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2. 7. 09:26

대림절과 메타노이아

(말라기 3:1-4 / 빌립보서 1:3-11 / 누가복음 1:68-79 / 누가복음 3:1-6)

 

1. 대림절 두 번째 주일에 읽게 되어 있는 성서정과(Lectionary)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네 개의 복음서는 모두 세례 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관련해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네 개의 복음서 중 마태와 누가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비해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은 누가복음 뿐이다. 우리는 누가복음이 전해주고 있는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2. 아기를 갖고 싶어하는 부부에게 ‘불임’은 예나 지금이나 큰 고통이다. 세례 요한의 부모도 불임으로 고생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이들은 제사장 가문이었고, 아주 신실한 사람들이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율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6). 이들은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고, 그냥 그렇게 늙어갔다. 이들의 이러한 상황은 분명 구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3.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난 이삭이다. 또한 사사기에 등장하는 불세출의 영웅, 마노아의 아들 삼손이 떠오른다. 또 있다. 엘가나와 한나, 그리고 그들의 아들 사무엘이 떠오른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분명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불임 이야기를 통해서 구약의 이삭과 삼손과 사무엘을 호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이삭과 삼손과 사무엘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세례 요한은 새 이삭, 새 삼손, 새 사무엘이라는 뜻이다. 세례 요한은 도대체 누구이길래, 누가복음은 이 사람을 이렇게 그리고 있는 것일까?

 

4. 요한은 히브리어 ‘요하난’에서 왔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이다. 그의 이름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요하난에 포함된 ‘하난’은 히브리어 ‘테힌나’와 관련이 있고, 그것은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뜻한다. 경건한 사람 사가랴와 엘리사벳, 특별히 제사장직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전 출입을 정기적으로 했던 사가랴는 자식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마도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자식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아마도,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마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엘가나와 한나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아주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5. 이러한 ‘테힌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에 우리의 마음이 찡해지는 이유는 그러한 기도를 드렸던 신앙의 선배들의 삶의 이야기들이 감동적이어서라기 보다는,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그러한 ‘테힌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가 절실히 요청되기 때문이다.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일은 참 좋은 일이다. ‘간절함’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생명력 있게 살고 싶어한다는 증거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없을 만큼 삶이 버려지고 포기된 상황이다.

 

6. 히브리어 ‘테힌나’는 ‘간구’라는 뜻이다. 이것을 그림언어로 표현하면, ‘항복을 하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이다. 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찬송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이다. 우리의 인생을 슬프게 하는 것도 이 ‘간절함’이고, 우리의 인생을 기쁘게 하는 것도 이 ‘간절함’이다. 간절함은 우리를 울리기도 하고 웃게도 만든다. 그게 인생 아닌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다면, 그것을 인생이라고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간절함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든다.

 

7. 요한’이라고 하는 이름에서 우리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간절함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간절함이 그를 성실하고 신실한 제사장으로 살아가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간절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너무 다행이고, 너무 감사하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테힌나)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13). ‘요한’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간절함이 배어 있는 이름이고,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이름이다. 참 좋은 이름이다.

 

8. 대림절은 이렇게 ‘간절함(테힌나)’의 절기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이 절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 기쁨을 증진시키는 어떠한 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하는 절기이기도 하다. 대개 그 간절함은 감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감춰져 있는 그 간절함을 허물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친구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는 사람이 친구인 것이다. (이런 친구가 있기를!) 테힌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멈추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으라. 대림절기에 ‘요한’의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이것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리는,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기 바란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9. 요한의 출생 소식과 함께 요한에게 쏠렸던 기대감은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요한은 그야말로 기대주였다.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 되려나, 모두의 관심을 독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요한의 삶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진행된다. 제사장의 아들이니, 사람들은 그가 커서 대제사장이 되어 큰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오히려 요한은 그 기대와는 반대의 삶을 살게 된다. 그는 광야로 나가 기존 종교와 정치 체제에 비판을 가하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10. 요한이 성전 밖에서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충격적인 일이다. 기존의 종교 체제에서 죄사함은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요단강으로 불러 모았고, 그곳에서 동물의 피를 쏟고 삶을 태우는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요단강의 깨끗한 물로 그들을 씻는 의식을 통해서 그들의 죄를 없애 주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말 대로, “내 뒤에 오시는 이”를 위해서 였다.

