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7. 6. 18:30

십자가와 화해와 평화

(에베소서 2:11-22)

 

 

이방인

 

나는 누군가에게 이방인이다

아니 나는 모두에게 이방인이다

저녁거리,

그 쓸쓸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노을로

고개를 돌리는 건

여기에서는 불경한 짓이다

그 너머 있는

무지개 마을을 상상하는 건

여기에서는 교수형감이다

이들에게 어제는 먼 미래와 같고

먼 미래는 태초와 같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마음조차

괴로운 상상인 것은

이들에게 내일은

아직 경험되지 못한

감각의 바깥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제 나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석양에 기울어지는 그림자만

나를 바싹 뒤쫓았을 뿐,

내가 거리를 돌며 본 건

옛날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에게서 발견한 오싹한 느낌,

그들은 모두 예전에

죽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도대체 어느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아직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이방인이다

 

(장준식 作)

 

위의 시에서 나는 이방인이다. 내가 이방인인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아직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죽은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죽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죽어본 일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곳에서 나는 얼마나 이방인인가. 죽어 본 적이 있는 사람들 틈에서 나의 존재는 낯선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본문은 우리의 존재를 굉장히 낯설게 만든다. 유대인이 아닌 우리를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우리를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이방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방인 무할례자들. 여기서 무할례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깊은 차원의 구원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라는 뜻은 구원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이라는 뜻이다. 마치 위의 시에서 ‘나(시적 자아)’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이방인이었던 것처럼, 본문에서 우리는 구원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이방인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이스라엘 시민권도 없는 외국인으로서 약속의 계약에서 제외된 채 이 세상에서 희망도, 하나님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엡 2:12/공동번역개정판)

 

내가 언젠가 한 번 밝힌 적이 있는데, 미국 와서 가장 힘든 상황 중 하나는 내가 여기에서 ‘people of color(유색인종)’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유색인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한국인이고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나는 유색인종이라고 불린다. 이는 철저하게 백인들의 시선에서 그런 것이다. 이처럼, 본문에서 우리가 이방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철저하게 유대인들의 시선에서 그런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접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에베소서를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때만 해도,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적어도 한국인들은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중화민국/세상의 중심인 나라)과 부자(父子)의 나라, 또는 형제의 나라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이방인은 아니었다. 우리 한국인들처럼 민족적 자부심이 강한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예로부터 우리는 중국 이외의 나라들은 모두 ‘오랑캐’로 불렀다. 일본은 왜놈이라고 불렀다. 중국과 한국 이외의 나라들에게 ‘놈’자를 붙였다. 그러다 최근에는 중국조차도 ‘놈’자를 붙여서 부른다. ‘중국놈’.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는 갑자기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다. 밀려난 정도가 아니라,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무할례자, 즉 ‘이방인’으로 불린다.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데, 에베소서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굉장히 안심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즉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이방인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엡 2:13). 이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로 불리는 분에게 관심을 돌리기에 충분하다. 만약 우리가 신약성경, 그 중에 에베소서를 처음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복음서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음서를 열심히 읽어볼 것이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가 피를 흘렸다고 하는데, 그가 흘린 피는 도대체 무슨 효력이 있길래 구원에서 멀리 있던 이방인인 우리들을 이제 하나님과 가까운 존재로, 즉 구원받은 존재로 만드는가? 그의 피흘림, 즉 그의 죽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의 죽음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죽음은 왜 여느 사람들의 죽음과 다른 것일까? 그냥 일반 사람들의 죽음은 그냥 인간의 유한성을 말하는 것일 뿐인데, 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인간의 유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죽음인 것인가? 이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최고의 신약학자 중 한명으로 불리는 루크 티모시 존슨(Luke Timothy Johnson)은 그의 책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 (The Real Jesus)>에서 이런 말을 했다. “복음서의 근본적인 초점은 예수의 이적이나 그분의 지혜로운 말씀이 아니다. 복음서의 공통된 초점은 그분의 삶과 죽음의 성격에 맞춰져 있다. 모든 복음서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이타적인 사랑이라는 동일한 본보기를 보여준다. 또한 네 복음서 모두는 제자도란 곧 그런 메시아적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복음서는 특정한 행동을 하거나 특정한 교리를 배우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삶과 죽음으로 보여주신 바로 그 본보기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Johnson 1996).

