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4. 21. 07:00

열어 주소서

(누가복음 24:44-49)

 

누가복음, 하면, 세 가지의 이야기가 떠올라야 한다. 첫째는 ‘탕자 이야기’, 둘째는 ’삭개오 이야기’ 그리고 셋째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이다. ‘탕자 이야기’와 관련된 찬송은 ‘나 주를 멀리 떠났다’가 있고, ‘삭개오 이야기’와 관련된 찬송은 ‘보고싶어 보고 싶어 예수님 얼굴~’이 있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찬송은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가 있다. 성경의 유명하고 중요한 이야기들은 대개 회화(그림)이나 음악으로 표현되어 있다.

 

누가복음 24장은 부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죽은 후,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준비한 향품을 들고 예수의 무덤을 찾는다.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이들은 그 사실을 열한 사도에게 알리고, 그 중 베드로는 여인들의 부활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무덤으로 달려가 죽은 예수를 쌌던 세마포만 남은 빈무덤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는 길게 이어진다. 두 제자에게 나타난 예수는 그들과 함께 동행하며 그들에게 부활의 현실을 알려주고, 두 제자는 열한 사도에게 달려가 예수의 부활을 알린다. 그러는 중 예수는 그들에게 나타나 부활의 현실을 알린다. 여인들의 무덤 방문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로 이어지고, 열 한 사도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며 그들에게 부활의 현실을 알려주시는 예수의 선포로 끝나는 이 부활 이야기의 정점은 44절에 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44절).

 

예언의 성취. 이것은 누가복음이 가진 중요한 신학이다. 모세의 율법(오경)과 선지서, 그리고 시편을 비롯한 성문서, 즉 모든 구약성경(히브리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는 신학, 이것은 놀라운 신앙고백이다. 44절의 구절 중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라는 말은 ‘신적 당위성이나 필연’을 말할 때 등장하는 단어이다. 한국어 어휘에는 이것을 대치할 만한 단어가 없다. 가령 이런 것이다. 우리 나라 말에, ‘용안’이라는 말이 있고, ‘수라상’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임금(왕)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이다. 이 말을 아무에게나 사용하면, ‘역모’로 죽는다. 이처럼,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동사는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질 때” 쓰는 단어이다.

 

예언의 성취는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늘에서 이룬 뜻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부활은 신적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하늘에서 이룬 뜻이 성취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큰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어떠한 것이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부활 사건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부활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처음부터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의심했다. 예수를 가까이서 따라다녔던 사도들도 처음에는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예수께서 부활의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선포하신 뒤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을 때”였다. 다른 말로 해서, 예언의 성취,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는 일이라고 고백하며, 또한 그것을 증언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삶의 일상이 기도 안에 있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침에 기상하자 마자 하루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성령의 능력 안에 있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하고, 출근하면서도 기도하고, 업무를 시작하면서도 기도하고,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도 기도하고, 밥 먹을 때도 기도하고, 일과를 마치면서도 기도하고, 잠 자리에 들면서도 기도하고, 잠든 중에서도 이 잠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때그때 매순간마다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도를 하루 중 정해진 시간에 몰아서 하거나,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몰아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그것보다 더 좋은 기도의 습관은 그때그때 매순간마다 짧게 기도하는 것이다. 000 집사님 가게에 심방 갔을 때 생긴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옆 가게로 잔돈을 바꾸러 간 000 집사님이 돈을 바꾸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갔더니 얘네들 기도하는 시간이에요. 바닥에 양탄자 깔아 놓고 기도하고 있는데, 얘네들한테 많이 배워요.” 여기서 얘네들은 누구겠는가? 무슬림들이다. 무슬림들은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메카를 향해 양탄자를 깔고 기도한다. 기독교인이 무슬림처럼 할 필요는 없지만,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계속하여 드리는 일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해야한다.

 

4월 말에 책이 한 권 나온다. 공저한 책인데, 그동안 가스펠 투데이(Gospel Today)에 실린 글을 모은 책이다. <예술신앙의 정원>, 이 책에 내 글이 7편 실린다. 책출판이 막바지에 있어 마지막으로 교정을 부탁하는 메일과 함께 출간되는 책의 교정판이 왔다. 오랜만에 진지하게 내 글을 읽었다.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읽으면서 든 생각은 ‘내가 이런 글을 어떻게 썼을까’이다. 도저히 내가 쓴 글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감사’였다. “나, 이런 감동적인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야”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감사의 고백이 나왔다.

 

사실 그렇다. 답답한 현실을 보면, 나의 부족함을 보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내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어쩌다 일이 잘 되면, 우쭐대기 십상이고, 일이 안 되면 낙심하기 십상이다.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우쭐과 낙심의 널뛰기를 하는 듯하다. 여기엔 감사와 평안이 깃들기 힘들다. 감정의 소모, 체력의 소모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쳐가는 삶을 살아간다.

 

요즘은 특히나 비관적인 생각과 냉소적인 마음을 갖기 쉬운 세상이다. 온통 들려오는 뉴스는 ‘죽음’에 대한 뉴스, ‘폭력’에 대한 뉴스, ‘미움’에 대한 뉴스, 등 사람의 몸과 영혼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뉴스들 뿐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는 안 되고, 이 세상은 소망이 없으니, 그냥 나나 내 가족이나 잘 챙기자 하면서 이기적인 마음으로 변한다. 그러한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마음이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범죄로 표출된다. 우리가 지금 ‘아시아 혐오 범죄’의 타겟이 되어 있어 피해자인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안에도 비관적인 생각과 냉소적인 마음에서 오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얼마나 깊은 혐오가 자리잡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비관과 냉소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이 열리는 것이다. 매일, 매순간 기도하는가? 무슨 기도를 하는가? 신적 당위성을 위해서 기도하는가? 뜻이 하늘에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가? 우리는 기도하면서 상상해야 한다. 부활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은 비관과 냉소 속에서 자기만 살 궁리를 하겠지만,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비관과 냉소를 거부하며, 비록 지금 현실에서는 비관과 냉소가 판을 치지만, 죽음(가장 큰 비관과 냉소)을 이기신 예수께서 이미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믿고,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정혜윤의 책 <앞으로 올 사랑> 마지막 챕터에 보면 ‘바빌로프(Nikolai Ivanovich Vavilov)’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기근과 감염병은 언제나 인류에게 큰 위협이었다. 러시아도 늘 기근과 감염병에 시달리는 나라였다. 바빌로프는 어려서부터 식물 표본과 어학 공부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는 나중에 특히 종자에 매력을 느껴 종자를 모으기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종자를 모은다. 그가 종자를 모으면서 한 일은 “이상 기후로부터 작물을 지켜내는 법을 아는 농부들을 찾아 인터뷰를 했고 종자 심는 법을 배워 꼼꼼히 기록”한 일이다.

 

레닌 그라드에 식물 연구소를 차려 종자를 모으고 종자를 연구하여 기근을 퇴치하려는 꿈을 가졌던 바빌로프에게 큰 시련의 시간이 찾아온다.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그를 시기하던 사람들에 의해 바빌로프는 잡혀가고, 바빌로프가 없는 상황에서 곧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종자를 지켜내기 위한 바빌로프의 동료들은 동분서주한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하면 2백만 점이 넘은 보물 같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을 파괴할 거라 생각하고 관련자들 수백명을 투입해 박물관의 작품들을 옮기는 작업을 했지만, 정작 히틀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아니라 스탈린의 무관심 속에 놓여 있던 바빌로프가 모은 38만개의 종자였다.

 

누가보다도 비관적이고 절망적이고 냉소적인 상황이었다. 바빌로프는 그를 시기하는 세력들에 의해 역적이 되어 총살형 선고를 받고, 종자를 보호해야할 스탈린은 종자에 관심이 없었고, 전쟁은 발발하여 독일군은 몰려오는 상황이었고, 추웠고, 배고팠다. 그러나, 바빌로프의 동료들은 끝까지 종자를 지켰다. 그 상황을 전하고 있는 문장은 이렇다.

 

연구원들은 문을 닫아건 채 얼어붙을 것 같은 음습하고 차가운 지하실에서 남은 종자와 씨감자를 지켰다. 추위로 몸이 얼어붙고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교대로 근무하며 계속 종자를 지켰다. 바빌로프의 동료 중 가장 헌신적이던 아홉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들은 끝내 자신이 돌보던 씨앗을 먹지 않았다. (276쪽).

 

굶주려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어떻게 씨앗을 먹지 않았을까?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의 한 작가가 바빌로프의 동료였던 바딤 레흐노비치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 인터뷰에서 여러 달 굶주리는 동안 어떻게 씨감자를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었냐는 질문을 받은 레흐노비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하는 게 힘들었죠. 매일 아침 일어나기도 힘들었고 손발을 움직이기도 몹시 힘들었답니다. 하지만 씨앗을 먹지 않고 견디는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그럴 먹는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씨앗에는 나와 내 동지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들어 있으니까요. (278쪽)

 

이에 대해, 정혜윤은 이런 문장을 이어간다. “그들은 씨앗이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되고 무화과나무가 되고 오렌지와 올리브 나무가 되고 숲이 되고 밀밭이 되는 모습과, 그것들이 빚을 받아 크고 튼튼해지는 모습과 벌과 나비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270쪽). 비관과 냉소 속에서, 지키고 있던 씨앗 종자들을 다 먹어버리고 함께 공멸할 수도 있었던 바빌로프의 동료들은 비관과 냉소가 가져다주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자신들을 내몰지 않고, 씨앗이 품고 있는 그 가능성들을 상상하며 끝까지 그것들을 지켜냈다. 죽음으로!

 

비관과 냉소가 판을 치고, 그 어두운 마음 때문에 폭력과 혐오가 판을 치고, 오직 자기와 자기 가족들 만의 안위를 챙기려는 이기심이 극도로 판을 치는 이 시대에, 부활 신앙이 더 필요한 이유는 그 비관과 냉소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서 갖게 되는 비관과 냉소를 물리치고,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열어 주시면,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안 될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하기 전에, 기도하고 하라. 그러면 그 일을 마친 뒤에,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해냈지?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 주님께서 이 일을 하도록 열어 주셔서 할 수 있는 거야!”라는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그러한 감사가 쌓이면, 다른 사람을 혐오할 일이 무엇이 있는가? 비관과 냉소 가운데 폭력과 혐오와 극심한 이기주의로 치달을 수 있지만, 부활 신앙 안에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주님께서 열어 주실 것이고, 주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셨다는 감사의 고백이 쌓이고 쌓이면,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감사를 나누게 될 것이다.

 

부활의 신앙 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하기 전에, 짧게 기도하는 습관을 세우라. “주여, 열어 주소서. 주여,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주여,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 일을 행하게 하소서. 주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비관적인 생각과 냉소적인 마음이 판을 치는 시대에, 부활 신앙을 통해 비관과 냉소를 물리치고, 매순간의 기도를 통해 삶을 감사와 평안으로 채우며, 냉소와 비관을 잠재우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 세상을 다시 세워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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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4. 13. 11:59

부활의 증언

(사도행전 4:32-35)

 

얼마전 이런 글을 써서 포스팅 한 적이 있다.

 

[요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 책을 보다 이런 문장을 읽었다. "I was country, when country wasn't cool(컨츄리 음악하는 것이 멋지지 않았던 때에 나는 컨츄리 음악을 했다(또는 컨츄리 음악을 좋아했다))." 이것은 바바라 만드렐(Barbara Mandrell)의 컨츄리 송의 가사인데, 제임스 스미스가 존 카푸토를 묘사하면서 가져다 쓴 문장이다. 그는 존 카푸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Caputo was an Augustinian before being an Augustinian was cool(카푸토는 어거스틴주의자가 되는 것이 멋졌던 시기 이전에 어거스틴주의자였다)"

 

이런 문장을 보면서,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나는 모태신앙이고, 1930년도부터 기독교신앙을 가지게 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이 멋진 일이 되기 이전부터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기에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역사에서(또는 미국 역사에서) 현재만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별로 자랑스럽지 못한 때가 있었나 싶다.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고, 목사를 먹사라 하며, 기독교는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회악이라고 비난하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훗날, 나는 오늘날을 뒤돌아보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멋지지 않았던 때에도 그리스도인이었다. I was a Christian when being a Christian wasn't cool." 이렇게 고백하기 위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 또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전에도 그리스도인이었고, 오늘도 그리스도인이며, 내일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사실 이런 고민은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나만, 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만 이런 고민을 한 것이 아니다. 여호수아서에서도 비슷한 고민과 고백이 등장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나는 이전에도 그리스도인이었고, 오늘도 그리스도인이며, 내일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동일한 맥락의 고백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러한 고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전하는 사도행전을 가만히 읽다 보면, 그때(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와 지금 시대 간의 신앙의 괴리 현상이 발견되어 적지 않은 당혹감을 경험하게 된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이때의 경험은 육적 경험과 더불어 그것을 넘어선 영적 경험이다)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키워드는 ‘부활의 증언’이었다. 이것은 그들 만의 독특하고 유일회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다. 부활의 증언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자, 또는 믿는 자에게서 발생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우리의 삶 가운데, 이 보편적인 현상이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리의 삶의 ‘키워드’는 무엇인가?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의 삶의 키워드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나의 삶의 키워드는 ‘부활의 증언’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물론 교회에 와서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부활의 증언’보다 ‘성공’이 삶의 키워드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느덧 이렇게, 신앙과 일상의 영역을 분리하여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신앙의 영역에서는 ‘부활의 증언’이 키워드 일지 몰라도, 그것이 삶의 전영역의 삶의 키워드가 되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한 혼란과 비극을 가져오고 있다.

 

부활은 신앙의 영역에서만 발생한 일이 아니다. 부활은 삶의 전영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부활은 모든 시공간을 덮는 사건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을 우주적 사건이라고 칭한다. 이 세상 구석구석 부활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부활 사건은 땅 끝까지 전해져야 하는 보편적 사건(누구나 알아야 하고,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성령을 받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증언은 사도행전 2장 14절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광장에 서서 소리 높여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다. 베드로와 열한 사도가 부활의 증언을 마치자,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어딘 가에서는 이러한 일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는 더 이상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곳에서, 어떤 시대를 살고 있길래, 이런 일을 경험하기 힘들까. 이런 생각을 하면, 설교자로서 무력해지기도 한다.

 

사도행전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부활의 증언을 했을 때 사도들을 비롯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았다. 3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치는 이야기는 재미난 것을 보여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쳐주는 이야기는 주일학교 때 들은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찬양 때문이다.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네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사건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공의회에 잡혀간다. 그런데, 공의회에 잡혀간 이유는 그들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쳐 주어서가 아니다. 그 상황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전한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되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행 4:1-2). 베드로와 요한이 공의회에 잡혀간 이유는 ‘부활의 증언’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즘 예수의 부활의 증언을 하다가 핍박을 받는 일은 없다. 적어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는 그렇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부활의 증언’을 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4장에 전개되고 있는 이야기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생소한 풍경이다. 다른 부활의 증언 사건들은 실제 우리 삶 속에서 발생한다고 해도, 그렇게 큰 저항감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핍박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본문에서 증거되고 있는 풍경이 현실에서 성취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저항이 심할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누가는) 경제적 분배 행위(경제적 평등/요즘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경제적 불평등과는 달리)를 ‘부활에 대한 증거’로 제시한다.

 

우리는 정치적 핍박은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경제적 평등은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의 증언을 반쪽만 하는 것이다. 부활의 증언은 정치하고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경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 우파, 또는 기독교 보수주의(또는 복음주의)의 사악함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부활의 증언을 정치하고만 연결시킨다. 그들은 부활의 증언을 경제적 평등과 연결시키는 것을 꺼려한다. 이것은 비겁한 일이다. 그들은 그렇게 ‘성경, 성경’하면서도 실제로 성경에서 증언되고 있고, 부활의 증언인 경제적 평등을 철저하게 외면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평등을 마르크스주의로 생각하면, 그것은 부활의 증언을 매우 오해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와 기독교의 경제적 평등은 닮은 구석이 있지만, 근본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는데,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적 평등(공산주의)는 무신론적 경제의 평등이지만, 기독교의 경제적 평등은 명백한 ‘부활의 증언’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적 평등은 모더니티의 산물이지만, 기독교의 경제적 평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선물’이다.

 

본문을 차근히 다시 읽어보면 이렇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33-35절). 여기서 보면, 주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의 실제적인 결과, 열매, 선물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부활의 증언이 온전히 전해지는 곳에 나타나는 현상 중 매우 고무적인 현상은 바로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복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부활의 증언이 온전히 선포되는 곳에 오는 것은 마음의 평안이 아니라 물질의 평등이다. (부활은 우선적으로 심리학이 아니라 경제학이다!)

