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16. 02:02

사도적 복음

(요한일서 4:1-6, 7-8 11-12)

  

1. 본문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잘 이해가 안 가거나, 아니면 너무 뻔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는 말씀을 보면서, 무슨 영들을 말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고, 진리의 영은 뭐고, 미혹의 영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7절 이하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요한의 이야기가 너무 뻔한 이야기라, 왜 이렇게 ‘사랑하라’고 계속 반복해서, 잔소리하듯이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2. 현재 21세기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가장 위협이 되는 사회적 요소는 무엇인가? 아마도, 자본주의(신자유주의), 반지성주의, 그리고 기후위기 등일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신앙에 위협이 되는 이유는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할 뿐 아니라, 인간의 삶(또는 인간성)을 형편없이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지금 ‘살기 힘들다’고 한숨을 내쉬게 하는 원인들이다. 현재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손쉽게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본문에서도 ‘분별’이라는 말을 통해 ‘영들을 분별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신앙을 교묘하게 위협하는 것들을 분별해야 한다.

 

3. 초대교회, 특별히 본문과 관련하여 요한일서의 회중들을 집요하게 괴롭힌 문제는 ‘영지주의’였다. 기독교 신앙이 생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3세기까지 200여년 동안 기독교 신앙을 집요하게 괴롭힌 것이 영지주의였다.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는 ‘적그리스도’는 영지주의에 현혹되어 요한 공동체를 떠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사도의 가르침 위에 세워졌다. 사도의 가르침이란 성육신 하신 하나님(말씀/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앙을 말한다. 2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4.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 고백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사도의 가르침이고, 사도적 복음이다. 사도들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복음을 전했다. 그리스도의 육체성,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에 영지주의자들이 들어와 그리스도의 육체성을 부인하기 시작했다. 즉, 사도적 복음을 거부한 것이다. 그들을 가리켜 요한 사도는 ‘적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사도적 교회에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적인 방식으로 가르쳤다. 이것은 사도적 복음이 아니라 영지주의적 복음이었다.

 

5.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우습게, 또는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그 당시 많은 이들이 사도적 복음 대신 영지주의 복음에 미혹 당하여 사도적 교회를 떠나 영지주의 교회에 입교했다. 아마도 우리가 그 당시에 신앙생활을 했다면, 우리 중 대다수도 깜빡하는 사이에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미혹 당하여 사도적 교회 대신 영지주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되었을 지 모른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면, 성경에서 영지주의 복음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는 이토록 강력한 언어를 사용하여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6. 성경 이외의 초대교부들의 문서, 특별히 2세기와 3세기에 활동했던 교부들의 문서는 거의 모두 영지주의와 대결하는 사도적 복음이다. 그 중 영지주의와 집요한 대결을 통해 초대교회를 위협했던 영지주의자들(영지주의 사상을 통해서 기독교를 해석했던 사람들)을 사도적 교회에서 몰아내는 일에 헌신했던 교부로 이레나이우스와 오리게네스가 유명하다. 이러한 교부들의 노고를 통해 교회는 사도적 복음을 지켜내고 교회에서 영지주의자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을 한다. 우리는 영지주의와 싸웠던 교부들의 저술들을 통해서 영지주의의 사상이 무엇이었는지, 영지주의 복음이 무엇이었는지, 그 요점을 충분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왜 영지주의와 한 판 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영지주의 기독교의 문헌을 담고 있는 ‘나그함마디 문서’가 1945년 이집트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7. (영지주의를 모르면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를 못하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사랑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구체성을 알지 못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영지주의는 기독교보다 더 오래된 사상체계다. 영지(gnosis)’는 ‘신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상체계이다. 그렇다 보니, 기독교인들에게 매력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므로, 영지주의와 같은 목표를 지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지(gnosis)는 기독교 사상과 똑같이 ‘계시(revelation/신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심/인간이 획득하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지식)’에 근거를 둔 지식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식은 인간의 두뇌를 쓰는 지식이 아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이 계시로 인간에게 선물로 주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영지는 구원하는 지식이다.

 

8. 영지주의의 사상체계의 근간은 플라톤주의,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에 있는데, 이들은 철저하게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한다. 이는 육신(물질세계)은 기본적으로 악(bad/evil)하고, 영혼(비물질세계)은 기본적으로 선(good/holy)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영지란 신적인 지식(신이 계시로 준 지식)을 통해서 영혼이 악한 물질 세계, 특별히 몸(물질)을 벗어나서 본래의 선한 세계인 비물질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영지는 곧 구원인 것이다.

 

9. 이러한 영지주의의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기독교 신앙과 같이 공유하는 것 같으나,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왜곡하기도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나님(말씀/성자)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은 영지주의자들에 의하면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 선하신 하나님이 악한 육신을 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한다. 성육신을 부정하는 그들의 교리를 일컬어 ‘가현설(Docetics/ ~인 듯하다, 혹은 ~인 것처럼 보이다라는 뜻의 헬라어 ‘도케스’로부터 유래)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은 것은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육신을 입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육체적 죽음과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10. 영지주의의 이러한 생각은 마치 이 세상에 하나님이 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구약의 창조의 하나님과 신약의 구원의 하나님, 이렇게 두 개의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 그래서 영지주의 교회에서는 구약의 하나님은 악한 하나님, 저급한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은 이 악한 물질 세계를 창조한 구약의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기독교 경전에서 제외시켰다. 이들에게 성경은 오직 신약성경 외에는 없다. 신약성경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만이 선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11. 영지주의 교회의 이러한 도전은 기독교 윤리 영역에서도 도전을 불러왔다. 영지주의 교회는 두 가지 윤리 영역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는 엄격한 금욕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육신, 또는 물질은 악한 것이므로, 육신의 일을 최대한 억압하거나(식욕, 성욕 등의 기본적인 인간의 육신이 가지는 욕구), 물질적인 것과 최대한 관계를 맺지 말하야 한다는 것이다. 육신을 살찌우거나 건강하게 하기 위하여 좋은 것을 먹고 살찌우는 것을 죄라고 생각을 해서 금식을 밥 먹듯이 하고 육신에 계속해서 고통을 가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한 집착은 죄악이라 생각하여 가난한 삶을 추구했다. 어떻게 보면 매우 경건한 것 같으나, 그들의 근본적인 생각, 육신(물질)은 부정한 것, 악한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발생한 윤리이기 때문에 사도적 교회는 이들의 이러한 극단적인, 엄격한 금욕주의를 인정할 수 없었다.

 

12. 영지주의 교회가 빠지게 되는 다른 하나의 윤리 영역은 반율법주의였다. 이것은 엄격한 금욕주의와 반대되는 생각인데, 물질은 영혼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영지를 통하여 이미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물질(육체, 몸)과의 관계가 어떠하든 구원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윤리적 방종을 낳기 쉬웠고, 다른 사람의 육신(육체, 몸)을 무책임하게 취급하고, 아무렇게나 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른 사람의 신체적 아픔에 무관심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육신(몸)에 폭력을 가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본인은 이미 영지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13. 사도적 교회(요한 공동체/요한일서 교회)는 이러한 영지주의 교회의 가르침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육체로 오신)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2-3절). 즉,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영들은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영지의 영과 사도적 복음이 말하고 있는 진리의 영, 즉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영은 미혹의 영이고,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14. 그렇다면, 우리는 비로소 왜 사도 요한이 사도적 복음에 근거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철저한 육체성을 전제로 한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다. 육체성에 대한 긍정이 없으면(육체/육신/물질을 선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에 머물 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말과 혀로, 가현적으로 한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실제로 육체가 달리고 죽은, 육체성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육체성의 사랑이어야 한다.

 

15. 그러나 생각해 보라. 육체성을 부인하여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빠지거나, 반율법주의에 빠지면,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가? 다른 형제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그들에게 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육체가 굶어 죽어가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그들에게 밥을 주기는커녕 굶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게 사랑인가? 어떤 이가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데, 그렇게 육신이 추위에 벌벌 떠는 것은 너의 영혼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오히려 악한 육체에 벌 주고 있는 좋은 일이라고 말하며 그에게 따스한 옷을 제공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16. 또한 어떠한 형제가 자신은 영지에 의해서 이미 구원받아서, 자신의 육신은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고 자살을 하거나 자해를 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육신으로 방종한 삶을 산다면, 또한 다른 이들의 육신에 해를 가하고 있다면, 그를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 사랑인가? 부모를 돌보지 않고, 가정을 돌보지 않고, 형제자매를 돌보지 않고, 그냥 남몰라라 사는 것(육체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자신이 영지의 의해서 구원받은 증거라고 자부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라고, 가정 내팽개치고, 사회적 관계 다 끊고, 주님만을 위해 산다고 교회가 좋사오니 교회에 초막을 짓고 살아가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17. 요한일서에서 요한 사도가 말하는 사랑은 이렇게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 영지주의 교회에서 마치 그것이 복음인양 전한 것에 대한 철저한 반대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하셨으니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할 때 이 마땅한 사랑은 육체성의 사랑을 말한다. 하나님은 가짜로, 마치 죽은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게 아니라, 하나님은 실제로 육체성을 가지고 육체의 고통을 오롯이 겪으면서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바로 그 육체성의 사랑으로 우리를 십자가 위에서 구원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적 복음이다.

 

18. 사도적 교회에서 쫓겨난 영지주의적 복음은 지난 2천년 동안 유령처럼 기독교 신앙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요즘, 21세기에서 보자면 대표적으로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기초한 소비주의와 그 때문에 발생한 기후위기(지구에 대한 파괴)를 남몰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 육체성(물질성)을 거룩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도적 복음에 따라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우리의 과욕과 불의의 때문에 망가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이 창조세계가 어떻게 되든,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고, 이 땅에 있는 동안 그냥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 자체가 사도적 복음에서 떠나 영지주의 복음에 근거하여, 또는 영지주의의 유령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다른 말로, 사도적 교회를 세우는 게 아니라 영지주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 21세기의 모든 교회들은 회개해야 할 것이다.

 

19.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영지주의 복음에서 떠나 사도적 복음을 생각해야 하는 시절을 살고 있다. 영지주의 복음으로부터 사도적 복음을 지켜내기 위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도 십자가 위에서 가짜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육체성을 지니고 죽으셔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주님처럼 육체성의 사랑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체와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사회와 우리의 지구를 ‘말과 혀’(영지적)로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사도적)으로 지켜나가는 것이 사도적 교회의 사랑이다. 우리는 사도적 복음을 붙들고 사도적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영지주의의 유령에 미혹되어 영지주의 교회에 다니는 적그리스도인가. 분별하라.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12. 10:21

사랑이 뭐길래

(요한일서 3:11-24)
 

1. 사랑이 뭘까? 사랑이 뭔지 묻는 일은 어찌보면 낭만적인 것 같고 한가한 사람들의 사색 같지만, 사랑에 대해서 묻는 것만큼 인생과 신앙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물으면 우선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생각부터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매우 감정적인 차원(사적인 차원)에 머문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할 때, 육체의 접촉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말할 때 ‘에로스’에 대하여 떠올린다.

 

2. 우리가 성경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일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8).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 더불어서 우리는 아가서를 떠올리며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아름다운 사랑을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을 가장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성경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 부르기도 한다.

 

3.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세우실 때, 친형제 사이였던 야고보와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막 3:17).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은 좀 더 쉬운 말로 ‘천둥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 다르지만, 우리가 만약 대면하여 예수님의 열 두 제자를 만났다면, 그 중에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가장 친근감을 느꼈을 것이다. 둘은 성격이 화끈(시원시원)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화끈하게 살았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열 두 제자 중 가장 먼저 죽은 사람은 야고보(James)였다. 화끈하게 복음을 전하다 화끈하게 죽었다.

 

4. 요한은 보통 예수님의 ‘애제자’로 불린다. 예수님이 요한을 편애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야곱이 열 두 아들 중 요셉을 편애했듯이, 예수님도 요한을 편애했다. 이것을 나쁘게 볼 필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왠지 좋은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다. 예수님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은 요한의 평생 자랑거리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줄곧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the beloved disciple)’라고 칭했다. 요한복음에 이 표현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요 13:23, 19:26, 20:2, 21:7, 21:20).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면서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하신다.

 

5. 사람이 죽을 때 하는 세 마디의 말이 있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또한 사람은 치매가 걸리면 자기 인생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이나 가장 좋았던 기억에 자기 자신을 고정시키기도 한다. 초대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노년의 요한은 아주 약해지고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교회 모임에 들것에 실려 왔다고 한다. 그때 모임에서 요한은 언제나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을 계속하여 속삭이곤 했다고 한다. 그의 인생 가운데 ‘사랑’이 얼마나 강력하게 그의 삶을 지배했으면 죽어가는 상황 가운데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계속했을까.

 

6.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요한이 말하고 있는 ‘사랑’의 성격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적인 사랑/또는 사적인 사랑’이 아닌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11절).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사랑은 ‘감정/감성적 용어’라기보다 ‘신학적 용어’라는 것이다. 성경의 사랑은 그냥 인간의 감정적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랑’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것을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은 감정놀이가 아니라 처음부터 들은 소식, 즉 복음과 관련된 것이다.

 

7. 복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사망(죽음/악)에서 생명(선)으로 옮겨졌다는 선포이다. 이것을 골로새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예수)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우리는 흑암의 세상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갔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죽음에 있지 않고 생명에 있다는 증거, 우리가 흑암의 나라(악한 세상)에 있지 않고 아들의 나라에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처럼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다.

 

8. 나는 ‘사랑’만이 모든 것의 자격(qualifications)이 되는 이 아들의 나라, 생명의 나라가 너무 좋다. 그 나라에서 살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쓴 정현종 시인처럼 나는 이렇게 쓰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아들의 나라가 있다. 그 나라에 가고 싶다.” 우리는 사랑 외에, 이런 저런 자격을 갖추느라 너무 힘든 사회에 살고 있다. 자기계발하느라 사랑할 시간도 없다. 무엇을 위해,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생명을 낭비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9.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의무라는 게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국민의 4대 의무가 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가 그것이다. 이것은 헌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에서 사는 한 누구든지 지켜야 하는 의무이다. 이 의무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이것이 감정의 문제였다면, 군대를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가기 싫은 사람은 안 가도 될 것이다. 세금을 내고 싶은 사람은 내고 내기 싫은 사람은 안 내도 될 것이다. 교육을 받고 싶은 사람은 받고 받기 싫은 사람은 안 받아도 될 것이다. 일하고 싶은 사람은 일 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안 해도 될 것이다.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했다고 처벌받지 않을 것이다.

 

10. 그러나,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4대 의무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우리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군대 가는 문제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세금을 내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교육도 근로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벌받는다. 더불어 사회적 왕따를 당한다. 병역문제, 납세문제, 교육문제, 근로문제 등은,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뜨거운 감자다. 이 네 가지의 의무는 그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의 표지이다. 그래서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 의무를 반드시 감당해야 한다. 그래야 그는 공동체의 정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4대 의무는 사적 영역에 있는 게 아니라 공적 영역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1. 요한 공동체(교회)의 자기 이해는 무엇일까? 위에서 말했듯이,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들의 나라로, 생명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그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자매들을 돌봤다. 또한 처음부터 들은 소식(복음)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듯이, 그들도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 그들은 그것을 감정에 근거해서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들은 소식, 즉, 복음에 근거해서 행했다. 그들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했다. 다른 말로, 그들은 신앙생활을 사적으로 하지 않고 공적으로 했다는 뜻이다.

 

12.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할까? 그렇게 사랑을 행하는 것이 아들의 나라의 ‘헌법’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23-24절). 아들의 나라에는 헌법이 한 가지 있는데, 그 헌법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이다. 전혀 복잡하지 않다. 많은 헌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 한 가지,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헌법이다.

 

13. 우리는 공부 많이 한 사람, 또는 공부 잘 하는 사람이 좋은 대학에 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스펙이 좋은 사람이 연봉 많이 주는 직장에 들어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돈 많은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 많이 한 사람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얻고 돈 많이 벌고 오래 살고 가장 행복하면 그리고, 죽어서도 천국가는 게 보장되면, 아마도 서로 사랑하느라 혈안일 것이다.

 

14. 실제로 중세시대 때 이러한 비슷한 생각이 유행했었다. 중세인들은 사후세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죽으면 천국 가는 것에 대한 큰 열망이 있었다. 즉, 구원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그러한 중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공덕(merit)’에 대한 신학이었다. 공덕을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죽은 뒤에 천국 가는 것, 즉 구원받는 일이 넉넉히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쌓은 공덕으로 공덕을 쌓지 못하고 죽어 연옥에 있는 일가족도 대신 구원할 수 있었다. 공덕을 쌓는 방법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성인의 유물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돈이 있었기에 성인의 유물을 많이 모았다. 또 한 가지, 가난한 자들(거지)에게 은혜를 베풀면 공덕을 쌓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가난한 자들(거지들)은 매우 큰 자부심이 있었다. 자신들의 가난 덕분에 사람들이 공덕을 쌓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감사성찬례(미사)에 참여하여 성찬례(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를 많이 받을수록 공덕이 많이 쌓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곳의 교회에서 미사가 끝난 뒤 다른 교회로 달려가 그곳에서 또 한 차례의 성찬례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면벌부를 사는 것이었다. 면벌부를 사면 공덕을 쌓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것은 연옥에 갇혀서 무서운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었다. 면벌부를 팔러 다니는 사제단(테첼)은 이런 문구를 가지고 다녔다. “금고에 넣은 동전이 짤랑거리면,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난다.”

