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21. 20:59

믿음과 미래

(요한일서 5:1-12)

 

1. <레 미제라블>을 좋아하세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장 발장(Jean Valjean)’은 정말 유명인사죠. 아마 ‘레 미제라블’보다 ‘장 발장’이 더 유명하지 않나 싶네요. 이 소설은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1862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프랑스인들은 성경의 ‘요한’을 매우 좋아했나봐요. 프랑스어로 ‘Jean(장)’은 영어의 ‘John(존)’이고, 한국어의 ‘요한’입니다.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 외에도, 프랑스에는 ‘장(Jean/John/요한)’이라는 이름(first name)을 가진, 유명인들이 정말 많거든요. 그 이름들을 굳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2. 작품은 어느 한 시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레 미제라블>이 1862년에 발표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서양의 역사 중, 1789년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왜 중요하냐면, 역사에서 비로소 시민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이에요. 그 이전까지 만해도 인류의 역사는 권력을 모두 소유한 한 인간, 즉 왕이 나머지 사람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시민들이 거기에 반기를 들면서 한 인간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을 시민 각자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기반을 만듭니다. 몇 년 후, 1793년에 루이 16세는 시민들에 의하여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이건 굉장히 혁명적인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왕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일반 시민은 넘쳐 났어도, 시민에 의해 왕이 단두대에서 죽는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3. 그 이후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두 차례 더 일어났었는데, 짐작하다시피, 그 싸움은 권력을 지키려는 왕과 귀족들, 그들에게 다시는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시민들의 싸움이었죠. 누가 이겼을까요? 시민들이 이겼습니다. 그 덕분에 역사는 ‘민주주의’ 시대를 엽니다. 왕, 한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인 시대가 열린 것이죠. 그런 점에서 1848년 2월 혁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1848년 이후, 세상은 왕정체체/또는 귀족체제를 벗어버리고, 민주주의 체제로 들어섭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현재 우리의 지도자(대통령)를 우리 손으로 뽑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시민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뽑아준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것이고요.

 

4.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 <레 미제라블>은 그 제목이 보여주듯이 ‘비참한 사람들’에게 주목합니다. 왕정체제/귀족체제가 무너지고 민주주의체제가 왔다고 해서 세상이 평화롭고 정의롭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와 함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인간의 온갖 욕망이 함께 튀어나왔기 때문에, 사회는 엄청 더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졌죠. 1789년 프랑스 혁명을 통해 주조된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에서 자유(Liberty)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사적인 소유물을 가질 수 있는 권리’의 자유를 말한다. 즉, 사유재산의 개념이 이때 생겨난 것이죠. ‘평등(Egality)’도 ‘너랑 나랑 똑 같은 인간이야’라는 뜻이 아니라 ‘법 앞에서의 평등’을 말합니다.

 

5. 19세기 혁명들 이후 발전된 민주주의는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자유를 강조하는 자본주의(자유주의) 진영과 다른 하나는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진영이죠. 두 진영 모두 인간의 번영을 도모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사회주의 진영(공산주의)은 획일적인 평등을 강조하다가 인간성을 훼손시키며 몰락했고, 자유주의(자본주의) 진영은 사적인 소유를 강조하다가 인간성을 훼손시키며, 더 나아가 자연 자체를 훼손시키며 몰락해 가고 있죠. 우리는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 자유가 사적 소유의 자유,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에만 머물고 말면, 결국 그 자유가 칼이 되어 인간을 겨누어 인간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터전인 자연까지도 해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8.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들을 부여잡고 시작한 민주주의가 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고, 더 불행하게 만들었을까요? 요즘 우리 시대에 모든 곳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을 보세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못 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먹고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일 하는 게 너무 힘들고, 너무 외로워하고, 무엇보다, 불안한 미래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움에 떨고 있죠. 뭔가 잘못되고, 뭔가 잃어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9. 우리가 위에서 자유와 평등 중 어느 것 하나를 강조하며 발전한 진영을 살펴보았는데,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프랑스 혁명의 가치 중 ‘박애’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자본주의) 진영이나 평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 그 어느 곳에서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박애(fraternity)’는 ‘사랑’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어요. 그런데, 박애라는 사랑은 공동체성을 말하죠. 자유주의, 사적 소유에 젖어 있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매우 사적인 차원에서만 말해지고 있어요. 사랑은 마치 사적인 일로, 아무도 왈가왈부할 수 없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인 것처럼 여겨지죠. 이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자유가 박애를 잡아먹는 꼴이에요. 박애는 사적인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공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10.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바로 이 박애의 정신을 보여주고 생각하게 하고 되살려 줍니다. 혁명을 통해 왕정체제를 무너뜨리고 시민사회, 민주주의(공화주의)체제로 이양되고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있었던 것이죠. 그게 바로 박애라고 하는 공적 사랑입니다. 장 발장은 굶주리고 있는 일곱 조카를 위해서 빵을 훔쳤는데, 그 죄로 인하여, 법에 의해서(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니까), 19년간 옥살이를 합니다. 장 발장이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사회에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출소 후 냉랭한 마음을 가진 장 발장은 자신에게 하루 숙소를 제공한 미리엘 신부에게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은식기를 훔쳐서 나옵니다. 그런데, ‘비참한 자’가 은식기를 들고 있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장 발장을 데리고 미리엘 신부에게 가 대질 심문을 합니다. 그때, 미리엘 신부는 경찰에게 그 은식기는 자신이 선물로 준 거라고, 왜 은촛대는 그냥 놓고 갔냐고 오히려 은촛대까지 챙겨주죠.

