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0. 19. 14:07

크리스투스 사피엔스(Christus Sapiens)

(요한일서 2:7-17)

 

1. 시월과 가을은 참 잘 어울리는 말 같다. 구월을 가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좀 설익은 것 같고, 십일월을 가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좀 너무 깊어진 것 같다. 그러나 시월은 가을이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가을이라는 옷이 딱 맞는 몸 같다. 자본주의에 좀 덜 찌들었던 시대의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영혼을 살찌우기 위하여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책 구매량이 늘어나던 계절이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스마트 폰과 넷플릭스에게 신체를 빼앗긴 듯하다. 그래서 요즘 인류를 일컬어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라고 부른다. 스마트 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2. 스마트 폰은 우리를 붙들어 두기는 하지만 머물게 하지는 못한다. 스마트 폰을 붙들고 살지만, 우리는 한 가지 깊은 이야기에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인내심을 잃어가고 공감능력을 잃어간다. 머물러 앉아 누군가의 이야기를 깊이 공감하며 들어주는 것을 지루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요즘 우리들의 인간관계는 매우 겉돌기만 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게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시(詩)를 읽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읽으면 머물 수밖에 없고, 머물다 보면 시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인내심과 이해력, 그리고 공감능력이 자연스럽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페이스북에 ‘詩사랑’이라는 개인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시를 읽으며 잠시 머물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지역의 사람들과 시 읽는 모임을 가져보고 싶기도 하다.)

 

3. 이 가을, 나의 영혼을 위로하며 살찌게 하는 시는 단연코 천양희 시인의 시이다. 천양희 시인은 당연히 본인 고유의 사유와 언어를 통하여 시를 쓰지만, 그의 시는 전혀 개인적이지 않고 매우 보편적 진리와 감성을 펼쳐 보인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위로하는 힘, 즉 내면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와 빛을 비춰주는 능력이 있다. 그녀의 시에 이러한 힘이 있는 이유는 그녀의 시를 읽다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시라는 덫’이라는 시의 한 구절만 봐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지금 네 가망(可望)은 / 죽었다 깨어나도 넌 시밖에 몰라 / 그 한마디를 듣는 것.” 50년 넘게 그녀는 시라는 세상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시라는 언어를 길어 올렸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인간 내면에 깊이 자리잡은 고독을 위로하는 힘을 지녔다.

 

4. 천양희 시인의 시를 한 편만 보자. ‘무너진 사람탑’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잠언은

망언이 된 지 오래다

오래된 것과 낡은 것은 다르고 변화와

변질이 다르다는 말

믿지 않은 지 오래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도전보다는

도약을 꿈꾼 지 오래다

허명도 명성이라 생각하고

치욕도 욕이라 생각 않은 지 오래다

젊은이는 열정이 없고

늙은이는 변화가 없는 지 오래다

예술과 상술을 혼돈하고

시업과 사업을 구별 못 한 지 오래다

고난이 기회를 주지 않고 위기가

기회가 되지 않은 지 오래다

 

그러니 꿈도 꾸지 마라

자존심 하나로 버틸 생각

죄 안 짓고 살 생각

 

그러니 너는 조금씩 잎을 오므리듯 입을 다물라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에 수록)

 

5. 이 시에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세상이 아주 적나라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제목처럼 우리는 사람탑이 무너진 시대, 즉 인간성이 무너진 시대, 인간 냄새를 맡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자존심과 존엄성을 다 버리고, 마음껏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 죄를 크게 지을수록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입을 오므리고 어금니 꽉 깨물며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더 이상 인간이라는 아이덴티티(identity)로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아주 잔인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이 선풍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그러한 세상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로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으며, 어떻게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6. 이렇게 잔인한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 요한일서의 말씀이 들어올까? 어떤 할아버지(요한이라고 불리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까? 더군다나 이 편지는 대략 2천 년 전에 씌어진 것인데, 우리의 마음에는 이 오래된 편지를 받아들일 여유가 있을까? 할아버지는 이 편지를 쓰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절). ‘죄 안 짓고 살 생각’하면 안 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이 편지는 매우 도전적으로 보인다. 죄 안 짓고 살 생각하면 망하는 이 시대에 죄를 짓지 않고 살게 하려는 할아버지의 기획은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7. 게다가 편지를 읽다 보면 할아버지의 사고방식은 매우 극단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나누고, 사랑과 미움으로 나누는 것 같다. 중간이 없다. 빛 아니면 어둠이고, 사랑 아니면 미움이다. 빛이면서 어둠이고, 사랑이면서 미움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주 극단적이다. 빛 아니면 어둠이고, 사랑 아니면 미움이다. 할아버지의 이러한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정말 고리타분해 보인다.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아니 분간하면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을 분간하면 먹고 살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일만 충실히 할 뿐이다.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할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8. 그러면서 편지를 보면 할아버지는 매우 ‘가족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12절에서 14절에 그러한 언어 구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할아버지는 마치 가족 구성원들에게 이야기하듯 언어를 구사한다. 자녀들아(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이것은 분명 할아버지가 속해 있는 공동체, 즉 요한공동체의 자기 이해이다. 요한공동체, 즉 교회는 가족(family)이다. 이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해한 사도 바울의 이해처럼 매우 특별한 이해이다. 생물학적, 또는 법적 테두리 안에서 가족을 구성하는 현대인들의 가족에 대한 인식을 뛰어넘는 매우 특별한 가족 이해다. 교회는 가족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9. 이 가족 안에는 자녀들(아이들)이 있다. 이들은 ‘죄 사함을 받은 이들’이다. 이것은 이제 세상에 새롭게 태어난 이들이라는 뜻이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죄 사함은 기쁜 것이다. 정현종 시인의 시 중에 ‘송아지’라는 시가 있다.