 

15. 이 세상이 아들의 나라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그 외의 다른 기준에 의하여, 또는 나쁜 짓 많이 하는 사람이 오히려 잘 먹고 잘 살며 높은 자리에 오르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러한 악한 세상에 저항하며, 우리가 그러한 악한 나라, 어둠의 세상, 죽음의 나라를 떠나 의의 나라, 생명의 나라,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세상에 당당히 드러내는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 스스로 생산해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부지런히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에 의해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주셨다”는 복음은 그래서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중요(crucial)하다.

 

16.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다. 또한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이다. 다른 말로, 기독교의 사랑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공적인 섬김이다. 마음 내키면 하고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아들의 나라의 헌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 사랑은 우리가 억지로 만들어내야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이 사랑을 받아, 그저 나누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 기억(아남네시스)은 바로 예배에서 일어난다. 예배는 기억의 자리이다. 우리는 들리는 말씀(설교)을 통해, 그리고 보이는 말씀(성만찬)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 정신없이 살다가도 예배에 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을 선물로 받아, 세상에 나가서 정신차리고 ‘사랑’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이것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반복한다.

 

17. 요한공동체에 참으로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는 진리를 거부하며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이 생겼고,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헌법)을 지키지 않아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진리가 거절당하고 신앙의 공공성이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진리를 거부하고 신앙의 공공성을 무너뜨린 이들을 향하여 ‘적그리스도’ 그리고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 세상, 서로 사랑하지 않고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헤치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볼 때, 요한 공동체(교회)는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였던 것이다.

 

18.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이 물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 물음은 그치지 말아야할 물음이다. 우리는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가? 죽음의 나라/어둠의 나라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생명의 나라/아들의 나라에 살고 있는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훨씬 뛰어넘는 신앙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아들의 나라의 헌법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사적 감정이 아니라 공적 섬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이 헌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아들의 나라에 사는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끄시는 삶의 신비이다.

 

19.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그렇게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라.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들의 나라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아멘. 아멘.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3. 09:00

마귀 심은 데 마귀 나고, 하나님 심은 데 하나님 난다

(요일 3:1-12)

 

1. 나는 개신교 목사이지만, 개신교가 종교개혁을 통해 가톨릭과 분리되면서 본의 아니게 잃어버린 여러 가지 좋은 전통을 아쉬워하는 사람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현재 개신교에서 행하고 있는 두 개의 성례전(세례와 성만찬) 이외의 다른 다섯가지 전통(견진, 고해, 성직, 혼인, 병자) 그 중에서도 고해성사를 잃어버린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성인들(Saints)을 기리는 일이다. 성례전이 축소됨으로 인하여 거룩(구별됨)의 영역이 좁아진 것 같아 아쉽고, 성인들을 추모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신앙의 유산이 부정되는 것 같고 신앙의 모범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쉽다.

 

2. 종교개혁은 달력의 시간으로 1517년 10월 31일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종교개혁은 교회의 중요한 절기 중 하나였던 만성절 전야(Halloween/할로윈)에 시작된 일이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은 교회력 안에서 발생한 일이지, 그냥 달력 안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다. 교회력으로 11월 1일은 만성절(All Saints Day)이다. 중세 교회는 만성절 전 날, ‘Halloween’을 지켰다. 지금 우리가 크리스마스 전 날, 크리스마스 이브를 지키는 것과 같다. 크리스마스 당일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기쁨과 즐거움이 더 크듯이, 만성절 보다 만성절 전야(할로윈)에 기쁨과 즐거움이 더 컸다. 그 기쁨과 즐거움 안에서 종교개혁은 시작된 것이다.

 

3. 개신교 문화가 강한 미국에서 ‘할로윈’을 다른 방식으로 소비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이제 할로윈은 기독교와 아무 상관없는 일반 문화가 된 듯하다. 한국에서도 할로윈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우리는 할로윈을 그저 무시무시한(spooky) 분장(costume)을 하고, 사탕 받으러 다니는 날 정로도 알고 소비할 뿐이다. 할로윈은 어느새 대목 장사의 날이 되어, 일 년 중 사람들의 소비가 가장 많은 날 중 하나로 자리 매김했다. 할로윈은 마치 자본주의의 자식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정말 안타까운 것이다. 할로윈은 무시무시한 분장을 하고 사탕 받는 날, 또는 엄청난 소비를 즐기는 날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에서 성인들(Saints)을 기리는 날이다. 그러면서 우리도 성인들처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다.

 

4. 성경의 등장 인물들 외에 기독교 역사에는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정말 많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다 간 신앙의 선배들이 정말 많다. 그들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처럼 살과 피를 가지고 이 땅의 슬픔과 고통, 역사적 질곡 속에서도 신앙을 굳건히 지킨 생생한 신앙의 모델이다. 살면서 삶의 롤모델을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신앙생활 하면서 신앙의 롤모델을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구체적인 삶 속에서 구체적인 삶과 신앙의 롤모델을 만나는 일은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5. 개신교인들은 신앙의 롤모델 같은 거 다 필요 없고, 예수만 닮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굉장히 은혜로운(복음적인) 말 같으나,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이처럼 모호한 말도 없다. 과정 없이 그냥 결론만 말하는 것 같다. 이는 마치 훌륭하게 되는 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훌륭한 사람 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모, 또는 부모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 없이, 인간이 어떻게 혼자서 크며 인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우리가 어떻게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좋은 선배들(성인들)을 잠시 멈추어서 생각해 보는 것, 그 선배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롤모델로 삼는 일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 정말 유익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교회에서 직분(집사, 권사, 장로 등)을 받는 것도 교회의 일을 많이 하게 된다는 의미보다는 근본적으로 좋은 신앙의 모델로 성숙해져 간다는 의미가 깊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지만, 묵묵히 신앙의 자리를 지키며 후배 신앙인들에게 좋은 신앙의 롤모델로 성장해 가시라.)

 

6.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좋은 날인 ‘할로윈’을 세상에 빼앗겼다. 개신교 교회에서는 ‘할로윈’을 할로윈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자체가 ‘만성절 전야제’라는 뜻인데, ‘할로윈’이 마치 세속화되고, 귀신에 물든 날인 것처럼 생각하여, ‘할로윈’이라 부르지 않고, ‘세인트 나잇(Saints Night)’이나 ‘할렐루야 데이’ 등으로 바꾸어서 부르며 할로윈을 개신교식으로 소비하려고 한다. 이것은 참 웃픈 일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의 좋은 전통을 우리가 소홀히 여기는 사이에 세상이 빼앗아 가서 돈 버는 일에 쓰고 있다. ‘할로윈’이라는 말이 너무 더럽혀져서 이제 그 용어를 쓰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7. 사실 그러한 기독교 용어가 또 있다. ‘신천지’. 요한계시록에는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장엄한 종말론적 비전이 선포되고 있다. ‘새하늘과 새땅’을 한자어로 하면 ‘신천지’이다. 그런데, 이 좋은 용어를 이단에게 빼앗겼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신천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이는 마치, 새하늘과 새땅을 빼앗긴 기분이 들게 한다. 우리가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소망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키지 않으니, 그것을 누군가가 빼앗아가 더럽혔다. 용어를 빼앗기는 일은 땅을 빼앗기는 일과 다르지 않다. 용어를 빼앗기면 우리는 그만큼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잃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점점 작아지는 것이다. (동해와 독도 표기 문제/언어를 잃으면 삶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

 

8. 할로윈에 등장하는 온갖 무시무시한(spooky) 캐릭터들은 무엇일까? 만성절에 등장하는 온갖 더러운 귀신들(evil spirit)은 성인들(Saints)과 대조되는 모습을 지닌다. 귀신의 실체가 실제로 존재하느냐 아니냐를 떠나, 귀신은 우리 인간의 보이지 않는 악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시무시(spooky)하고 어글리(ugly)한 외모를 가진 귀신(spirit)의 모습은 우리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죄로 가득한 지를 눈으로 보이게 보여주는 것이다. 만성절의 무시무시하고 어글리한 외모를 가진 귀신은 일종의 시청각 교육인 것이다.

 

9. 요한일서의 할아버지는 이 세상의 존재를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마귀에게 속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이고, 사랑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을 위해서 할아버지가 사용하는 용어는 ‘죄(하마르티아)’와 불법(아노미아)’이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선교사들이 했던 일 중 가장 힘든 일은 전도가 아니라 성경번역이었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귀가 따갑게 듣는 ‘죄’라는 용어는 기독교 용어가 아니라, 불교용어다. 선교사들이 불교 용어에 더 익숙했던 한국인(조선인)들에게 성경의 ‘하마르티아/영어의 sin’을 좀 더 친숙하게 만들기 위해서 택한 용어가 바로 ‘죄’이다.

 

10. 문제는 이 불교의 ‘죄’라는 용어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을 다 담아내지 못할 뿐더러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죄’의 개념은 “도리(道理)에 반하는 행위, 계율을 어기는 행위, 또는 고의 과보(인과응보)를 불러올 악행”을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은 매우 관계적 개념이다. 한국의 전통 종교인 불교나 유교에서는 ‘신(하나님)’이라는 절대자의 개념을 상정하지 않고 죄에 대한 것을 논하기 때문에 불교나 유교에서의 죄는 법정적 죄의 개념이 크다. 그러한 죄의 개념은 몇 해 전 한국에서 유행했던 <신과 함께>라는 영화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잘잘못을 따져 물어 천국과 지옥 행이 결정된다.

 

11. 기독교의 죄, 그리고 구원을 이러한 식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우리가 기독교의 죄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하여 빌려온 불교의 죄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무늬만 기독교인이고, 알맹이는 불교인인 것이다. 기독교의 죄 개념은 매우 관계적(relational)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보자.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어느 날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러 모리아 산으로 간다. 자식을 잡아죽이는 일을 법정적 개념으로 보면 그것은 명백한 죄이다.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아브라함은 지옥에 가야지 천국에 가면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려 했던 행위를 통해서 오히려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는 온전히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12. 요한일서에서 등장하는 죄와 대조되는 용어는 ‘사랑’이다. 죄는 관계가 안 좋은 상태를 말하고, 사랑은 관계가 좋은 상태를 말한다. 죄는 관계 바깥에 있는 것을 말하고, 사랑은 관계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적그리스도는 관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죄인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의인이다. 요한일서는 두 가지 종류의 죄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하마르티아’라고 불리는 죄로서 관계 안에서 짓는 잘못을 말하는데, 그것은 회개함으로 용서 받을 수 있는 죄를 말한다. 죄를 짓더라도 관계 안에서 짓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있다.

 

13. 그런데, 또 다른 죄의 표현인 ‘아노미아(불법)’는 좀 다르다. 이것은 아예 하나님과의 관계 바깥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아노미아를 저지르는 이들은 아예 하나님과의 관계 바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마귀의 자녀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한다. 이런 자는 형제와의 관계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즉 형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듯, 형제를 죽인다. 형제에게 악한 일을 행한다.

 

14. 요한일서에서 드러나고 있는 요한 공동체를 괴롭혔던 두 가지 일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신앙고백에서 떠난 이들이 생겨난 것(적그리스도)과 공동체의 일부 지체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마귀의 자녀)이었다. 이것은 2천 년 전 처음 교회인 요한 공동체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 우리의 교회에서도 발생하는 일이다. 교회를 힘들게 하는 두 가지의 일,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신앙고백 위에 서 있지 못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기독교의 사랑은 감정을 포함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종말론적 신앙의 행위이다.). 즉, 신앙과 사랑은 두 개의 다른 일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일인데, 신앙과 사랑이 온전하지 못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는 늘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15. 요한 할아버지는 굉장히 재밌고 명쾌한 말씀을 하신다. 한 마디로, ‘마귀 심은 데 마귀 나고, 하나님 심은 데 하나님 난다’고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8-9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마귀 심은 데 마귀 나고, 하나님 심은 데 하나님이 나는 법이다.

 

16. 요한 할아버지는 ‘하나님의 씨’가 거하는 이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씨’는 ‘스페르마’라는 헬라어를 옮긴 것이다. 영어로는 보통 ‘seed(씨앗)’라고 번역을 하는데,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sperm(정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씨(스페르마)’이라는 표현 매우 강력하고 현실적인 표현이다. 부모의 생식기를 통해서 태어난 자녀들이 부모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부모를 닮은 것처럼, 하나님의 씨를 통해서 태어난 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씨를 품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랑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한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자가 아니라, 즉 하나님의 씨를 품은 자가 아니라, 마귀의 씨를 품은 자가 되는 것이다.

 

17. 만성절에 등장하는 온갖 귀신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씨를 받아 다시 태어나기 전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무시무시하고 어글리한 귀신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하나님으로 난 자들이기에 우리는 더 이상 귀신 같은 사람들(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즉 성인(Saints/거룩한 사람)이다. 성인들이 성인인 이유는 그들이 그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하기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인을 본받아, 귀신 옷을 입지 않는다. 우리는 거룩한 사랑의 옷을 입는다. 우리는 악을 행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을 행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씨를 우리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씨를 품고 사랑의 삶을 사는 것보다 생명력 넘치는 삶이 어디에 있는가.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26. 02:52

적그리스도와 기름부음 

(안티크리스토스와 크리스마)

(요한일서 2:18-29)

 

글의 전개: 적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기름부음에 대한 이해, ‘적그리스도는 왜 요한 공동체를 떠났을까’의 질문에 대한 답변, 그리고 우리의 신앙 들여다 보기

 

1. 몇 절 안 되는 짧은 구절인데, 아주 무거운 단어들이 몇 개 등장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단어는 ‘적그리스도(안티크리스토스/안티크리스트)’이다.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말이었다. 지금도 일부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을 ‘적그리스도’라 칭하고 있고, 한 때는 가톨릭, 특별히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난무한 때도 있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당시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칭하며 공격하고 비판했던 것의 영향이 크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비난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던 이승복 어린이의 말처럼 개신교인들의 마음에 가톨릭을 향한 적대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2. 또한 모든 서구적 가치의 전복을 꿈꿨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안티크리스트/적그리스도>라는 책을 써서 서구 사회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기독교적 요소를 적나라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을 통해서 서구 사회의 기독교적 요소를 비판했기에 기독교인으로부터 ‘악마’라는 비난을 들었고, 지금도 기독교인들은 그를 좋지 않은 눈길로 바라본다. 그래서 사람들은 니체를 일컬어 ‘적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는 기독교를 대적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3.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기독교 역사에서 하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에 우리는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성경 곳곳에 있는 말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요한1서에만 나오는 용어이다. 이 용어가 나올 법한 곳, 요한계시록에도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서로 사랑하라’를 그토록 강조하는 요한1서에만 이 용어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꽤 충격적이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4. 요한일서의 화자, 요한 할아버지는 왜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누구에게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요한일서에서만 등장하지만 그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용어들은 성경 곳곳에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데살로니가 후서의 ‘불법의 사람’ 또는 ‘멸망의 아들’(살후 2:3-9)이 있고,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포학하여 가증한 것’(단 9:27)이 있고, 마가복음에 나오는 ‘멸망의 가증한 것’(막 13:14) 등이 있다. 적그리스도는 표면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사람 또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5.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데에는 특별한 정황이 있다. 요한 공동체는 매우 초기의 기독교 공동체이므로, 아직 분열이 없었고, 자기 스스로 ‘그 교회(the church)’라 생각할 만큼,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신앙 위에서 진리 그 자체를 품고 있는 공동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공동체에 시련이 닥친다. 함께 세례도 받고,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던 사람들 중에 스스로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 마디로, 분열(schism)이 요한 공동체를 강타했다. 할아버지는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거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19절).

 

6. 할아버지는 아주 명시적으로, 콕 집어서, 요한 공동체를 떠난 이들을 일컬어서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공동체를 떠난 이들에게 ‘적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특권처럼 느껴진다. 2천 년이 지난 지금, 교회가 엄청나게 나뉜 이 때에 교회를 떠난 이에게 적그리스도라는 부르는 일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개신교가 가톨릭을 일컬어 적그리스도라 부르는 것은 유체이탈 화법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을 통해서 교회로부터 나온 것은 개신교이지, 가톨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물론 프로테스탄트들도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가톨릭과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부르며 비난했다. 기독교 역사에서 분열이 있을 때마다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계속해서 소환되었다.

 

7. 이런 아픈 역사성을 가진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요한 공동체의 특별한 정황 속에서 살펴봐야 엉뚱한 상황에서 엉뚱하게 쓰이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요한 공동체의 맥락 안에서 ‘적그리스도’는 ‘요한 공동체를 박차고 나간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요한이 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진리에서 떠나 거짓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무엇이고, 적그리스도가 말하는 거짓이란 무엇인가? 진리를 알면 거짓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법이다.

 

8. 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그가 만들어낸 진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다. 그것을 사도적 전승(사도로부터 전해진 복음/그래서 교회는 사도적 교회라 불린다)이라고 하는데,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경험한 사도들은 다음과 같은 진리를 전해준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고, 진리의 표현이다. 요한 공동체를 비롯한 기독교 공동체는 모두 이 진리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했고, 주님은 베드로의 이러한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마 16:15-18).

 

9. “예수는 그리스도다!” 이것은 진리이다. 그렇다면, 거짓은 무엇인가? 이 진리를 부인하는 자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이다. 할아버지가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자들은 요한 공동체를 떠나갔다. 그들이 요한 공동체를 떠나간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진리를 고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들은 것에’ 더 이상 거하지 않았고, 그들이 요한 공동체를 떠났다는 뜻은 그들이 더 이상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을 말하는 자들일 뿐이다.

