한 일, 비참한 현실이 로마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다. 바울이 본문에서 열거하고 있는 악습(29-31절)과도 같은 일이 로마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를 업신여기고 비판하는 일, 본인들이 스스로 인식을 하고 있지 못해서 그렇지, 인간의 비참한 현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 안에서 여전히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지금 바로 그 현상에 대해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16. 로마교회 공동체 안에서 왜 그렇게 흉한 일이 발생했는가? 바울이 말하는 매우 일반적인 인간의 비참한 현실이 발생한 원인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사회적 지위의 우월성, 자신이 가진 선민의식의 우월성이 믿음보다 먼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통렬한 지적이고 소송이고,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주는 메타인지의 선물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로마서를 읽을 때 바울의 정서를 세심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 정죄의 정서로 읽으면 안 되고, 사랑의 정서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바울은 지금 로마교회 성도들을 정죄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들의 모습을 조금 돌아보십시오!’(메타인지)

 

17. 로마서를 성경으로 받아들여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바울의 애정 어린 소송은 로마교회를 향한 소송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에게 하는 소송으로 다가온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구원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의인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무슨 일을 해결하려 할 때든지, 그 모든 것의 원리는 믿음이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일이 진리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the truth will set you free)”(요 8:32)고 할 때, 그 뜻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일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이다. 이 말이 어느 대학교에 걸려 있다 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학문적 성과를 통해서 얻게 된 지식이 우리를 자유케 해준다’는 뜻으로 오해되고 왜곡되기도 하지만, 진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것이다. 지식이 진리가 아니라 존재가 진리다. 하나님이 진리다.

 

18. 우리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즉, 진리가 드러나도록 살고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며 살아가는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가? 그렇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영광송(doxology)이어야 한다. 지금, 로마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혹시 그러한 것은 아닌가? 나 자신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메타인지가 필요하다. 바울은 우리에게 애정 어린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겨 묻은 개여, 똥 묻는 개를 나무라지 말라.” 비참한 현실을 직면하여,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살아야지, 서로에게 악한 일을 저지르면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일이 우리 삶 속에 일어나도록,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다. 그것이 로마교회의 평화요, 곧 우리의 평화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