 

내가 미친놈처럼 헤매는

원성 들판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세상에 나온 지

한 달 밖에 안된!

송아지

 

너 때문에

이 세상도

생긴 지 한 달 밖에 안된다!

 

(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에 수록)

 

10.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이 태어나면, 세상은 막 태어난 그 사람만큼 젊어지는 것이다. 세상이 노쇠해지는 이유는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 줄어들거나 없기 때문이다. 요즘 교회들이 노쇠해진 이유, 정현종 시인의 시 ‘송아지’에서처럼 생동감이 넘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부흥을 해도 교회에서 교회로 수평 이동하는 사람들 때문이지, 요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세례가 얼마나 뜸해졌는가. 우리는 날마다 새생명을 갈망한다. 그 새생명을 보면서 먼저 태어난 이들도 다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가장 기쁠 때는 새생명이 탄생하는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새로 태어난 이를 믿음으로 받아낼 때이다.

 

11. 이 가족 안에는 아비들(부모들/엄마와 아빠)이 있다. 이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하나님,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이들이다. 이들은 그것에 knowledgeable(경험적 지식이 많다) 하다. 그래서 이들은 방금 막 태어난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다. 교회는 갓 태어난 아이들만 있는 곳이 아니라, 그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는 영적인 부모들이 있어야 하는 곳이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은 경험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손에 키워지는 아이들, 이제 막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태어난 영적인 자식들을 능수능란하게 키울 수 있다.

 

13. 또한, 이 가족 안에는 청년들이 있다. 이들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고, 그래서 악한 자, 흉악한 자를 이긴다. 청년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네아니스코스’는 단순히 젊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싸움터에 나갈 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아비들에게는 지혜(wisdom)가 있지만, 청년들에게는 힘(strength)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은 악한 자들을 물리칠 수 있다. 이렇게 강한 청년들이 없으면 하나님의 가족은 악한 자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 안에는 강한 청년들이 있어야 한다.

 

14. 우리가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가족을 구성하는 아이들, 아비들, 청년들은 육신의 나이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족은 연차적 나이로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인간의 육신의 나이와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의 구분이 잘 겹치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젊은 사람이 영적으로 젊을 때 더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신체 나이가 늙으면 아무리 영적인 나이가 젊어도 행동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그래서 교회는 젊은 이들을 하나님 가족의 청년들로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구한말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은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15. 가장 이상적인 것은 육신의 나이도 젊고, 영적인 나이도 젊은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주의 일은 육신의 나이와는 크게 상관없이 영적인 젊음으로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갈렙(Caleb)이 있다. 여호수아와 함께 출애굽 제 1세대 중 유일하게 가나안 땅을 두 발로 밟은 갈렙은 가나안에 입성했을 때 육신의 나이가 80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던 아낙 자손이 차지하고 있던 헤브론을 가리키며 ‘이 산지를 나에게 주소서’라고 여호수아에게 간청한다. 자신이 가장 어려운 일을 감당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0-12).

 

16. 우리는 세상을 행해서는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말하며 자기의 젊음을 자랑하고 유지하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는 ‘이 나이에 내가 어떻게’라고 하면서 마치 자기의 젊음은 지난 것처럼, 또는 없는 것처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가족은 육신의 나이로 구성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 믿음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져 새벽 이슬 같은 청년으로 머물기를 간구해야 한다. 나이 젊은 사람이 더 많이 섬기는 게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섬기는 신비로운 현상이 발생하는 곳이 하나님의 가족, 교회이다.

 

17. 요즘 사람들을 일컬어 ‘포노 사피엔스’라고 부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불리면 안된다. 우리는 ‘크리스투스 사피엔스(Christus Sapiens)’라고 불려야 한다. ‘포노 사피엔스’가 스마트 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리듯, 크리스투스 사피엔스’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즉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내가 주조한 개념이다). 우리는 요즘,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는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에 따라 우리는 바로 그 마음 둔 것에 의해 살아갈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혹시 나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 있다면 마음을 돌이켜,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불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자.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보자.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부질없이 지나가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리와 함께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 끝날까지, ‘크리스투스 사피엔스’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게 되길!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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