 

10. 본문에는 ‘적그리스도’처럼 문제적 용어는 아니지만, 그것과 매우 대조되는 신비한 용어가 하나 등장한다. 그것은 ‘기름부음(크리스마/anointing)’이라는 용어이다. 이 편지는 요한 공동체를 떠난 적그리스도에게 쓰는 편지가 아니라, 공동체에 여전히 ‘거하고 있는’ 지체들에게 쓴 편지이다. 공동체를 떠난 적그리스도와는 달리 그들이 공동체에 여전히 거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 안에는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 할아버지가 말하고 있는 ‘기름부음’은 무엇인가?

 

11. 지금 개신교 전통에는 이러한 것이 별로 없지만, 구약성경을 보거나 기독교의 다른 전통을 보면 기름을 바르는 전통들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기름부음’의 전통은 선지자나 제사장 또는 왕을 세울 때 나타난다. 그들에게 기름(올리브 오일)을 붓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히 구별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메시아라는 말 자체가 ‘기름부음 받은 자(the anointed one)’라는 뜻이다. 아직 일곱개의 성례전(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을 모두 가지고 있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 같은 곳에서는 ‘병자성사’라고, 병자들에게 기름을 바르며 병 낫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전통도 있다. 이처럼 ‘기름부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보여주는 성례전적인 성격을 가진다.

 

12. 그러나,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기름부음’은 이러한 것과는 다른 맥락으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물리적 기름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요한복음 16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16장에는 엄청난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데, 요한 공동체가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출교 당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출교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법 바깥으로 쫓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출교 당한 이들을 누군가 죽여도 살인자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 공동체는 출교의 위기에 놓여 있으며, 유대인들이 출교 당한 요한 공동체를 죽이더라도 그들은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며 요한 공동체를 죽이는 일에 더 열심을 낼 것이다.

 

13. 이러한 무시무시한 일을 앞에 놓아두고 떨고 있는 제자들(요한 공동체)에게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면서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한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불린다.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 부르고, 그 진리의 영이 요한 공동체에 임할 것이라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하다. 예수의 제자들(요한 공동체)이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고백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한 제자들에게 그들의 고백이 헛된 것이 아니며 진리를 행하는 것이고, 오히려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이 거짓를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이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옳다!’고 하나님이 판결을 내려주시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이든지, 그것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일이라면 박해를 받더라도, 설사 죽임을 당하더라도 가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하여 언제나 ‘진리’를 구하는 법이다.

 

14. 요한복음 16장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이 지금 요한일서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다. 요한일서에서 할아버지가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너희는 주께 받은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라고 말할 때의 ‘기름부음’은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기름부음, 즉 성령을 받은 요한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

 

15.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 적그리스도는 요한 공동체에 머물지 못하고 떠났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적그리스도’, 그리고 ‘기름 부음’과 함께 본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용어 ‘거함(abide/메노)’이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라는 말씀을 하셨듯이, 요한일서에서도 ‘거함’이 강조되고 있다. 요한 공동체는 ‘거함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거함’에 대하여 강조한다.

 

16. 거한다는 것’은 머물고 집중하고 헌신한다는 뜻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어 단어 중에 ‘mindfulness’가 있다. 나는 이 단어를 컴퓨터에 붙여 놓고 일한다. 정신이 하도 딴 데로 가서, ‘바로 지금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mindfulness’란 정신이 빈 데 없이 꽉 찰 정도로 딴 생각하지 않고 그 마음이 한 곳에 집중해 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지금 바로 여기에 100% 머물러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거한다’라는 뜻은 이것보다 더 강력한 뜻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함(abide/메노)’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즉 한 인간이 전인적으로, 온 인격체가 머물고 집중하고 헌신한다는 뜻이다.

 

17. 본문을 보면, 우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것을 요한일서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고 은혜이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선포를! 부흥회 용어, 또는 범퍼 스티커 같은 용어로 이것을 ‘성령충만’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약장사가 약파는 느낌으로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렇지,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사실 굉장한 말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고 우리에게 집중하시고 우리에게 헌신하신다. 이것을 좀 더 말랑말랑한 용어로 바꾸면, 성령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이란 머물러 있고 집중하고 헌신하는 것 아닌가.

 

18. 요한 할아버지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것’에 거하는 것, ‘성령이 우리를 가르친 그대로 주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것’ 즉 복음, 다시 말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진리 안에 거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진리 안에 머물러 집중하고 헌신하고 있는가. 나의 육체가, 나의 마음이, 나의 영혼이, ‘예수는 그리스도다!’에 ‘충만히/fully’ 머무르고 집중하고 헌신하고 있는가.

 

19. ‘기름부음’은 정말 중요하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셔야 우리가 우리의 육체와 마음과 영혼(우리의 전인격/인간성)을 엉뚱한 것에 빼앗기지 않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만이 진리이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 안에 있는 자,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진리를 떠난 ‘적그리스도’가 아닌, 진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20. 06:07

크리스투스 사피엔스(Christus Sapiens)

(요한일서 2:7-17)

 

1. 시월과 가을은 참 잘 어울리는 말 같다. 구월을 가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좀 설익은 것 같고, 십일월을 가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좀 너무 깊어진 것 같다. 그러나 시월은 가을이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가을이라는 옷이 딱 맞는 몸 같다. 자본주의에 좀 덜 찌들었던 시대의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영혼을 살찌우기 위하여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책 구매량이 늘어나던 계절이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스마트 폰과 넷플릭스에게 신체를 빼앗긴 듯하다. 그래서 요즘 인류를 일컬어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라고 부른다. 스마트 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2. 스마트 폰은 우리를 붙들어 두기는 하지만 머물게 하지는 못한다. 스마트 폰을 붙들고 살지만, 우리는 한 가지 깊은 이야기에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인내심을 잃어가고 공감능력을 잃어간다. 머물러 앉아 누군가의 이야기를 깊이 공감하며 들어주는 것을 지루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요즘 우리들의 인간관계는 매우 겉돌기만 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게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시(詩)를 읽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읽으면 머물 수밖에 없고, 머물다 보면 시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인내심과 이해력, 그리고 공감능력이 자연스럽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페이스북에 ‘詩사랑’이라는 개인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시를 읽으며 잠시 머물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지역의 사람들과 시 읽는 모임을 가져보고 싶기도 하다.)

 

3. 이 가을, 나의 영혼을 위로하며 살찌게 하는 시는 단연코 천양희 시인의 시이다. 천양희 시인은 당연히 본인 고유의 사유와 언어를 통하여 시를 쓰지만, 그의 시는 전혀 개인적이지 않고 매우 보편적 진리와 감성을 펼쳐 보인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위로하는 힘, 즉 내면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와 빛을 비춰주는 능력이 있다. 그녀의 시에 이러한 힘이 있는 이유는 그녀의 시를 읽다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시라는 덫’이라는 시의 한 구절만 봐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지금 네 가망(可望)은 / 죽었다 깨어나도 넌 시밖에 몰라 / 그 한마디를 듣는 것.” 50년 넘게 그녀는 시라는 세상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시라는 언어를 길어 올렸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인간 내면에 깊이 자리잡은 고독을 위로하는 힘을 지녔다.

 

4. 천양희 시인의 시를 한 편만 보자. ‘무너진 사람탑’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잠언은

망언이 된 지 오래다

오래된 것과 낡은 것은 다르고 변화와

변질이 다르다는 말

믿지 않은 지 오래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도전보다는

도약을 꿈꾼 지 오래다

허명도 명성이라 생각하고

치욕도 욕이라 생각 않은 지 오래다

젊은이는 열정이 없고

늙은이는 변화가 없는 지 오래다

예술과 상술을 혼돈하고

시업과 사업을 구별 못 한 지 오래다

고난이 기회를 주지 않고 위기가

기회가 되지 않은 지 오래다

 

그러니 꿈도 꾸지 마라

자존심 하나로 버틸 생각

죄 안 짓고 살 생각

 

그러니 너는 조금씩 잎을 오므리듯 입을 다물라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에 수록)

 

5. 이 시에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세상이 아주 적나라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제목처럼 우리는 사람탑이 무너진 시대, 즉 인간성이 무너진 시대, 인간 냄새를 맡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자존심과 존엄성을 다 버리고, 마음껏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 죄를 크게 지을수록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입을 오므리고 어금니 꽉 깨물며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더 이상 인간이라는 아이덴티티(identity)로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아주 잔인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이 선풍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그러한 세상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로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으며, 어떻게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6. 이렇게 잔인한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 요한일서의 말씀이 들어올까? 어떤 할아버지(요한이라고 불리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까? 더군다나 이 편지는 대략 2천 년 전에 씌어진 것인데, 우리의 마음에는 이 오래된 편지를 받아들일 여유가 있을까? 할아버지는 이 편지를 쓰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절). ‘죄 안 짓고 살 생각’하면 안 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이 편지는 매우 도전적으로 보인다. 죄 안 짓고 살 생각하면 망하는 이 시대에 죄를 짓지 않고 살게 하려는 할아버지의 기획은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7. 게다가 편지를 읽다 보면 할아버지의 사고방식은 매우 극단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나누고, 사랑과 미움으로 나누는 것 같다. 중간이 없다. 빛 아니면 어둠이고, 사랑 아니면 미움이다. 빛이면서 어둠이고, 사랑이면서 미움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주 극단적이다. 빛 아니면 어둠이고, 사랑 아니면 미움이다. 할아버지의 이러한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정말 고리타분해 보인다.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아니 분간하면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을 분간하면 먹고 살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일만 충실히 할 뿐이다.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할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8. 그러면서 편지를 보면 할아버지는 매우 ‘가족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12절에서 14절에 그러한 언어 구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할아버지는 마치 가족 구성원들에게 이야기하듯 언어를 구사한다. 자녀들아(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이것은 분명 할아버지가 속해 있는 공동체, 즉 요한공동체의 자기 이해이다. 요한공동체, 즉 교회는 가족(family)이다. 이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해한 사도 바울의 이해처럼 매우 특별한 이해이다. 생물학적, 또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 가족을 구성하는 현대인들의 가족에 대한 인식을 뛰어넘는 매우 특별한 가족 이해다. 교회는 가족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9. 이 가족 안에는 자녀들(아이들)이 있다. 이들은 ‘죄 사함을 받은 이들’이다. 이것은 이제 세상에 새롭게 태어난 이들이라는 뜻이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죄 사함은 기쁜 것이다. 정현종 시인의 시 중에 ‘송아지’라는 시가 있다.

 

내가 미친놈처럼 헤매는

원성 들판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세상에 나온 지

한 달 밖에 안된!

송아지

 

너 때문에

이 세상도

생긴 지 한 달 밖에 안된다!

 

(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에 수록)

 

10.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이 태어나면, 세상은 막 태어난 그 사람만큼 젊어지는 것이다. 세상이 노쇠해지는 이유는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 줄어들거나 없기 때문이다. 요즘 교회들이 노쇠해진 이유, 정현종 시인의 시 ‘송아지’에서처럼 생동감이 넘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부흥을 해도 교회에서 교회로 수평 이동하는 사람들 때문이지, 요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세례가 얼마나 뜸해졌는가. 우리는 날마다 새생명을 갈망한다. 그 새생명을 보면서 먼저 태어난 이들도 다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가장 기쁠 때는 새생명이 탄생하는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새로 태어난 이를 믿음으로 받아낼 때이다.

 

11. 이 가족 안에는 아비들(부모들/엄마와 아빠)이 있다. 이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하나님,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이들이다. 이들은 그것에 knowledgeable(경험적 지식이 많다) 하다. 그래서 이들은 방금 막 태어난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다. 교회는 갓 태어난 아이들만 있는 곳이 아니라, 그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는 영적인 부모들이 있어야 하는 곳이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은 경험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손에 키워지는 아이들, 이제 막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태어난 영적인 자식들을 능수능란하게 키울 수 있다.

 

13. 또한, 이 가족 안에는 청년들이 있다. 이들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고, 그래서 악한 자, 흉악한 자를 이긴다. 청년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네아니스코스’는 단순히 젊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싸움터에 나갈 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아비들에게는 지혜(wisdom)가 있지만, 청년들에게는 힘(strength)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은 악한 자들을 물리칠 수 있다. 이렇게 강한 청년들이 없으면 하나님의 가족은 악한 자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 안에는 강한 청년들이 있어야 한다.

 

14. 우리가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가족을 구성하는 아이들, 아비들, 청년들은 육신의 나이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족은 연차적 나이로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인간의 육신의 나이와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의 구분이 잘 겹치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젊은 사람이 영적으로 젊을 때 더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신체 나이가 늙으면 아무리 영적인 나이가 젊어도 행동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그래서 교회는 젊은 이들을 하나님 가족의 청년들로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구한말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은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15. 가장 이상적인 것은 육신의 나이도 젊고, 영적인 나이도 젊은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주의 일은 육신의 나이와는 크게 상관없이 영적인 젊음으로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갈렙(Caleb)이 있다. 여호수아와 함께 출애굽 제 1세대 중 유일하게 가나안 땅을 두 발로 밟은 갈렙은 가나안에 입성했을 때 육신의 나이가 80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던 아낙 자손이 차지하고 있던 헤브론을 가리키며 ‘이 산지를 나에게 주소서’라고 여호수아에게 간청한다. 자신이 가장 어려운 일을 감당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0-12).

 

16. 우리는 세상을 행해서는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말하며 자기의 젊음을 자랑하고 유지하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는 ‘이 나이에 내가 어떻게’라고 하면서 마치 자기의 젊음은 지난 것처럼, 또는 없는 것처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가족은 육신의 나이로 구성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 믿음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져 새벽 이슬 같은 청년으로 머물기를 간구해야 한다. 나이 젊은 사람이 더 많이 섬기는 게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섬기는 신비로운 현상이 발생하는 곳이 하나님의 가족, 교회이다.

 

17. 요즘 사람들을 일컬어 ‘포노 사피엔스’라고 부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불리면 안된다. 우리는 ‘크리스투스 사피엔스(Christus Sapiens)’라고 불려야 한다. ‘포노 사피엔스’가 스마트 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리듯, 크리스투스 사피엔스’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즉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내가 주조한 개념이다). 우리는 요즘,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는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에 따라 우리는 바로 그 마음 둔 것에 의해 살아갈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혹시 나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 있다면 마음을 돌이켜,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불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자.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보자.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부질없이 지나가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리와 함께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 끝날까지, ‘크리스투스 사피엔스’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게 되길!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12. 03:08

죄를 고백한다는 것의 의미

(요한일서 1:1-10)

 

1. “눈 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이 노래의 제목은 <굳세어라 금순아>이다. 우리는 이 노래의 제목을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 노래의 가사에는 엄청난 인간애와 역사적 아픔이 담겨 있다. 이 노래의 화자는 사랑하는 금순이, 그러나 전쟁통에 헤어진 금순이를 애타게 찾고 있고, 본인은 흥남부두 철수 작전 때 미군 함선을 타고 탈출을 했고, 그리고 지금은 ‘국제시장 장사치’로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금순이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은 남북통일의 소망으로 이어지고,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라는 매우 역사/정치적인 용어까지 등장한다. 촌스러워 보이지만, 이 노래의 가사가 담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공부가 많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대단한 노래다.

 

2. ‘그 날의 일’을 직접 경험한 이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다. 내가 우리교회에 부임하여 받은 축복 중 하나는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에 등장하는 흥남 철수 작전을 직접 경험하신 故 박영희 권사님으로부터 그 날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이다. 역사 교과서에서 또는 영화를 통해서 접하던 흥남 철수 작전(Hungnam Evacuation)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밀려오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떠한 사건을 직접 경험한 이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 그 사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가리키는 모든 후대의 작품이나 이야기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법이다. 나는 그 날 이후, <굳세어라 금순아>를 들을 때도,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볼 때도 마음 가짐을 다르게 하게 되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것이 故 박영희 권사님이 나에게 물려주신 유산이다.

 

3. 요한일서는 한 마디로 얘기해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박영희 권사님이 흥남 철수 작전을 직접 경험했듯이, 요한일서의 화자, 어떤 장로(할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1절). 사실 이게 굉장히 전율이 흐르는 진술이다. 이 진술을 들으면서 우리의 반응은 “와~~~”이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관찰하고 손으로 만져 봤다고!

 

4. 살면서 만나본 유명인들이 기억난다. 탤런트 심은하. 우리 동네 살았다. 어떤 예쁜 사람이 그랜저 몰고 지나가길래 누군가 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심은하였다. 탤런트 음정희. 도시인이라는 드라마로 스타덤에 오른 연예인이었다. 그런데, 그 남동생이 나의 고등학교 후배였는데, 내가 그 친구 영어/수학 과외선생을 했다. 그 집에 가서 괴외를 했는데, 그때 음정희를 보곤 했다. 가수 강타. 우리 동네 잠깐 살았다. 이 친구가 우리 동네 사는 동안 동네가 난리도 아니었다. 강타 오빠 보러 몰려드는 열성 팬들 때문에 동네가 맨날 시끄러웠다. 놀이터 앞집에서 잠시 살았는데, 강타를 보러 온 소녀 팬들이 날마다 놀이터를 가득 채웠다. 일반 주택만 있는 동네다 보니 공중 화장실이 없어서, 그때 아이들이 화장실 문제를 해결하느라 우리교회에 몰려들곤 했다.