 

사도행전은 부활의 증언을 통해 주님의 선물로 임하는 경제적 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뒤, 부활의 증언이 긍정적으로 작동한 예와 부정적으로 작동한 예를 하나씩 전하고 있다. 긍정적으로 작동한 예는 바나바라 일컬어졌던 레위 사람 요셉의 이야기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는 부활의 증언을 듣고 자신의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둔다. 부정적으로 작동한 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통해 제시되는데, 그들은 부활의 증언을 듣고 소유를 팔아 그 값을 사도들에게 온전히 내놓지 못하고 얼마간 감추었다가 결국 생명까지 빼앗기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요즘 부동산 문제로 대표되는 경제적 불평등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부활의 증언’이 얼마나 희귀한 세상이 되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더욱이 지구에서 가장 부자 나라들은 대개 기독교 국가이거나 기독교 비율이 높은 나라들인데, 그러한 부자 나라들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더 심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부자 나라들과 가난한 나라들 사이에 경제적 불평등이 심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 만 보더라도,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증언’을 입으로만 하고, 삶으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를 보게 된다. ‘부활의 증언이 실종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경제적 평등은 정치 또는 국가 정책으로 오지 않는다. 정치 또는 국가의 권력은 경제적 불평등을 더 조장할 뿐이다. 그것이 정치 또는 국가 권력이 지닌 현실적인 한계이다. 그들은 힘 있는 자들을 우선시하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평등은 부활의 증언을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경제적 평등은 부활의 증언을 삶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온다. 부활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부활의 현실을 사는 자는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는다. 지금 이러한 부활의 증언을 들으면서 이러한 부활의 증언이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부활의 현실성을 전혀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경제적 평등이 부활의 증언이었다’는 엄연한 성경의 증언은 이 시대에 가장 외면당하는 부활의 증언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성경을 금쪽같이 여기면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은 모순이고 비극이다. 예수 믿으면 꿈이 이루어지고, 잘 먹고 잘 살게 되고, 평안이 온다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경제적 평등이 부활의 증언이라고, 부활의 증언을 하는 자, 또는 부활의 증언을 들은 자는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멋지지 못한 이유는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잘 먹고 잘 살지 못해서, 평안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멋지지 못한 이유는 부활의 증언이 경제적 평등으로 이어지는 부활의 현실성이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사회 속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 대통령이 되고, 아무리 정부에서 훌륭한 정책을 내어놓아도, 정치나 국가가 경제적 평등을 이룰 수 없다.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한다. 경제적 평등은 부활의 증언이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증언을 현실로 살아간다면, 정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증언한다면, 선물처럼 임하는 것이 경제적 평등이다. 경제적 평등은 정치로 오는 것이 아니고 신앙으로 온다. 그래서 신앙은 그 어떤 정치보다 능력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부활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자기의 것(property)’라 주장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선포하며, 최선을 다해 나눔의 삶을 살자. 그리하여 정치보다 신앙이 위대하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자. 그러면, 초대교회에서 발생했던 바로 그 일, “부활의 증언을 보고들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의 역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개독교라고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에 칭송을 받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질문한다. 당신의 삶의 키워드는 무엇인가? 성공인가, 부활의 증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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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3. 30. 10:36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서 죽으셨나?

(마가복음 11:1-10)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가 미국 전역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가장 이득을 보고 있는 산업은 총기산업이다. 나는 이 뉴스를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미국 내에서도 아시안 커뮤니티는 별로 총기 구매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 미국 언론에서 조사한 총기 판매 통계를 보면, 20 퍼센트 정도의 아시안들이 총기를 처음 구매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아마 여러분들도 아시아 혐오 범죄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총기 구매에 대한 욕구가 증가했을 것이다.

 

불과 3년 전만해도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총기규제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위가 무색할 정도로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을 거치면서 미국인의 총기 구매율을 급증했고, 급기야 총기 구매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아시아인들도 총기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법은 멀고 총은 가깝기 때문이다. 혐오 범죄에 대한 가중처벌법을 제정하여 시행하여도, 법이 직접적으로 사람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인 총기 소지를 선택한다.

 

미얀마에서 들려오는 쿠데타 군부의 강경진압으로 인한 미얀마 시민들의 사망자 소식을 듣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가뜩이나 전세계가 바이러스로 인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힘을 합쳐도 모자를 판에 미얀마 사태를 놓아두고 국제사회가 분열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일도 너무 힘들다. 우리는 매일 같이 촛불을 켤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쳤던 것처럼, “주님,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가슴 찢어지게 외칠 수밖에 없다.

 

네 개의 복음서가 예수님의 사역을 그리는 방식에서는 각각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 얼개는 같다. 예수님의 사역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길’, 또는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가신 길(또는 여행)의 시작은 갈릴리였고, 그 길(여행)의 끝은 예루살렘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의 삶 자체가 길을 걷는 것, 여행이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복음서의 처음 부분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시는 말씀처럼, 그 길을 따라 나서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나선 자들의 삶은 필연적으로 ‘길 가는 자의 삶, 여행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는 여행처럼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여행의 끝은 결국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일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길래, 예수님의 길은 끝, 여행의 끝은 예루살렘이었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우리의 삶의 길, 여행의 끝도 예루살렘일 수밖에 없는가? 예루살렘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천년을 이어온 거룩한 땅이었다. 그곳이 거룩한 땅인 이유는 그곳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단순한 신전이나 건물이 아니었다. 구약에 전개되고 있는 성전신학을 보면, 성전은 이 세상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세상의 중심. 세상의 배꼽. 옴팔로스라고 불린다. 그리스 신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의 중심이 어딘지 알고 싶었던 제우스가 독수리 두 마리를 다른 방향에서 날렸는데, 그 두 독수리가 만난 지점, 그곳이 바로 델포이였다. 그곳에는 우리가 잘 아는 델포이 신전이 세워져 있다. 그 세상의 배꼽은 인간이 신과 만나는 거룩한 장소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단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매개해 주는 곳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은 신앙의 중심지였고, 순례의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기쁨의 길이었다. 그들은 늘 그곳에 가는 것을 동경했다. 그러한 마음들이 시편 120편에서 134편에 아주 잘 담겨 있다. 그 중 우리에게 익숙한 시편 한 편만 보면 이렇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무주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로다

(시편 121편)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은 어떤 여행이었을까? 아주 따스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집에 가는 길이었다.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가? 집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멋지고 좋은 곳에 여행을 갔다 할지라도, 결국 가장 가고 싶은 곳은 집이다. 우리는 늘 그 길을, 그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집으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여행.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서서 ‘내 아버지(나를 가장 사랑하시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가 계신 집으로’ 가는 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계신 곳, 예루살렘,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버지가 계셔야 할 집에 강도가 든 것이다. 예루살렘은 아버지가 계신 곳이기에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형제자매가 연합하여 서로 사랑하고 서로 생명을 지켜주며, 서로 기뻐하고 즐거워야 하는 곳인데, 불의한 자들(강도 같은 자들)이 권세를 쥐고 가족들을 억압하고 못살게 굴고 있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소위 성전 정화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자.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마가복음 11:15-18)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간 이유와 예루살렘에서 죽은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예루살렘은 ‘내 아버지가 계신’ 집이기 때문에 간 것이고, 그곳에서 죽은 이유는 아버지 집을 차지하고 온갖 나쁜 일을 벌이고 있는 강도 같은 세력들하고 싸우다가 죽은 것이다. 예루살렘, 아버지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정의와 사랑에 힘써야 마땅하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정의와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이 인간의 불의/죄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 고발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미가서와 이사야서 두 군데만 보자.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며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미가 3:1-3)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이사야 1:21, 23)

 

예루살렘, 옴팔로스, 우주의 배꼽, 하나님 아버지의 집. 이곳에서 발생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정의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며 고아를 신원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다. 한마디로, 서로의 생명을 아껴주고, 서로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며, 서로의 삶을 보듬어주는 일이 있어야 한다. 왜? 그곳은 아버지의 집이니까. 예루살렘이니까. 그런데, 집에 간 예수님은 기대와는 달리 정반대의 상황을 목격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다. 1) 도망가든지, 2) 집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과 한통속이 되든지, 아니면 3) 그들과 맞서 싸우든지.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집(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가면서 계속해서 물었다. “어떻게 할꺼니?”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 10:38). 여기서, 잔과 세례는 죽음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정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원했고, 예수님의 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그 좌우편에 강도들 대신에 야고보와 요한이 달렸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 그렇기에 본인의 집이기도한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집에 갔는데, 그곳에서 지금 강도가 불의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 강도들 때문에 가족들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도망을 치거나, 그 강도들과 연합하여 가족들을 헤칠 사람이 있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가족이 아니거나 가족으로서의 자격이 없거나,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즉, 아버지의 집, 본인의 집에 도착하여 행하신 일은 아버지 집에 마땅히 있어야 할 정의와 사랑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지를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지키면서 두 눈으로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의 이야기이다. 사도행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곳에 모여 있으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에 정의와 사랑이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는 위에서 선지자들이 비난한 예루살렘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소개된다. (예루살렘의 회복)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3-47)

 

초대 교부 중 한 명인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소개할 때 그들의 합리적 논증의 힘을 보라고 외친 게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를 보라!”고 했다. 그들이 얼마나 미워하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라는 이 말, 너무나도 마음에 사무치는 말이다. 지금 세상을 보면, 또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 말이 거꾸로 들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들이 얼마나 서로 미워하는가를 보라!”

 

“Hate Crime!” 미워함의 범죄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미움이 가득한 세상). 2천년전 예루살렘, 아버지의 집에 도착한 예수가 목격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Hate Crime’(미움 자체)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의 삶 속에 가져다 주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Hate Crime’을 발생시키는 세력들과 싸우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리고 부활하시어,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어, 서로 미워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공동체를 예루살렘, 아버지의 집에서부터 다시 세워나갈 것을 부탁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선 우리들, 우리는 어떠한 교회를 세워나가고 있으며, 어떠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가? Hate Crime이 판을 치고 있으니까,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가? 아니면, 그렇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가? 또는 본인을 지키기 위하여 총기 구매를 고려하고 있는가? 우리가 정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다른 곳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집이고, 나의 집이라는 생각, 우리의 이웃들이 그냥 남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가족이라는 생각을 갖는다면(실제로,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형제자매인 것을 고백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라와 민족이 구분되지 않는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이 세상, 우리의 집에서, 우리들의 형제자매들, 우리 가족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불의한 일에 대하여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얼마나 서로 미워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는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가. 우리의 사랑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우리의 사랑을 보고 사람들이 우리처럼 사랑하기 원하는가. 우리는 사랑의 히스토리(역사)를 써나가고 있는가.

 

Hate Crime의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그리고 Hate Crime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는 한 사람으로서, Hate Crime에 맞서 싸우며,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 어려운 시대를 건너기를 다짐한다. (혹시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나는 끝까지 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할 것이다.) 우리 서로 사랑하며, 함께 그 길을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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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3. 16. 04:36

높이 들린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3:14-21)

 

작년 12월 14일 첫 백신접종이 시작된 이래, 연일 뉴스는 백신접종 관련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WHO에서 팬데믹을 선언한 날(2020년 3월 11일) 이후 일년이 지나 그동안 바뀐 인류 역사의 풍경을 보면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 중에서 언론사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 사람 중, 5명에서 1명 꼴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가족이나 친구를 잃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는 일은 고통에 휩싸이는 일과 같다. 그러므로, 지난 일년 동안 지구적으로 얼마나 큰 고통이 발생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사실, 뉴스 기사는 고통받은 이들에 대하여 숫자적 통계만 낼 뿐이지, 그들이 경험한 고통을 직접 보여주지는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물량적으로 계산할 수 있겠는가. 고통 지수를 100으로 설정해 놓고, 이번 팬데믹을 통해 많은 이들이 경험한 고통을 95정도로 표현한들, 그 고통의 숫자가 고통 당하는 이들의 실제 고통을 전혀 전달해 주지 않는다. 고통은 통계가 아니고 계량화할 수 없는(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이고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범죄도 결국 팬데믹 동안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표출이다. 팬데믹 동안 이래저래 억압된 감정을 나쁜 방식으로 표출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보면서, 민수기 21장에 소개되고 있는 ‘불뱀 사건’을 떠올려 본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상할 때마다 불평과 불만을 쏟아 놓으며 ‘반출애굽 주제(anti-exodus motif)’를 꺼내 들었다. 불뱀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광야 길을 걷는 것이 가뜩이나 험하고 힘든데, 에돔 땅을 우회해서 갈 생각을 하려고 하니 그들의 마음이 상했다.

 

마음이 상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들어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한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민 21:5).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찮은 음식’이라고 칭하는 것은 ‘만나’이다. 광야에서 굶지 않고 만나를 먹으면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하찮은 것이라 폄하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비난한다.

 

팬데믹 기간 동안 혐오 범죄를 비롯해 각종 범죄를 범하는 이들의 마음이 이런 것이다. 미국에서, 거의 3천만명 되는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53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은 팬데믹 가운데서도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인데, 죽지 않거나 병원에 누워 있는 게 아닌,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혐오 범죄를 일으킨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불경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죽은 자가 그렇게 많고, 병원 신세를 지는 자가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풍경을 TV를 통해 연일 보는데도 불구하고, 혐오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만나를 하찮게 여겼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불경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팬데믹 시대에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 팬데믹 시대에 병원 신세 안 지고 이렇게 건강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 죽음이 난무하는 이 디스토피아 시디에 이렇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죽은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몸이 조금이라도 더 성하거든, 그들의 죽음과 그들의 고통을 헛된 것이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혐오 범죄’ 같은 죄악을 저지를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을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의 본문 말씀은 니고데모와 예수님 간의 대화 속에 담긴 말씀이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절)은 명백하게 위에서 언급한 민수기에 등장하는 ‘불뱀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민수기 21장의 불뱀 사건은 참 기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 놓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시고, 불뱀에게 물려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그에 대해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하자, 하나님은 놋뱀을 장대에 달라 높이 세우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모두 불뱀에게 물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선포하신다.

 

이것은 과학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굉장히 낯선 이야기이다. 누군가 성경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놓은 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고통받는 이들에게 그것을 쳐다보면 바이러스가 낫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것을 정말로 믿고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놋뱀을 쳐다보기 보다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하는 비난이 먼저 쏟아질 것이다. 사실, 이러한 연장선 상에서 우리 시대의 복음은 많은 이들에게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실제로 기독교는 숫자적으로 쇠퇴하고 있다(숫자적 쇠퇴가 곧 기독교 복음의 쇠퇴는 아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기독교에 몸 담고 있는 우리들은 바보들인가.

 

놋뱀 사건과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연결시키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들으면 이해가 되는 것 같다가도 이내 미궁에 빠지고 만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자기 자신의 수난을 이미 예고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절)에서 ‘들림(휩소오)’이라는 말은 ‘십자가에 들려지는 고난’을 말함과 동시에 ‘높이 들려 존귀하게 되는 영광’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들려야’ 하는가?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들림’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십자가를 쳐다보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과학시대를 사는 이들을 오히려 실족시키는 미신을 생산해 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들림은 미신이 아니라 복음이다. 예수의 십자가 들림은 실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들려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인간들의 ‘영생’을 위해서이다. 여기서 우리가 영생에 대하여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생은 양적 구원이 아니라 질적 구원이라는 것이다. 영생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육신적 생명의 연장이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생명의 질적 변화이다.

 

그 질적 변화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은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첫 이야기로 배치해 놓았다. 양적 구원은 물이 계속해서 불어나는 것을 말하겠지만, 질적 변화는 물이 계속해서 불어나는 게 아니라,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생명의 경험이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 자체를 ‘믿음’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들림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한다.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모세가 장대에 높이 매단 놋뱀(구리로 만든 뱀) 자체에 무슨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구원의 능력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 믿음은 우리의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게 한다. 놋뱀 자체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 하지만 놋뱀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실제적으로 작동하는지, 1972년 남미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얼라이브(1993년 상영)’를 통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 우루과이의 한 대학 럭비 팀이 시합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다 안데스 산맥에서 추락한다. 승객과 승무원 포함해 45명이 타 있던 비행기의 추락으로 인해 16명만 살고 나머지 사람들은 죽는다. 식량이 얼마 없던 터라 눈 덮인 안데스 산맥 위에서 살아남은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사의 위기에서 그들은 72일을 버텼는데, 식량이 다 떨어지자 결국 죽은 이들의 살을 떼어서 먹었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는 안 나오는데, 나중에 생존자들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인육을 먹을 때 어떠한 마음가짐이었는지 밝히는데, 그들은 인육을 먹는 것을 하나의 성만찬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죽은 동료의 살이 예수님의 살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남미에는 가톨릭 신자가 많은데, 그들이 가진 가톨릭 신앙, 성만찬을 예배의 중심으로 두는 신앙이 동료의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을 거룩한 성만찬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들은 동료의 인육을 동료의 인육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살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이 실제로 우리 삶에서 발생하는 ‘믿음’인 것이다. 동료의 살을 예수의 살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인육을 먹을 수 있었겠는가. 먹었더라도 그들의 삶에 어떠한 감사가 있었겠는가. 그러한 믿음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동료의 살을 먹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평안한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뷰를 통해 밝힌 그들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매우 감사하며 살았다.

 

지금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구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백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연일 뉴스에서는 백신을 장대에 높이 매달아 백신을 맞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선전을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백신을 맞으면서 백신을 만든 제약회사가 구원해 준 것인 양 생각할 수 있고, 어떤 이들은 백신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공짜로 투약해 주는 국가가 자신들을 구원해 준 것처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발생하는 모든 구원 사건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알 것이다. 백신 접종을 앞두고 그 백신 접종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놋뱀 사건과 십자가 사건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은 복되다. 백신 접종을 마친 후, 그것을 놋뱀 사건과 십자가 사건과 연결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되다. 얼바이브 영화의 실제 주인공들처럼 자신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구원 사건을 ‘성만찬’화 시킬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복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구원 행위는 모두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원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삶의 현실, 삶의 현장에서 구원을 바라거든 언제나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삶의 현실, 현장에서 구원을 경험했거든 그것이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감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믿음으로 살 뿐만 아니라, 은혜와 감사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또한 믿음으로 살고, 은혜와 감사 가운데 사는 사람은 본인이 행하는 모든 일이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헤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고 구원이 되는 일이 되도록 선하게 살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된 것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7절). 그러니 우리, 부지런히 구원을 간구하고, 또한, 부지런히 구원을 베푸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믿음의 자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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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3. 9. 03:14

나는 기도합니다

(빌립보서 1:9-11)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님께서는 천국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시며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를 하신다. 90년대부터 한국교회의 주일학교에 유행했던 행사 중 하나가 달란트 시장이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주일학교 보조교사를 했고, 대학을 들어간 후부터는 주일학교 교사를 했는데, 주일학교 행사 중 달란트 시장 할 때 아이들이 가장 기뻐했다. 지금은 풍경이 좀 달라졌지만(지금 어른들 예배 드리는 시간에 주일학교도 하는 경향이 있다), 예전에 주일학교는 아침 9시에 있었다. 주일 아침 일찍 교회 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선생님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그러나 그때는 선생님들도 아이들도 아주 성실하게 주일학교에 참석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게으른 종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성실하게 주일학교에 참석한 아이들은 달란트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달란트 시장이 열리면 그동안 모은 달란트를 가지고 본인이 원하는 상품을 살 수 있었다. 달란트 시장에서 통용되는 ‘돈’은 달란트였다. 달란트가 없으면 달란트 시장에서 원하는 물건을 가질 수 없었다. 물론 동심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선생님들이 달란트가 부족한 아이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모든 게 풍성하게 넘쳐나는 시절을 살고 있어 주일학교에 와서 달란트를 받는 것에 대한 재미, 모은 달란트로 달란트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재미도 별로 느끼지 못하는 시대이지만, 성경의 달란트 비유는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질문하고 있다.

