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7. 18. 21:31

최후의 인간

(에베소서 3:14-21)

 

본문은 바울의 기도문이다. 바울 서신의 특징이 몇 가지 있는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면서 기도문이 들어간다는 것과 전반부에는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후반부에는 실천적인 이야기(권면)를 한다는 것이다. 바울 서신 중에 에베소서는 좀 더 특이하다. 다른 서신에서는 기도문이 앞부분에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앞 부분 외에 이렇게 중간에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기도문을 기점으로 에베소서는 전반부의 신학적인 이야기와 후반부의 실천적인 이야기(권면)로 나뉜다.

 

전반부의 신학적인 이야기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혔다. 그것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문 사건이고, 그리하여 이방인과 유대인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받는 새로운 인류가 되었다.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함께 세워 나간다.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가 세워진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에베소 공동체를 위해 바울은 기도한다.

 

기도는 참 따스한 인간의 유산이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만큼 깊은 사랑의 행위가 없다. 내가 나를 위해 기도할 때,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날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내가 기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가장 고마운 사람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기도 안에 ‘나의 이름(장준식)’이 불린다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다. 기도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다. 기도는 사랑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기도하는 한, 긴 기도는 필요 없다. 짧게, 그의 이름만 불러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연결되는 것이다. 내 기도 안에서 이름이 불리는 사람은 미워할 수 없는 법이다.

 

유대인의 평소 기도법은 서서 기도하는 것이다. 서서 기도하는 것은 서서 말씀을 받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기에 서서 말씀을 받는 것인 것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기에 서서 기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무릎 꿇고” 기도한다. 서서 기도하는 것보다 더 간절함이 배어 있는 기도가 바로 무릎 꿇고 하는 기도이다. 무릎 꿇음은 경외심, 복종, 겸손의 의미가 강력하게 들어 있다. 성경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대표적인 장면은 세 군데 등장한다. 첫째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장면이다. 둘째는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장면이다. 셋째는 바울이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에베소 교회 교인들과 작별하면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다. 어떤 자세로도 기도할 수 있다. 누워 있을 때도 기도할 수 있고, 앉아 있을 때도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의 기본 자세는 서서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앉아서 기도를 제일 많이 한다. 기도를 좀 더 오래하기 위한 편의이다. 서서 하는 것이 기도의 기본 자세인 이유는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혹시 앉아서 기도하더라도,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반드시 들어가도록, 서서 하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다. 누워서도 기도하고 앉아서도 기도하지만, 기도의 기본 자세는 서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또한 기도의 자세 중 무릎 꿇고 하는 기도가 가장 간절한 기도의 자세라는 것도 알아 두면 좋겠다.

 

바울의 기도를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굉장한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과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는 ‘(신체적) 건강, (물질적) 성공, (어떤 고난(고통)도 없는) 행복’ 등의 가치가 많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바울의 기도는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현재 추구하는 가치관의 문제점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바울의 기도는 세 개의 간구와 한 개의 영광송으로 이뤄져 있다. 우선 세 개의 간구를 먼저 보면, 첫번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속사람(the Inner Man)은 바울 서신에만 나오는 독특한 용어이다. 로마서(7:22/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와 고린도후서(4:16/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에도 나오는 용어이다.

 

속사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아는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마음’이다. 우리말 ‘마음(속사람)’이라는 말도 참 예쁜 말이지만 헬라어도 참 예쁘다. 속사람(마음)을 ‘카르디아’라고 한다. 히브리어도 예쁘다. “레브.” 영어로는 ‘heart’, 또는 ‘mind’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심장, 또는 마음. 아무튼, 속사람이란 인간 내면의 보이지 않는 어떤 공간인데, 사람됨의 근원이 바로 거기에서부터 비롯되기에 ‘속사람(the inner man)’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곳도 바로 ‘속사람’이다. 그러니 그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속사람이 강건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현대인들의 기도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대개 육신의 건강, 몸이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병든 육신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데만 그치는 경우가 많다. 만약 누군가 ‘속사람’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낯설어 할 뿐만 아니라, 매우 이상한 감정이 들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속사람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겉사람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두번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한계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랑은 “지식을 초월하는, 뛰어넘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아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수준에만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헤아리고 말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지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가 잴 수 있는 만큼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재서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만다. 그렇다 보니, 우리 삶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억압이 일어날 뿐이다.

 

세번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기를 간구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대담한 기도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수준까지 이르기를 구하는 것인데,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구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충만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개념과 유사(엡 4:13)하고,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와 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는 개념과 유사(마 5:48)하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경지까지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보다 더 대담한 기도는 없다. 이것은 기도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기도의 마무리를 영광송으로 하고 있는데,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경험 때문이다. 바울의 하나님 경험은 20절에 표현되어 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주님께 영광송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제가 구한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이루어주시는 분입니다. 당신은 영원무궁토록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모든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이루어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의 기도는 ‘속사람’에 대한 기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에 대한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이르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그리고, 기도의 마무리는 영광송이다. 우리가 구한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이루어 주신 분이라는 고백을 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와 같이 살펴본 바울의 기도는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가치관과 매우 이질적이다. 우리 시대는 겉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둔다. 우리 시대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려고 하지 않고, 물질 세계에 대한 깊이를 알려 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물질 세계에 대하여 알게 된 지식으로 물질적 풍요, 즉 겉사람에 대한 풍요를 누리려 할 뿐이다.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쉽게 말해, 물질적 부자되는 것에만 관심 있다. 우리 시대는 영광송이 사라졌다. 풍성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부족함과 모자람의 감정을 주입시키기 시대에 살고 있기 대문이다.