 

11. 박애란 바로 이런 사랑을 가리킵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 사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랑, 더 나아가서 미리엘 신부가 장 발장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악을 오히려 선으로 갚는 사랑, 이러한 사랑이 박애인 것이죠. 박애는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기독교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박애의 정신이 자유의 정신과 동일하게 강조되었다면, 자유주의(자본주의)의 과도한 사적 소유의 욕망은 컨트롤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만약, 박애의 정신이 평등의 정신과 동일하게 강조되었다면, 평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의 과도한 획일화가 컨트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그리고 평등주의 진영에서도 박애의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인간의 욕망과 인간성의 훼손만 난무할 뿐입니다.

 

12.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유럽은 유서 깊은 기독교 국가들이죠. 기독교의 흥망성쇠와 그 역사를 함께 한 나라들입니다. 19세기는 유럽의 기독교에도 정말 중요한 시기였는데, 왕정체제/귀족체제가 무너지면서 기독교도 함께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세속화’, 즉 하나님 없는 세상이 이때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왕/귀족에 대한 거부는 곧 기독교 신에 대한 거부와 그 맥락을 같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기독교 신앙을 버리게 되고, 믿음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들의 힘(이성)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하죠. 19세기에 시작된 이러한 흐름은 현재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세상은 이제 ‘믿음’ 없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기독교의 잘못도 굉장히 크죠. 예수의 정신은 온데 간데없고, 왕과 귀족들처럼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려고 했으니까요.

 

13. 저는 이 ‘믿음 없는 세상이 되었다’에 집중해 보고 싶습니다. 자유를 사적 소유로 생각하는 것이 깊어진 우리 시대에 ‘믿음’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믿음을 자기 자신의 신념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맙니다. 즉, 믿음도 사적 소유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것이죠. 자유의 개념을 자기 중심성(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의 개념으로 파악하다보니, 믿음도 그렇게 생각할 뿐이죠.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믿음’을 엄청나게 오해하고 훼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죠. 믿음은 개인의 신념, 즉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내 안에 오신 성령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14. 본문은 ‘믿음’에 대해서 엄청난 진리를 알려줍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기독교의 믿음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고백할 때, 우리 안에 성령이 있는 것이고, 그 성령으로 인하여 그 진리를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고,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 그런데, 이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데만 그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존재를 바꿉니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적인 복음입니다. 창세기만 보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make)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애제자 요한은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피조물에 머물게 하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낳은 자(begotten)로 존재를 바꾸어 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도 동일하게 나오는 복음이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믿음이 단순히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믿음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를 바꾸어 주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죠.

 

16. 믿음이 우리의 존재를 단순한 일 개의 피조물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같은 속성(본질)을 지닌 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속성(본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너무도 잘 하는 것이죠. 맞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데, 바로 사랑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죠.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무엇보다 그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 계명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쉽고 가볍습니다. 왜냐하면 그 계명이 바로 사랑인데, 사랑의 본질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자에게 그 사랑을 행하는 것은 돌고래가 물에서 수영하는 것처럼 너무 쉬운 것이기 때문이죠.

 

17. 우리는 왜 사적 소유를 갈망하고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자유’를 외치며 살면서, 그리고 법 앞에서는 평등한 거라고 외치면서 법적 평등을 보장해 달라고 외치며 살면서, 왜, 이렇게 못살겠다고 아우성 칠까요? 가진 게 많은데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고 싶다고 아우성대고, 가진 게 없어서 못살겠다고 아우성, 저 사람과 내가 평등하지 못한 것 같다고 아우성대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악한 세상을 만들고 만 있을까요? 제 짧은 생각으로,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선가 말씀하셨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18. 믿음의 실종은 사랑의 실종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공동체성이 사라진 것, 박애가 사라진 것은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자유, 즉 개인의 소유도 중요하고, 법 앞에서의 평등도 중요하지만, 사랑이 없는 자유와 평등 인간을 인간답게 하지 못하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성을 파괴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전도서의 솔로몬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이 없으면 웃는 것은 '미친 것'이고, 즐거움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장 발장처럼 냉소적인 사람만 만들어낼 뿐입니다. 냉소적이었던 장 발장을 따스한 인간성을 지닌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 것은 바로 미리엘 신부의 ‘박애(사랑)’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걱정, 가족에 대한 걱정, 사업에 대한 걱정, 무엇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 두려움을 이용하여 우리에게서 뭔가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여, 우리는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두려움을 극복해 보려고 아주 잘못된 선택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기도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해하며, 머물지 못하고 떠납니다.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한없이 약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말도 안 들릴 것이고, 자기의 선택이 진리라고 귀를 막고 눈을 가릴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악에 잡아 먹힐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더욱더 악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20.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열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바로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사랑의 존재로 바뀐 사람이 그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리게 하기 위하여, 사랑의 존재인 우리를 그냥 연약한 한 개의 피조물로 바꾸어 버리기 위하여,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미래를 닫아버리고, 현재의 삶에만 집중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듭니다. 그 두려움이 지금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못살겠다고 아우성 칩니다.

 

21. 누가복음 8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딸을 살려보고자 야이로는 염치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와 엎드려 간구합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 딸 좀 살려주세요!” 예수님은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 사이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고쳐주시죠. 그리고 길 가던 중,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 딸이 죽을까봐 두려움에 떨고 있던 야이로는 이 소식을 듣고 아마도 심장이 내려앉았겠죠.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눅 8:50).

 

22. 믿음을 개인의 신념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능력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우리에게 미래를 열어줍니다. 우리의 존재를 일 개의 피조물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 자체를 바꾸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의 일을 하게 합니다. 이 믿음의 역사 없이,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꿈꿀 수 있으며,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자녀의 일로, 가정의 일로, 직장의 일로,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십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그 믿음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이미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은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일 개의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믿음이 불안한 미래를 열어줄 것이고, 그 믿음이 우리를 악에서 구원하여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멋진 인생을 살게 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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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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