 

우리는 달란트 비유를 보면서, 너무 먼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달란트 비유가 죽음 이후의 심판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달란트 비유가 죽어서 천국 갈 때나 유효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먼 이야기로 생각하다 보니 비유에 대한 현실감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까운 현실의 이야기로 가져오면 된다. 그 방법은 달란트 비유를 매주일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면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매주일은 작은 부활절이니, 매주일은 우리에게 매순간 삶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해준다. 주일을 그렇게 사유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쉽게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나는 매주일을 주님께서 달란트를 나눠 주시는 날임과 동시에 한 주간의 달란트를 셈하시는 날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낀다. 주일 예배를 마치면, 이런 음성이 들려온다.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다.”(마 25:14-15). 여기서 주님이 우리에게 ‘자기 소유를 맡기셨다’고 하신 말씀이 중요하다. 신앙의 관건은 이것을 실제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 우리는 주일에 모여, 주님께 달란트를 받는다. 그 달란트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기의 소유이다.

 

나는 매주일, 주일이 가까이 오면 긴장이 된다. 그리고 한 주를 돌아보게 된다. 특별히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그렇다. 내가 지난 주일예배를 마치고 주님께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썼는가?(은혜로 바꾸어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몇 달란트를 받은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본인이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달란트를 통해 어떠한 열매를 맺었는지가 중요하다. 주님이 주신 달란트는 ‘땅’과 같다. 농부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땅을 일궜으면 땅은 그 소산을 낼 것이고, 그렇지 못했으면, 땅은 농부에게 소산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한 주간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따라, 주님 앞에 나아오는 우리 두 손에 들린 열매의 양이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빈 손으로 오기도 할 것이고, 어떤 이는 기쁨의 열매를 들고 올 것이다.

 

나는 목회자로서, 개인적으로, 한 주간을 잘 보내지 못하면, 주일 설교를 하기 너무 힘들다. 설교자의 설교는 말이 아니라, 한 주간 동안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일군 달란트 열매여야 할 텐데, 한 주간을 잘 보내지 못하면 열매로서의 설교를 하지 못하고, 그냥 말로서의 설교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혹시 열매로서의 설교를 하지 못하고, 말로서의 설교를 하면 그렇게 공허할 수 없다. 그 공허함에서 밀려오는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언제든지, 말의 설교가 아니라, 열매로서의 설교를 하기 위해, 아주 필사적으로, 다섯 달란트 남긴 종과 두 달란트 남긴 종처럼 한 주간을 잘 보내려고 노력한다. “주께서 내 입에 말씀을 넣어주시길!”

 

우리의 삶이 복되려면, 우리의 삶이 “악하고 게으른 종의 삶”이 되지 않으려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기지 않으려면” 우리는 매주일, 주님께 달란트를 받는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고, 주일에 주님께 나아올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지난 주 받은 달란트에 대한 열매를 들고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안다. 만약 우리가 일주일 동안 아무런 열매 없이 주님 앞에 나오면, 스스로 자책하게 된다. 우리의 삶 자체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을 당한 것처럼, 왠지 쓸쓸하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가끔 경험하는 삶의 현실일 것이다.

 

무엇이든지 너무 멀리 생각하지 말고, 짧게 끊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한꺼번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매주일 예배를 드리며 주님께 수여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종들을 불러”, 주님께서 주일에 우리는 부르신다. 그리고, “자기 소유를 맡기”신다. 우리는 주님의 소유를 맡은 종으로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에, 주님의 삶에 참여(participation)하는 삶을 살게 된다. 우리의 삶은 주님의 삶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 발을 들여놓고 사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주님께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식으로 주님의 삶에 참여하게 되는 것일까? 달란트 비유는 비유이다. 우리가 주일에 주님께 예배 드리면서 실제로 무슨 달란트를 받는 것은 아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종들은 실제로 금 다섯 달란트, 금 두 달란트, 금 한 달란트를 받지만, 우리는 교회를 나서며 어떤 실체가 있는, 어떤 금품을 손에 받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100달러짜리 돈 다발 다섯 묶음, 두 묶음, 한 묶음, 이렇게 실물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고, 어떤 영적인 달란트를 받다 보니, 달란트를 받은 우리가 주님의 삶에 참여한다고 하는 게 무엇인지 손에 안 잡힌다.

 

영적인 달란트를 받은 우리가 주님의 삶에 참여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것은 기도생활이다. 기도생활을 보면, 참여를 알 수 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은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바울은 육신적으로 매여 있는 상태라 빌립보 교회에 직접 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빌립보 교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삶에 참여했다. 어떻게? 기도함으로!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도’로 시작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매어 있는 몸이라 기도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기도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가장 신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며,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잘 세워져 나가는지 어떤지, 직접 가볼 수 없어 애타는 마음으로 교회를 ‘염려’했다. 그러나 그는 염려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염려를 기도로 바꾸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삶을 놓아두고, 염려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일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는 참으로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확실 하기 때문이다. 온통 들려오는 소리를 염려의 탄식 뿐이다. 직장에 대한 염려, 비즈니스에 대한 염려, 자식에 대한 염려, 가족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미래에 대한 염려 등등, 우리의 삶은 전방위적으로 염려에 놓여 있다. 그런데, 그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일은 좀처럼 잘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나친 염려 가운데 살아간다. 그렇다 보니, 두 가지 삶의 방식에 빠져버린다. 하나는 무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몰두하는 것이다. 염려가 심하면, 사람은 ‘될 대로 되라’고 삶을 포기한다. 모든 것에 무관심해진다. 내 삶이 어떻게 되든, 다른 이들의 삶이 어떻게 되든, 아니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관심이 없다. 이렇게 세상 무관심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반대로, 염려가 지나치면, 너무 삶에 몰두하게 된다. 삶의 모든 것에 너무 집착해서, 자신의 삶에 엄습해 오는 염려를 어떻게 해서든 물리쳐 보려고 한다. 바로 이러한 무관심과 몰두가 기도를 지나치게 만드는 변명거리들로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주님의 삶에 참여한다는 것은 주님께 삶을 맡긴다는 것과 같다. 맡기는 자는 동시에 맡은 자가 되는 것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염려가 많아서, 맡기지도 못하고 맡은 자가 되지도 못한다. 염려가 너무 많아 삶에 무관심한 자는 심지어 자신의 삶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내가 내 삶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염려가 너무 많아 삶에 너무 몰두하는 자는 자신의 생사여탈권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생명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기도가 필요 없다. 기도하지 않아도, 자기가 자기의 삶에 있는 염려를 몰아낼 수 있다는 자기확신이 기도를 멀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대한 염려가 많았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염려를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염려를 기도로 승화시키고 있다. 나는 기도합니다! I pray!”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삶에 참여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른 이들의 삶에 참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 나의 삶과 다른 이들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여한다는 것은 나의 삶이나 다른 이의 삶에 함부로 개입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된다. 자신의 삶에 함부로 개입한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현대인들에게는 이러한 성향이 강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남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사람을 일컬어서 ‘사이코패스(Psychopathy)’라고 한다. ‘사이코패스’의 특징은 자신이 상대방에 대하여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는 ‘네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지금 너를 살려 두어서 그런 것이고, 나는 너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제도적 사이코패스로 발전하기도 한다. – 검찰개혁이 필요한 이유: 니가 감방 안가고 살아 있는 이유는 우리가 탈탈 털지 않아서야! / 군부독재(미얀마사태) / 전체주의 – 집단이나, 정권이나, 국가가 사이코패스 성향을 보이면 사는 게 힘들어진다. 그래서 조직이나, 집단이나, 정권이나 국가나, 민주적 개혁이 필요한 것)

 

이런 측면(자기 자신에게 함부로 개입하는 상황(자살률이 높다), 남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상황(갑질이 횡행한다))에서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이다. 기도를 단순히 목적으로 이루는 ‘수단’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기도를 그렇게 사용하는데 익숙하다. 뭔가 자기 자신이 이루고 싶은 열망이 생기면, 기도를 통해 그 목적을 이루려 한다. 그래서 기도를 그런 식으로 밖에 생각 안 하는 현대인들은 기도를 하면할수록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갈 뿐이다.

 

기도는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내려놓은 수단이다. 기도는 ‘참여’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에 직접 내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통하여 나의 삶에 참여한다. 상대 방의 삶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상대 방의 삶에 참여한다. 특히나, 사람 문제에는 섣부르게 개입하면 안 된다.

 

조지아에서 목회할 때, 어떤 집사님 한 분이 부부문제로 상담을 해 오신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였는지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분이 상담 끝에 나에게 아주 난감한 요청을 해오셨다. 본인이 곧 법원에 가서 이혼신청을 할 건데, 법원에 갈 때 남편이 자신을 해코지할 것 같으니, 본인을 법원까지 에스코트 해달라는 것이었다.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목회자인 내가 그분을 법원까지 에스코트하는 일은 부부관계에 직접 개입하는 일이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 이후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참 난감했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난감한 상황입니다. 00 집사의 청을 거절하자니 상처받을 것 같고, 들어주자니 너무 개입하는 것 같고, 어떻게 합니까. 주여, 주께서 해결해 주옵소서.” 그랬더니, 1주일 후에 그 집사님한테 연락이 왔다. “목사님, 법원에 갈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지난 번에 에스코트 부탁했던 것은 안 해주셔도 됩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염려와 위험으로 가득한 내 삶을 지키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내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것만큼 나를 망치기 쉬운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나는 내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돌보심과 인도하심에 주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가장 안전하게 보살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기도합니다. 다른 이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것만큼 그 사람을 망치는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나는 그/그녀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그녀의 삶을 가장 안전하게 보살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 자신을 위해, 자식을 위해, 배우자를 위해, 부모님을 위해, 형제 자매를 위해, 친구들을 위해, 교우들을 위해, 나에게 염려와 걱정을 안겨주는 그 일을 위해, 이 세상의 불의한 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가장 신실한 방법이다. 무관심 또는 몰두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그리고 다른 이들의 삶을 가장 따스하게 보살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삶과 다른 이들의 삶을 가장 안전하게 돌보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염려와 걱정이 우리를 엄습해 올 때,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기도합니다.”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기도합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3. 1. 10:20

극강 휴머니즘 (Extreme Humanism)

(로마서 4: 13-25)

 

요즘 주식 투자 열풍이 불고 있는데, 혹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 있는가? 주식 투자에 관심 없는 사람은 주식 뉴스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기업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식 투자에 관심이 있고, 어떤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 기업에 대한 소식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왜냐하면, 주식이 오르고 내리는 것이 내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주식이 올라서 돈을 벌면 좋고, 주식이 떨어져서 돈을 잃으면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다. 주식을 샀다는 것은 이제 나의 삶이 그 기업과 연관되었다는 뜻이다. 나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면, 그것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사순절은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질문하는 절기이다. 단순히 죽음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예수의 죽음이 나의 삶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복음이다. 기독교 복음이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기업과 연관을 맺으려면 주식을 사야 하지만, 즉, 주식을 사지 않으면 그 기업과 연관이 없지만, 예수의 죽음은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갖든지, 갖고 있지 않든지 상관없이 나의 삶과 연관이 있다. 그것을 복음의 보편성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그 기독교 복음의 보편성을 받아들이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삶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깨달아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 예수의 삶의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나의 삶과 연관시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햇볕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햇볕은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이든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든 동일하게 비춘다. 생명체는 햇볕 없이 살 수 없다. 그러나 햇볕의 고마움을 인식한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햇볕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겠지만, 그 고마움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은 햇볕의 소중함을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이 삶을 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냥 비추이는 햇볕을 받고 살 뿐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기에, 그것이 복음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었는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그 신앙이 어떠한 ‘가르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받아들고 죽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놓아두고 그것의 보편적 의미를 논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소크라테스가 살아 생전에 행했던 가르침에 주목할 뿐이다. 그것도 플라톤이라고 하는 제자를 통해서 재구성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주목할 뿐이다.

 

더 나아가, 인류가 공자라는 인물, 석가모니라는 인물을 성인으로 추앙하며 그들을 기리는 것도 그들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 때문이다. 지구 상에 존재했던 그 어느 인물도 그 사람의 죽음이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오직 예수의 죽음만이 ‘문제적 죽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이 무슨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길래, 우리는 사순절기 동안, 즉 40일 동안이나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질문하며 묵상해야 하는가? 40일 동안, 절기를 정해서 예수의 죽음을 묵상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죽음이 우리 인간에게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일단, 한 가지 질문을 해보고 싶다. 다음 세 가지 진술 중에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진술은 무엇인가? 즉, 가장 믿기 힘든 진술은 무엇인가?

 

1) 무에서 유를 불러내시는 창조의 하나님 (creation from Nothing / God of Creation)

2)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 (God of Resurrection)

3) 죄인을 아무런 조건 없이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 (God of Salvation)

 

사실 세 가지 진술 모두 믿기 쉽지 않은 진술이다. 그러나, 1)번과 2)번은 인간의 현실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믿기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술도 아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3)번이다. 이는 인간의 현실적인 행위와 연관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이 세번째 진술과 관련된 신학적 논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게 왜 문제인가?

 

로마서를 통해 바울은 유대인들이 통념적으로 가지고 있던 신앙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유대인들의 생각한 의는 율법의 행위를 통한 의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하고 지킴으로써 의로움에 이른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율법을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일인 것 같지만, 현실에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쉽다. 지금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하고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하고 우주개발 경쟁이 붙었다. 그들의 꿈은 지구가 아닌 우주의 한 곳에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갖춘 행성을 개발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우주 개발에 성공했다고 가정한다면, 사람들은 점점 황폐화되어 가고 있어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지구를 떠나 그들이 개발한 새로운 세계로 가고 싶은 소망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그들이 개발한 우주의 행성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이다. 당연히, 우주의 행성으로 향하는 우주선의 탑승권을 구매할 수 있는 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 값은 얼마쯤 될까? 아마도 일반 사람들은 꿈 꿀 수 없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 것이다. 즉, 우주에 있는 또다른 행성으로 가는 일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그림의 떡’같은 이야기이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실에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율법을 지킬 수 있느냐, 아니냐는 신앙의 문제, 또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아주 현실의 문제다.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613가지에 달하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오늘 먹을 게 없는 사람에게 ‘안식일 준수’를 말할 수 있는가? 하루만 일을 하지 않아도 굶을 수밖에 없는데,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할 수 있는가? 안식일에 일하지 않고 쉴 수 있는 사람들은 하루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이렇듯, 율법을 통해 의로움에 이르는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통념은 필연적으로 차별을 가져온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무능력’한 자들로 나뉜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는 의로운 자가 되어 머리를 치켜세우고 다니지만,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는 불의한 자가 되어 머리를 숙이고 다녀야 한다. 현실 세계에서 율법은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차별하는 방편이 될 뿐이다.

 

이것은 요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능력주의’와 매우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요즘 사회의 키워드는 ‘공정’이다. 공정을 평가하는 기준은 개인의 능력이다. 예를 들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기준은 ‘개인의 능력’이다. 학교 성적이 얼마나 좋은 지, SAT 점수가 얼마나 높은 지, 등 객관적 기준이라고 불리는 것을 통해서 입학 사정을 한다. 만약, 어떤 학생이 그러한 객관적 기준에 못 미치는데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고 생각되면, 학교의 입학 사정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빗발 칠 것이다.

 

최근 마이클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 The Tyranny of Merit>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공정이라는 덫’에 걸려 있는 지를 파헤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말한 적이 있다. 샌델은 공정의 기준이 되는 개인의 능력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아이비 리그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을 분석해 보면, 그들이 지닌 능력은 결코 공정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공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어진 것이기에 공정 자체를 평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하는 일이다. 경제력 뒷받침이 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한국의 명문 대학에 진학할 확률이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 비해서 월등히 높다. 그러므로 명문 대학 입학 자체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이 제시하는 공정에 대한 해결법은 매우 흥미롭다. 명문대학교 입학을 할 때, 일정 자격이 되는 학생들 중에 제비를 뽑아 합격자를 정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대기업 취직도 마찬가지다. 일정 자격이 되는 사람들 가운데서 제비를 뽑아 입사를 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이 제시하고 있는 방법을 받아 들일 수 있는가? 아마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내가 경쟁자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특별히 이러한 방식을 거부할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은 매우 전복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유대인들이 생각한 구원의 방식은 율법을 지켜 의로움을 스스로 보이는 자들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방식을 ‘공덕(merit)’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통념에 정면적으로 도전한다. 유대인들의 믿음을 뒤엎는 전복적인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율법을 통해서, 즉 인간들의 행위를 통해서, 또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능력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원의 방식을 ‘은혜(grace)’라고 한다. 이게 아주 은혜로운 이야기 같지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게 아니다.

