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1. 30. 10:56

구원된 일상

(이사야 64:1-9)

 

잊고 살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국문과 대학원 종합시험 문제가 근대의 시간이해를 서술하시오.”였다. 근대란 모더니티(modernity)를 말하는 것인데, 이 시험문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시대마다 시간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 혁명을 거친 이후의 사람들을 근대인이라고 불렀고, 근대인은 그 이전의 사람들과 시간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근대의 영향 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근대의 시간 이해 안에서 시간을 향유한다.

 

그때 나는 무슨 답을 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정답을 적었을 것이다. 종합시험을 통과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답을 적는 게 아니라, 그 정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근대는 시간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근대(modernity)를 잘 알아야 하는데, 현재 우리의 삶의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발견이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개인의 주체, 권리, 인권이라는 개념은 모두 근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다. 근대를 거쳤다는 뜻은 비로소 우리 인간이, 각 개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주체가 될 수 있게 되었고, 권리를 가지게 되었으며, 인권이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근대 이전까지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삶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향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사회를 봉건사회라고 한다. 독립된 (주체적인/권리와 인권을 가진) 개인이 없었던 사회를 말한다.

 

근대 이전의 사회인 봉건사회에서 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당연히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시간을 당연히 각자 개인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봉건사회에서 사는 게 아니라, 근대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근대인이다. 근대인에게 시간은 개인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의 미래에 대한 이해이다. 근대인에게 시간의 과거가 중요할까, 현재가 중요할까, 아니면 미래가 중요할까? 과거와 현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미래는 내 삶의 주체인 내가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 근대인은 시간을 가능성이 가득한 것으로 이해했고, 현재 내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느냐에 따라서 그 가능성이 미래에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상황을 근대인들은 이러한 격언으로 표현한다. “시간은 금이다.” 시간 안에는 금이 감춰져 있다.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시간 안에 감춰진 금을 발견하느냐, 못발견하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그래서 근대인들은 당연히, 시간에 감춰진 금을 발견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 것이다. 그것을 성취라고 부른다.

 

이러한 근대인들의 생각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도 그러한 방식으로 발생할 거라 생각했다. 이성적인 인간이 도덕성을 갖추고,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면, 시간 안에 금처럼 감춰진 하나님 나라가 현실에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금욕적인 삶을 살았고, 사회봉사를 많이 했다.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게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의 역사에 임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서로 죽이고 죽는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도래하는 것이고, 구원은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림절은 이 질문을 하기 참 좋은 절기이다. 그리스도인의 시간 이해는 근대인들의 시간 이해와 다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을 초월해 사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근대의 시간 이해의 영향 아래 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성취로 보지 않고, 선물로 본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 나라는 성취로 도래하는 게 아니라 선물(은총/은혜/grace)로 도래하고, 구원은 성취하는 게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본문은 구원을 갈망하는 이사야의 노래이다. 여기서 이사야가 말하는 주님이 행하신 두려운 일들은 구원을 가리킨다. 그 구원이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셨다”(3). 공동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좀 더 풀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은(구원)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근대인으로서 우리가 뭔가를 성취하기 위하여, 즉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하면, 그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한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사실 자기 구원적 행위이다.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조차도 자살하는 이유는 자기 멸망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 자기 구원을 위해서 한다.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행위로서 자살한다. 근대인들에게는 자살도 구원의 자기 성취이다. 이렇게 근대적 시간 이해는 인간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비극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우리는 자기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참 힘들게 산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은 결코 자기 성취가 아니다. 구원은 선물이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자기 성취를 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그것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곳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 공동번역 성서는 이것을 이렇게 좀 풀어서 말한다. “우리는 모두 부정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기껏 잘했다는 것도 개짐처럼 더럽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고 우리의 죄가 바람이 되어 우리를 휩쓸어 갔습니다.”

 

기껏 잘했다는 것도 개짐처럼 더럽습니다.” 아주 통렬하고 솔직한 고백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구원을 꿈꾸며,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나를 구원해 줄 거라 기대하며 최선을 다해보지만, 그 열심을 다한 최선이 나의 삶을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삶을 망치거나 더 어려운 문제를 가져오는 것을 경험한다. 정말 그렇다. 기껏 잘했다는 것도, 나뿐 아니라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그때 우리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시간이라는 것이 그냥 근대인들이 생각하는 시간 이해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성취를 통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살 것이다. 물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삶의 구원을 이루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소망은 참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대림절을 맞아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리스도의 구원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성취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복음)’을 전해줄 사명을 가지고 있다. 구원은 자기 성취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임을 알려야 한다.

 

구원은 선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이사야의 고백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8). 공동번역 성서는 이것을 이렇게 옮겼다. “야훼여, 당신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이, 우리는 모두 당신의 작품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사야와 똑 같은 고백을 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8-10). 공동번역 성서로 읽으면 이렇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

 

이사야와 바울이 똑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자기 성취의 근대적 시간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못한다. 자기의 구원은 자기가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영광 받고,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시간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삶을 완전히 다르게 본다. 구원은 자기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자신은 자기 성취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작품으로 고백한다. ‘포이에마’(하나님의 작품)는 여기에서 온 말이다.

 

근대인들(세상 사람들/세속)은 자기 성취를 통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살지만,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주어진 구원의 일상을 산다. 구원을 자기 성취를 통해 이루려는 사람의 삶과 이미 선물로 주어진 구원을 일상으로 사는 사람의 삶은 같을 수 없다. 자기 성취를 통해서 구원을 이룬 사람은 얼마간 여유를 가질 수 있겠으나, 그 성취가 구원을 지속해 주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성취를 통해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의 삶은 늘 불안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선물로 받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성취를 통해 구원을 이루려 하지 않기 때문에 여유를 가질 수 있고, 구원된 일상을 살기 때문에 늘 기쁘다.

 

성취가 아닌,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즉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행위(선물)를 통하여 비천한 자에서 존귀한 자로 인생이 뒤바뀐 마리아의 찬가는 자기 성취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려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우리가 이 기쁜 소식(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 삶 속에서 자기 성취를 통하여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허망한 신화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 구원된 일상을 기쁨으로 누리는 하나님의 작품(포이에마)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2:46-55).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날마다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구원된 일상을 살게 하신 주님,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선한 삶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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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