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28. 21:45

하나님의 구원은 멈추지 않는다

(데살로니가전서 3:9-13)

 

1. 한국 기독교를 보면 용어 문제 때문에 교회일치운동이 참 어렵다. 하나님과 하느님, 교회와 성당, 세례와 침례, 바울과 바울로 등, 같은 것을 지칭하고 있는데도 용어가 다르다 보니 마치 존재가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영어의 Advent, 즉 대림절도 마찬가지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대림절과 대강절 그리고 강림절, 이렇게 세 가지 용어로 불리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도 한국 사회와 문화 속에 기독교가 충분히 녹아 들어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더 발전하고 성숙해지고 영향력을 가지려면, 용어의 일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해 본다.

 

2. 나는 Advent를 ‘대림절’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 ‘오심을 기다림’이라는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시는 것은 그리스도고, 기다리는 것은 우리들이다. ‘오심을 기다림’이란 그리스도와 우리들이 하나가 될 때 의미 있는 것이다. 오신다고 해도 기다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기다린다 해도 오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기다림은 하나이어야 한다. 그래서 기다림 자체가 믿음인 것이다.

 

3.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기다림은 성경에서 증언되고 있는 신앙 중 가장 핵심적인 신앙이다. 신약성경 중 가장 먼저 쓰였다고 하는 데살로니가전서는 온통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다. 가장 처음 성경인 데살로니가전서가 그렇다는 뜻은 초대교회 사람들, 특별히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이 아직 살아 있던 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은 ‘종말신앙’이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은 세상의 파괴(파탄)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4.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에서 종말신앙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자취를 감추었다기보다 덜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대략 두 가지 정도가 있는데, 하나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오심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른 말로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의 오심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 역사가 진행되면서 종말이 매우 폭력적으로 묘사되었다는 데 있다. (폴라 구더, <기다림의 의미>, 41-42쪽) 마치 넷플릭스의 최신 드라마 <지옥(Hellbound)>에서처럼 말이다.

 

5. 그리고 요즘 대림절은 기다리는 거를 싫어하는, 아니 견디지 못하는 시대에서 거부당하고 있고, 기독교 내에서는 대림절이 성탄절에 잡아 먹힌 듯하다. 적어도 핸드폰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기다리는 일은 그 자체가 낭만이었는데, 요즘은 기다리는 것 자체가 짜증인 시대가 된 듯하다. 습작할 때 쓴 조잡한 시이지만, 옛날 친구들과 약속 장소를 잡고 기다리던 때를 생각하며 쓴 시도 있다. “말죽거리 국민은행 앞에서 만나”, 이런 문장이 들어가는 시다. 그때는 약속 시간 정하고, 약속 장소에 나가 친구가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기다림’이 생활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기다리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시대다. 그렇지 않은가. 약속 시간에 조금만 늦어도 짜증내는 시대. 인터넷이 조금만 느려도 짜증내는 시대.

 

6. 기록시기가 복음서보다 빠른 바울서신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안 나오고 온통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정하여 지키고 있지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즉 세상의 종말이 있을 때, 예수님처럼 본인들도 부활하게 될 것을 믿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다.

 

7. 부활이 무엇인가? 부활이 곧 구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활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부활은 생명의 완성이다. 생명의 완성(Fullness of Life). 우리는 이것을 깊이 있게 묵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완성을 갈망한다. 우리는 흔히 구원을 말할 때 ‘죄로부터의 구원’을 말하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반쯤 만 이해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죄’를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정죄하여 죄책감이 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생명을 해치고 생명의 완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은 단순히 죄로부터의 구원(소극적 구원)이 아니라 생명의 완성(적극적 구원)이다. 이것을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신앙이 곧 죄책감을 갖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거기엔 기쁨이 없고 두려움만 있을 뿐이다. 나쁜 사람들은 그러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착취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서처럼 말이다. (2019년 7월 13일, <두 편의 영화와 한 번의 강의>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죄론의 이해’라는 특강을 하면서 말했던, 죄의 메커니즘이 그대로 드러나는 드라마다.)

 

8. 생명의 완성. 너무 가슴 떨리고, 벅차고, 행복한 일이다. 우리는 살면서 늘 뭔가 모자라고 부족한 것을 느낀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명이 완성되지(생명이 풍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의 생명이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고, 그 절대생명(완성된 생명)이 지금 오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9. 바울은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10절). 이것은 2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말씀이다. 우리는 정말 믿음이 부족하다. (지난 주 설교에서도 강조했지만) 믿음의 실종은 사랑의 실종을 반드시 불러온다. 대림절 신앙은 종말신앙인데, 기독교의 종말신앙은 사람들에게 많이 오해되고 있듯이 피비린내 나는 파멸과 파괴, 죽음이 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이미 생명의 완성을 이룬 것이다. 생명의 완성을 이룬 자는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랑의 일을 한다.

 

10.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를 보라.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12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과 그의 일행은 자신들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을 이루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이것을 ‘자족’이라고 부른다.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바울과 그 일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완성을 이루었기에 생명의 풍성함을 느꼈고, 그 풍성함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사랑했다.

 

11.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랑이 먼저가 아니다. 믿음이 먼저다. 그들의 부족한 믿음이 먼저 보충되기를 원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이 굳건하게 갖게 되기를 바라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믿음이었다. 살아 있을 때 그리스도의 오심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하나 둘씩 그리스도의 오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가자,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 중 어떤 이들은 믿음을 잃어갔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랬는데, 2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더 심하겠는가.

 

12. 믿음을 잃어가는 일은 사랑을 잃어가는 일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지 않는 것과 같고, 하나님의 구원이 마치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일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자기를 구원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생명의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우리의 심장을 딱딱하게 만들 뿐이다.

 

13. 어떤 분이 이러한 농담을 하는 것을 봤다. “개고기를 먹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개와 사는 것이다.” 이게 왜 더 큰 문제일까? 개와 사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개와 살아야 할 만큼 외롭다는 것이 문제라는 뜻이다 (오강남 교수의 페북에서). ‘외롭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을 보면, 인간들의 상실감,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우울함, 그것을 좀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는 처절한 노력들이 잘 그려져 있다) 이렇게 사랑이 없어 외로운 삶을 사는 현대인들의 삶이 회복되려면, 무엇보다 우리의 믿음이 좀 더 굳건해져야 한다. 믿음의 상실은 사랑의 상실을 불어오니 때문이다. 거꾸로, 믿음의 굳건함은 사랑의 풍성함을 불러온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14. 하나님은 구원을 멈추지 않으신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생명의 완성을 이루기까지 쉬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증거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소망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대림절을 지킨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시작된 생명의 완성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삶,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나아간다는 뜻이다. 사랑이 없어 외로움이 난무하는 이 시대를 이길 힘은 믿음 밖에 없다. 구원을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생명의 완성을 이루신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일(대림절기를 지키는 일)은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을 주는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이다. 구원하기를, 생명의 완성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일이 우리네의 이 메마른 삶에 활기를 주는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는다. 하나님을 구원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좀 더 힘을 내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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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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