 

무에서 유를 불러내시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일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심지어 그런 하나님을 간절히 원한다. 아무 것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런 하나님은 나에게 유익이 되고 온당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일도 어렵지 않다. 나도 죽을 것이기 때문에, 죽은 나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오히려 감격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죄인을 아무런 조건 없이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일은 쉽지 않다. 아주 실제적인 문제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전교 일등 하는 학생과 전교 꼴등 하는 학생이 동일하게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전교 꼴등 하는 학생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는 일은 감격과 은혜로운 일이겠지만(grace), 전교 일등 하는 학생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merit). 그러나, 전교 꼴등 하는 학생과 동일하게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과연 전교 일등 하는 학생이 전교 꼴등 하는 학생의 하버드 대학교 입학을 기뻐해 주고 축하해 주고, 함께 자랑스러워 할 것 인가의 문제는 다르다.

 

사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여기에서 걸려 넘어진다. 겉으로는 창조의 하나님, 부활의 하나님,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일을 우리는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어떻게 죄인이 아무런 조건 없이 의인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어떻게 나보다 못한 인간이 나와 동일한 신분을 유지하고 나와 동일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러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며 산다. 우리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우리가 저 죄인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며 살아야 속이 시원하다. 그게 공평한 신앙이라고, 그게 공정한 구원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전복적이다. 극강의 휴머니즘이다. 구원에 조건이 없다. 아무리 죄가 많아도, 아무리 부족해도, 아무리 찌질한 인간이어도 하나님은 그들 사랑하시며 구원해 주신다. 무엇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냥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의롭다 여겨주신다. 무엇 때문에 그러냐면, 바로 예수의 죽음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 자체가 우리 모두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냥 믿으면 된다. 그러니 얼마나 이 복음이 전복적인가. 이것은 인간을 무조건 긍정하는 ‘극강 휴머니즘’이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로마서의 복음은 바로 이 세 번째의 전복적인 진술, 죄인을 아무런 조건 없이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복음의 선포이다. 우리는 이미 자격, 능력주의, 공정이라는 잣대에 찌들어 살기 때문에 이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삶 속에서 그러한 전복적인 극강의 휴머니즘을 실천하지 못한다. 기독교인들은 믿음 자체도 ‘공덕(merit)’으로 변질시킨다. 자신이 이렇게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모든 일이 다 잘 돼야 하고 형통해야지 안 그러면 하나님이 마치 불의한 것(또는 안 계신 것)처럼 생각한다.

 

영적인 문제는 육적인 문제, 현실적인 문제로까지 번지는 법이다. 현실에서 누군가 더 많이 가지면, 누군가는 덜 갖게 된다. 누군가 어디에 합격하면 다른 누군가는 불합격 하게 된다. 더 많이 가진 자, 어떤 위치에 올라선 자는 자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자신을 정당화한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 그것을 소유하고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 정말 그런가? 예수의 죽음은 우리에게 그것을 묻고 있다.

 

예수의 죽음을 묵상하면 할수록 ‘극강의 휴머니즘(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을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보게 되고, 예수의 죽음을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 이 세상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곳인가를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히 엎드려 주님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구원을 바랄 수밖에 없게 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처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놓을 줄 알 때, 실제로 그런 삶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삶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모든 구원을 놓아두고 ‘나는 이것을 받아 누릴 자격이 있어’라며 그 풍요로움을 낭비하지 말고,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시는 은혜야’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풍요로움을 아낌없이 나누시라. 그것이 바로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을’ 정도로 극강의 휴머니즘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의 휴머니즘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2. 24. 08:0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고린도후서 4:3-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익숙한 말이지만, 막상 뜯어보면 정말 어려운 말이다. 일단 언어구조를 보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형상이 동등한 관계로 설정되고 있다. A는 B이다(A = B).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복음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9).

 

세 단어,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형상 중에 어떤 단어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일까? 바로 ‘형상’이라는 단어이다. 영어로는 ‘Image’로 번역되는 ‘형상’이라는 말은 영어의 ‘이미지’라는 번역 때문에 많이 오해되는 단어이다. 우리가 대개 ‘이미지’라고 하면 어떤 상상적인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미지’는 어떠한 물체에 대한 ‘상상된 모사품’으로 이해된다. 또는 ‘그림’이나 ‘영상’ 같은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렇게도 쓴다. “그 사람 이미지가 어땠어?”라고 어떠한 사람에 대한 인상을 표현할 때 쓰기도 한다.

 

형상, 이미지라는 단어가 현대인들에게 위에서 열거한 용도로 사유되고 쓰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도 대단히 오해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모사품 정도로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인상을 볼 수 있다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매우 가벼운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불상사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형상(image)’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형상(이미지)’은 헬라어의 ‘에이도스(ειδως/eidos)’를 옮긴 말이다. 에이도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데아’라는 뜻이다. 플라톤 철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이데아’가 무엇인지 감이 올 것이다. 오래전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중 ‘교실 이데아’라는 노래가 있었다. 다음과 같은 가사를 지니고 있다.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족해 족해 족해

내 사투로 내가 늘어 놓을래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곤 덥석 모두를 먹어 삼킨

 

이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진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교실 이데아>라는 노래를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교실의 이데아와 교실의 현실이 전혀 맞지 않고 심각한 괴리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실의 이데아를 회복하는 것이 학생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강변이다. 교실은 원래 어떠해야 하는가? 교실은 학생과 학생이 뭔가 새로운 것을 함께 배우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서로의 기쁨을 나누고, 서로의 사랑을 나누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는 아이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경쟁자로 의식해 서로의 관계를 처참하게 밟아버리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즉, ‘형상’이라는 것, ‘이데아’라는 것, ‘에이도스’라는 것은 ‘~인 것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교실 이데아는 ‘교실인 것 자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실인 것 자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교실의 학생들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교실인 것 자체의 모습에서 벗어나면 교실의 학생들은 행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형상’이라는 것이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이 무엇인지를 마음 깊이 깨달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것 자체이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사람을 포함한 모든 물체들)는 ‘에이도스(이데아)’를 가지고 있다. 세계의 인구가 70억명이지만, 우리가 인간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라고 불리는 본질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에이도스(이데아, 형상)이다. 사자도 마찬가지고,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것들의 에이도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각각의 에이도스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인간의 에이도스, 사자의 에이도스, 고양이의 에이도스는 어떠한 에이도스에서 나온 것일까? 각각 존재하는 에이도스의 에이도스를 일컬어서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플라톤 철학에서는 이것을 ‘일자’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일자인 하나님의 에이도스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구원자)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보통의 고백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에이도와 동일한 존재라는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자체라는 고백이고, 우리의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대어 있다는 고백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의 기원이시고 주인이시고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 자체가 그분의 존재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이도스(이데아/형상)는 우리의 감각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플라톤 같은 경우는 ‘동굴의 비유’를 써서 동굴 바깥에서 비춰오는 햇볕에 의해 동굴 벽에 맺힌 그림자를 보는 것처럼 우리가 ‘에이도스’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플라톤이 말하는 것보다 더 나아가서 매우 래디컬하게 말하고 있다. ‘에이도스’를 우리가 직접 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에이도스가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독교는 성육신 사건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이 말하는 구원은 인간이 죽어서 에이도스로 돌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는데, 기독교는 죽어서 에이도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에이도스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왔기 때문에 그 에이도스를 알아보고 믿으면 죽지 않아도 이미 구원 받았다고 말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3절). 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에이도스가 우리에게 육신을 입고 와서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정말 기쁜 소식 아닌가?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런 소망 없이 살다가 죽어서야 에이도스로 돌아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는 삶을 살다가, 에이도스가 우리에게 와서 그 에이도스를 알아보고 믿으면 지금 당장 구원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기쁨인가.

 

복음이 가리었다는 것은 구원의 현재성(구원을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누리는 기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의 현재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런 소망 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일 뿐이다.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 그러나, 에이도스가 지금 여기에 오셨다는 것을 안 사람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인생은 이미 구원에 들어간 인생이기에 죽음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죽음이 두렵지도 않고, 이미 영원한 생명(에이도스)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삶 자체가 어메이징 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를 통해 다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교실 이데아에서 묘사되고 있는 아이들은 교실 ‘이데아(에이도스)’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산다. 그들은 이데아(에이도스)에서 한참 벗어난 인생을 산다. 그렇다 보니, 교실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지옥을 사는 것 같다.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이런 교실의 풍경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 그러나, 교실 이데아(에이도스)가 실현된 교실을 경험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얼마나 생명력이 넘칠까. 그들은 더 이상 경쟁할 필요도 없고, 교실 안에 있는 다른 친구들을 자신의 경쟁자로 의식해서 그들을 미워할 필요도 없고, 교실의 다른 친구들과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 것이다. 그런 풍경, 그것이 바로 구원의 풍경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즉, 그리스도는 에이도스의 실현이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에이도스’, 그 생명의 깊이, 생명 그 자체를 경험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을 통해서 일희일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자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경험했다고 하면서, 이미 천국을 산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의 일들에 의해서 압도당하여 두려움에 떤다.

 

우리가 경험하는 불의, 폭력, 압제 등은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경험하지 못한 ‘망하는 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서든 구원을 성취해 보겠다는 몸부림이고 아우성이다. 왜 세상 사람들은 옆의 사람들을 도와주기는커녕 그들에게 불의를 저지르고, 폭력을 가하고 압제하는가? 존재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내가 저 사람의 것을 빼앗아 좀 더 가지고 있어야 자신의 삶이 안정을 누릴 수 있다는 거짓된 착각, 거짓 구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에이도스’를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그에게 구원이 묘연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한 일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이루려는 구원의 성취에 대한 욕망일 뿐이다. 그들은 참된 생명, 참된 구원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에이도스’, 하나님의 생명에 거하게 된 자들은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5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전파한다. 그게 불의, 폭력, 압제와 같은 악으로 나타난다. 구원을 스스로 이루려는 사람의 비참한 운명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에이도스’라는 것을 알고 그를 믿는 자,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예수가 바로 에이도스들의 에이도스이기 때문이다. 생명 중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내가 드러나면 악을 드러낼 뿐이지만, 생명 중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면 구원사건이 발생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전적으로 알려준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

 

이 진술은 스스로 구원 이루려는 세상의 가치와 완전히 반대되는, 완전히 전복적인 가치를 말해 준다. 스스로 구원 이루려는 사람들은 ‘주인’이 되려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에서 말하고 있는 ‘옆에 있는 그 애보다 좀 더 비싼 존재’, ‘옆에 있는 그 애의 머리를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좀 더 잘난 존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의 가치는 완전히 전복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주인이 되려하지 않고, ‘종’이 되려 한다. 왜? 모자란(모질란) 존재여서가 아니라 ‘옆에 있는 그 애보다 좀 더 비싼 존재’가 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그 애의 머리를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좀 더 잘난 존재’가 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무슨 구원이 더 필요한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바쁘게 사는가? 우리는 무슨 필요를 채우기 위해 힘들게 사는가? 우리는 무엇이 부족하여 두려워 하는가? 우리는 ‘주인’이 되기 위하여 이렇게 바쁘고 힘들고 불안해며 사는가? 아니면,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생명의 풍성함을 잃어버린, 그래서 삶이 쪼그라든, 이 세상의 불의와 폭력에 희생당하여 정신을 잃어버린 그들의 종이 되기 위하며 바쁘고 힘든가? 세상이 조장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휩쓸려 이리저리 휘둘리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되신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에이도스를 경험했다면,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에 휩쓸려 있는 이웃들에게 소망과 사랑과 자유를 가져다 주기 위하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종의 모습으로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바쁠수록, 불안할수록, 두려울수록, 그 바쁨과 불안과 두려움에 휩쓸리지 말고,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에이도스(형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하나님의 형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주인’이 되고자 하는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서 ‘종’이 되고자 하는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우리를 잠잠케 하실 것이다. 하루에 단 1분이라도 좋으니, 촛불을 켜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안에 푹 잠기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그 구원에 잇대어 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예배 드리는 우리 모두는 이미 구원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자기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성취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누리는 ‘놀이’어야 한다. 그러니, 평안을 누리라. 그 평안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라.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2. 8. 10:39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와 우리의 존재의 크기

(시편 147:1-11)

 

외할아버지께서 내리신 우리집 가훈은 이렇다. “적극신앙 / 성실근면 / 평화위주 / 순종효도”. 여기에 ‘적극신앙’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이것이 기독교 집안에 내린 가훈인지, 아니면 일반 집안의 가훈인지 분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외갓집이 유서 깊은 유교 집안이라 우리 집안의 기독교는 ‘유교적 기독교’였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할아버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래되었고, 아버지 대의 목사님들도 거의 은퇴를 하신 시점이라, 우리 집안의 기독교는 예전보다 유교적 색채가 많이 없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제 3대째 자녀들이 일선에서 한창 목회를 하고 있는 시대이고, 유교문화보다는 서구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서구적인 기독교의 색채가 많이 들어와 있다.

 

유교적 색채가 워낙 강했던 터라, 우리 집안에는 샤머니즘적인 기독교의 색체는 거의 없다. 물론 한국 기독교의 4대 부흥사 중 하나로 추앙받고 있는 이용도 목사와의 인연 때문에 ‘부흥사 기질’을 가지고 있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유교적인 기독교 가풍에 의해서 집안의 목회자들이 모두 점잖은 편이다.

 

순수한 기독교는 없다. C. 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에서 기독교의 여러 전통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공통적인 신앙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변증하기는 했지만,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기독교는 없다. 어떤 토양에 복음이 전해졌는지에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모양은 조금씩 다르다. 집안 내에서도 각 가정마다 신앙의 모양이 다르다. 친형 가정의 신앙의 모양과 우리 가정의 신앙의 모양도 차이가 난다. 심지어, 나와 우리 집사람의 신앙의 모양도 차이가 있다. 하물며, 한 교회를 섬기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의 모양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양한 신앙의 모양을 갖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히려 축복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 현상도 마찬가지다. 생명이라는 것이 한 육체 안에 들어가면 그 육체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내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생명 현상과 내 자녀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생명 현상은 같지 않다. 아주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생명 현상이 다르다는 것은 축복이다. 우리는 나와는 다른 상대방 안에서 발생하는 생명 현상을 통해서 생명의 넓이와 깊이를 배운다. 우리는 각자 생명을 받았지만, 모든 생명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어진 생명을 통해서, 그리고 이웃들의 생명을 통해서 생명을 조금 맛볼 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생명을 경외하는 것이다. 생명의 깊이와 넓이 앞에서, 아주 조그마한 생명 밖에 경험하지 못하는 존재로서 생명을 경외하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위대한 일이다. 생명의 경외는 사랑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 전체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의 일부분만 경험하는 연약한 존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생명을 경외하지 않는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모든 생명을 알고 모든 생명을 경험해 본 것처럼, 그래서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하는 일은 ‘남을 판단하는 일’이다. 자기가 경험하는 생명이 아주아주 일부 밖에 안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주 무례하게 행동하기 일쑤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을 ‘차별’한다. 차별은 마치 자신이 생명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의 대표 행동이다.

 

최근 AP 뉴스에 의하면, 디즈니가 그동안 인종차별 문제에 둔감했다는 비판을 받고, 작년에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인종차별적인 과거를 청산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놀이기구 테마를 바꾸었다고 한다. 디즈니에 가면 Splash Mountain이라는 놀이기구가 있는데, 이 테마가 인종차별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영화 ‘Song of the South’에서 가져온 것인데, 이 놀이기구를 다시 재구성해서, 흑인 여성이 주연을 한 에니매이션 ‘the Princess and the Frog’를 테마로 바꾸기로 했다고 한다.

 

백인들이 인종차별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경험하는 생명 현상이 다른 인종들이 경험하는 생명 현상보다 우위에 있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백인이라는 바디(몸)에 들어가 있는 생명과 흑인이나 아시아인의 바디(몸)에 들어가 있는 생명이 다른가? 그렇게 생각하는 백인은 오히려 생명의 경험을 매우 좁게 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미국에 와서 제일 불편한 단어가 'people of color(유색인종)'라는 말이다. 한국에 살면서 나는 한 번도 내가 '유색인종'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미국에 살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냥 사람이다. 인간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나를 '유색인종(people of color)'이라고 한다. 영어 자체에 인종차별이 들어 있다.

 

인종차별뿐 아니라, 성차별(젠더의 차별), 아동차별, 노인차별, 장애인 차별, 등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각종 차별들은 상대방 안에 들어가 있는 생명을 무시하는 행위이고, 마치 자신이 상대방보다 생명을 더 잘 경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생명이라는 것이 그렇다. 그 생명을 몸에 품고 있는 내가 그 생명을 어떻게 향유하느냐에 따라서 생명의 가치가 달라진다. 주어진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풍성한 생명의 삶을 살면 그 사람이 보여주는 생명의 가치는 매우 크다. 그러나, 주어진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고 생명을 남용하면 생명은 매우 추악해 보인다.

 

부모가 자식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부모는 자식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이 잘 되면 자신의 영혼이 잘 된 것처럼 마음이 기쁘고, 자식이 좀 잘 되지 못한 것 같으면 자신의 영혼이 망친 것처럼 우울해 한다. 생명이라는 것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학생은 우울증이 심하다. 우울증은 병리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병리적 우울증은 적당한 호르몬을 맞으면 극복이 된다(물론 극복이 쉽지 않고 안 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사회적 우울증은 호르몬을 맞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 관계가 건강해져야 한다. 요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우울증이 심하다. 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간에는 기독교인들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더니, 바로 그 차별금지법이 세워지지 않는 것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 받게 생겼다고 걱정한다.