 

5. 이런 유명인들을 직접 본 경험을 말하면 사람들은 눈이 반짝거린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유명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한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눈이 정말 반짝거려야 한다. 요한일서는 요한복음과 같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한 증언을 한다. 우리는 이것을 정말 잘 알아들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한 인간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고 ‘영원한 생명’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 그 자체’라는 뜻이다. 우리는 생명 그 자체를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생명 현상을 경험할 뿐이다. 그런데, 요한일서의 한 어르신(어르신 그룹 / 요한 공동체)이 증언하는 것은 정말 ‘와~~’가 저절로 나오는 것인데, 그는 생명 그 자체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6.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멋진 일은 무엇일까? 요한 공동체가 증언하듯이, 그것은 ‘생명’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보람찬 일은 무엇일까? 내가 경험한 생명을 나누는 일이다. 지금 요한 공동체는 그것을 하고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3-4절). 생명 자체를 직접 경험한 요한 공동체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방법은 자신이 경험한 그 놀라운 일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이다.

 

7.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도’라는 게 다른 일이 아니다. 우리는 ‘전도’라고 하면, 어던 비즈니스가 고객을 유치하듯이 ‘교회 나오세요’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실 전도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 기쁨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행위’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 즉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들은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우물가의 여인처럼 생명에 목말라 한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도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가 더 이상 목마르지 않게 하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어떻게 했는가? 너무 기뻐서, 주체를 못하고, 마을로 뛰어 들어가서, 그 기쁨을 동네 사람들과 나누었다. 전도는 이렇게 기쁨을 나누는 일이다.

 

8. 생명을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가 아주 멋진 이야기를 하신다. 생명 자체를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는 이런 표현을 하신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5절). ‘빛’은 은유이다. 빛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보는 그런 빛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빛을 보면 그것이 하나님인양 그 빛에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빛을 발산하는 태양이 마치 하나님인듯 태양신을 섬기게 될 것이다. 빛은 은유이지,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빛과 대조되는 은유는 어둠이다. 어둠은 뭔가 음산하고 베일에 싸여 있고 분명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그와 반대로 빛은 활기차고 열려 있고 확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어둠은 거짓 같은 것이지만, 빛은 진리 같은 것이다.

 

9. 할아버지는 우리를 빛과의 사귐으로 초대한다. 그 사귐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사귐이다. 즉, 우리 안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사귐이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신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8-9절). 여기에는 빛, 진리, 사귐, 죄 사함이라는 말과 더불어 어둠, 거짓, 죄라는 말이 나온다.

 

10. 우리는 여기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는 말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죄는 무엇인가? 우리는 죄의 개념을 실정법 차원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법에 접촉이 되는 것, 법을 어기는 것, 우리는 그것을 범죄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매우 신학적이고 존재론적 차원의 죄이다. 죄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가리킨다. 우리 자신의 내면을 보면, 우리는 우리의 어둠을 만나게 된다. 사실 이게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어둠을 직면하길 싫어한다. 마치 어두운 밤길을 걷기 싫어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바깥에서 활동하는 어떤 것들인가? 우리 바깥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결국 내 안에 있는 어둠이다.

 

11. 김형영 시인은 시 <화실시편 18>에서 이런 고백의 기도를 드린다.

 

한 번만 더 / 못 박히소서

내 잘못 내가 모르오니 / 한 번만 더 / 한 번만 더 / 못 박히소서

주님, /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오니 / 내 대신 못 박히소서

못 박히소서 / 못 박히소서 / 아멘,

 

12. 그의 <화실시편 18>은 ‘아멘’으로 끝나지만, 아멘 뒤에는 마침표가 찍히지 않고, 쉼표가 찍혀 있다. 우리는 아멘 뒤에 마침표를 찍음으로 기도를 마칠 수 없다. 우리는 아멘 뒤에 쉼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 조금 쉬었다, 우리는 다시 기도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어둠은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할 수밖에 없다.

 

1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에서 “자백하면”은 계속적 죄의 고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자백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호몰로게오’인데, 이는 문자적으로 ‘동일한 것을 말하다’, ‘함께 말하다’이다. 자백, 즉 고백(confession)이라는 행위는 “하나님과 죄인이 한 가지 동일한 것에 대해 함께 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죄의 고백, 또는 회개를 매우 기계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취조실에서 수사관들에게 취조 당하면서 실토하듯이, 그렇게 죄의 고백, 회개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고백(confession)’의 전통을 심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고백은 취조실에서 실토하는 것 같은 행위가 아니다. 고백은 하나님과 함께 앉아서 두런두런 내 안의 어둠에 대해서 대화 나누는 것이다.

 

14. 고백은 인격적인 행위이지 비인격의 기계적 행위가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개신교가 ‘고해성사’의 전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때 이런 고백을 한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고(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게 아니라 우리는 교회를 믿는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고(단순히 친교 나누는 게 아니라 우리는 친교를 믿는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 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 사함은 같은 호흡 속에 있다. 즉, 죄 사함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게 아니라, 사귐 안에서 죄 사함을 받는다.

 

15.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그리고 교회 지체들과의 사귐 안에서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고백은 우리가 할까 말까 내 마음대로, 마음내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고백은 우리의 믿음, 신앙이다. 왜냐하면, 고백은 우리 마음에 있는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고해성사의 전통을 잃어버린 개신교인들은 고백할 줄 모른다. 마음에 어둠이 가득한 데도, 그것을 어떻게 어디에다가 털어놓아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냥 상담가를 찾아가거나 정신과의사를 찾아가거나, 처방을 받아서 약을 먹는다. 이것을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최선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16. 죄를 고백한다는 것, 그것은 전혀 개인적이고 기계적인 일이 아니다. 종교적 행위나 관습도 아니다. 죄(우리의 어둠)를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고, 교회의 지체들과의 깊은 사귐으로 들어가서, 그 사귐 속에서 내 안의 어둠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다는 뜻이다. 이것은 최고의 치유행위이며, 구원의 은총이 발생하게 하는 신앙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과 두런두런 대화하는 가운데, 우리는 빛으로 나아온 지체들과 함께 두런두런 대화하는 가운데, 빛이 스며들어 어둠이 어느새 물러간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17. 생명을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의 이야기, 빛을 직접 경험한 할아버지의 나눔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우리에게 어둠만을 전달해 주는 이 어두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어둠의 희생자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빛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의 어둠을 물리치고, 빛으로 나와야 한다. 그 길이 여기에 있다. 고백. 죄를 고백한다는 것. 우리의 어둠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 우리는 단순히 고백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백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 개신교에는 ‘고해성사’라는 전통이 형식적으로는 살아 있지 않지만, 반드시 내용적으로는 살려 내야 한다. 기도할 때 고백하든, 목회자에게 고백하든(목사님, 고백(confession)하고 싶은 게 있어요! 얼마나 아름다운 사귐인가), 교회의 지체를 만나 고백하든, 우리의 고백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둠에 대하여 말하는 것, 그것을 꺼내 놓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그리고 교회의 지체와의 사귐 가운데서 하는 고백은 어둠을 몰아내고 빛으로 나아오는 신앙의 행위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4. 11:56

약한 그리스도인 (Weak Christians)

(고린도후서 12:9-10)

 

1. 고린도후서 10장부터 마지막 13장까지는 한 호흡으로 가려고 한다. 마지막 네 장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용어는 ‘약함(weakness)’이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과 10절은 그 약함에 대해서 가장 극명하게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 운율을 붙여서 찬양으로 부르기도 한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복음의 맥락에서 ‘약하다는 것’, ‘약함(weakness)’이란 무엇일까? 살아남기 위해서 강한 자가 되라고 주문하는 우리 시대에 ‘약함’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2.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을 받아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특별히, 2세대 종교개혁자인 칼뱅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차원의 신학적 성찰이 담겨 있다. 그러나 나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읽어야 한다’를 조금 다른 차원에서 해석하고 싶다. 조명이란 어두운 곳을 밝히는 것이다. 어두우면 잘 안 보인다. 그래서 어두운 곳에는 빛을 비추어야 그곳을 잘 볼 수 있다. 언어는 때로 굉장히 어둡다. 언어는 인간의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 인간은 언어에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문자는 매우 건조하다. 나는 그 건조한 문자에 성령의 조명을 비춘다는 것을 그 문자/언어에 담긴 ‘감정선(emotion line)’을 밝히 보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감정선(지금 어떤 감정(emotion)이 여기에 흐르고 있는지)을 복원해야 한다.

 

3. 고린도후서 10장 이후의 말씀에는 바울의 아주 세밀한 감정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그곳에 흐르고 있는 바울의 세밀한 감정을 복원해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받아 바울의 감정선에 감정이입을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부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곳에 흐르는 바울의 감정선은 ‘약함(weakness)’라는 용어에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다.

 

4.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어떨 때 약해지며, 약해졌을 때 어떤 감정이 드는가? 병 들었을 때도 약해지고, 속상한 일을 겪을 때도 약해지고, 무엇인가 간절히 바랄 때도 약해지고,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때도 약해진다. 또한 누군가에게 부당한 공격을 받았을 때도 약해진다. 우리는 약해져 있을 때, 서러운 마음도 들고, 서글픈 마음도 들고, 억울한 마음도 들고,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이런 감정들은 모두 쉽게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약해져 있을 때, 우리는 감정노동을 아주 심하게 한다. 그래서 마음이 아주 지치게 된다.

 

5. 그런데, 본문을 보면, 바울의 약함은 이러한 약함과 조금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약함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따라가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매우 사랑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어느 순간 그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아주 괴상한 말을 만들어 내어 바울을 공격했다. 10장 이후에는 그 공격이 무엇이었는지, 세 가지가 명시적으로 나온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글은 잘 쓰는데, 말하는 것은 시원치 않다. (10:10)

2) 다른 명성 있는 사도들에 비해 사도적 자질이 부족하다. (11:5)

3) 다른 교회들에게서 ‘탈취’하여 고린도 교회를 섬겼다! (고린도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고 사역한 일에 대한 비난) (11:8-9)

 

6. 바울은 이런 이유를 들어 자신을 깎아내리는 자들을 일컬어 ‘거짓 사도, 속이는 일꾼, 사탄의 일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비난에 맞서, 부득불 자기를 변호한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얼마나 피곤하고 고달프고 속상하고 서운했을까, 그의 감정선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역하느라 그 자체로도 엄청나게 피곤하고 힘들었을 텐데, 바울은 지금 자기를 그릇된 이유로 비난하는 자들의 비난을 듣고, 감정적으로 매우 힘든 상태에 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서 ‘쓰담쓰담’ 해드리고 싶다. 힘 내시라고.

 

7. 바울은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난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다는 것과 고린도 교회가 그러한 터무니없는 비난을 쉽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꾸짖는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10:7). 광명한 천사(외모만 뻔지르르 한 사람/말만 잘하고 실제 영성은 없는 사람/왜곡된 복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사람)로 가장하여 나타나 사역하는 척하지만, 결국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재물만 탐하는 자들의 비난을 듣고 그들의 말에 동조하여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고린도 교회를 꾸짖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왜 바울을 비난하겠는가? 바울을 비난해서 그를 깎아내림으로 자기들이 높아지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건 정말 파렴치한 행위일 뿐이다.

 

8.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꾸짖으면서 아주 재미난 말을 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재밌게 다가왔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을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2-3).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중매를 섰다고 한다. 고린도 교회는 신부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인데, 신부에게 최고의 신랑감을 소개시켜 줬다는 것이다. 근데 이게 참 난감한 일이다. 고린도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의 신랑감이었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린도 교회는 최고의 신붓감이었을까?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에 아주 점잖게, 복음적으로 어퍼컷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최고의 신랑감에는 최고의 신붓감이 어울리는 법인데, 지금 고린도 교회는 최고의 신랑감에 어울리는 최고의 신붓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9. 그렇다면, 바울의 목표는 여기서 더 분명해진다. 그의 목표는 최고의 신랑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울리는 최고의 신붓감으로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후 12:19). 바울은 본인이 약해졌는데, 본인이 약해진 이유는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면서 보통 약해질 때와는 다른 바울의 약함이다.

 

10.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에서 ‘너희’는 ‘고린도 교회’이다. 그냥 교회라고 해도 무방하다. 바울에게 교회는 그냥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작은 우주다. ‘덕을 세우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οἰκοδομέω (오이코도메오)’이다. 이는 1차적으로 건물이나 집을 세운다(build)는 뜻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upbuilding’이라는 단어를 쓴다.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몸 또는 건물로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몸이 건강해지기 위해서, 또는 건물이 튼튼하게 세워지기 위해서 여러가지 요소들이 조화와 질서를 이루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특별히 ‘덕을 세운다’는 말의 뜻은 성장과 성숙을 말하는 것이다. 몸은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생명이 되어 행복을 누리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덕을 세운다’는 것은 최고의 신랑감인 예수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최고의 신붓감인 교회로 성장하고 성숙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11. 바울은 최고의 신랑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려다 보니 약해졌고, 최고의 신붓감인 교회를 사랑해서 덕을 세우려다 보니 약해진 것이다. 특별히 바울은 연약한 교회의 덕을 세우려고, 교회를 너무 사랑해서 교회를 염려하고 교회를 향한 애타는 마음 때문에 약해졌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수고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옥살이도 많이 하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채찍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고 세 번이나 파선을 당했고 밤낮 꼬박 하루를 바다에서 헤맨 적도 있습니다. 나는 수차례에 걸친 여행에서 강의 위험도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들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나는 또 수고와 곤고와 종종 자지 못함과 배고픔과 목마름과 때로 굶주림과 추위와 헐벗음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와 별로도 날마다 나를 억누르는 것이 있으니, 곧 내가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고후 11:23-28/우리말성경).

 

12.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구절은 마지막 절의 “이와는 별도로 날마다 나를 억누르는 것이 있으니, 곧 내가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이다. 교회와 교인들의 상황이 바울의 마음을 염려하게 하고 애타게 했다. 여기서 ‘애타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퓌푸마이’인데, 이는 ‘내가 불탄다’의 뜻이다. 바울은 실족하는 형제/자매가 생겨날 때마다 마음이 불타듯이 아파했다. 바울은 바로 이때 자신이 약해졌다. 교회를 사랑해서 염려하고 애타는 마음 때문에 약해졌다.

 

13.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종류의 약함이 대개 목회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을 왜 교회 공동체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겠는가? 그냥 목회자들에게 주어진 목회지침이라고 하면 될 것을. 성경이, 바울의 이러한 약함을 담고 있는 성경이 교회 공동체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진 이유는 교회 구성원 모두가 ‘약함(weakness)’에 대하여 묵상하라고 주신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약해져야 한다. 아니, 그리스도를 높이고, 교회를 사랑하다 보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14. 개인주의를 태동시킨 모더니티를 받아들여 형성된 미국의 복음주의(20세기 중반미국에서 생겨난 미국 백인 중산층 중심의 보수적인 기독교)는 교회론을 형편없이 축소시켰다. 그래서 미국의 복음주의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제 그 수명이 다 했다고 비판 받는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교회를 개인들의 집합소 정도로 전락시켰다. 교회를 종교적 욕망이 있는 개인들에게 그 욕망을 해소시켜 주는 종교적 서비스 업 정도로 생각하게 끔 한 것이 미국의 복음주의이다. 개인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은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채워주는 교회를 찾아 나선다. 마치 쇼핑하듯이. 그러다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채워주는 교회를 만나면 거기에 등록하고 다닌다. 그러다 그곳이 식상해지면 새로운 교회를 찾아 나선다. (이게 모더니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새로운 것(modern/신상품)을 찾아 떠나는 현상.) 한국교회가 미국의 복음주의를 받아들여 기독교 생태계를 형성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한 신앙의 생태계에서는 자아가 강한 그리스도인, 종교적 소비 욕망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만들어질 뿐이지, 오늘 우리가 바울을 통해서 본, 그리스도를 높이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해서 ‘약해지는 그리스도인’이 세워지는 것은 힘들다.

 

15. 우리가 정말로 성경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고린도후서에서 드러나고 있는 바울의 약함, 바로 그 약함을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교회로 세워져 나가면 좋겠다. 교회는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이건 매우 기독교 교회론을 세속적으로, 모더니티의 영향 아래서 왜곡시킨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주님께 부름을 받아 교회의 몸이 되어 ‘함께’ 지어져 간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바쁜데 시간을 내야 하는 것, 육체 노동, 감정 노동,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한 몸의 다른 지체를 섬겨줘야 하는 것, 다른 지체의 아픔을 들어주고 보듬어 주어야 하는 것, 때로는 다른 지체들의 불만과 불의, 불합리를 받아줘야 하는 것, 내가 가진 것을 관대한 마음을 나누어야 하는 것 등등,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 가는 것은 오히려 내가 약해지는 일이다. 주님만을 높이고, 교회를 사랑하는 일은 약함(weakness)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16.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반전이 있다. 우리의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난다. 바울은 아주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주 신비로운 고백을 하는데, 자신의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붙들어 두기 위해서 자신은 계속하여 약함 속에 자기는 내어주겠다는 고백을 한다. 우리의 약함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는 통로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주님을 찬양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10절). 그래서 우리는 ‘약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쓰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읽는다. 이러한 존재의 신비가 우리의 삶을 휘감아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리스투스 사피엔스(Christus Sapiens)  (0) 2021.10.20
죄를 고백한다는 것의 의미  (1) 2021.10.12
신앙의 역설  (0) 2021.09.27
위로와 기쁨  (0) 2021.09.21
마음을 넓히라  (1) 2021.09.17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27. 13:12

신앙의 역설

(고린도후서 8:1-5, 16-19, 9:7, 11)

 

1. 고린도후서 9장에는 ‘연보(捐補)’라는 말이 나온다. 한자어이다 보니 마음에 착 와 닿지 않는다. ‘연’은 ‘버릴 연’이고, ‘보’는 ‘도울 보’이다. ‘연보’의 뜻은 “자기 것을 버려서 해어지고 떨어진 곳을 기워준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헌금(Offering/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과 다르다. 그래서 영어로 ‘연보’를 옮길 때 ‘offering’이라 하지 않고, ‘liberality/generosity’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니까, 연보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고린도후서의 컨텍스트 안에서는 예루살렘의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 관대한 마음으로 내는 물질(재산)을 말한다.