 

11. 우리는 요한의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나 자신이 또는 우리의 자녀들이 세례 요한처럼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빛나기 좋아하고, 주목 받기 좋아하고, 세상이 나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 시대에 세례 요한처럼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을 가리키는 사람으로, 명소가 아니라 명소를 가리키는 표지판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의 이름이 담고 있는 ‘간절함’, ‘테힌나’의 기도,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하면서도, 우리의 기도 자체가 요한처럼 되게 해달라는 기도 드리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12.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줄 알면서, 또는 ‘작은 예수’라는 용어를 좋아하면서도, ‘작은 세례 요한’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는 드릴 줄 모를 뿐더러, ‘작은 세례 요한’이라는 용어 자체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작은 예수’가 되고 싶은 메시아 병에 걸려 있는지 모르겠다. 예수님처럼 작은 메시아가 되어서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작은 메시아의 역할이라도 감당하며 세상을 구원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세례 요한’의 이름을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지워버린다. 우리는 ‘작은 예수’는 될 수는 있어도 ‘작은 세례 요한’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13. 그러나 대림절기는 오히려 우리를 ‘세례 요한의 자리’에 머물게 한다. 다른 말로 해서,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것을 권장하는 세상에서, 삶의 중심을 자기 자신에게서 ‘메타노이아’ 해서 그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어드리는 삶으로 돌아서게 한다.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메시아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이 ‘작은 메시아’라는 의식 자체가 없다.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내 뒤에 오시는 이”, 즉 메시아를 가리키는 사람이다. 성경을 통틀어 온 인생을 다 해서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를 가리킨 사람이 요한보다 더 했던 사람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눅 7:28).

 

14. 대림절기는 무엇보다 요한의 ‘메타노이아’를 묵상하는 절기이다. 우리말로 ‘회개’로 불리는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히브리어의 ‘니함’ 또는 ‘슈브’를 옮긴 말인데, 그 뜻은 “반대방향으로 돌아선다”는 뜻이다(헬라의 군대가 행진하다 ‘메타노이아!’하면 ‘뒤로 돌아가!’가 된다.). ‘회개’가 ‘죄를 뉘우침’이라는 좁은 의미로 쓰이는 것과는 달리, 메타노이아의 뜻은 방향전환이다. 오시는 주님(메시아)을 만나려면 방향의 재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삶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 되면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대림절은 삶의 중심을 자기 자신에서 메타노이아(돌아서서)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본다.

 

15. 우리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테힌나’의 기도,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며,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테힌나’의 뜻이 ‘항복하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인 것처럼,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주님께서 이루어주시길,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바라면서 주님께 항복하기 위하여 손을 드는 것 자체가 ‘메타노이아’이다. 항복하기 위해 손을 드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느 방향을 향해 손을 들었냐이다. 항복해야 할 대상이 내 뒤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바라보지 않고, 그 반대 방향으로 두 손을 들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6. 이 대림절기 동안, 오시는 주님을 오롯이 가리켰던 세례 요한을 묵상해 보기를 바란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메시아’가 되기를 전혀 바라지 않았고, 사람들이 실로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을 전환하게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드렸던 사람이다. 세례 요한은 아주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받을 수 없는 최고의 명예롭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

 

17. 방향을 돌이켜(메타노이아), ‘작은 예수’가 되려 하기 보다, ‘작은 세례 요한’이 되는 삶을 한 번 묵상해 보면 좋겠다. 겸손(케노시스)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 진실로 겸손했던 사람과 마주하면 좋겠다. 우리의 삶이 세례 요한처럼 오롯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삶이 되면 좋겠다. 세례 요한과 가까운 삶을 살면 살수록 역설적으로 우리도 그가 들었던 명예로운 축복의 말씀을 동일하게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세례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삶이었다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우리보다 큰 자가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죽은 아무개를 위해 잠시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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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