 

가뜩이나 코로나 블루 때문에 우울한데, 사회적 우울증까지 겹쳐 기독교인들의 건강 상태가 매우 걱정된다. (반대로,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우울증을 유발하여 사람들을 더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도 받는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인데, 사회적 우울증으로 인하여 생명이 축소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기독교가 사회적 우울증을 유발한다는 것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릇된 신앙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을 잘못 배워서 그렇다. 기독교인들이 자주 범하는 잘못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의 생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고, 죄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가령, 기독교인은 자신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고 자기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구원 받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차등을 둔다. 이러한 영적 차별은 생명 차별로 이어지는데, 예수를 믿지 않아 구원 받지 못한 이들을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다 보니, 자칭 구원 받은 이들은 다른 생명을 차별하고, 판단하고, 무시하며, 상대방의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한다. ‘너는 죄인이야. 너는 구원 받아야 할 불쌍한 존재야.’

 

또한 자기 자신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여기게 되다 보니, 자신에게는 어떠한 악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특별히, 요즘 전염병과 관련해서 자신들은 전염병에 안 걸릴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요즘 물의를 일으킨 선교단체의 선교사가 설교시간에 한 말이다. 그리고 어느 대형교회에서는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준다는 ‘anti-covid 19 카드’를 팔려다 세간의 비난을 받고 철회한 일도 발생했다. 주님께서 지켜주실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미신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기독교는 어떤 토양에 복음이 뿌려졌는지에 따라서 그 모양이 다르다. 유교적 토양에 뿌려지면 유교적 기독교가 자라고, 샤머니즘적 토양에 뿌려지면 샤머니즘 기독교가 자란다. 기복적 토양에 뿌려지면 기복적 기독교가 자라고, 냉소적 토양에 뿌려지면 냉소적인 기독교가 자란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의 존재에 하나님의 존재를 맞추는 일과 같다. 그렇다 보니,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의 존재의 크기만큼 밖에 안 자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신앙의 왜곡현상이 일어난다. 그러한 기독교의 왜곡현상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언제나 거꾸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생각의 방식을 시편에서 배운다. 그래서 성경이 중요한 것이다. 성경이 왜 중요하냐면, 무엇보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선조들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았다. 이것을 배우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편의 시인은 첫 구절부터 먼저 “할렐루야!”를 외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1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선한 것이고, 그 일은 아름답고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선하거나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가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어떠한 일이 진행되어야만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것은 자기 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의 시인은 정반대이다. 자신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선한 일이고 마땅한 일이다.

 

이어지는 시인의 사유(생각의 방식)를 보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2-3절). 모든 일의 주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흩어진 자를 모으시고, 하나님이 고치시며, 하나님이 싸매주신다. 사람의 일 뿐 아니라, 자연의 일까지도 모두 하나님이 주어이다.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8-9절).

 

구름이 하늘을 덮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비가 내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산에 풀이 난 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우리는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를 보며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우리는 아마도 그럴 겨를이 없다고, 그런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찬양을 돌린 적이 한 번도 없을 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할 뿐이지,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은 왜 나 자신의 존재의 크기까지만 성장하고 마는가? 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크기를 벗어나서 훨씬 더 풍성하게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조그마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의 크기만큼만 생명을 누리고 마는가? 왜 한 발자국도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의 이 조그마한 존재의 크기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10-11절). 자신의 말의 힘 안에서만 생명을 이야기 하는 자, 자신의 다리의 억셈 안에서만 생명을 이야기 하는 자, 곧 자신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 즉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자기 자신을 생각할 줄 아는 자를 기뻐하신다.

 

우리 인간의 크기 안에서 지금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크기 안에서 생명을 극복해 보려고 이런저런 안간힘을 쓴다. 그렇다 보니 위에서 말한 이런저런 미신 같은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미신은 모두 자신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생명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인간적인 노력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바라다볼 줄 안다면, 우리는 시편의 시인처럼 우리에게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크기 안에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오히려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여호와께서는 겸손한 자들을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5-6절). 우리의 존재의 크기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은 크신 분이다. 그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지혜가 무궁하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크기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겸손한 자)들을 붙들어 주시지만, 자신의 그 조그마한 크기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바라보는 자(악인들)들을 땅에 엎드러뜨리신다.

 

자신의 크기 안에서 생명을 살아가니까 남을 차별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크기 안에서 생명을 살아가니까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신의 크기 안에서 생명을 살아가니까 두려운 거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이 아름다운 말씀이 우리 귀에 들린다면, 우리는 당장 우리 존재의 크기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려는 악한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우리와 세상을 바라보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 악하게 살거나 미련하게 살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날마다 위대하고 능력이 많으시고 지혜가 무궁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찬양하며 아름다운 인생을 살자. 할렐루야!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2. 2. 05:20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고린도전서 8:1-13)

 

“이제 개신교라면 지긋지긋합니다!” 지난 주 인터넷 뉴스 매체를 달군 헤드라인이다. 광주 IEM 국제학교(IM 선교회) 발 바이러스 전파를 두고 한 일반 시민들의 반응이다. 그 사람들이 ‘지긋지긋하다’라고 말할 때, 저렇게 콕 찍어서 “이제 ‘개신교’라면 지긋지긋합니다”라고 말했을 리는 없다. 그냥 “이제 교회라면 지긋지긋합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기자가 옮기면서, 교회 대신 ‘개신교’라는 단어를 넣었을 것이다. 이게 참 재밌는 현상인 거다. 예전 같으면, 그냥 ‘교회’, 또는 ‘기독교’라고 했을 텐데, 이제 아주 명시적으로 ‘개신교’라고 하는 이유는 기독교 내에 여러 종파가 있기 때문인데, 아마도 다른 종파(예를 들어 가톨릭)와의 구분을 두기 위해서 일 것이다.

 

개신교가 자꾸 바이러스 전파의 진원지가 되는 이유는 ‘친교문화’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단순히 ‘친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신경에 명시하고 있듯이,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 ‘친교, 교제, 코이노니아’는 신앙의 원리 중 하나다. 그래서 교회에는 친교의 문화가 깊숙이 들어와 있다. 친교(교제, 코이노니아)는 좋은 것이다. 요즘 시대에 어디서 이러한 친교를 나눌 수 있겠는가. 같이 밥 먹고, 서로의 삶의 문제를 놓아두고 위로해 주고, 함께 기도하고, 이러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인들은 이렇게 좋은 신앙의 원리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를 일으키는 정황은 다르지만 문제의 성격은 같다. 고린도교회가 자리한 고린도라는 도시는 헬라도시였다. 헬라사회는 다신교 문화였기 때문에, 발달된 도시에는 여러 신전들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종교행사를 중심으로 ‘feast(축제)가 열렸다. 지금처럼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았던 그 당시, 종교행사를 중심으로 열리는 축제는 모든 이들에게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신에게 바쳐진 음식은 종교행사가 끝난 뒤 그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지금 막 제사를 드린 그 신을 섬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 그것을 먹는다는 뜻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이다.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이방신들은 우리가 제물로 드린 음식을 신이 먹지만,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신의 몸을 먹는다.)

 

고린도교회가 처한 현실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놓아두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지금 현재 우리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이 문제를 놓아두고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고대사회처럼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드리는 종교도 없을 뿐더러, 우리는 그러한 문화를 가진 곳에 살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설사 그렇더라도, 우리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아주 맛있게 먹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지식’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4절).

 

이런 것을 보면, 우리는 분명히 ‘지식의 진보’를 이루었다. 우리는 더 이상 우상의 제물을 꺼림칙하게 생각하거나 ‘우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진보이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여전히 우상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교인 중에는 ‘복음’을 들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습관대로 우상의 제물을 먹을 때 우상에게 바쳐진 것으로 인식하면서 그 음식에 깃든 우상의 힘을 의식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그 음식을 먹는 교인들이 있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서로 다른 태도를 지닌 사람들의 갈등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갈등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지식(그노스)’ 때문이었다. 이 지식은 다른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지식이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5-6절).

 

우리가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영적 지식’이지만, 그 당시 이것은 최근에 드러난 아주 신비한 지식이었다. 지금 바울이 다시 진술한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드러난 하늘의 지식이었다. ‘우리에겐 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모든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또한 만물이 그에게서 났다’는 이 지식은 현재 고린도 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자칭 신과 주님이라고 불리는 우상에 대한 숭배행위를 일소에 부정하고 무너뜨리는 엄청난 ‘하늘의 지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식(그노스)’을 알게 된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서 발생했다. 이 지식을 알고 난 후의 그들의 행동이 문제였다. 그 문제점은 1절과 2절에서 지적된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1, 2절). 위에서 진술한, 그 하늘의 지식을 알게 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교만해졌다. 교만의 특징은 자기를 높게 여기고 다른 이들을 낮추어 보는 것이다.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알고 나서 교만해진 사람들이 있었다. 본인이 무슨 위대한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을 했고,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아직도 모르고 우상의 제물 앞에서 쩔쩔매는 사람들을 깔봤다.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교만했던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요즘 문제를 일으키는 한국 교회의 교인들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안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쭐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그 지식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구원받았다’는 자기 확신 안에 거했다. 이것은 그 당시 굉장히 유행하던 ‘영지주의적인 생각’이다. 영지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그노스(특별한 영적인 지식)’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이다. 어떤 지식을 소유함으로 인해 그들은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했다. 교만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영적 지식(그노스), 그래서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던 그 영적 지식이 바로 6절에서 진술되고 있는 그 지식이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6절).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아니다! 그 지식(그노스)을 가지고 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며,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지식(그노스)’이 아니라 ‘사랑(카리타스)’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2절). 이것은 매우 매우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원리이다.

 

우리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지식’, 그러나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갖지 못하고 일부 사람들만 가졌던 것보다 훨씬 더 진보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잘 알고 있다.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그 우상을 두려워하며 먹는 그리스도인은 한 명도 없다. 엄청난 지식의 진보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요즘 보여지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지식은 진보했으나, 사랑이 없는 것은 2000년 전 교만했던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식은 진보했으나, 사랑의 진보는 없는 것이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으로 발생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사도 바울의 해법은 ‘사랑’이다. ‘지식(그노스)’이 왜 매력적이냐면, 어떤 지식을 갖게 되면 그 지식으로 인하여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억압받던 옛날 부모님들이 그렇게 자식을 가르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던 이유가 뭔가. 몰라서 억압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중세 때 일반 교인들이 교회와 사제들로부터 억압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모든 성경과 예배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는데, 라틴어를 몰라서 그랬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행했던 일차적인 작업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아직 우상의 제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그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두려운 마음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들에겐 자유함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식’을 통하여 자유를 얻는 이들이 아직 자유함이 없는 이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깊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해결책은 ‘사랑’이다. 지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놓는다는 뜻이다. 지식은 사람들을 분열시키지만, 사랑은 분열된 사람도 다시 이어 놓는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시험에 들게 하여 교회공동체(그리스도의 몸)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즉 분열을 일으키게 만들지만, 사랑은 그 지식과 상관없이, 믿음이 약한 자들도 교회공동체(그리스도의 몸) 안에 머물게 한다.

 

사도 바울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사랑을 말하는 것은 ‘복음’ 때문이다.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11절).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를 위해서만 죽으신 게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모든 만물이 다 그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몇 사람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만유를 위한 죽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이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고, 그리고 진실로 그들을 형제자매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종교의 자유라는 법을 들이대며, 종교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세속적인 법에서 찾겠다는 뜻 밖에 안 된다. 세속적인 법을 통해서 차별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시킬 수 있어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자유를 제한시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우리에게 예배할 자유가 있고, 모일 자유가 있고, 함께 밥 먹을 자유가 있고, 모든 게 다 자유롭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이러스가 퍼져 이웃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자유를 포기할 줄 아는 게 사랑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믿음 있는 자들, 교회 안에 있는 자들) 뿐 아니라 그들(믿음이 없는 자, 교회 바깥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다. 그 십자가 사랑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나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 교회가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를 바라보면, ‘2천년이 지나서 지식의 진보는 이룬 것 같은데, 아직까지 사랑의 진보는 한 발자국도 이루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쓸쓸하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까지 든다. 우리는 여전히 성경에서 그렇게 배격하고 경고하던 ‘영지주의적 신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지식’이 구원한다는 생각,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지식의 산물인 ‘백신’이 이 팬데믹으로부터 구원해 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백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라. 백신을 빼돌리고 일부러 훼손하는 일 뿐만 아니라, 백신 생산과 구매를 놓아두고 각 나라 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백신이라고 하는 지식에 더해 사랑이 없으면, 결국 우리는 백신을 맞아서 ‘구원받기’ 이전에, 백신을 둘러싼 전쟁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죽음에 처해질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사랑의 진보를 이루지 못할까? 지식이 구원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여전히 지식의 진보를 이루는 일에만 몰두할까? 구원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고, 그렇게 성경은 외치고 있는데, 왜 우리는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못할까? 우리는 결국 지식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을 바란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덕을 세워주는, 즉 사람과 사람 사이를 따스하게 이어주는 사랑의 진보를 배워야 한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 27. 02:55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

(요나 3:1-5, 10)

 

서울에서 살았던 분들은 종로에 있던 단성사, 피카디리, 파고다극장 등을 기억할 것이다. 그곳은 청춘들의 낭만이 서려 있는 곳이다. 종로의 극장가와 연관된 청춘의 낭만이 없는 사람은 서울에서 살았다고 말하면 안 된다. 198937일 새벽 330분에 파고다극장에서 한 사람이 죽은 채 발견된다. 세간의 주목을 받은 사건은 아니나 후에 이 사람의 유고시집으로 인하여 그 죽음이 기억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시인 기형도(1960~1989)이다.

 

그가 파고다극장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그의 죽음이 애처로운 것은 그가 요절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담긴 그의 절망과 희망이 그의 죽음을 더 애처롭게 한다. 그의 시에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오버랩되어있다. (강신주,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47) 얼마 못산 인생이지만, 그의 삶 속에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오버랩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죽음을 더 애처롭게 한다.

 

기형도는 삶 속에 구멍처럼 뚫린 죽음들을 응시하며 살았다. 그의 유고시집이 출간된 후 젊은이들은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공감했고 함께 울었다. 그의 시 제목을 차용하여 만들어진 영화도 두 편이나 된다. “봄날은 간다(2001)” “질투는 나의 힘(2003).” 그의 시 질투는 나의 힘에 나오는 마지막 문구는 매우 유명하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외로운 청춘이 읽어내려가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한 문구이다.

 

기형도의 시를 평론했던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늙음이나 아픔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반드시 겪게 되는 현상이다. 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실존의 범주이다.”(기형도 시집 해설,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중에서) 인간의 실존인죽음을 응시하는 일’, 누군가는 기형도처럼 예민하게 그 일을 잘 해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죽음을 응시하는 일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응시하는 일도 거부하는 일도 하지 않고,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

 

요나서를 죽음이라는 렌즈로 읽어보면, 거기에는 엄청난 죽음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요나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1:1-2). 여기서 죽음은 악독으로 표현된다. 깊은 죽음의 그림자가 니느웨를 덮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요나에게 알려주신다. 그러나 요나는 그 죽음을 응시하지 않는다.

 

니느웨라는 삶에 커다랗게 뚫린 죽음의 구멍을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알려주셨지만, 요나는 그 죽음의 구멍을 외면한다. 이런 요나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도처에 숭숭 뚫린 죽음의 구멍을 외면하는 일, 우리는 지독히도 요나와 닮아 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이 참 묘하다. 요나는 니느웨에 뚫린 커다란 죽음의 구멍을 외면하고 멀리 도망가나, 이제 그의 삶에 죽음의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한다.

 

요나는 니느웨로부터 멀어지기 위하여(죽음의 구멍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하여, 그것을 외면하기 위하여), 그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탄다. 그러나 그가 그 배에서 만난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의 구멍이었다. 큰 바람이 바다 위에 불어 배가 전복될 찰나, 요나는 그 죽음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선원들에게 자기를 바다 위에 던져버리라고 말한다. 이렇듯, 우리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들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은 그 뚫린 죽음의 구멍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온 생명을 다해 막는 것밖에는 없다.

 

요나가 자기의 생명을 바다에 던졌을 때, 발생한 엄청난 일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죽음을 향해 돌진했을 때 오히려 그 죽음이 멈춰 선다. 바다는 고요해졌고, 바다에 빠져 죽을 것이 분명했던 요나는 커다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생명을 부지한다. 그리고 비로소 요나는 그 죽음과도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 죽음을 응시한다. 요나는 그 죽음을 응시하고,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2:3, 4, 5)

 

요나의 고백을 한 마디로 다시 정리해 보면 이런 것이다. “나는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죽음을 응시하지 못하던 요나는 이제 죽음을 응시하게 됐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니느웨의 죽음도 눈에 들어오게 됐다. 그리하여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들에게 그들의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을 말해준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

 

나는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를 무너뜨리게 할그 죽음의 구멍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요나서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 예전 같으면 이러한 생각을 못했을 것 같은데, 요즘에는 이런 생각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아마도,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를 무너뜨릴 그 죽음의 구멍은 역병이었던 것 같다. , 전염병이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어서 잘 알지만, 전염병을 이기는 최선의 방법은 방역을 잘 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백신 같은 것이 없었으므로, 할 수 있는 일은 방역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선포되고 있는 방역조치를 한 번 보자.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3:7-8).