 

2. 바울이 ‘연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고린도 교회와 바울 일행 간에 오해가 생겨서 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바울은 ‘눈물의 편지(frank speech)’를 써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좋은 마음으로 돌려 놓았다. ‘솔까말 편지’를 보내 놓고 마음 조렸던 바울은 디도 편에 온 고린도 교회의 회개 소식을 듣고 너무나도 기뻐했다. 바울은 뜬금없이 ‘연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다. 9장 5절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였노니.”

 

3.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미루어 보면, 고린도 교회는 바울 일행에게 ‘연보’를 약속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 일행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오해(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가 뭔가 잘못한 일 / 복음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안에서 벗어난 일)가 발생하여 둘 사이가 별로 좋지 않게 되었다. 화평(peace)이 없으면 무슨 일이든 진행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일이고, 주님의 일이라 할지라도 공동체(부부 간/친구 간/동료 간)에 화평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 아니라 서로 간에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다.

 

4. 고린도 교회와 다시 화평을 이룬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권면하고 있다. “예전에 약속했던 연보를 관대한 마음으로 실행하라!” 고린도 교회 입장에서는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에 그렇게 마음 먹었다가 오랜 동안 잊고 있었던 일을 다시 실행하는 일은 처음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들게 마련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연보를 독려하면서 다시 한 번 ‘칼 와호메르 논리(하물려 논리)’를 쓴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 이야기를 꺼낸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마케도니아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쳤고,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연보를 했습니다”(우리말 성경).

 

5. 마게도냐 지역은 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가 있는 곳이다.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은 고린도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다. 핍박도 많았고, 극한 가난 속에서 어려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은 아주 관대한 마음으로 연보를 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열악한 상황 속에 있었던 마게도냐 교회도 자발적 관대함을 보여주었는데, 하물며(칼 와호메르 논리), 풍성함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는 얼마나 더 큰 관대함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6. 마게도냐 교회들(빌립보 교회/데살로니가 교회)은 어려운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대한 마음으로 관대한 연보’를 할 수 있었을까?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힘들면, 마음이 좁아지는 법이다. 자기가 힘들면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십상이고, 자기 살 궁리만 하는 법이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바울은 지금 마게도냐 교회의 그러한 모습을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마게도냐가 교회들이 관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자족하기 自足, self-sufficiency’를 배웠기 때문이다. 자족이란 스스로 넉넉함을 느끼고, 스스로 만족하게 여겨서 뭔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중요한 기독교 영성이다.

 

7. 자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렇지 않음에도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왜 가진 게 이렇게 없지? 나는 왜 이렇게 예쁘지 않지?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하지 않지? 나는 왜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지? 나는 왜 친구가 없지? 나는 왜 이렇게 외롭지?’ 등등, 전혀 그렇지 않은데 스스로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군다. 바울은 마게도냐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인 빌립보 교회에 이런 말씀을 전한 적이 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니라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립보서 4:11-14).

 

8. 너무도 아름다운 말씀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라고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칭찬하는 장면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처럼 ‘자족하기’를 배우고 실천했다는 뜻이다. ‘나 왜 이렇게 힘들지’, 하면서 신세 한탄하고 외로워 하고 주저 앉은 것이 아니라, 자족하기를 배우고 실천한 빌립보 교회는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연보를 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바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9.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이 관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착한 일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미 나는 주 안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이 풍성하기 때문에 그 풍성함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의 공급자이시고 우리들은 그 은혜를 받는 수급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은혜를 공급받았기 때문에,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가난한 자/육신이 가난한 자 또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공급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 수 있는 신앙의 역설이다. 한 마디로 이거 아니겠는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렇게 외치는 것!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

 

10. 성경에는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를 외치며, 신앙의 역설을 보여준 신앙의 선조들이 즐비하다. 사무엘하 15, 16장에 보면, 다윗이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예루살렘 궁을 빠져나와 피난 길에 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가. 식솔들,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바후림이라는 곳을 지날 때,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나타나서 피난 길에 오른 다윗을 저주한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삼하 16:7-8).

 

11. 그때 시므이의 저주를 들은 다윗의 장수 아비새가 다윗 왕에게 “시므이의 목을 칠까요?”라고 물어본다. 다윗 왕은 화난 장수들을 말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0-12). 하나님께 마음을 둔 사람의 관대함은 이렇게 어려울 때 드러나는 법이다.

 

12.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를 외치면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관대한 마음을 보이는 이야기를 우리는 열왕기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로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이다. 그때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선지자도 그 가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극심한 가뭄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엘리야 선지자를 하나님께서는 많고도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사는 한 과부의 집으로 보내신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곳에 간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이렇게 청한다. “물 한 모금 주시오. 그리고 떡 한 조각 좀 주시오.” 극심한 가뭄에 물과 떡이 어디 있겠는가.

 

13. 엘리야의 청을 들은 사르밧 과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 이 보다 비참하고 슬픈 장면이 어디 있는가. 극심한 가뭄 때문에 먹을 게 없어서, 이제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자식과 함께 죽으려고 작정한 엄마의 최후.

 

14. 신앙의 역설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그렇게 최후의 죽음을 작정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7:14). 극심한 배고픔, 극심한 비참함 가운데서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그 순간 신앙을 택한다. 하나님께 마음을 둔 사르밧 과부의 관대함이 엘리야 선지자를 살렸을 뿐만 아니라 본인과 자식도 살렸다. 육신의 선택이 아닌 신앙의 선택은 늘 이렇게 우리가 예상치 못한 구원을 가져오는 법이다. 할렐루야!

 

15.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고린도 교회는 부요한 교회였다. 열악한 상황 속에 있었던 마게도냐 교회들도 자족하기를 배우고 자발적 관대함을 보여주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듯이, 하물며, 풍성함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는 얼마나 더 큰 관대함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풍요로운 고린도 교회도 마게도냐 교회들처럼 자족하기를 배워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16. 바울은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에 다시 한 번 디도를 보낸다. 바울에게 있어 디도는 어렵고 힘들 때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이었다. 디도는 눈물의 편지를 들고 가서 오해와 음해 가운데 빠져서 삐딱하게 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의 잘못을 돌이킨 장본인이었다. 이제 바울은 디도에게 극심한 어려운 가운데 빠져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연보를 고린도 교회로부터 받아서 오는 중요한 일을 맡긴다. 이렇게 신실한 주의 일꾼이 있다는 것은 교회의 희망이다. 우리 모두 디도처럼 신실한 주님의 일꾼이 되면 좋겠다.

 

17. 어려울 때 관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요, 우리가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상황이 더 좋은 사람일수록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 은혜요 믿음이다. 신앙/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신실함은 어려울 때 움츠러들지 않고 역설적인 관대함을 나타낸다.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우리 모두,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관대한 마음으로 선한 일 하기를 멈추지 말자. 마게도냐의 교회들처럼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더욱더 관대한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신앙의 역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를 고백한다는 것의 의미  (1) 2021.10.12
약한 그리스도인 (Weak Christians)  (0) 2021.10.04
위로와 기쁨  (0) 2021.09.21
마음을 넓히라  (1) 2021.09.17
그리스도인의 갈망  (1) 2021.09.08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21. 05:17

위로와 기쁨

(고린도후서 7:2-16)

 

1. “ㅡ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가 다섯 번 반복되는 시가 있다. 정지용의 시 ‘향수’이다. 1989년 가수 이동원과 성악가 박인수가 듀엣으로 불러 유명해진 노래 ‘향수’의 원작이다. 한국 근대시인들(일제시대 때 활동했던 시인들) 중에는 윤동주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당시 한국 문학계에서 정지용은 아이돌이었다. 윤동주는 정지용을 너무 좋아해서 정지용의 첫 시집(1935년)을 구입하여(1936년) 필사하며 시작 연습을 했다. 정지용은 일본 유학파인데, 일본 교토에 있는 동지사(도시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귀국하여 정지용은 모교인 휘문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았고, 해방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 가르쳤다.

 

2. 연희전문을 다닐 당시 윤동주는 정지용의 집을 방문하곤 했다. 그리고 윤동주도 일본 유학의 꿈을 꾸고 일본으로 가게 되는데, 입교대학에 입학했다가 정지용이 다닌 동지사대학으로 옮겨서 거기에서 정지용처럼 영문학을 공부한다. 이처럼 윤동주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 중 하나는 정지용이다. 윤동주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정지용의 시는 그 당시 매우 모던했다(새로웠다). 그의 시 ‘향수’가 발표된 시기는 1927년 3월이다.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 정지용의 시는 그야말로 한국 근대문학의 기적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ㅡ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3. 인간에게 경험이란 존재를 꽃피우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서 인간은 그 인격을 형성한다. 정지용에게 ‘고향’에 대한 경험은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된다.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같은 고향이지만 누군가에겐 ‘꿈에서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곳’일 수 있다. 고향에 대하여 무슨 경험을 가지고 있는 지에 따라서 그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좋은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이 곧 생각의 틀과 그 사람의 인격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4.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하나님’에 대하여 표현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은 ‘위로의 하나님’이다. 1장에서도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장 3-4절). 그 이후 계속해서 바울은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으로 기억하고 찬양하면서 자신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삶(부요케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한다.

 

5. 수련회를 연다면 공동체 활동 시간에 가장 묻고 싶은 질문 중 하나이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요? 한 단어로 표현해 보시고 왜 그런지, 무슨 경험 때문에 그런지 나누어 주세요.” 대개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바울도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며 찬송하는 이유는 그가 사역을 하면서 어려운 일을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위로가 없었으면 바울도 그 사역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찬송이 그 당시에 있었다면, 바울이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 중 하나였을 것이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

 

6. 고린도후서에는 정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고린도후서를 읽으며 그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는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성경이 그렇다. 그 이면에는 어떤 긴장감이 배어 있다. 그 긴장감을 찾아내야만 성경을 읽을 때 재미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그 영화의 스토리가 지닌 긴장감을 찾아내고 유지해야만 그 영화가 재밌는 것과 마찬가지다.

 

7. 바울은 어느 순간 오해와 음해 때문에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관계가 소원해졌다. 고린도후서에 흐르는 긴장감은 바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 간의 소원해진 관계 때문은 아니다. 그 관계가 긴장감을 촉발시키기는 했지만, 그들의 긴장감은 그 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 관계를 회복하고자 써서 보낸 바울의 ‘눈물의 편지’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뭔가 오해하고 복음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하여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냈다. 지금처럼 운송체계가 활발하지 못했던 그 당시 편지를 보내 놓으면 그에 대한 답장을 받는 것은 꽤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 일었다. 편지를 보내 놓고 사도 바울은 마음을 조린다.

 

8.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는 그렇게 정다운 편지가 아니었다. 바울은 그 편지를 ‘담대하게’ 썼다고 했는데, 여기서 담대하게 썼다는 것은 ‘frank speech’라는 말로, 아주 솔직하게 상대방을 향한 마음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솔까말 편지 / 솔직히 까놓고 말한 편지).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서, 그들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조목조목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편지를 써서 보낸 측에서는 자기가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가감없이 다 써서 속이 시원할지는 몰라도, 그 편지를 받는 측에서는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9. 바울은 ‘따끔하게 한 마디 한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보내 놓고 후회했다.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8절).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편지 한 통 보내 놓고 노심초사하는 바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도 종종 그러한 경험을 하지 않는가? 어떠한 일을 해놓고 그 일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몰라서 밤잠을 설치며 전전긍긍하는 것 말이다.

 

10. 바울은 자신이 써서 디도 편에 고린도교회로 보낸 편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할 수 없었다. 아마도 바울은 그 편지로 인하여 자신과 고린도교회와의 관계가 완전히 뒤틀릴지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보내 놓고 “괜히 보낸 것 같다.”라며, 근심 속에서 하루하루 살았던 것 같다. 지금처럼 수일 내에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으니, 바울은 그 편지 사건 때문에 얼마나 많은 날들을 마음 졸였을까. 생각만 해도 애처롭다. 바울은 당연히 고린도교회에 보내 편지를 놓아두고 하나님께 매일같이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11.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은 ‘디도(Titus)’였다. 디도는 바울의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전했고, 디도는 그 편지를 받아 든 고린도교회의 반응을 바울에게 전해주었다. 고린도후서는 마치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인 바울과 고린도교회 간에 알콩달콩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디도를 만나기 위해서 드로아의 사역을 포기하고 마케도냐로 건너가서 빌립보에 이르러 디도를 만나게 되는데, 디도가 가져온 소식은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12. 바울은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바울이 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들어보자.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바울은 말한다. 사역을 하면서 여러가지 어려운 일이 있어서 바깥으로는 사람들과 여러 다툼이 있었고, 심정적으로는 마음이 많이 두려웠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바울은 ‘낙심(downhearted)’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6절). 바울이 자신의 ‘낙심’을 표현하기 위해 쓴 헬라어는 ‘타페이노스’이다. 이는 낮은, 가난한, 겸손한’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사역하면서 어려움을 겪었고, 자신의 질병과 디도에 대한 염려, 그리고 고린도교회에 보내 놓은 편지에 대한 걱정 등으로 인하여 한없이 ‘낮은 자리’에 있었다. 바울은 그러한 상황을 ‘낙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13. 낮은 자리에 처한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위로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낮은 자리’에 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병에 걸렸을 때, 가족 중 누가 아플 때(특별히 자식이 아프면), 자식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가족의 불화를 경험할 때, 직장 문제, 인간 관계의 문제, 하고자 하는 일이 제대로 잘 안 될 때, 등등 우리는 살면서 수도 없이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된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낮은 자리’에 있었다고 고백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낙심(낮은 자리에 처하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을까. 정말 애처로운 모습이다.

 

14. 그런데, 본문에 흐르는 기류는 단순히 ‘낙심’이 아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낙심’이 아니라, 위로와 기쁨이다. 그러나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6-7절). ‘낮은 자리에 처해 있던’ 바울의 상황에 반전을 일으킨 사건은 ‘디도의 옴’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께서 ‘낮은 자리에 처해 있던’ 바울을 위로하셨는데, 그 방법은 ‘디오의 옴(by coming of Titus)였다. 바울에게 ‘디오의 옴’은 그냥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의 사건이었다는 뜻이다.

 

15. 디도는 참으로 기쁜 소식을 들고 왔다.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 놓고 노심초사하고 있던 바울에게 디도는 참으로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의 편지를 읽고서, (그 편지는 결코 friendly한 편지가 아니었다),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켰다는 소식이었다. 바울은 그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써서 보낸 편지를 받아들고 근심했을(마음 찔렸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칭찬하며 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10절).

 

15. 이것은 참으로 따스한 고백이다.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내 놓고,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하여 후회하면서 마음을 쓸어내리고 숱한 날을 가슴 조리며 기도했을 바울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지금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편지에 함께 하시고, 그 편지를 읽은 고린도교회 성들과도 함께 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다는 고백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한 근심이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한 근심은 세상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한, 하나님 안에서 한 근심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좋은 결과, 좋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고백인 것이다. (할렐루야!)

 

16. 지금, 우리를 낙심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지금 우리를 ‘낮은 자리에 처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 낮은 자리에 처하는 일은 참 어렵다.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내 자신이 한없이 무력해지고, 내 자신이 한없이 슬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눈물 흘리는 것 외에는 마땅히 할 게 없다. 그러한 감정을 감당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시니까, 조금 힘을 냈으면 좋겠다. 나를 한없이 ‘낮은 자리에 처하게 만드는 바로 그 일’을 주님께 내어드리면 좋겠다. 그러면, 낮은 자의 하나님, 스스로가 낮은 자리에 처하신(케노시스)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우리에게도 ‘디오의 옴’과 같은 위로와 기쁨을 안겨주실 것이라 믿는다.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한 그리스도인 (Weak Christians)  (0) 2021.10.04
신앙의 역설  (0) 2021.09.27
마음을 넓히라  (1) 2021.09.17
그리스도인의 갈망  (1) 2021.09.08
낙심하지 않으려면  (0) 2021.09.01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17. 11:46

마음을 넓히라

(고린도후서 6:1-13)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1. 어떤 물건을 매뉴얼 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 보니, 그 물건이 가진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거나, 사용하다 잘못해서 고장나게 하고, 또는 매뉴얼대로 사용하지 않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좋은 음식도 적당히 먹어야지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 원장님한테 배운 사실 한 가지가 있는데, 아이오다인(요오드)를 먹으면 갑상선 저하증을 치료할 수 있는데,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약을 먹을 때도 용량에 맞게, 의사의 지시를 따라서 먹는 게 중요하다. 안 그러면 병을 고치려다 더 큰 병에 걸리기 십상이다.

 

2. 디모데후서에서 가르쳐 주고 있듯이, 성경은 신앙의 매뉴얼이다. 신앙도 매뉴얼을 따라 하지 않으면 탈이 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물건의 매뉴얼을 대충 보거나 아예 보지 않고 물건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듯,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매뉴얼에는 별로 관심 없고 그냥 자신의 감정을 기준 삼아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신앙이 주는 유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이런 상황은 참 안타까운 것이다. 바울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1절).