 

여기서 그분의 삶과 죽음의 성격이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를 내어줌”을 의미한다. 본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자기를 내어주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엡 2:14-15a).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화해사건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 화해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친구랑 싸운 뒤 화해하는 것, 또는 부부싸움 뒤에 화해하는 것 등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우리는 싸움을 많이 하고 산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싸움은 부부싸움이다. 싸움 뒤에는 평화가 없다. 부부사이에 담이 생긴다. 그런데 그 담이라는 게 아주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담이 쌓여 있었는지 모르게 무너지고, 그리고 아주 간단한 사과 한마디로 그 담은 쉽게 무너진다. 이처럼 화해는 좋은 것이다.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국가적 싸움을 경험한다. 국가 간의 싸움이 발생하면 평화가 없다. 그래서 실제로 국경에 담을 쌓기도 한다. 그러나 그 담도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거나, 그저 관광지로 바뀌고 만다. 국가 간의 싸움도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쌓인 담은 부부싸움에서 새긴 담이나 국가적 싸움에서 생긴 담과는 질적으로 다른 담이다. 그것이 왜 질적으로 다른 담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성경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계시는 한 특별한 사람, 즉 선택된 사람에게 드러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그리고 그 계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전해져서, 한 민족, 한 나라에게 계시된 것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그 한 민족, 그 한 나라를 이스라엘이라고 알고 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만국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고, 그를 축복의 통로하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그에게서부터 모든 인류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으로 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지닌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으로 나셨는지 궁금해한다. 하나님이라면 굳이 유대인이 아니라 한국인을 사용하셔서 그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수도 있을 텐데, 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나셔야 했는가? 바로,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인류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이 하나님 계시의 보편성으로 전환되는 국면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동안 감춰져 있던 하나님의 계시가 이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났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신비하신 분이지만, 즉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지만, 그리고 여전히 우리 가운데서 보이지 않게 활동하시는 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이 눈에 보이도록,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셨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의 몸(자기의 전체)을 내어놓으셨기 대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부른다.

 

유대인(할례 받은 자 / 하나님의 계시를 담지하고 있던 자)과 이방인(할례 받지 않은 자 /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던 자) 사이에 쌓여 있던 담은 부부싸움으로 생긴 담이나 국가간 싸움으로 생긴 담처럼, 우리 인간의 힘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담이 아니라, 저 하늘에 속한 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담은 오직 하나님만 허무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담을 허무셨다.

 

이것(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담이 허물어졌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당황스러운 상황을 가져다 준다. 자칫 잘못하다간, 유대인들이 갑자기, 오히려 이방인이 될 수 있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나라는 더 이상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을 가진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주 보편적인 이름으로 전환을 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라고 하는 민족적 정체성을 갖는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은 나라와 민족을 초월한 매우 보편적인 이름을 갖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에클레시아/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를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본문에서 처음에는 ‘이방인’으로 불린 것을 억울해할 필요 없는 상황을 가져오는 ‘복음’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이제 이 세상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것이 이룬 화해 덕분이다. 이제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인류를 이룬다. 성경은 이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 하셨습니다”(엡 2:15-16).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할례자, 이방인, 구원에서 멀리 있던 자에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선포한다.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한 가족입니다”(엡 2:19). 이것은 정말 좋은 소식이다. 나는 더 이상 소외된 이방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즉 구원받는 자가 되었다는 선포이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이방인이라 부르랴. 아무도 이제 그런 권리를 가진 사람/나라는 없다.

 

이것은 요즘 교회를, 요즘 그리스도인을 부끄럽게 만드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보면, 요즘 교회에서는 이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것 같고,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을 보편적 복음으로 전환시키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은 온데 간데없고, 요즘 교회는,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본인들이 이방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화해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독점하고 있는 양 새로운 유대인이 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드는 일이다.

 

성경은 보편적 복음을 통해 탄생한 새 이스라엘인 교회를 가리키는 다음과 같이 은유적 표현을 쓴다. 1) 그리스도의 몸(자기를 내어주는 존재 / 구원이 발생하도록 하는 존재), 2) 하나님의 성전(구별된 존재 / 존귀한 존재), 3) 그리스도의 신부(사랑 받는 존재), 4) 새로운 인류(다르게 사는 존재 / 모험적 존재 / 세상의 체제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사는 존재). 자기를 내어주어야 할 존재가 다른 이들의 몸(삶)을 착취하는 것을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존귀한 존재가 비천한 존재로 전락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랑받는 존재가 누군가를 미워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르게, 모험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사는 존재가 이 세상의 일에 몰두하느라 삶을 낭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화해사역을 통해 평화를 선물로 받은 자들이다. 그러니, 어디에서든 평화를 이루는 자가 되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눈으로 본 자 답게, 어디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모든 이들이 눈으로 우리들처럼 구원을 보도록, 자기를 내어주고, 존귀한 자로, 사랑하며, 무엇보다 모험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사는 자가 되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받은 우리의 삶은 얼마나 복된 삶인가. 이런 삶을 얼마나 흥미진진한 삶인가.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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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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