 

우리는 이것을 회개라고 하는 매우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는데 익숙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최고의 방역조치이다. 왕의 조서, 즉 법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이 방역조치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더 깊이 담겨 있다. 그리고 매우 실제적이고 과학적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전염병은 인수공통감염병이다. , 인간과 짐승이 접촉해서 생긴 병이고, 인간과 짐승이 동일하게 감염되는 병이다. 다른 말로 해서, 인간이 짐승과 접촉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았을 병이다. 하지만 인간이 짐승과 접촉이 잦아진 이유는 인간의 무분별한 살림파괴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전염병을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는 성경에서 그토록 심판이 선포되던 죄악의 도시 니느웨보다도 영적이지 못하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죽음에 대한 감수성도 부족하고, 그 죽음을 응시하려고 하는 마음도 부족하고, 삶 속에 숭숭 뚫린 죽음의 구멍을 메우려고 하는 의지와 관심도 부족하다. 만약 지금 정부에서 법을 제정하여 니느웨가 했던 방역을 시행한다면, 쉽게 말해, 각자 골방에 들어가서 14일 동안 금식하라고 한다면, 오히려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니느웨는 그것을 시행했다. 그래서 그들은 니느웨에 들이닥친 죽음의 구멍을 막아낼 수 있었다.

 

요나는 니느웨에 뚫린 죽음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선택된 선지자였다. 우리 삶에 필연적으로 뚫리는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미국의 동화작가 매리 매입스 닷지(Mary Mapes Dodge)의 동화, “Hans Brinker(한스 브링커)”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한 이 동화에서 한스 브링커라고 하는 소년이 뚝 제방에 뚫린 구멍을 온몸으로 막아낸다. 이렇게 누군가는 우리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을 해야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

 

군대에 있을 때 친구와 주고 받은 편지가 생각난다. 다른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던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그 친구의 편지는 참 애처로웠다. 자신은 부대에서 이발병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이발병이라는 보직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이발을 하려고 친구는 부대에서 지급한 하얀 가운을 입었는데, 그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마치 우스꽝스러운 삐에로 같다고 한탄했다. 그 이유는 그 친구의 키가 190cm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190 센티미터의 키를 가진 친구는 별로 없었다. 당연히 군대에서 그렇기 키 큰 친구들을 위한 이발병 복장을 제공해주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전개되는 친구의 편지내용이 감동적이었다. 처음에는 짧은 이발병 가운을 입고 병사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운 삐에로 같아서 힘들었는데, 누군가는 이발병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라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여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 그 현실을 잘 받아들이고 그 일을 열심히 감당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신태준, 보고싶다.)

 

우리는 김현이 기형도의 시에 대한 평론에서 말한 것처럼 죽음을 실존의 범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상, 기형도와 같은 운명, 요나와 같은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다. 죽음을 응시하는 일, 그리고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는 일. 그래서 우리는 기형도처럼, 요나처럼, 우리의 삶의 도처에 뚫린 죽음의 구멍들을 메우기 위하여, 기형도가 시를 썼던 것처럼, 요나가 물고기 뱃속(죽음의 한가운데서)에서 주님의 은총을 간구했던 것처럼, 간절한 은총이 필요하다.

 

우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 숭숭 뚫려 있는 죽음의 구멍에 압도되지 않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 막아낼 수 있는 이유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의 구멍을 메우려면, 죽음을 이기신 그분을 내 삶으로 초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시편의 시인처럼 하루를 시작하며 주님을 삶으로 초대해야 한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편 5:3).

 

우리가 아침마다 죽음을 이기신 그분의 은총을 간구하고, 그분을 우리의 삶으로 초대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삶에 뚫린 죽음의 구멍에 압도당하거나, 그 숭숭 뚫린 구멍으로 세차에 밀고 들어오면 죽음의 황소바람에 치어 죽을지 모른다. 하지만,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우리가 먼저 만나고, 그분의 은총을 간구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의 구멍을 메우는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힘이다.

 

요즘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죽음의 구멍이 너무 크게 뚫려 있어서 가뜩이나 추운 겨울, 황소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고통당하고 있는 시절이다. 춥다고 아우성이다. 구멍이 클수록 그 구멍을 막기 위해서는 '협동'이 필요한 법이다. 화이자나 모더나 같은 백신회사들만 그 구멍을 막기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놓을 수 있는 구멍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이 큰 구멍을 막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협동'을 하고 있는가. 구멍이 크게 뚫려 칼바람이 세차게 밀려들어올수록 우리는 절망하지 말고 그 구멍을 막아내기 위하여 서로의 온기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버텨왔다. 삶을 위협하는 수많은 죽음의 구멍들을 잘 막아내며 살아낸 우리들이니, 이번에도 잘 막아낼 것이다. 다만, 간구하는 것은 너무 춥지 않기를, 지치지 않기를!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 18. 12:17

나다나엘이 필요한 시대

(요한복음 1:43-51)

 

(나다나엘이 필요한 시대, 라는 제목을 듣고, 왜 나다나엘이 필요하지? 나다나엘은 누구지?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떤 시대이길래 나다나엘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이지? 이런 질문들이 떠올라야 한다.)

 

나다나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이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ㅡ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전문

 

이 시가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나왔는지 모르는 사람은 껍데기는 가라를 아주 웃기는 방식으로 해석할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 살코기만 오라.” 그러면서 먹는 것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한국 역사를 아는 사람은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고 있는 신동엽의 안타까움에 금방 스며들 것이다. 신동엽이 이 시를 세상에 내놓은 때는 1960년도에 있었던 4.19 혁명 후이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탄압, 그리고 억압적인 정치에 맞서서 민주화를 갈망했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사건이 바로 4.19 혁명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는 오지 않았고, 박정희에 의한 군부독재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면서 어느새 4.19 정신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신동엽은 그러한 시대의 아픔과 절망을 시 껍데기는 가라에 담아내고 있다.

 

성경의 인물인 나다나엘과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가 무슨 상관이 있길래, 나는 나다나엘을 생각하며 신동엽의 이 시를 떠올렸을까.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나다나엘의 순교와 관련된 전승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통찰력이 신동엽과 닮았기 때문이다. 우선, 나다나엘은 주님을 전하다 순교할 때 피부 껍데기가 벗겨진 채로 죽었다고 한다. 그러한 전승을 담은 예술작품이 이탈리아의 밀라노 두오모 성당과 바티칸 성 시스티나 성당에 남아 있다.

 

나다나엘의 순교 이야기를 가장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작품은 밀라노 두오모(대성당/dome이 있는 대형성당)에 세워진 마르코 다그라떼(Marco d’Agrage)의 나다나엘 입상이다(1562). 대개 사도들의 입상은 로마시대 영화에서 보듯이 긴옷을 겉에 두른 형식을 띄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나다나엘은 겉옷으로 천을 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벗겨진 피부 껍데기를 두르고 있다. (아래 사진)

 

 

그보다 25년 전쯤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라는 작품에도 나다나엘이 등장을 한다. 예수님 왼쪽 아래에 위치한 나다나엘은 오른 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자신의 신체 껍데기를 들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 얼굴까지 신체 껍데기가 벗겨진 나다나엘의 얼굴을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자화상으로 채운다.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나다나엘의 얼굴모습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모습이다. (아래 사진)



 

복음서에서 몇 군데 밖에 등장하지 않고, 사도행전이나 바울서신에서는 아예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나다나엘이지만, 그와 관련된 순교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 누구 못지않게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는 어떠한 인물이었길래, 이렇게 전승과 전통에서 훌륭한 인물로 기억될까?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를 읽을 때 그 시가 씌어진 시대적 배경을 알면 그 시를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듯이, 나다나엘 이야기에 묻어 있는 시대적 배경을 알면 나다나엘이 어떠한 인물인지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다. 나다나엘이 한 이야기 중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말은 굉장히 널리 알려져 있는 말이다. 이렇게 나다나엘이 말한 것을 두고, 나다나엘이 나사렛 시골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왜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했을까?

 

흔히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질곡(차꼬와 수갑)의 역사라고 말한다. 한국 사람들이 성경의 이스라엘 민족과 정서적 교감이 잘 되는 이유는 한국의 역사도 질곡이 많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질곡은 전쟁의 빈번함에서 온다. 지정학적 위치가 외세의 침입을 자주 받을 수밖에 없는 곳에 정착하여 나라를 이룬 민족들은 원래 질곡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한국이 수없이 많이 북쪽으로는 중국, 남쪽으로는 일본의 침략을 받아 수많은 역사의 질곡을 겪었듯이, 이스라엘도 이집트, 앗시리아, 바벨론 등의 제국들에 둘러싸여 수많은 침략 속에서 질곡을 수도 없이 겪었다. 성경은 그 제국들을 둘러싼 질곡의 역사의 기록이라도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선민이라고 가지고 있었고, 유일신 여호와를 믿는 민족으로서 종교적인 정체성이 굉장히 강력한 나라였다. 그들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큰 어려움을 많이 당했지만, 그래도 근근이 민족적 정체성, 그리고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았다.

 

그러다, 그들에게 불어 닥친 큰 사건이 발생했는데, 알렉산더 대왕으로부터 시작된 헬라화(세계화)의 물결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성경에 이 빠진 듯이 기록이 없는 신구약 중간기가 바로 그때이다. 신구약 중간기의 기록들은 대개 외경에 있다. 그렇다 보니, 외경을 성경에 끼워서 함께 보지 않는 개신교인들에게는 신구약 중간기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 이야기가 낯설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작년 부활절을 맞아, ‘부활신앙이라는 특강을 통해서 신구약 중간기 때 기록된 외경을 살펴보며, 그들이 헬라화의 물결 속에서 어떻게 처절하게 저항했는지를 들여다 보았다.)

 

19세기 말, 조선에도 세계화 물결이 들이닥쳤다. 그때 조선이 얼마나 큰 혼란을 겪었는지, 대한민국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모두 잘 아는 이야기다. (그 혼란을 예술적으로 잘 묘사한 드라마는 단연 미스터 션샤인(Mr. Sunshine)”이다.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에 길이남을 역작이다. 그 드라마를 진지하게 보고 나면, 다른 드라마는 시시해서 못 본다.) 19세기 말 조선 개화기 때 제국 열강의 침략 앞에서 조선 정부(대한제국)는 개화파와 척사파로 나뉘어서 싸웠다. 개화파는 외국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척사파는 외세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스라엘은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 이후에 계속하여 헬라화(세계화) 물결의 위협 속에 살았는데(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그당시 고대 근동의 모든 나라가 헬라화의 위협 속에서 살았다), 그들도 동일하게 개화파와 척사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그러한 헬라 외세의 침입과 헬라화 물결에 반대하여 반-헬라화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이스라엘의 헬라화를 원했던 헬라의 제국은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진압했다. 그러면서 현실 세계에서 생겨난 사상이 메시아 사상이다. 메시아(하나님이 보내신 강력한 왕)가 나타나 이 헬라 세력을 몰아내고 옛날 다윗왕조처럼 찬란한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세워줄 것이라는 소망이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 속에는 간절하게 자리 잡았다.

 

헬라 세력을 몰라낼 강력한 메시아가 나타나길 간절히 기다리는 이스라엘 군중의 마음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 당시 수없이 많은 메시아가 출현했었을 거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모든 여인은 자식을 낳으면 자기 자식이 메시아일거라는 기대를 안고 있었다. 이는 마치 한국 부모들이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공부를 잘해서 아이비리그대학에 들어갈 거라는 희망을 갖는 것과 같았다.

 

그런 정황을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던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뀌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사도행전 5:36-37).

 

빌립이 예수님을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소개한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 다른 말로 해서, 빌립은 예수를 메시아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라고 말한 것은, 빌립이 소개하고 있는 예수에 의한 메시아 운동을 아주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메시아 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메시아 민족주의 운동은 매우 보수적인 정치운동이었고, 다윗과 같은 메시아, 즉 왕을 세워서 이스라엘 민족주의를 통해 외세를 몰아내겠다는 정치전략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메시아()를 갈망하여 메시아를 보내주어도 왕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가차없이 그 왕을 버리고 다른 왕을 찾았다는 데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눈에 보이는 왕을 세워 나라를 꾸려가는 왕 정치 제도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성공을 거둔 적이 없었다. 결국 왕정 제도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다나엘이 보기에 아직까지 그러한 실패한 왕정 제도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는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심해 보였다. 그 한심한 마음이 담긴 말이 바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이다.

 

다시 말해, 나다나엘은 강력한 왕(메시아)을 세워 외세를 몰아내려고 하는 메시아 민족주의 운동으로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그 어느 나라도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나라였다. ‘메시아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 무슨 구원인가. (이는 예레미야의 국제정치 시선과 닮았다.)

 

메시아 민족주의 운동은 요즘 말로 하면 포퓰리즘(Populism)’이다. 대중의 심리를 이용하여 지배자는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 대중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다. 구원은 없고 구호(예를 들어,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만 있는 것이다. 나다나엘은 어떻게 그당시 일반 대중들과 달리 메시아 민족주의라는 포퓰리즘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나다나엘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다.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 나다나엘은 무화가 나무 아래있기를 즐겨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무화과 나무 아래를 성경을 묵상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여겼다. 나다나엘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묵상하며, 공부하고, 자기를 성찰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포퓰리즘에 휩쓸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간사한 마음이 없었다.

 

실제로,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이스라엘 군중이 원했던 메시아 민족주의 운동에 휩쓸려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신 분이 아니다. 군중들은 한 때 예수를 본인들이 원하는 메시아로 알고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으나, 예수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길을 걷자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난 군중으로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다그쳤다. 그들의 간사한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지금도 미국이나 한국이나, 시대를 오판하는 포퓰리스트들에 의하여 나라가 혼란스럽다. 요즘 방역당국과 대립각을 세우며, 예배를 목숨처럼 여기겠다고 저항하며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세력들의 사상은 기독교 민족주의(기독교인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고, 그 외의 세력들은 모두 외세 오랑캐로 보는 시각)’에 불과하다. 그렇게 해서 팬데믹에서 벗어날 수도 없으며, 기독교 신앙을 전할 수도 없다. 오히려 반대의 일만 벌어진다.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세력들 때문에 팬데믹 종식은 느려지고, 기독교 신앙은 사회에서 지탄을 받을 뿐이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절(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시절)에는 나다나엘 같은 영성이 필요하다. 시대를 읽을 줄 알고, 그 시대의 질곡을 돌파할 수 있는 하늘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간구하며, 세속(포퓰리즘)에 휩쓸리지 않도록 자기를 철저하게 성찰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 중 바돌로매로 알려져 있다. 바돌로매는 바디매오(디매오의 아들)’처럼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돌로매의 아들이라고 불린 거의 무명의 제자이다.


하지만, 바돌로매는 요한에 의하여 나다나엘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가진 사도로 기억되고 있고, 나다나엘은 어려운 때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했으며, 그는 결국 자신의 민족 뿐 만이 아니라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만났다. 참된 구원의 길을 발견한 나다나엘은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참된 구원을 주지 못하는 껍데기들은 가고, 우리를 진정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여 오라!”

 

우리도, 이 어려운 시대에 길을 잃지 않고, 우리의 소중한 생명을 헛된 것에 소모하거나 빼앗기지 말고, 참된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나다나엘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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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 11. 09:59

성령과 생명력

(사도행전 19:1-7)

우리는 One’ 하나님을 고백한다. 이는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 하나님이라는 뜻은 유일신이라는 뜻도 있고, ‘보편적인이라는 뜻도 있다. 그리고 일치된 신앙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고백하되, 그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매우 독특한 기독교의 하나님 고백이다. 아버지도 하나요, 아들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다. 특별히, 한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것은 너와 내가 한 하나님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공동체성을 말하기도 한다.

 

김 집사가 고백하는 하나님과 박 집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일까? 아니다. 같은 하나님이다. 물론 각자 하나님 경험이 다르고, 하나님을 사유하는 방식이 다를지 몰라도 김 집사와 박 집사는 같은 하나님을 고백한다. 미국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다르고, 한국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다를까? 아니다. 같은 하나님이다. 물론 문화적 배경과 처한 환경에 따라 하나님 경험이 다르고 하나님을 사유하는 방식이 다를지 몰라도 미국교회와 한국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One’ 하나님이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이방지역)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는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땅 전역으로, 유대땅을 넘어 사마리아로,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이방지역)으로 확장되는 현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19장의 이야기는 흔히 말하는 바울의 제 3차 전도여행을 그리고 있다. 누가는 드라마 기법을 사용하여 그 전도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바울 뿐 아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아볼로, 디모데와 에라스도, 그리고 가이오 및 아리스다고 등의 활동을 다양하게 그리고 있다. 특별히, 아볼로와 다소 경쟁적인 전도여행을 전달해 주고 있는 게 인상적이다. 본문의 1절이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바울이 문서를 남겨서 후대에 가장 잘 알려진 전도자로 자리매김 했지만, 당대 최고의 전도자는 아볼로가 아니었나 싶다. 사도행전 18장에는 아볼로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18:24-25). 아볼로를 소개할 때 알렉산드리아출신이라는 것을 아무 의미 없이 밝힌 게 아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당대 최고의 도시였다. 당대 최고의 지식 공동체가 그곳에 있었다. 이슬람이 그곳을 이슬람화시키기 전까지(7세기),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 역사, 기독교 교리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가 바로 그곳에서 생성되었다.) 아볼로는 그곳에서 어마어마한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아볼로에게 부족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다.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요한복음에서도 묘사되고 있는 바, 초대교회 당시에는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이 미묘한 경쟁관계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지금 예수에 관한 사건의 일체의 모든 것이 확정된 상황에서 예수를 믿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경험과 신학적 해석이 아직 부족한 상황이었고, 한창 진행되던 상황이었다.