 

3. 신앙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 자체를 가져다 준다. 이 진리를 모르는 것도 결국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매순간 ‘구원’을 원한다. ‘힘들다. 어렵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낙심된다. 고통스럽다.’ 등등, 우리는 부정적인 환경과 기운 속에서 살아내려고 애쓰고 또 애쓰며 산다. 우리의 삶은 온통 구원의 갈망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누가 나 좀 구원해 줬으면 좋겠다!”

 

4.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2절). 신앙은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구원을 지금 당장 경험하게 하는 은혜의 통로이다. 우리가 마음이 답답한 이유, 우리가 사는 게 힘든 이유, 우리가 마음이 강퍅해지는 이유, 우리가 마음을 나쁜 기운에 내어주는 이유는 지금 바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서 자꾸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물건만 잃어버리고, 정신만 깜빡깜빡 한 게 아니라, 신앙에도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5. 오늘 본문도 차근차근 읽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신앙의 매뉴얼에서 벗어나, 아주 한참 벗어나 변변치 못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거울로 보듯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고린도후서를 읽다 보면, 고린도교회와 사도 바울 일행 간의 감정선(tension)을 볼 수 있다. (바울 서신은 뭔가 일이 happen했고 그에 대하여 address 하는 내용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매우 엉뚱한 해석을 낳는다.) 그 둘 사이(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는 아주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다. 일단, 고린도교회가 바울과 그 일행을 보는 눈이 조금 삐딱하다. 다른 말로 해서, 고린도교회는 바울에게 마음을 열고 있지 못하다. 마음을 열고 있지 못하니까, 바울이 무슨 말을 해도 그의 말이 귀청만을 울릴 뿐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그러한 고린도교회의 강퍅한 마음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6.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대적하게 만드는 바울의 대적자들과는 달리 얼마나 복음을 위해서 수고했는지, 그들과는 달리 얼마나 순수하고 의로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자기 자랑(self-commendation/자기 자신을 뽐 내는 게 아니라, 수사법(레토릭)이다.)을 하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들로 추천하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많은 인내와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감옥에 갇히는 것과 난동과 수고와 자지 못함과 배고픔 가운데 하나님의 일꾼들로 지냅니다. 또한 우리는 순결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과 모욕, 비난과 칭찬을 동시에 겪으며 일합니다”(4-8절/우리말 성경).

 

7.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이 신앙생활의 매뉴얼이라면, 이 매뉴얼에 비친 우리의 신앙은 말도 못하게 부족하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은 굉장히 독특하고 특별하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기복’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매뉴얼을 잘 따라서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을 ‘기복’의 수준으로 하락시킬 수 있다. (기복: 복만 받기 원하고 십자가가 없는 신앙)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매뉴얼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 정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가 선물로 주시는 완전 다른 차원의 구원을 받는다.

 

8. 완전 다른 차원의 구원은 완전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하는데, 바울은 그 다른 차원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무명한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8-10절/우리말 성경).

 

9. 기독교 신앙, 그리스도인의 삶은 굉장히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절대자/신)으로부터 단순히 무엇인가를 제공받는 사람이 아니라(기복), 하나님과 모든 것을 나누기 때문이다(십자가).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신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친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친구란 그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삶과 다르다. 세상에서는 반대의 일이 발생한다. 진실한 것 같으나 알고 보면 속이는 사람이었고, 유명한 사람 같았는데 보면 별 존재 아니고,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사람이고, 기뻐하는 것 같으나 실은 근심이 가득한 사람이고, 부유한 사람 같았으나 알고 보니 속이 텅 빈 사람이었고,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으나 빈털터리인 사람.

 

10. 바울은 자신의 겉모습과 실제 모습이 어떻게 다른 지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부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많은 요즘 시대에 바울의 모습은 여러 모로 생각할 것이 많다. 특별히 진정한 부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에 의하면, 진정한 부자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정말 부자다. 그의 겉모습을 보면 매우 불쌍한 사람 같지만, 실제로 바울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재물을 축척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가긴 유.무형의 자산을 내어 놓은 삶 말이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다른 이를 부요케 하는 자가 진짜 부자라는 뜻이다.

 

11. 바울은 자신이 실제로 어떠한 사람인지를 밝히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고린도 사람들이여, 우리의 입이 여러분을 향해 열려 있으며 우리의 마음이 넓게 열려 있습니다”(11절/우리말 성경).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게 열렸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개 사랑하지 않으면 입을 닫는 법이다. 상대방하고 말을 섞기 싫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마음이 닫힌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 서로 사랑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아주 따끔한 말을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여러분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스스로 좁아진 것입니다.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이 말합니다. 여러분도 보답하는 양으로 마음을 넓히십시오”(12-13/우리말 성경).

 

12.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나를 비난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마음이 좁아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남 탓 하지 말고, 여러분의 마음을 돌아보고 그 마음을 넓게 가지십시오!”

여기서 ‘마음을 넓게 가지라’고 할 때, 마음은 영어로 ‘affections’라고 번역한다. 이건 굉장히 감정적인 용어이다. 우리가 대개 ‘애정, 속이 좁다 깊다’라는 표현을 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하는 말은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그 좁은 마음을, 그 좁은 이해력을 넓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13. 이런 속담이 있다. “집은 좁아도 같이 살 수 있지만, 사람 속이 좁으면 같이 못 산다.” 아무리 잘 생겼어도, 아무리 예뻐도, 아무리 몸/몸매가 좋아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마음 좁은 사람 하고는 못사는 법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말하면, 그냥 일반 심리학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복음은 심리학 이상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왜 그렇게 마음이 좁아졌을까? 바울은 5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무도 육체를 따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체를 따라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알지 않습니다”(고후 5:16/우리말 성경).

 

14.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마음이 좁아진 이유는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문제였다. 그들은 사람을 육체에 따라 판단했고, 그리스도도 육체에 따라 믿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판단할 때 아주 쉽게 육체에 따라, 겉모습에 따라, 세상적 기준에 따라 판단한다. 그러나 바울은 더 이상 그렇게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선포한다. 그는 사람을 판단할 때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게 아니라 복음을 따라 판단한다. 그의 판단 기준이 되는 복음이란 바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Christ has died for all)”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몇몇 사람들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판단할 때 그들의 외적인 모습(flesh)으로 판단하면 안 되고, 그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15. 우리가 이 복음을 잊어버리면, 우리도 얼마든지, 고린도교회 성도들처럼 마음이 좁아질 수 있다. 그리고 본인들의 마음이 스스로 그렇게 좁아진 것이면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 탓을 하기 쉬워진다. 그렇게 좁은 마음으로는, 자기 스스로의 삶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도 평화와 화해를 이루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하는 바울의 질책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16.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을 생각하지 않는 자는 좁은 마음으로 남을 쉽게 정죄하고, 남 탓 하기 십상이고, 상대방의 진실한 마음과 수고를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복음을 늘 마음에 품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넓은 마음’ 안에서 용납하고 용서하고 화합을 이루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도 부요케 하고, 무엇보다 주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교회 공동체를 굳건하게 세워 나갈 것이다. 모든 것은 복음과 그 복음을 붙드는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을 좁게 가지지 말고, 마음을 넓히라. 너무도 따스하고 멋진 메시지다. “복음으로 마음을 넓히라”, 이것이 복음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의 역설  (0) 2021.09.27
위로와 기쁨  (0) 2021.09.21
그리스도인의 갈망  (1) 2021.09.08
낙심하지 않으려면  (0) 2021.09.01
그리스도인, 성령의 사람  (2) 2021.08.23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8. 01:27

그리스도인의 갈망

(고린도후서 5:1-21)

 

시편 37편 4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참 따스한 말씀이다.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는 사람일수록 이 말씀이 마음에 깊이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산다. 마음의 소원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힘든 삶이지만, 우리가 그래도 이렇게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 그 소원이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대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가 마음의 소원을 성취하면 자신의 노력으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경쟁 또는 공정이라고 부른다. 우리 시대에 차별과 인간에 대한 무시(갑질)가 난무하는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성취된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반대로, 실의와 절망이 가득한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성취되지 못했을 때, 자신이 못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자책감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 통용되는 상식과 매우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당연히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할 것이나,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결정적 요인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기뻐하라!’ 이 명령문을 앞에 놓아두고 잠시 묵상해 본다.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을까?

 

어거스틴은 <고백록Confession>에서 이런 고백을 하면서 자신의 신앙 여정을 풀어간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의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편안하지 않습니다.”(고백록, 선한용 역, 45쪽) 시편 기자가 말하는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어거스틴이 말하는 “당신을 향하여”와 같은 말이다. 기뻐한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 대상을 향한 ‘방향성’과 ‘욕망’을 동시에 표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올바른 것을 욕망하고 있는가?”

 

바울은 2절에서 이런 말을 한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간절히 사모하다’를 두 자로 줄이면 ‘갈망’이다. 바울의 갈망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 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안겨준다. 바울이 아주 멋진 말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가 그토록 갈망하는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란 ‘부활’을 말한다. 사실 우리는 ‘부활’이라는 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가진 의미는 잘 알지 못한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즉 ‘부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은 종말의 때이다. 기독교인의 믿음과 소망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온전히 드러나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에게 종말은 파국이 아니라 안식이다.

 

바울은 육신의 생명을 벗어버리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8절). 이것을 ‘죽고 싶다’라는 말로 잘못 오해하면 안 된다. 육신 안에 있는 인간 생명은 ‘탄식(신음하고 애통하는 것) 뿐이다. 그러한 탄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식’에 이르는 길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 즉,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이다. 죽음 같은 일이 주변에 널려 있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그 죽음을 삼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순례자(길 떠나는 사람)’이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가 그 갈망을 잃지 않도록 보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보증이다. 성령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 무엇인지 보다 명확히 하고,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가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순례의 길을 걸으며 고난과 고통에 노출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능히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도다.” 여기서 ‘강권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쉬네코’인데, 이는 ‘통제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쉬네코’를 ‘control’로 번역한다.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가?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대개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돈’이나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더 이상 돈이나 두려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의 삶을 내어드린다.

 

우리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와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구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의 의지와 상반되는 일을 강요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자유로 무슨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귀찮아도, 하고싶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헌신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기 때문에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니스트리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윤이 목적이 아니라 구원이 목적이다. 하나님의 생명(사랑)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고린도후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17절에 나온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새로운 삶의 체계를 따라 산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 새로운 피조물은 사람을 죽이는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성령으로 산다.

 

물을 길어 나르는 항아리가 있었다. 주인은 언제나 두 개의 물항아리를 물지게 양쪽에 걸어 먼 길을 오갔다. 그런데 어느 날 항아리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허리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더니 왼쪽에 금이 가고 말았다. 주인이 열심히 물을 길어 항아리에 넘치게 담아도 집에 돌아와 보면 절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항아리를 계속 사용했다. 어느 늦은 봄 주인과 함께 물을 길으려고 가는 길에 그 깨진 항아리가 주인에게 부탁했다.

“주인님, 이제 저를 버리세요. 전 깨진 항아리라서 물이 다 새어 나가 버리니, 아무 쓸모가 없잖아요.” 그때 주인은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을 가리켰다.

“이 꽃들이 보이니? 이 꽃길이 너의 작품이란다.”

“저의 작품이라뇨? 무슨 뜻인가요?”
“너의 깨진 허리춤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새어 나간 것이 아니라, 꽃길에 물을 준 거란다. 너의 몸에 상처가 나던 그날 내가 길에 꽃씨를 심어 두었단다. 돌아오는 길에 네가 날마다 물을 주지 않았다면,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꽃길을 걷지 못했을 거야.”

(최병락, <부족함>에서)

 

부족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어떠한 일을 행하실지 아무도 모른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사람’을 통해서 어떠한 일을 행하실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거나, 함부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헛된 것에 욕망을 두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시도록 내어드리지 못하면, 우리는 쉽게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향한 평안을 잃어버린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얼마나 괴로운가. 나와 ‘저사람’에게서 부족함을 느끼거든, 기도하라.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인생은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다른 이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안에서 ‘꽃길’을 만든다.

 

그리스도인의 갈망.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중세의 아가씨는 ‘면벌부’를 욕망했고, 현대의 아가씨는 ‘명품백’을 욕망한다. 하나는 과도한 종교적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과도한 세속적 욕망이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갈망해야 하는지 배운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부활,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한다. 아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갈망이 바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한 주님의 약속을 마음에 깊이 간직해 두기 바란다. 여러분의 마음의 소원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아름답게 이루어질 기도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로와 기쁨  (0) 2021.09.21
마음을 넓히라  (1) 2021.09.17
낙심하지 않으려면  (0) 2021.09.01
그리스도인, 성령의 사람  (2) 2021.08.23
눈물로 쓴 편지  (0) 2021.08.21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1. 04:10

낙심하지 않으려면

(고린도후서 4:1-18)

 

1. 요즘엔 개인주의적 문화가 하도 강해서, ‘보냄을 받았다’라든지,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말이 굉장히 구시대적인 말로 들린다.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주체적으로 결정해서 사는 것이지, 누군가에게 보냄을 받거나, 부름을 받는 것에 대해서 요즘 사람들은 굉장한 거부감을 가진다. 그렇다 보니, 현대인들은 ‘낙심’하는 일도 많다. 본인이 생각했던 대로 일이 잘 안 풀리면, 이내 풀이 죽고 낙심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못난 존재라는 자책감에 빠져 우울해 한다.

 

2. 요즘 한국 군대 문화를 보면 비인간적이었던 문화가 많이 바뀌고 군인들의 인권이 매우 존중 받는 군대문화가 정착되어 가는 것 같다. 참 좋은 일이다. 요즘 군인들에게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입대 했다’는 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 같다. 그래서 한국도 미국처럼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모든 것이 개인의 자유, 개인중심적으로 돌아가는 사회가 심화되다 보니, 이제 한국도 전통적인 공동체성을 찾아보기 힘든 사회가 되었다.

 

3. “우리 시대의 소명은 자유주의를 증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에 주어진 사명입니다. 우리가 중요시하는 자유는 모든 인류에게 권리와 능력이 되는 것임을 믿습니다.” 이것은 2003년 9월 6일,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의 연설이다. 미국의 정치이념은 이른바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의 추구다. 이는 “미국의 자유주의가 표적으로 삼은 나라들의 민족주의, 종교를 이길 수 있다”는 이상에 근거한다. 자유주의는 민족주의나 종교를 넘어서 그러한 것들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4. 우리가 사는 시대는 두 개의 ‘주의/ism’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자유주의(liberalism)와 자본주의(capitalism). 삶의 선택(조건)이 모두 자유와 자본을 바탕으로 돌아간다. 자기가 선택하되, 자본이 선택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미국은 군대를 가는 것도 모병제로서 자기가 선택해서 가는 것이고, 군대를 가면 물질적 보상이 크기 때문에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된다. 한국도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현재 한국은 징병제이지만, 그래서 자신이 선택해서 군대를 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 보니, 군인들의 정신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기의 선택이 아닌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서 군인이 된 것이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군대를 강제로 간다는 것은 굉장히 모순된 삶의 모습인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결혼하고 싶지 않은 배우자와 강제 결혼해서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5.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모든 삶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보냄을 받은 삶’, ‘부르심을 받은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이는 기독교가 점점 우리 사회에서 매력을 잃어가는 이유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자유주의나 자본주의와 별로 썩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기독교는 개인의 선택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가, 자본(돈)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자유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쉽지 않다. 부대낌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살아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6.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내가 선택해서, 내 마음대로,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나오기 싫으면 안 나오는, 그런 모임이 아니다. 교회를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자유주의적인 생각인 것이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교회(에클레시아)는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교회는 기본적으로 관계적이다. 부르신 이가 있고, 부름에 응답한 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름을 받은 이들 간의 교제(fellowship)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은 서로를 보면서 이렇게 인사해야 한다. “당신도 부름을 받았습니까? 저도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우리 부름을 받고 여기에 왔으니,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끼리 잘 해봅시다!”

 

7. 교회는 기본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면서 동시에 보냄을 받은 이들의 모임이다. 부르신 이께서는 동시에 우리를 보내신다. 부르심은 소명(calling)이라고 하고, 보내심은 사명(sending out/mission)이라고 한다. 우리는 소명과 사명의 사람들이다. 교회의 역동성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교회에 모인 이들이 소명 받은 이들과 사명 받은 이들로 가득 찬다면 교회의 역동성은 아무도 못 말린다. 마치, 나라의 부름을 받고 왔다고 굳게 믿는 군인들이 가득한 군대와 마지 못해 군대에 끌려온 군인들이 가득한 군대의 사기가 다른 것과 같다.

 

8.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중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세속적인 ‘자유주의’ 이념과 다르다. 자유주의 이념을 따라사는 요즘 사람들을 보면, 마치 ‘자유’에 예속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목격하고,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경험한다. 그 누구도 ‘나’를 건들 수 없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이 최고의 이념이고, 이것을 벗어나면 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요즘 시대의 자유는 자신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만 천명할 뿐이지,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공동체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9. 우리가 사는 시대에 사람들은 아주 쉽게 ‘낙심’할 수밖에 없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낙심한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으로 짊어지게 되는 것은 ‘낙심’ 뿐이다. 또한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사나워진다. ‘자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남을 짓밟고 죽이는 일은 너무 쉽게 발생한다. 삶이 전쟁터 그 자체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보고 싶은 ‘섬’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경쟁’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요즘 사회는 우울한 사회다.