 

요즘 지구가 아주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바이러스 팬데믹에 더해, 유럽에서는 대홍수사태를 겪고 있고, 미국에서는 유례없는 더위와 가뭄 사태를 겪고 있다. 뉴욕 타임즈에 이런 헤드라인이 떴다. ‘No One Is Safe’: “Deadly flooding in Europe, vicious heat in America: Wealthy nations are waking up to the idea that climate disasters can reach them too.” 이 기사는 정말 씁쓸한 기사이다. 유럽과 아메리카, 뉴욕 타임즈에서 말하고 있는 ‘wealthy nations’는 모두 기독교 문화를 바탕으로 세워지고 성장한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들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기후변화, 기후위기의 주범들 아닌가?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한 기도에서 간구하는 것, 속사람의 강건,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려는 것,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려는 것,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들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 내리고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속사람을 건강하게 하는 것,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려고 하는 것,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즘 마치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들려주시는 탕자의 이야기의 현실판을 보는 듯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인간의 최후 말이다.

 

최후의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파멸당하는 인간일까, 아니면 구원받는 인간일까? 우리는 구원을 너무 비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혹시, 지구를 이렇게 망쳐 놓고 이렇게 환란이 가득한 지구에서 휴거하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독교 신앙을 다시 배워야 한다. 우리가 지구에 사는 한, 우리는 지구의 흥망성쇠와 함께 할 것이다. 지구가 고통 당하면 우리 인간도 함께 고통 당할 것이다. 지구가 번성하면 우리 인간도 함께 번성할 것이다. 즉, 우리는 지구의 멸망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지구의 번영과 함께 구원받게(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인가?

 

위의 기사에서 Wealthy nations(부유한 국가들/선진국)는 모두 기독교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한 국가들이다. 그들이 기후변화의 주범 아닌가? 그만큼, 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대로 사는 데 실패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쓰지 못하고 자기의 욕심대로 썼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는 것은 다른 누구가 아닌 인간 자신이다. 근대의 사고방식: 하나님을 삶의 영역에서 몰아내고 종교의 영역에 가두고, 이성이 신앙 안에서 작동하도록 하지 않고, 이성과 신앙을 분리하여 이성의 고유 영역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조차 개입하지 못하는 이성의 고유 영역이 있는 것처럼 말하며(근대의 사고방식),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성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인간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고 싶은가? 파멸인가? 구원인가? 죽음인가 생명인가? 우리는 마치 파멸을 경험해 보고 싶어 미친 사람처럼 달려가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겉사람에게만 관심 있을 뿐 속사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겉사람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기계와 수치는 매우 발달되어 있는 반면, 속사람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기계와 수치는 전혀 없다. (혈압이 높으시네요? 당뇨가 있으시네요? 짠 거 덜 드시고, 음식 조심해서 드세요. 이런 말은 해도, 속사람의 건강이 별로 안 좋으시네요, 기도를 하루에 세 번 하시고, 예배에 빠지지 마세요. 그리고 성경읽기를 하루에 한 장씩 하는 것 잊지 마시고요.) 우리가 사는 시대는 물질세계에 대하여 깊이 있게 알려고 할 뿐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원소 주기율표는 있어도, 그리스도 사랑 주기율표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물질적 충만만 바랄 뿐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려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파멸만 남은 것 같고, 그것을 지금 우리는 현실판으로 경험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시작은 우리의 기도부터 바꾸는 데 있다. 기도할 때 ‘‘(신체적) 건강, (물질적) 성공, (어떤 고난(고통)도 없는) 행복’에 관한 기도는 좀 내려놓고, 속사람의 건강에 대한 기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 원하는 것에 대한 기도,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려는 갈망에 대한 기도로 우리의 기도를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우리의 속사람이 얼마나 건강하지 못한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지를 알게 될 것이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충만이 아니라 엉뚱한 것이 충만하게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을 알아야,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 성경공부의 자리, 교제의 자리, 선교와 봉사의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러한 것들이 영적인 치유의 자리라는 것이 보이게 된다. 

 

이러한 기도와 깨달음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어둠이 깊을수록 아주 작은 불빛도 소중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법이다.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을 건강하게 하려는 노력이 피어날 때(또는 겉사람과 동등하게 속사람의 건강도 신경 쓸 때), 물질 세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알기를 소망할 때(물질 세계에 대한 관심 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에도 관심을 둘 때),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려고 갈망할 때, 그러한 가치관으로 새롭게 삶을 규정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날 때 최후의 인간은 파멸이 아니라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최후의 인간이다. 파멸이 아닌 구원을 경험하기 위하여 우리를 자꾸 파멸로 몰고 가는 가치관을 내려놓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가치관(속사람/그리스도의 사랑/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다시 옷 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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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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