 

예수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던 아볼로에게 더 깊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전수한 사람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였다. 그 당시에는 요한의 세례만 아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만큼 요한의 제자들의 활동도 활발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요즘 같으면 요한의 제자들이라고 하면 이단이야, 그러면서 그들과 선을 그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이 요한의 제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나무란다거나 그들을 적대시하는 정황이 전혀 없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의 대한 지식을 토대 삼아 그들에게 더 깊은 예수의 신앙을 전수해 준다.

 

본문은 바울의 제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 지역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여 어떤 제자들을 만났는데, 그들과 반가운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사귐을 가져보니 그들도 요한의 제자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이 받은 세례는 요한의 회개하는 세례였고,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성령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정황이다. 그들도 예수를 믿었다’. 그런데 그들이 받은 세례는 요한의 세례였다. 그 말을 듣고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에 대한 신앙을 더 깊게 해주는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그들이 드디어 성령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 정황을 본문은 이렇게 전한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6). ‘방언과 예언의 현상,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되고, 성령을 알게 되니, 뭔가 생기가 돌았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뭔가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뜻이다. 그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상이 이제 보이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 초반에 나오는 오순절 사건의 축소판이다. 그 규모는 작았지만, 제자들이 모여 있었고, 성령의 세례를 받으니, 그들이 방언과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사도행전의 누가가 오순절 사건의 축소판인 에베소 사건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분명하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이곳 이방지역인 에베소까지 퍼졌고, 예루살렘에 역사한 성령님과 에베소에 역사한 성령님은 한 분(One God)’이라는 뜻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알려진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 무엇인지,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그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복음이 선포되고, 말씀의 가르침이 발생한다. 바울은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에베소 지역에 머물며 복음을 선포하고 말씀을 가르친다. 바울은 두란노라는 사람이 운영하던 아카데미를 빌려서 그 일을 진행한다. ‘두란노(튀란누)’라는 말의 그리스어 원뜻은 폭군(튀란노스)’이라는 뜻이다. 공룡 중에 티라노 사우러스할 때, ‘티라노두란노가 같은 뜻이다.

 

이 상황이 굉장히 재밌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처음에 도움을 구했던 곳은 유대교 회당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세 달 동안 복음을 전하는 사이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여긴 몇몇 유대인들에 의하여 바울은 회당에서 쫓겨난다. 쫓겨난 바울을 맞이해 준 곳,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도록 허락해 준 곳이 폭군(두란노)’라고 불리는 한 사람이 운영하는 아카데미였다. 그를 두란노(폭군)’이라 부른 이유는 아마도 그가 굉장히 괴짜 인물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폭군이라 불리는 사람의 도움에 힘입어 바울은 그곳에서 안정적으로 2년 동안 복음을 전한다.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그곳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전해진다는 뜻이다(정확히 말해서, 전해진다기 보다 그곳에 있는 하나님이 드러난다는 뜻). 그곳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한 하나님(One God)’으로 전해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자꾸 왜곡하고, 놓치고 사는 게 있다. 우리는 자꾸 기독교를 교리적으로 전하려 한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리를 믿느냐, 안 믿느냐의 논리도 자꾸 빠진다. 그러니, 그곳에서 다툼만 일어날 뿐이다.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그곳에 교리가 전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현상이 전해진다는 뜻이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그가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생명사건을 보라.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11). 이것은 다른 권능이 아니라 생명사건이 발생하는 권능을 말하는 것이다. 거기서 발생한 생명사건은 이런 것이었다.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12).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바울을 통해 발생한 생명사건의 작은 에피소드이다. 어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 장난삼아 악귀를 쫓아보려 했다가 오히려 그 악귀들한테 봉변을 당한 우스꽝스러운 일화를 전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누가가 전하고 싶은 것은 생명사건은 인간이 임의적으로 장난처럼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 사건이라는 뜻이다. 생명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생명사건은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생명사건 앞에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명사건을 하나님의 사건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follower of Christ)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 그래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교리적으로기독교인이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생명사건이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성령이 계시고, 그곳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면밀히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의 삶에는 생명사건이 있는가. 우리는 생명이 없는 곳에 그리스도를 전하여 그곳에 생명이 있게 하고 있는가.

 

우리 잠시 멈추어서, 하나님의 생명사건이 필요한 내 삶의 부분이 무엇인지 떠올려보자. 나를 답답하게 하는 것, 나를 억압하는 것, 나를 힘들게 하는 것, 나의 생명을 쪼그라들게 하는 것, 한숨 짓게 하는 것 등, 하나님의 생명사건이 필요한 것들을 생각해 보자. 사실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맞닥뜨리고 살면서도 실상은 한숨 짓고 걱정과 근심에 싸일 뿐,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성령이 계시고, 그곳에는 생명이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곳에 그리스도를 모셔보자.

 

또한 우리 잠시 멈추어서, 하나님의 생명사건이 필요한 사회 곳곳의 어두운 곳을 돌아보자.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를 전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존재하고 활동하는 이유는 생명이 없는 곳에 그리스도를 존재하게 하여 그곳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각자 직업의 자리가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루터는 일, 사역을 ‘beruf(직업, calling, 소명)’라고 번역했다.

 

여러가지 이유로 생명력(생명현상/생명사건)이 줄어들고 있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은 더 자주 이 고백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성령이 계시고, 그곳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곳에 생명의 영이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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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 4. 14:46

우리 심령이 물 댄 동산 같으려면

(예레미야 31:7-14)

 

어려울 때일수록 잔잔한 기쁨들을 서로 전하는 게 좋다. 공동체란 그런 것 아니겠는가. 기쁨을 함께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함께 나누면 반이 되게 하는, 그런 신비한 일이 발생하게 하는 것이 공동체라고 믿는다. 요즘 시대는 사람들의 관계를 원자화시켜서 서로 나누는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든다. 콩 한쪽도 나눠 먹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발생하고 있다. 콩 한쪽을 나눠 먹기보다, 나는 내 콩을 먹고, 너는 니 콩을 먹는 게 좋은 세상이라고 말한다.

 

가뜩이나 고립된 세상을 사는데, 바이러스가 그 고립을 더 심화시켰다. 그러한 고립에 저항해 보려고 사람들이 모임을 갖고 여행도 가는 것 같으나, 그러한 저항은 계속하여 실패로 끝나고 있다. 모이면 모일수록 바이러스가 더 빨리 그리고 더 널리 전파되어, 우리는 더 깊은 고립의 세계로 내몰리는 듯하다. 그나마 온라인을 통해서 고립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그러나 온라인마저 접속하기 힘든 노인분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요즘 시절이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올 듯싶다. 그러한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다.

 

나는 괜찮으니까 문제없다생각 말고, 삶을 나누라. 좋은 일 있으면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나누고, 맛 있는 거 있으면 나눠 먹고, 어려운 일 있으면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삶을 나누라. 사도들은 환란 가운데 있을 때 두 가지에 힘쓰라고 말한다. 하나는 인내이고 다른 하나는 기도이다. 고난 당할 때 우리는 인내하며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인내와 기도가 최대한 힘들지 않게 하는 것은 같은 고난 가운데 있는 공동체의 나눔이다.

 

나눔도 크게 세 가지의 나눔이 있다. 물질적인 나눔, 정서적인 나눔, 그리고 영적인 나눔이다. 교회 공동체가 좋은 것은 물질적 나눔과 정서적 나눔에서 더 나아가 영적인 나눔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 나눔과 정서적 나눔을 계속, 끊임없이 하면 좋다. 물질적 나눔은 돈도 나누고 음식도 나누고 하면 된다. 참 따뜻한 나눔이다. 정서적 나눔은 정서, 기쁨, 슬픔, 아픔, 생각 등을 나누는 것이다. 요즘엔 이 정서적 나눔이 참 많이 필요한 때다. 정서적 나눔이 있으면, 서로 간에 치유가 발생한다. 슬픔이나 아픔이 있는 사람도 치유되지만,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도 치유된다. 서로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너무 자기 자신의 감정(정서 Emotion, 내 마음이 지금 어떠한 상태인지)을 감추지 말라. 우리 한국사람들이 가장 잘 못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대개 감정을 드러낼 때 그 감정을 속에서 키워 거의 핵폭탄처럼 터뜨리기 때문에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참다참다 폭발시키니, 그 감정에 안 다칠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그때그때,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면 서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수위이기 때문에, 관계를 다치는 게 아니라, 관계를 더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목회하면서 가장 고마운 분들은 본인의 감정(정서, 본인 마음이 지금 어떠한 상태인지, 본인은 지금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을 그때그때 잘 표현해 주시는 분들이다. 좋으면 좋다, 은혜 되면 은혜 받았다, 또는 서운하면 서운하다, 이런 감정들을 잘 표현해 주시는 분들이 고맙다. 그런 게 인격인 것이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좀 더 인격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텐데, 인격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정서)를 정확하게 드러내어 서로 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때로는 옳지 못한 일을 했기 때문에 감정을 드러내야 할 때가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것들은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이해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촌극에 불과하다. 누가 틀리기 때문이 아니라(right and wrong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we are different) 감정(정서)이 어긋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경우에는 감정(정서, 생각)을 나누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의 생각을 더 잘 알게 되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법이다. 정서적인 나눔만 잘 되도 우리는 참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다. 정서적인 나눔만 잘 되도, 어려운 시절을 잘 인내하며 이겨낼 수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질적 나눔, 정서적 나눔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영적인 나눔을 한다. 그래야만 한다. 영적인 나눔이란 기독교인의 정신성(영성)을 나누는 것이다. ‘영성(spirituality/정신성)’이라는 말이 쉽게 마음에 다가오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 보니, 영성은 뭔가 고차원적이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번역의 잘못이다.

 

'Spirituality'를 영성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차라리 '정신성'이라고 번역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 않나. ', 저 친구 정신(spirit)이 살아 있네!' 그런 것처럼, spirituality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신성을 말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게 좋다. 기독교의 'spirituality', 그래서, 기독교 고유의 정신성을 말하는 것이고, 그 정신성을 내면화시키는 훈련이 '기독교 영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정신성은 그 사람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 사람은 어떠한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어떤 삶을 의미 있는 삶이라 여기는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보는지, 그 사람의 생명성(그 사람의 삶의 가치와 의미)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의 행동이나 말, 또는 그 사람의 작품 등은 모두 그 사람의 '정신성'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물론, 아무 생각없이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하고, 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기교만 살아 있는 작품(행동, )을 내놓는 사람들도 태반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면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 정신성이 깃들지 않는 말이나 행동, 그리고 작품은 가치가 떨어지거나 아예 없다.

 

예레미야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예언서이다. 이 예언이 바로 영적인 나눔이다. 내가 보기에, 구약성경의 예언서는 모두 애가(Jeremiad)’. 예레미야 애가가 대표적이지만, 사실 구약성경의 예언서는 모두 애가이다. 애가는 영어로 ‘jeremiad’라고 한다. 예레미야 애가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애가를 생각할 때 슬픈 노래정도로만 생각하고 만다. 예레미야 애가를 보면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이 망한 것을 보면서 슬픔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리면서 애가를 지어 불렀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애가를 오해하는 것이다.

 

애가(Jeremiad)’는 단순히 슬픈 노래가 아니다. 애가는 히브리어의 어떻게/어찌하여라고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도 일상에서 이런 일을 겪는다. 누군가가 전혀 뜻하지 않게 죽음에 처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그 죽은 사람의 영전 앞에 서서 슬피 울며 이런 질문을 한다. “어떻게 이렇게 허망하게 죽었는가? 어찌하여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애가란 바로 이런 것이다.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는지를 철저하게 물어,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애가(Jeremiad)’이다.

 

대한민국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처절한 애가(Jeremiad)가 바로 세월호 사건이다. 세월호 희생자의 부모님들은 지금 애가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본인들의 자식에게 닥친 죽음 앞에서 마냥 슬퍼하고 만 있는 게 아니라, 왜 그러한 일이 벌어졌는지, 그 이유를 물어 철저하게 밝히려고 하는 것, 바로 그 행위가 성경에서 말하는 애가이다. 그래서 나는 그 세월호 유가족이 지금 우리 시대에 그 어느 사람들보다도 신학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시대를 바라보며 애가를 부르는 사람은 모두 신학자이다. 정의와 불의는 그 앞에 놓여 있다. 그들의 애가를 신원하여 주는 지도자(정부)는 정의로운 지도자(정부)일 것이고, 그들의 애가를 외면하는 지도자(정부)는 불의한 지도자(정부)일 것이다. 종국에, 주님께서 그들의 애가를 신원하여 주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서를 자꾸 오해한다.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 말이다. 아니다. 예언서는 그런 게 아니다. 모두 애가이다. 지금 현재 이스라라엘 나라에 어떠한 슬픈 일, 고통스러운 일이 발생을 했고, 그러한 일이 왜 발생했는지를 철저하게 물어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이 예언서이다. 예언서의 내용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언서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 가운데 경험하는 여러가지 슬프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들에 대하여, ‘를 묻고, 그 이유를 발견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나누는 것이 바로 영적인 나눔이다. 이런 게 영성이다.

 

예레미야 31장은 예레미야서의 백미라고 불린다. 그러나, 우리가 예레미야 31장만 뚝 떼어서 잘못 해석하면,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예레미야 31장의 언어는 매우 행복한 언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희망을 품기 전에 거쳐야만 하는 신학적 작업을 소홀하게 만들 수 있다. 본문에서 제시되는 세상은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이다. 이 구절을 읽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샘솟는 듯하다. 특별히 우리가 좋아하는 이 구절,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를 보면, ‘물 댄 동산이라는 구절만 따로 떼서 액자에 걸어 놓고 싶은 심정이 생기는 복된 구절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애가를 처절하게 부른 자들에게만 오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언서를 보면 하나의 공통된 애가가 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고통에 처해지게 된 이유, 그것을 모든 예언자들은 헤세드에서 찾는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헤세드(언약적 사랑)를 버렸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러한 슬픈 일이 닥쳤다고 말한다. 예레미야도 같은 예언(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따져 묻기)을 한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떠났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물 댄 동산같은, 에덴동산 같은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의 헤세드(언약적 사랑)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돌이킴 없이 우리의 삶이 물 댄 동산같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도둑이요, 불의요, 욕심일 뿐이다. 우리가 지금 그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바이러스 백신이 나왔다고, 곧 바이러스가 물러갈 거라고, 바이러스가 물러가고 나면, 우리는 예전의 삶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경제가 다시 살아날 거라고 희망에 부풀어 있지만, 이 얼마나 불경한 희망인가.

 

팬데믹의 고통 가운데 있는 지금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백신에 대한 희망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애가를 불러야 한다. 지금 이렇게 바이러스 때문에 고립된 삶을 살고,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정말 총체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애가를 부르고 있는가? ‘를 묻고 있는가? ‘어떻게를 묻고 있는가? ‘어찌하여를 묻고 있는가? 이렇게 고통에 처해지게 된 그 이유를 철저하게 물어서, 그 해답을 찾고자 우리는 애통해 하고 있는가? 그 애통함 없이 그저 위기를 모면하려고 헛된 희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애가(Jeremiad) 없이, 바이러스가 물러가고, 경제가 다시 회복된 들,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가? 경제가 돌아가면, 여전히 우리는 과잉소비를 하게 될 것이고, 그 과잉소비 때문에 지구는 더 병들어 갈 것이고, 우리의 삶의 터전은 점점 더 피폐해져만 갈 텐데, 그리고 또다른 전염병이 올 텐데 말이다.

 

우리의 심령이 물 댄 동산 같으려면, 우리의 삶이 물 댄 동산 같으려면,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애가이다. , 이러한 어려움을 맞닥뜨리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묻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 없다면, 우리에게 과연 물 댄 동산이 올지는 미지수이다. 주님께서는 애가를 통하여 그 이유를 찾고, 그 마음을 돌이킨 자들에게만 물 댄 동산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때문이다.

 

새해가 밝았지만,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팬데믹의 고통 가운데 있다. 그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그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저 고통스러워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애가를 불러야 한다. ‘어떻게, 어찌하여, 이러한 일이 발생했는지를 철저하게 묻고, 우리가 하나님의 헤세드를 떠난 것은 아닌지,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애가를 부르는 동안, 지치지 않게, 힘들지 않게,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며, 물질적 나눔, 정서적 나눔, 영적인 나눔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맛 있는 거 있으면 나누어 먹으라. 자신의 마음(정서 /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 상태인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을 솔직히 표현하라. 그리고, 어려운 시절에 예레미야가, 또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영적인 나눔을 가지라. 애가를 부르며 왜 이렇게 어려움에 처해지게 됐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겠거든 서로 나누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을 알겠거든 서로 나누라. 그렇게 우리가 물질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정신성(영성)을 나눈다면, 우리는 이 어려움을 잘 이겨낼 것이고, 이 어려움의 끝에 주님이 주시는 물 댄 동산같은 삶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힘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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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2. 28. 09:35

노인의 탄생

(누가복음 2:22-39)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등장하는 시므온과 안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꿈꾸는 세상, 우리가 꿈꾸는 인생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진 누가Luke’는 자신이 데오빌로에게 말한 것처럼 예수에 대한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펴전하는 데 힘쓴다. 여러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들로부터 자료를 수집하고, 그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예수의 이야기를 전한다. 복음서 중(또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누가는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누가의 시선은 독특한 데가 있다. 그는 남들이 주목하지 못했을 법한 사건에 귀를 기울인다. 예수의 탄생과 세례 요한의 탄생을 병행구조로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목자들을 등장시키는 것도 그렇고,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수의 이야기에 노인들을 등장시키는 것도 그렇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노인이 등장하는 것은 참 따스하면서도 애절하다. 특히 이것(노인이 등장하는 것)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현대사회는 노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나마 성탄절이 되면 산타 할아버지덕분에 노인들의 존재감이 다시 살아나 곤 한다. 모든 일자리에 청년들로 채워 넣는 이 시대에, 산타 은 여전히 할아버지가 아니면 안 되는 성역으로 남아 있다. 아직까지, ‘산타 청년이나 산타 아가씨’, 또는 산타 아저씨나 산타 아줌마가 등장하지 않았다. ‘산타라는 고유명사에는 할아버지가 붙어야, 사람들은 안심한다.