 

10. 고린도후서 4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구는 “낙심하지 아니하고”이다. 우리는 수도 없이 낙심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데, 바울은 어떻게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가? 사실 바울은 낙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고린도교회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그를 낙심시키기에 충분했다. 죽을 고생을 해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는데,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고린도교회는 복음을 위한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았다. 얼마나 낙심되었겠나.

 

11.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선포한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낙심’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엥카케오’라고 하고, 영어로는 ‘lose heart’라고 한다. ‘엥카케오’는 ‘엔(~안에)’이라는 전치사와 ‘카코스(나쁜)’라는 낱말이 합해진 말인데, 이는, 마음이 나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만큼 살면서 두렵고 힘든 것도 없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마음만 늘 좋은 상태를 유지해도 어떠한 상황이 오든지 모든 것을 잘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잠언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그런데, 마음이 나쁜 상태로 들어가면,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우리의 인생은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12. AP News의 보도에 의하면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이들이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런 기사였다.

 

UNICEF says aid concerns are growing in Afghanistan.

UN agency for children expects the humanitarian situation in the country to worsen due to a severe drought, the onset of winter, and the Coronavirus pandemic.

The agency says 10 million children in Afghanistan already survive off humanitarian assistance and around a million are expected to suffer from life-threatening malnutrition this year.

It says some 4.2 million children, including 2.2 million girls, are out of school.

 

정치적 소용돌이 외에, 극심한 가뭄과 겨울철 진입,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등의 삼중고로 인하여 1000만명의 아이들이 인도주의적 지원에 의해 연명하고 있고, 약 100만명의 아이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영양실조로 고통받을 것이고, 약 440만 명의 아이들이 학교를 떠났다고 한다.

 

13. 풍요로운 미국의 주민들과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주민들 중 누가 더 낙심할까? 우리도 낙심하고 그들도 낙심하겠지만, 낙심의 이유가 정말 다를 것이다. 우리는 마음대로 하고 살다가(자유주의) 삶에 제약이 오니 그렇지 못하는 것 때문에 낙심하고, 그들은 생명 자체가 너무 위협을 받아서 낙심할 것이다. 낙심의 차원이 좀 다르다. 아마도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우리들이 낙심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들으면 기가 막힐지 모르겠다. 낙심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미국에서는 약물(drug) 소비만 늘어가고,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은 그러한 것조차 없어 그냥 굳건하게 맨정신으로 참고 있을 것이다.

 

14. 우리가 복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낙심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를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선포는 단순히 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라고 선포할 수 있는 이유는 말 그대로 ‘복음’ 때문이다. 우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절).

 

15. 문맥에 따르면,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다. 바울은 그 보배가 질그릇 같은 자신들의 마음에 있다고 고백한다. 사실 여기에는 우리 시대가 최고의 가치로 삶고 있는 ‘개인(자유)’과 ‘자본’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우리 마음에 ‘나’나 ‘자본’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빛’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빛을 품고 있는 자들이 행하게 되는 것은 다음처럼 바울이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11절).

 

16. 바울은 자신이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용된 ‘죽음’이라는 헬라어는 완전히 죽은 상태인 ‘싸나토스’가 아니라 ‘죽어 가는 상태’를 나타내는 ‘네크로시스’이다. 이 표현은 굉장히 중요한 표현인데, 이 표현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유대 당국에게 ‘넘겨주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에 넘겨졌다. 예수님의 죽음으로의 넘겨짐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구원 사건이 되었다.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이 죽음에 넘겨져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처럼, 자신들도 죽음에 넘겨져 생명을 주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7. 이것은 ‘자기(개인/자유)’와 ‘자본’으로 꽉 차 있는 요즘 우리들의 삶과 너무도 다른 삶이다. 자기 뜻대로 안 되고, 돈을 벌지 못하면 쉽게 낙심하게 되는 요즘 사람들의 삶과는 달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는 삶을 살기에, 사실 낙심할 겨를이 없다. 우리가 낙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삶’, 즉 복음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18. 여기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16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겉사람’과 ‘속사람’에 대한 이분법은 플라톤을 중심으로 한 헬라 철학/신앙이 말하고 있는 ‘영육 이원론’과는 다르다. 영육 이원론은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기 때문에 악한 육체를 벗어나 영의 세계로 가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겉사람’과 ‘속사람’의 구분은 시간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는냐의 문제이다.

 

19. 겉사람의 관점은 현세적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한다. 현세적 차원에서 보면 우리의 겉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게 끝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현세적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차원에서 바라볼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종말론적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종말’은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을 이루는 시간이다. 그때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모든 것이 아름다움의 끝에 도달한다. 겉으로 보면(보이는 것에 의하면) 우리가 늙어가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 같지만, 속으로 보면(보이지 않는 것에 의하면) 우리는 그와 반대로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20. 우리는 왜 낙심하는가? 우리는 왜 마음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가? 개인과자본에 집중하게 만드는 체제는 끊임없이 낙심을 만들어 내고, 끊임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래야 그러한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이용하여 이익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낙심하고 있으니, 마음이 나쁜 상태로 들어가고 있으니, 요즘 사람들의 삶이 기쁠 리 없다. 현대인들은 자기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을 때 기쁨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한동안 마음대로 소비를 못하다가 마음대로 소비하게 되는 현상을 ‘보복소비(revenge consumption)’라고 한다. 별말이 다 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용어이다.

21. 낙심하기 쉽고, 마음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기 쉬운 이 시대에 낙심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더 복음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의식과 주님께 보냄을 받았다는 사명의식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부르신 이와 보내신 이가 있기 때문에 일이 좀 우리의 마음처럼 잘 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낙심할 필요가 없다. 일이 잘 안 되면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신 이께서 속상해 하실 일이지, 우리가 속상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부르시고 보내신 이의 뜻대로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죽음에 넘겨주는 삶을 성실하게 살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을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신 이께서 돌봐주실 것이다. 이 얼마나 진정으로 자유한 삶인가.

 

22. 또한 답답한 현실만 바라보게 하는 이 땅의 시간에서 벗어나,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 즉 종말론적 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중이 아니라 더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생각하며 낙심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살아갈 것이다. 한 마디로, 낙심하지 않으려면, 부르심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 답게, 복음에 붙들려 살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낙심’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다시 복음을 믿음으로 굳게 붙들고, 나쁜 상태에 빠져 있는 마음을 좋은 상태로 구원하자.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을 넓히라  (1) 2021.09.17
그리스도인의 갈망  (1) 2021.09.08
그리스도인, 성령의 사람  (2) 2021.08.23
눈물로 쓴 편지  (0) 2021.08.21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  (0) 2021.08.09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23. 12:55

그리스도인, 성령의 사람

(고린도후서 3:1-18)

 

1. 나이가 들면 생기는 현상 중 하나는 ‘자신감을 잃어가는 것’이다. 건강도 예전만 못하고, 힘도 떨어져 가고, 살결도 탄력을 잃어가고, 외모도 매력을 잃어가니, 가만히 앉아서 나 자신을 생각하거나, 또는 거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자신감을 잃어간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읽다 보면, 통상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것, 즉 나이가 먹어가면서 자신감을 잃어가는 현상과는 아주 대조되는 이야기를 한다. 바울은 대표적으로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이런 말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공동번역성서).”

 

2. 이뿐만 아니다. 본문의 마지막절도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공동번역성서). 바울에 의하면, 우리가 통념적으로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즉 나이를 먹어가면 자신감을 잃어가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날로 새로워지고,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3. 바울이 본문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레토릭(수사법/화법) 지식과 두 가지의 구약 지식이 필요하다. 두 가지의 레토릭 지식 중 하나는 이미 지난 시간에 배웠다. Self-commendation 레토릭(자기칭찬/자화자찬 화법). 2장 12절에서 17절 사이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문구는 전형적인 ‘self-commendation’ 수사법(화법)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를 품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이러한 진술을 할 때 사용되는 구절이 바로 고린도전서 2장 15절의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4. 맞는 말이긴 하나, 이것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맥락에서 조금 떨어진 이야기다. 고린도후서 2장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과 일행)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자화자찬’ 수사법이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화자찬 수사법’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주장하는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다짜고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나, 바울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전혀 경청하지 않는 태도이다.

 

5. 지금은 ‘바울(Paul)’하면, 누구나 인정하는 사도 중의 사도이지만, 그 당시 바울의 사역(ministry)은 많은 이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특별히 유대인들(또는 그리스도 사건을 유대인의 종교 안에서만 해석하려는 사람들)에게 공격을 많이 받았는데, 고린도교회에도 여느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대적자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바울서신에서는 대개 그러한 사람들을 ‘거짓 교사’라고 부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잘못 해석하거나,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왜곡해서 가르치고, 신앙생활의 실천을 율법적으로 전락시키는 일들을 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파는 잡상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파견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6.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낭만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니, 향기 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바울은 대적자들과 맞서고 있는 중이다. 어떤 거짓 가르침, 아주 교묘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뒤틀어서 그것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장사치 같은 이들에 맞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온전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을 낭만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의 향기’는 로마의 군사문화의 배경을 가진 용어이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은 정복 전쟁에서 이기고 다시 부대복귀 할 때, 개선문을 통과하면서 정복한 나라의 향품을 피우면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결기가 묻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것이다.

 

7.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알아야 할 두 번째 레토릭은 ‘칼 와호메르’라고 불리는 수사법이다. 영어로는 ‘from the lesser to the greater’ 용법으로 불리고, 한국어로는 ‘하물며 논리’라고 한다. 이것은 가벼운 차원의 진리(the lesser)를 무거운 차원(the greater)의 진리와 대비시키는 화법인데, 이런 것이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하물며) 주 얼굴 뵈올 때에에야 얼마나 좋을까.” (생각-좋음 -à 대면-더좋음) 이러한 레토릭은 성경 곳곳에 쓰이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8)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서 4:10-11)

 

8. 바울은 3장에서 전형적인 ‘하물며 논리’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있다.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하여 바울은 구약의 두 이야기를 가져오는데, 그 두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바울의 주장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두 가지 이야기이다. 하나는 예레미야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모세의 이야기이다.

 

9. 바울은 자신의 적대자들이 바울의 사역의 신빙성(Authenticity)을 공격하며 그에게 자격을 물어왔을 때, 자신은 다른 누군가에게 소개장(recommendation)을 받을 필요없이, 고린도교회 교우들 자체가 소개장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예레미야 31장의 말씀을 근거 삼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시켜 보내신 소개장입니다. 이 소개장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쓴 것이며 석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진 것입니다.”(3절) 바울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가져다 쓴 예레미야의 본문은 이렇다.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둔다…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1, 33).

 

10.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변호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바로 예레미야의 예언과 연결 짓는데,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일컬어 ‘새 언약의 사역’이라고 하고,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 칭한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모세의 사역과 대비하면서 자신의 사역의 성격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바로 이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11.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모세의 사역과 대비시키는 이유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아직까지도 모세의 사역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8절에서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즉, 모세의 사역은 영광스러운 사역이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모세의 영광스러운 사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다. 즉, 모세의 사역은 옛 언약의 사역이고, 바울 자신의 사역은 ‘새 언약의 사역’이라는 주장이다. 바울은 왜 이렇게 주장하는가?

 

12. 바울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이 언약(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6절). 옛 언약은 율법이다. 그것은 문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돌판에 새겨진 것이다. 그러나 새 언약은 성령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문자와 성령의 결정적인 차이는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문자(율법)과 성령’의 차이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보통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라고 알려진 <예수를 시험하는 유대인들> 이야기를 볼 것이다.

 

13. 예수와의 극한 대립 가운데 있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려온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조항을 들이대며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처리를 말한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요 8:4-5). 바로 이 구절에 대한 바울의 코멘트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율법은 석판에 새겨진 문자로서 결국 죽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7절).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모세의 율법대로 처리하면, 그 여인에게는 오직 죽음 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결국 죽음을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14. 율법의 기능은 매우 분명하다. 사람들을 모두 정죄하는 것이다. 율법을 들이 댔을 때, 죄인이 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울이 말하기를, 모세는 바로 이러한 일의 심부름 꾼이었다. 그러나,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대하는 방식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들이댄 유대인들과 다른 모습을 취하신다.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에 있으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으냐?”고 물으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하고 말씀하셨다. (요 3:10-11).

 

15. 이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율법(문자)은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왜 ‘새 언약의 사역’인지, 그리고 자신이 왜 ‘새 언약의 일꾼’인지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대적자들의 사역은 ‘새 언약의 사역’이 아니라 ‘옛 언약의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옛 언약의 사역을 따르지 말고, 새 언약의 사역을 따르라고! 옛 언약의 일꾼이 되지 말고, 새 언약의 일꾼이 되라고!

 

16. 물론, 바울은 모세가 율법을 통해서 했던 ‘옛 언약의 사역’을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터라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고 수건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자신의 얼굴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 그런데 바울은 그 사건을 두고,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이유는 그 영광이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문자로 된 율법을 통한 ‘옛 언약의 사역’이 가진 한계였다.

 

17. 바울은 문자로 된 율법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율법, 돌에 새겨진 법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법이 더 영광스러운 사역이라는 것을 위에서 말한 ‘칼 와호메르 수사법 / 하물려 논리’를 사용하여 주장한다. “이 문자의 심부름꾼(모세)도 그렇게 영광스러웠다면, 하물며, 성령의 심부름꾼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사람을 단죄하는 일(문자로 된 율법의 기능/사역)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하물며, 사람을 무죄 석방하는 일(성령의 기능/사역/예수님께서 하신 일)에는 얼마나 더 큰 영광이 있겠습니까?”

 

18. 바울은 자신이 ‘새 언약의 사역’을 하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모세보다 더 영광스러운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직도 모세의 사역을 강요하여 사람들을 ‘죽음과 정죄’ 아래에 가두어 꼼짝 달싹 못하게 하려는 바울의 대적자들, 거짓 교사들에 대한 적나라한 폭로이자 일침이다. 그렇게 문자로 된 율법에 갇혀 ‘죽음과 정죄’ 안에 가두는 행위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가증스러운 일인 것이다.

 

19. 바울은 1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문자(율법)는 사람을 죽이지만,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였다. 그런데, ‘옛 언약’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바울의 대적자들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복음’을 통해서 선물로 받은 ‘자유와 생명’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사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 주님께 선물로 받은 자유와 생명을 잘 지켜야 한다.

 

20. 바울의 편지가 기독교의 성경(경전/canon)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바울이 주장하고 있듯이 더 이상 사람을 죽이는 문자의 법(율법) 아래 묶여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확증이다. 또한 사람들을 죽음과 정죄(죄책감) 아래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사람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성령의 법을 통하여 사람을 살리고, 누군가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확증이다. 18절에서 바울이 주장하고 있듯이,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라는 것은 죽음의 일, 정죄의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일, 자유케 하는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몸 바쳤듯이, 우리도 헌신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울의 대적자들의 가르침이 성경이 되었을 것)

 

21. 이 복음이 전해진지도 벌써 2천년이 되었는데, 우리는 성령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여전히 문자로 된 율법 아래 있는 것을 본다. 교회의 이름으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를 차별하고, 누군가를 억압하며 산다. 또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생명력 있는 삶, 자유를 만끽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성령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마음에 두고 그것으로 인하여 짓눌리면서 산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나이 먹어가면서 건강도 예전만 못하고, 힘도 떨어져 가고, 살결도 탄력을 잃어가고, 외모도 매력을 잃어가니, 가만히 앉아서 나 자신을 생각하거나, 또는 거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서, 자신감을 잃어갈 뿐이다.

 

22. 그런 모습들은 바울이 그토록 경계하던 ‘옛 언약’에 붙들려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옮아가지 못한 어린 아이의 믿음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죽이는 문자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성령을 마음에 품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마음에 새긴, 성령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마음에 품고 생명력 넘치게 삶을 살고 하나님 아닌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며 살 뿐만 아니라(내 마음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고, 나는 지금 무엇에 매어 힘들어하는가 가만히 살펴보자), 사람을 살려내고 자유케 하는 일(지금 내가 하는 일은 사람을 살려내고 자유케 하는 일인가? 아니면 그저 나 먹고 살려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인가?(이익을 취하려는 장사치))을 하면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겨가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과 구원의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인의 갈망  (1) 2021.09.08
낙심하지 않으려면  (0) 2021.09.01
눈물로 쓴 편지  (0) 2021.08.21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  (0) 2021.08.09
선물이며 과제인  (0) 2021.08.02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21. 08:46

눈물로 쓴 편지

(고린도후서 2:1-11)

 

고린도후서를 읽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어떤 사람에게 큰 봉변을 당했던 것 같다. 편지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봉변을 당했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냈던 편지였기 때문에, 그 사람이 누군지, 어떤 일인지 자세히 서술하지 않아도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모두 그 사람에 대하여,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방문 때 당했던 봉변으로 인하여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다. 그 사건은 다른 사건을 불러오는데, 바울이 원래 고린도교회를 또다시 방문하려고 했던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려고 했던 약속을 어긴 바울의 행동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바울의 적대자들에게 비난 거리를 제공한다. 바울이 방문하기로 했던 약속을 어기자 고린도교회에 있던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을 ‘말 바꾸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바울을 비난한다. 이 소식도 바울의 귀에 들어갔고, 바울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고린도교회에 항변하지 않을 수 없어, 편지를 쓴다. 그게 바로 우리가 다루고 있는 고린도후서이다.