 

우리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노인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노인들의 이름은 시므온과 안나이다. 이 두 노인이 등장하는 배경은 유대인의 율법과 관련 있다. 짧은 구절에 두 개의 율법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할례법이고 다른 하나는 정결예식이다. 할례법은 아기 예수와 관련된 법이고, 정결예식은 어머니 마리아와 관련된 법이다. 이 두 가지의 율법이 동시에 지켜지고 시행되고 있다.

 

율법에 의하면, 첫 자식이나 첫 동물, 또는 첫수확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그 첫 열매들은 모두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사람을 하나님께 바치려면 대속이 필요한데, 그렇게 대속을 해야만 첫 열매로서의 자식(사람)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출애굽 경험 때문이다. 무엇이든 첫번째 것(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을 거둘 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길 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삶이 그냥 아무렇게나 주어진 삶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고백했다.

 

그리스도인은 유대인들이 했던 방식으로 구원된 삶을 고백하지는 않으나, 우리도 주일에 주님께 나아와 예배드림으로 우리의 삶이 그냥 아무렇게나 주어진 삶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서 선물로 주어진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삶이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깊이 묵상하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주일 예배를 헛드리는 것이다. 구원된 삶을 산다는 것은 복되다. 자신이 구원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의 삶과 그것을 모르는 이들의 삶은 같을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아직 이 거룩한 뜻을 잘 알지 못하여 헤매는 것을 보면 참 마음 아프다. 주일에 나와 주님께 예배드리면서도 아직 구원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는 이 없다. 많은 이들이 자기 구원을 이루려고 얼마나 동분서주하면서 사는가. 예배는 구원된 삶에 대한 감사이어야 하는데, 그들에겐 예배가 자기 성취를 위한 기복일 뿐이다. 그러니 예배가 축복이 아니라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또 하나 등장하는 의식은정결예식이다. 정결예식은 레위기 12장에 나오는데, 모든 산모는 아이를 낳은 후 산혈로부터 깨끗해지지 않으면 성전에 접근하거나 성물에 접촉할 수 없다. 산모는 일정 기간이 지나 성막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1년된 양 한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 혹은 형편이 어려우면 비둘기 두 마리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을 통해서 정결케 되었다. 정결케 되어야 제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고, 제의에 참여해야 하나님의 복을 받아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정결예식의 시각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정결예식이 말하고 싶은 것은,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생명을 풍성히 누리려면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생명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풍성하여 지고, 생명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생명의 부여자인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려면 정결해야 한다. 정결치 못한 자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 그래서 생명의 풍성함을 갈망하는 자는 정결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이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없다. 현대인들은 생명의 풍성함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찾는다. 사람들이 이번 성탄절을 유독 힘들어한 이유가 무엇인가? 마음껏 소비하지 못해서 그렇다. 현대인들은 마음껏 소비해야 생명의 풍성함을 느끼는데, 소비를 못하니, 생명이 쪼그라든 것처럼 느낀다. 현대인들에게는 정결한 사람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정결과 상관없이 돈 많은 사람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이번 성탄절은 오히려 더 생명이 풍성한 성탄절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마음껏 쇼핑할 수도 없고, 어디 갈 데도 마땅치 않으니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또는 혼자서 고요한 가운데,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성탄절에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고 하면서 요란을 떨었지만, 많은 부분 자기만족을 위한 것은 아니었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기 예수와 산모 마리아를 위한 제사를 위하여 그 가족이 모세의 율법대로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 그곳에는 두 노인이 있었다. 모세의 율법대로 각종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그 많은 이들이 다녀가는 곳에서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며 일생을 보내던 두 노인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부자들, 권력자들, 젊은이들, 성직자들 등, 예루살렘을 드나들었을 수많은 사람들 중에 노인이었던 시므온과 안나만메시아를 알아보았다.

 

누가는 시므온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한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25-26).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 이 소개 글에서 시므온의 간절한 마음을 볼 수 있다. 위로가 없던 시절,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해 주실 거라는 강력한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 우리에게 이렇게 간절한 마음이 있는가? 그 간절함이 성령의 감동을 가져왔고, 그 간절함과 성령의 감동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성전에서 메시아 예수를 알아보게 했다.

 

누가는 안나를 이렇게 소개한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여 기도함으로 섬기더니”(36-37). 안나가 아셀 지파였다는 것, 그가 과부였다는 것은 그녀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는 것들이다. 아셀은 북이스라엘의 지파였다. 7년간 남편과 살다 남편이 죽은 뒤, 재가하지 못하고 평생 과부로 살았다는 진술에서 그의 아픔이 엿보인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을, 메시아 예수를 알아본 시므온과 안나, 이 노인들의 행보는 매우 고무적이다. 노인의 가치, 노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이들의 등장을 통해서 노인의 탄생을 본다. 노인은 나이를 먹어서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라, 탄생하는 것이다. 노인의 가치는 나이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노인으로 탄생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노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을 생산력의 수단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것도 그런 연유다. 흔히 정상인, 그리고 젊은이에 비해 노인과 장애인은 생산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저급한 것이다. 유교의 효사상이나 어른공경 사상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교의 효사상이나 어른공경 사상이 공격을 받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의 관계에서 상하관계를 만들어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다른 측면으로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있다. 노인들이나 장애인들이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차별한다. 나쁜 사회다. 옛날에 우리 동네에 발달장애 형이 있었다. ‘용마형이라고, 온동네 돌아다니면서, 모든 일을 참견했다. 그런데, 그 형을 미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동네 형으로서 서로 존중하며 어울려 놀았다. 그런데, 요즘 그런 발달장애인은 시설에서 가둔다. 이상한 세상이다. 노인들도 실버타운으로 가둔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장애인이나 노인들에게 막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은 장애인이 되지 않을 것처럼, 자신들은 노인이 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우리가 잃고 사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그냥 노인이 되는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노인은 나이를 먹어서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라, 탄생하는 것이다. 노인은 탄생하는 것이다. 노인이었던 시므온과 안나 이야기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권력을 가지려 노력하고, 젊어지려고 노력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는가?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하나님의 일을 알아채려고 노력하는가?

 

우리는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을 산다. 얼마전 작업을 하다 우연히 지난해(2019) 마지막 날 페북에 올린 사진과 글을 보았다. 맑은 하늘 사진과 이런 문구가 써 있었다. “오늘 아침 출근길 하늘~ 2019년 마지막 날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의 하늘~ 너무도 행복했던 2019년이 다 지나갔다. 내년에는 어떤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까.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열심히 십자가를 지고 가야지!^^” 나는 나에게 2020년 어떠한 십자가가 기다리는 줄 전혀 몰랐다. 팬데믹이 기다리고 있을 줄 전혀 몰랐다. 올해, 우리는 모두 팬데믹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왔다.

 

우리는 사실 젊은 요셉과 마리아의 모습으로 산다.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법대로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갔지만, 그들의 인생에, 그리고 그들이 지금 모세의 법대로 하나님께 바치는 첫 아이 예수에게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 전혀 몰랐다. 그러나, 그 부모에게 이 아이에 대하여 알려준 것은 두 노인이었다. 그들은 이 아이가 누구인지 알려주었고, 이 아이가 어떠한 일을 하게 될 것인지 알려주었다. 두 노인은 이 아이의 젊은 부모에게 영적 지혜를 알려준 것이다.

 

노인의 탄생. 우리가 늙어간다는 것, 우리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 우리가 노인이 되어간다는 것은 이런 것 아니겠는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위로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던 시므온과 안나처럼, 우리 민족의 위로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민족을 넘어 인류의 위로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는 세대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전달해 주기 위해 성령의 감동을 놓치지 않기 위해 경건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오는 세대에게 참된 위로를 주는 노인으로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인들의 지혜를 통해 위로 받는 세상, 그래서 노인들이 존경받는 세상을 꿈꾸고, 세상에 위로를 전할 수 있는 노인으로 탄생하기 위하여,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권력을 가지려 노력하고 젊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인생,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하나님의 일을 알아채려고 노력하는 인생이 되기를 꿈꾼다. 나이 먹어가는 우리들, 그냥 불가항력적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노인으로 탄생하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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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2. 21. 09:21

사랑은 가능한가?

(누가복음 1:46-55)


정말 훌륭한 사상가들은 자신이 그러한 말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훌륭한 사상가들의 공통점이 있다. 가령 예를 들어, 근대사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빨간서적의 대표적 인물, 카를 마르크스(칼 맑스)자본론같은 책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하도 마르크스 때문에 격동의 세월을 보내서 그런지, 마르크스를 공산주의자(빨갱이)’라고 치부하지만, 그가 자본론이라는 책을 쓴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때문이다. 그 이유가 엄청 쇼킹하지 않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그렇게 비판한 이유는 자본주의가 인간들의 사랑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그러한 상황을 나와 너라는 책에서 잘 설명해 놓았다. 사랑을 하려면 나와 너(Ich-Du/I-Thou)’의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현대인들의 인간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를 맺지 못하고, ‘나와 그것(I-It)’의 관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나와 너의 관계에 있으면 폭력이나 착취를 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폭력과 착취를 하나.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러나,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는 폭력과 착취가 발생한다.

 

현대사회를 공동체라 부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동체란 나와 너의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이다.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된 응답하라 1988”을 보면, 서울 쌍문동 한 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그들은 나와 너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기쁨과 함께 나누면서, 서로 보듬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 TV 드라마에서 그러한 시절을 추억하는 이유가 뭔가? 그러한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가 눈물을 훔치는 이유가 뭔가?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나와 너의 관계를 찾아보기 힘들고, ‘나와 그것의 관계만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나와 그것의 관계. 그냥 상대방에게서 내가 원하는 이익만 취하면 되는 관계. 얼마나 삭막한가.

 

서로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해진 이 시대, 그래도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할 텐데, 그래야 인간이라는 의미,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텐데, 사랑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사실, 그 어떤 문제보다 절실한 문제이다.

 

대림절 네 번째 주일, 우리는 네 번째 촛불을 켜는데, 사랑의 촛불을 켠다. 사랑의 촛불을 켜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일명마리아 찬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마리아 찬가는 사랑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한다. 자기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했음에도,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게 단순히 그녀가 메시아를 잉태했기 때문이 아니다. 메시아 잉태 사건을 통해 마리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의 처음 고백은 이렇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48).

 

우리는 사랑 받을 때 자신을 귀하게 느끼고, 사랑 받지 못할 때 비천함을 느낀다. 몸에 값비싼 것을 두르고 있을 때 자신을 귀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몸에 값비싼 것을 두르고 있는 자기 자신이 그것을 더 잘 안다. 대개 인간이 허영을 부리는 이유, 그래서 외적인 것으로 자기 자신을 치장하려는 이유는 누군가로부터(또는 마땅히 사랑 받아야 할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귀함과 비천함은 결코 외적인 것에서 오지 않고 사랑에서 온다. 사랑 받으면 들꽃도 다이아몬드보다 귀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래도 다이아반지가 좋다는 사람은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했구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리아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 메시아 잉태 사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로 들어선 것이다. 하나님과 나와 너의 관계로 들어섰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마리아의 찬양은 마음(영혼)에서 울려 터지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기쁨의 노래인 것이다.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도, 현대인들은 하나님과 나와 너의 관계를 만들지 못하고, ‘나와 그것의 관계에만 머물기 때문에 신앙의 깊이가 없는 것이고, 마음이 늘 공허한 것이다. 하나님과 나와 그것의 관계에 머물러, 하나님에게서 얻을 수 있는 어떤 이익만 얻고 말려 한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 매순간, 삶의 자리에서 사랑을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성경의 말씀을 대면한다는 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사랑의 가능성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고, 사랑이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자꾸 사랑을 묻지 못하게 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나와 너의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게 하고, ‘나와 그것의 관계에만 머물게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세상에 굴복하면 안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죽는 날까지, 사랑을 물어야 한다.

 

훌륭한 사상가, 훌륭한 신학자는 모두 사랑을 물었다.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이런 데 있지 않았다. 정말 모든 사상가들, 그리고 우리가 성인이라고 부르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사랑에 대하여 물었다.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하면 더 깊이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어떻게 우리가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이론도, 모두 사랑에 대한 질문이고, 그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이다. 이것을 묻지 않는 사상가는 좋은 사상가가 아니다. 사랑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한 비판, 이것이 모든 사상가들의 책이다. (어떠한 책을 읽을 때 이 원리를 참고하면 좋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 불리는 어거스틴도 당연히사랑에 대하여 물었다. 그가 인생의 말년에 쓴 대작, “삼위일체론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기 시작하면 사랑 자체가 사랑받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분명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어거스틴, <삼위일체론>, 8.8.12)

 

사랑이 일어날 때, 사랑하는 자(actor of loving) '자기 자신'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사랑 그 자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이 발생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사랑으로 현존하신다. 어거스틴에게서 보이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은 대단하다. 그만큼 그의 영혼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이고, 그 사랑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열렬히 갈망한다.

 

어거스틴의 신학이 왜 중요하냐면, 그 이전까지 신학자들은 모두 인간 바깥에서 발생하는 일들에만 집중을 했는데, 어거스틴은 인간과 인간의 내면을 응시한다. 이 세상의 다른 어느 피조물보다도 인간 안에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또는 하나님 나라)은 무지개 너머 어딘가(somewhere over the rainbow)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깊이깊이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어거스틴은 아담의 죄를 자기사랑/교만(self centered-ness/amor sui)라고 말하고 있는데, 자기 자신을 향하는 욕망은 결국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을 더 가로막을 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밖(이웃/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그럴 때, 오히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구원론적인 정향(orientation)을 가진 사랑이다. 사랑이 구원이다. 사랑이 발생하면, 거기에는 동시에 구원이 발생한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므로, 사랑이 발생하는 곳에 구원이 발생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구원자시라는 뜻과 같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떠한 일에서든 사랑이 발생하지 못하게 한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이 발생하면, 거기에 구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구원이 발생하면, 모든 게 완전해지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런 것을 싫어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거기에 구원이 발생하기 때문인데, 우리가 사는 시대가 발생되기 원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이익이다. 구원이 발생하지 못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이익이 발생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구조이다.

 

마리아 찬가는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은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51-53).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 ‘권세 있는 자’, 이런 자들이 누구냐면, 구원이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구원이 발생하면, 자신들의 이익이 없어지기 때문에, 구원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계속 이익만 발생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팔의 힘으로 구원이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구원이 필요한 자,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먹이시는 분이다. 그리고, 부자, 즉 구원이 발생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신들의 이익만 취하려는 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시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그곳에서 구원이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미워하신다. 그러니,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하지 못하게 하여 구원을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최근에 아주 재밌는 주장을 하나 보았다. 인류가 발명한 것 중,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 중의 하나가 냉장고라고 주장하는 글이었다. 냉장고의 발명으로 인하여 서로 나눠 먹는 사랑이 사라지고, 자기 배만 불리려고 음식을 쟁겨놓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냉장고가 없다면, 보관할 곳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많이 먹으려고 하지 않은 것이고, 음식이 금방 상할 것이기 때문에 이웃과 나누어 먹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맞는 말이다. 레위기 공부할 때 우리가 살펴보았던 제사의 종류 중에 화목제라는 것이 있다. 화목제라는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어겼을 때,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화목제의 특징이 뭐냐면, 그날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잡은 고기는 그날 다 먹어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소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혼자서 다 먹는가? 그날 잡은 고기를 그날 다 먹는 방법은 딱 하나다.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 것이다. 화목제는 바로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정말 중요한 질문이고, 절실한 질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그 방법을 알고 있다. ‘그분과 같이사랑하면 된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위해 오시는 주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하면 된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을 못하게 만드는 이 시대에 우리가 사랑을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시대가 사랑하는 일을 가로막고 있어서 일까? 아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구원을 발생시키는 사랑을 하지 못하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이익을 발생시키는 가짜 사랑에 머물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자체에 구원을 지니고 있다. 사랑이 발생하면,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그 사랑 안에 존재하시기 때문에, 사랑이 발생되는 곳에는 동시에 구원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사랑하다 죽어도 괜찮은 것이다. 사랑 안에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 없이,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몸/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사랑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냉장고를 없애는 마음으로, 나눔을 늘려가야 한다. 매일의 삶이 화목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누고 또 나눠야 한다. 팬데믹 후에, 홈리스 사역을 하고 싶다. 홈리스들이 와서 조금이라도 쉬어 갈 수 있게, 의자들도 다시 설치하고, 식수기도 정비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에게 따스한 밥 한끼라도 나누고 싶다. (홈리스들에게도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다. 기관에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는 홈리스, 그냥 떠돌아다니는 홈리스, 전혀 소통이 안 되는 홈리스, 떠돌아다니는 홈리스들과 소통이 안 되는 홈리스들이 잠시 와서 밥 먹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렸던 예수의 급진적 사랑이 더 절실한 시대이다. 우리에겐 예수가 필요하고, 예수를 사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래도 인간이 아직까지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인간의 사랑이 완전하지 못하고 영원하지 못해서 구원이 영원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하고, 그 구원의 경험은 계속해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인간의 희망으로 남아 있다. 우리 삶 가운데, 날마다 사랑을 발생시켜, 구원을 이루어, 마리아처럼 마음(영혼)에서부터 흘러 터져나오는 찬송이 넘쳐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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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