 

고운정도 있지만 미운정이라는 것도 있다. 고운정보다 미운정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다. (지도 참조) 바울은 소아시아(Asia minor)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아가야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들이 생겨났다. 소아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는 에베소교회이고, 마케도니아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는 빌립보교회이고, 아가야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는 고린도교회이다. 바울에게는 모두 깨물면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바울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교회는 고린도교회였다. 그만큼 고린도교회와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고린도교회는 고운정, 미운정 모두 깊이깊이 든 교회였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착과 사랑은 1장 14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전 1:14). 이것을 직역하면 이런 뜻이다. 너희가 우리의 자랑인 것처럼 우리가 너희의 자랑일 것이다.” 고린도교회가 바울과 그 일행(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에게 자랑인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 신실하게 전했는데, 그 복음을 통해 고린도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즉, 고린도교회는 순전한 복음에 의해서 탄생한 교회였다. 금으로 따지자면, 순도 99.99%의 순도를 자랑하는 금인 것이다. 그러니 자랑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교회를 방문했다가 그 교회의 어느 한 교우로 인해서 큰 상처를 받은 바울은 상심이 컸다. 그 일로 인하여 사도 바울만 상심이 컸던 게 아니라 고린도교회 전체가 술렁였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방문하겠노라’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또 문제를 불러 일으키게 될지 바울은 몰랐다. 바울의 사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평탄하거나 형통치 못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목회’가 바울에게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적대자들 때문에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의 아킬레스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울의 사도성에 대하여 늘 시비를 걸었다.

 

바울 서신의 특징 중 하나는 그가 ‘self-commendation(자기칭찬/자화자찬)’ 레토릭(수사법)을 자주 구사한다는 것이다. 대적자들에 맞서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을 자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에서도 그러한 정황이 반영되고 있는데, 고린도교회 방문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대적자들을 향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바울은 ‘self-commendation(자기칭찬)’ 화법을 사용하여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육체의 지혜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고 강변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전 1:12절).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했다”라고 자기칭찬(self-commendation)을 하고 있다. 거룩함과 진실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하플로스테’와 ‘에일리크리네이아’를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뜻이다. 하플로스테(거룩함)’은 ‘생각이나 마음을 두 번 접어 다르게 표현하지 않고 한 겹으로 진솔하고 솔직하게 드러냄’을 뜻한다. 에일리크리네이아(진실함)’은 ‘태양 빛으로 비추어 보아도 가려지거나 숨겨진 부분이 없을 정도로 명백하고 진실함’을 뜻한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이렇다고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자기칭찬’이다.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하여 이것을 적용하면, 바울은 지금 자신이 ‘방문하겠다고 했다가 방문하지 않은 것’은 변덕쟁이처럼 말을 바꾼 것이 아니라(그의 언어로 표현하면, 한 입으로 Yes와 No를 내뱉는 것이 아니라), 즉, 인간의 지혜로 그런 것이 아니라(그곳에 가면 또다른 봉변을 당할지도 몰라, 하는 염려 같은 것),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바울의 믿음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중요한 삶의 자세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가 대척점에 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wisdom)도 소중하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지혜가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인간의 지혜는 참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하지 않고 그저 인간의 지혜를 먼저 내세운다면, 거기에서는 선한 열매가 맺어지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일의 출발점이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기 위하여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아브라함/이삭/야곱)의 이야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행동이 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제단을 쌓았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새롭게 무엇인가 시작되는 그 시점에서 언제나 하나님께 제단을 먼저 쌓고 시작했다. 이것은 그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삶의 여정을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신앙 행위였다.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게 될 시간과 공간은 나에게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그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다. 지금 맞닥뜨리게 될 시간과 공간 앞에서 제단을 쌓는다는 것, 즉 예배 드린다는 것은 이제 내가 경험하게 될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게 될 거룩한 시간, 공간으로 내어드린다는 뜻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일들을 하고, 수많은 일을 겪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일들 가운데서 어떠한 열매(결과)가 맺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주님께 맡기면서 무엇이든지 시작한다면, 우리의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 거룩한 시간과 공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은 주말(한 주간의 끝)이 아니라 한 주간의 시작이다.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반복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기억한다. 우리가 일주일 단위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행위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바로 이렇게, 무엇을 시작하기 전, 구체적으로는 일주일의 삶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에 주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그 행위 자체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이다.

 

주일에 예배 드리는 것 외에,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당황하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주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삶을 보듬어 주기 위해서이다. 어려운 일, 답답한 일을 만나거든 혼자서 괴로워하지 말고 교회의 지체들과 그 문제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라.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으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으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3-16).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교회의 지체들을 청하여 함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죄를 서로 고백하라는 것’은 나쁜 일 한 것을 이실직고 고하라는 뜻이 아니라(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연약하다. 즉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의도하지 않고 뜻하지 않았던,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다. 그게 인생이다. 어려운 일을 만나지 않는 것이 신앙인이 아니라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함께 기도할 줄 아는 신앙이 우리가 인간의 지혜로 모든 일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바울이 방문계획을 취소한 이유는 1절에 진술되어 있다. 이제 나는 또다시 근심 가운데 여러분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우리말성경). 대신 바울은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4절).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만약 본인이 약속한 대로 방문했더라면 근심과 아픔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아픔은 바울의 아픔이요, 그들의 기쁨은 곧 바울의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만큼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영적으로 긴밀히 묶여 있다는 뜻이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이다. 그만큼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사랑했다는 뜻이다. 고운정, 미운정이 듬뿍 들어 깊이 사랑했던 고린도교회를 생각하며, 바울은 눈물로 편지를 썼다. 가만히 감정 이입을 해보자. 우리는 지금 눈물로 쓴 편지를 받아서 읽고 있는 중이다. 바울의 그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가. 아마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했던 문제가 우리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직접 경험했던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를 두 손에 받아들고 읽어내려가면서 울었을 것이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긴밀히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과 고린도교회 교우들은 문제의 발단이 된 ‘어떤 사람’을 치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문제를 다룬다. 그들은 사랑과 온유로, 즉 눈물로 이 문제를 다룬다. 바울과 고린도교회에 아픔을 가져온 사람에 대한 치리를 언급하는 6절에서 8절을 개역개정으로 읽어보자.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6-8절).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바르게 번역하지 못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좀더 잘 번역한 우리말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렇다. 뜻이 더 명확해질 것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여러분은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가 더 큰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 오히려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기를 권면합니다.”

 

바울과 고린도교회를 마음 아프게 ‘그 사람’은 이미 충분한 벌을 받은 것 같다. 그 벌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형벌 같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교회 공동체로부터 특별한 제재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그가 받은 벌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용서와 위로의 단계로 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과 온유로 내리는 벌은 그 사람을 온전케 하는 데 목적이 있지 그 사람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를 용서하는 이유,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그를 이제 용서하고 받아들이라고 권면하는 이유, 모두가 다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 고린도후서를 읽다보면 그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던 것처럼,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처럼 사랑했다. 바울은 성령 안에서 교회와 영적으로 긴밀히 엮여 있었다. 그래서 교회의 아픔은 자신의 아픔이었고, 교회의 기쁨은 자신의 기쁨이었다.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는 교회에서 발생한 마음 아픈 일도 모두 사랑과 온유로 치리하려고 했다.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를 받아 들고 읽는 우리도 바울처럼 교회를 사랑하면 좋겠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사랑했던 이유는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신앙고백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우리가 교회를 단순히 ‘다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과 사도신경에 나타나는 신앙고백에 의하면, 교회는 ‘다니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물론 사도신경에서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회를 구분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할 때는 ‘in’의 전치사를 쓰고(credo in Spiritum Sanctrum), 교회에 대한 믿음을 말할 때는 ‘in’이라는 전치사를 쓰지 않는다(credo ecclesiam).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185쪽). 교회 자체가 곧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한다.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눈물로 쓴 편지를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그리고 교회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신앙의 충분한 표준이 되는 가르침들을 만나게 된다. ‘이래서 고린도후서가 성경이 될 수밖에 없었구나!’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본문을 통해서 특별히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우게 된다. 첫째, 우리는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시작하고 있는가. 둘째, 우리는 교회를 ‘믿는다’라고 고백할 만큼 사랑하고 있는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하는 우리들, 주일예배는 일주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리고 어려운 일을 만나거든 혼자서 힘들어하지 말고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기도하자. 우리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니 우리 서로 더 사랑하자.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9. 13:55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

(고린도후서 1:1-11)

 

신약성경에는 ‘바울’의 이름이 등장하는 서신(letters)가 13개 있다. 보통 그들은 ‘바울 서신’이라 불린다.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중에서 일곱 서신만 실제 바울이 쓴 편지들이고, 나머지는 바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바울의 이름을 빌어 다른 누군가가 쓴 편지들이다. 바울이 직접 쓰지 않았다고 성경으로서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디모데후서가 말하고 있듯이 모든 성경은 교회 공동체가 정경(canon)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직접 쓴 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울은 매우 독특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서신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 “디아 쎌리마토스 쎄우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디아’는 ‘~에 의해, ~를 통하여’라는 뜻의 전치사이고, ‘쎄우’는 ‘하나님’의 속격’이고 ‘셀리마토스’는 ‘뜻(will)’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자신의 사도직은 자신의 선택이나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지로 인하여 된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게 은혜스러운 표현이긴 하지만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감흥이 없는 표현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무슨 일이든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하며 그렇게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좋은 것, 선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실천하기 때문이다. 요즘엔 ‘하나님의 뜻’ 운운하면 ‘꼰대’소리 듣는다. 꼰대 중에서도 상꼰대 소리를 듣는다. 요즘 가장 인기 없는 찬송이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 옵소서!(549장)”이다.

 

발명은 과학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에서도 발생한다. ‘사적인 영역(privacy)’라는 말은 근대에 발명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사적 재산(property)의 개념도 동시에 불러왔는데, 사적 재산은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라는 뜻이다. 근대에 발명된 ‘사적(privacy)’ 개념에는 다른 사람 뿐 아니라 신적 존재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사적(privacy)’라는 말은 ‘나만의 고유 영역’이라는 뜻으로,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영역은 다른 사람도, 국가도, 하나님도 끼어들지 못한다.

 

이것은 지금도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기능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현대인들은 그것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사적 영역’을 건들면 그 존재가 누구든, 그게 가족이든, 친척이든, 친구든, 국가든, 하나님이든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에서 보수정치란 바로 이 사적인 영역을 지켜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정치를 말한다. 그 누구도 나의 ‘사적인 영역’ 또는 ‘사유재산’을 건들 수 없다. 이것은 ‘자유’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다. 이것은 법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보수정치의 근간이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사적인 영역이 보장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사적 영역’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바울의 사도직은 사적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에 대하여 이런 의심을 했다.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신 게 맞어? 그가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야, 아니면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야?” 바울은 이러한 의심에 대하여 단호하게,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은 정말 좋고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보니,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을 묻는 것이 쉽게 웃음거리가 되는 이유는 첫째, 우리가 너무 ‘사적 영역’이라는 개념에 매몰되어 있어서 그렇고, 둘째, 자신의 사적 욕망을 너무 쉽게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말 좋고 중요한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너무 사적 영역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욕망을 쉽게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려는 유혹도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고난과 위로를 동반한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인생은 하나님 경험에 대한 독특한 고백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의 하나님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경험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영광송을 부르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3-4절).

 

이 구절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바울이 의도적으로 단어를 배열한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 – 아버지 – 하나님 – 우리”가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고난을 당하며 경험한 하나님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요, 자비의 아버지, 그리고 위로의 하나님이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경험한 하나님이 동일하게 우리들에게도 경험된다고 고백하는 중이다.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5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파쎄마)”에서 쓰인 헬라어 동사 “파쎄마(고난들)”는 복수형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한 모든 고난들을 통칭하는 단어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 당한 사람이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될까 싶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셨다. 모욕은 인격적인 모욕을 말한다. 감정이 상하는 모욕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빌라도에게 넘겨져 심문을 받았는데, 이것은 법적인 모욕을 말한다. 법으로부터 버림 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법으로부터 버림 받을 때 사람은 쉽게 죽임 당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나치에 의해서 유대인 대학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분석하면서 밝혀낸,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나누겠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채찍질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셨다. 이것은 신체에 당하는 모욕(고난)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했다. 죽음은 인간이 당하는 가장 마지막, 결정적인 모욕이다. 이것은 생명 자체에 대한 모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파쎄마/고난들)을 쉽게 보면 안 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다. 인격적 모욕, 법적 모욕, 신체적 모욕, 생명 자체에 대한 모욕, 이 모든 것을 당하시고 감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매우 특별한 고난의 이력을 지닌 분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은 이러한 특별한 고난의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게 고난당하여 죽으신 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의 그 어떤 고난도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깊은 고난과 연결되어 있다. 고난 당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면 고난들(인격적/법적/신체적/생명적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 반드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당하는 고난에 대한 위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될 수 있다. 하나님 뜻 안에서 당하는 고난은 오직 하나님만이 위로해 주실 수 있다.(룻기의 나오미(기쁨): 마라(쓰다) à 기쁨을 회복시켜 주심: 오벳(효도를 위해 태어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으로, 위로의 하나님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고난을 당했는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되니, 그저 눈물만 주룩주룩 나올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즘, 현대인들이 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못할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너무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너무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지 않고,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만 무엇이든지 하려고 들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 보니,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하면서 당하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가 들어설 여지가, 공간이 없어서 그런 것을 아닐까. 요즘 시대를 돌아보면, 현대인들에게 고난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경험하는 통로일 뿐,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가 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물려 하지 않고, 너무도 당연하게 자신의 뜻, 자신의 의지 안에 머물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도된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불평하거나 불쾌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당한 바로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신 이유는 동일한 고난을 당하여 고통 당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한다. 고난을 수치로 여겼던 그리스도-로마 세계에서 고난을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로 여기고, 자신이 고난 당한 것은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은 대단한 신앙이다.

 

바울은 8절에서 자신의 일행이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은 나오지 않지만, 그 고난이 엄청난 고난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8b-9a).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그래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했던 고난은 어떤 고난이었을까? (주의: 아시아는 소아시아를 가리킴)

 

이 부분을 놓아두고 학자들은 몇 가지 가설을 이야기한다. 첫째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이라는 구절과 사도행전 19장에 등장하는 에베소에서의 소요 사태를 연결한 가설이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 일행에게 발생한 에베소에서 활동하던 우상판매 업자 데메드리오와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거대한 아데미 신전이 있던 에베소에서는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파는 상업행위가 성행했다. 데메드리오는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 일행은 데메드리오와 그의 사람들이 은으로 만든 신상을 향해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행 19:26).

 

이게 단순히 우상숭배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계를 위협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적잖은 사람들이 바울 일행을 해하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19장을 자세히 보면, 적어도 그들은 그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상황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9장에 소개되고 있는 일화가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아시아에서의 환난’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아시아에서의 환난이 바울의 간헐적 질병의 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우리는 바울이 경험한 아시아에서의 환난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시아에서의 환난을 경험하고 나서 바울이 하고 있는 고백이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we would not trust in ourselves, but in God who raises the dead)”(19b절).


요즘 우리가 뉴스 기사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단어는 ‘전례 없는(unprecedented)’이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고 있기에 오히려 감각이 무덤덤한 듯하다. 이전에 경험해 본 것이 다시 발생한다면,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을 텐데,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지구적 재난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기에 오히려 무감각한 것 같다. 상상을 초월한 사건이 발생하면 인간은 오히려 무기력해지는 법이다.

 

기후위기 같은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일들 뿐 아니라, 개인이나 가족에게, 또는 공동체에게 발생한 고난들을 마주하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말씀을 통해 두 가지를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첫째,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 나 자신의 뜻, 나 자신의 의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신경 써서, 의식적으로, 우리의 인생이, 또는 우리의 어떠한 선택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묻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쉽게 나 자신의 뜻, 나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 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발생하는 고난들(고통의 일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된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을 괴롭히는 고난들은 단순히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이 신앙의 원리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을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도록,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한다.

 

현대인들에게 하나님 경험이 드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해 보인다. 무엇이든지 자기의 뜻, 자기의 의지대로 할 뿐이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간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으니, 고난을 경험하더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손해다. 고난이 얼마나 괴로운가. 고난 속에서 괴로움만 당하고 만다면, 그것은 정말 큰 손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면, 그 어떤 고난이든지,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경험은 놀라운, 아주 신비로운 경험과 마주하게 되는데, 당한 고난이 그냥 괴로움으로만 남지 않고 미래를 활짝 열어준다. (성경의 스토리들은 모두 그것에 대한 증언 아닌가. 아브라함, 요셉, 모세, 나오미와 룻, 다윗 등등)

 

둘째, 우리는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 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적 영역의 개념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는 사유 재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사유 재산(사적 영역)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여 그것에 의지해서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개념은 근대가 만들어낸 허구인 것을 알아야 한다. 사적 영역, 사유 재산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우리는 어느 순간 이러한 현실과 마주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아, 하나님만이 구원하시는구나!”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은, 그것이 거룩하거나 죄악되거나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구호를 외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필연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힘에 겹도록 심히 고난에 처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운동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하여, 바로 그 한 순간을 위하여 수년간 피땀흘려 노력하듯이, 우리가 평소에 열심히 신앙생활에 정진해야 하는 이유는 바울이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 우리가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려고 하지 못하고,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고 나의 사적 재산이나 또는 다른 것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한 번 가만히, 오늘 말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를 짓누르는 영적 기운은 무엇인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위로인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가.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인, 성령의 사람  (2) 2021.08.23
눈물로 쓴 편지  (0) 2021.08.21
선물이며 과제인  (0) 2021.08.02
신인류의 사랑 (Love of New Human Race)  (1) 2021.07.26
최후의 인간  (0) 2021.07.19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