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1. 23. 17:44

마리아마르다?

(누가복음 10:38-42)


현대 개신교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하지 않으면 두 가지의 오류에 빠진다(물로 이것은 개신교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근대 사상(modernity)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이들에게서 모두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하나는 이원론적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복음서 중 유일하게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위에서 말한 두 가지의 오류를 가지고 읽는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둘 중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개혁자(특히 루터)의 신학/신앙에 의존해서 읽는 것인데, 우리는 마리아를 마르다보다 바람직한 신앙의 모범으로 삼는다. 그 이유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진술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 신학적 명제에 집착하다 보니,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행위에 집착한 마르다보다 훌륭한 신앙인으로 추앙을 받는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는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고, 성경주석의 학문이 종교개혁 당시보다 훨씬 발달한 지금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말로, 왜 누가는 이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지, 그 의도와 의미를 잘 추적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는 워낙 흥미로운 이야기다 보니 기독교 역사에서 이름 꽤나 있는 신학자들은 대부분 이 본문을 해석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초대교부 중 한 명인 오리게네스이다. 오리게네스는 성서주석에 아주 큰 기여를 한 교부인데, 그는 이 본문을 관상(contemplation)과 행위(action)의 용어로 해석한다. 그런데 오리게네스는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았고, 헬라철학을 바탕으로 신학을 전개하고 성경을 해석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교부였기 때문에, 마리아의 관상을 마르다의 행위보다 높은 신앙의 경지로 해석한다.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영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였고, 마르다는 육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마르다처럼 육적인 방법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지 않을 수 없으나, 우리의 신앙의 지향점은 육적인 방법을 넘어 영적인 방법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리게네스의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다.

 

(당연히)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도 이 이야기를 해석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리게네스처럼 어떤 신앙이 더 좋은 신앙인지 차등을 두어 해석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 안에 두 가지의 삶(죄를 넘어선 삶이다)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하나는 현재 시대(이 땅)에서 살아가는 교회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오는 시대(종말/창조의 완성)에 살아가는 천상의 삶이다. 마르다의 신앙은 현재 이 땅에서 살아가는 교회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고, 마리아는 오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살아갈 삶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해석했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르다의 행위를 전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취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신앙의 행위라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도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서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는 해석되는데,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14세기 독일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의 해석이다. 엑카르트는 마르다를 마리아보다 더 중요한 사람으로 여긴다. 엑카르트는 마리아와 마르다는 가장 사랑 받는 마리아(the Beloved Mary, 가장 사랑 받는 마르다(the Beloved Martha)’라고 불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가르침만 받았지만, 마르다는 예수님께 가르침과 더불어 섬김을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엑카르트에게 가르침을 받고 섬김을 수행한 마르다는 가르침만 받고 아직 섬김의 수행에 이르지 못한 마리아보다 더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였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 대한 해석들을 논하면서 내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을 읽을 때 너무 이원론적으로 보거나 너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만 머물러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개신교인들은 특별히 종교개혁신학/신앙의 전통 안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때로는 거기에만 너무 머물러 있으려다 성경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계시(말씀)를 협소하게 왜곡한다. 이것은 전혀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다. 우리 인간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우리 인간이 거해야 한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두어 둘 수 없다.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몇 가지 당황스러운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왜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평을 늘어놓았을까? 왜 예수님은 불평을 늘어놓는 마르다에게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으로 족하다고 말씀하셨을까? 그리고 왜 마리아는 침묵하고 있을까? 아주 짧은 이야기이지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많고, 쉽게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렇다 보니, 많은 신학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분명한 것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르다이지 마리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다에게서 보이는 문제가 누가복음 공동체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듯하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월등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이 많은 복음서이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이 많이 소개되어 있으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때도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 다음에 어김없이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또한 예수님은 모든 사역에 앞서 기도를 하신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그 어느 복음서보다도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마르다의 불평은 우리가 교회의 일 또는 사역을 하다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갈등이다. 또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다보면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마르다의 현재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는 근심/염려/worry’이다. 근심(염려)이 사람을 압도하면, 사람은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인다. 무기력해지거나, 지나친 활동을 한다. 이는 현대인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반응이다. 요즘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살거나, 지나친 활동을 하면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르다는 지나친 활동으로 자신의 염려를 이겨보려고 했다.

 

그러면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무엇이 마르다는 이렇게 염려 속으로 몰아넣었을까이다. 마르다는 염려 속에서 분주하게 활동하면서 동생 마리아가 자신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 상황을 예수님에게 말한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 하시나이까”(40). 마르다는 갑자가 자신이 혼자 내버려 진것처럼 느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매우 위험한 요소이다. 인간은 자신이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 매우 공포스러워 할 뿐 아니라, 걱정과 근심과 염려에 쌓이게 되고,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지나친 활동을 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지금 시대가 정말로 위기인 것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밖에 없어 자기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려는 자기계발서가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고, 가장 많이 팔리는 물건이 자기를 지키는(gun)’이고, 자기를 살게 해주는 것은 이라는 생각에 돈을 벌기 위해 영혼을 파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한 유명한 명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The war of all against all”의 상황이 충만하게 연출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너무도 자명하다. 누구도 염려에 놓이게 하지 않는 신실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 마르다처럼 왜 나를 혼자 내버려 두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에게서 근심과 염려를 찾아볼 수 없듯이, 따뜻한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은 근심과 염려(worry)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 먼 듯하여 안타깝다. (에휴, 하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르다야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2). 이 구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만, 또는 혹 한 가지만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마리아의 신앙(예수님 발치에서 말씀 듣는 신앙/믿음신앙)이 마르다의 신앙(행위의 신앙)보다 더 좋은 것이라는 오해를 낳는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택하였으니(choose)’라는 말이다.

 

선택의 신학은 구약성경에 면면히 흐르는 신학이다. 신명기 30장이 대표적이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30:15). 모세는 생명과 복의 삶과 사망과 화의 삶을 열거한 뒤에, 이 두 삶 중에 어떠한 삶을 택할 것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묻고 있다. 지금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서 이러한 결단이 또 요구되고 있는데, 마리아는 좋은 것(good)’을 택했다. 이것은 믿음과 행위 둘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마리아가 택한 것은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었다. 주님의 말씀 듣는 것, 그 좋은 것을 택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떠한 믿음인가? 우리는 분주하게 일을 하고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마르다처럼 아주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 마르다는 섬기는 일로 바빴다. 섬기는 일로 바쁜 것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섬기는 일로 좀 바쁜 그리스도인, 교회 공동체가 되면 좋겠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섬기기 전, 우리는 먼저 주님(그리스도)에 의해 섬김을 받았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섬김을 받기 전에, 그리스도의 섬김을 알기전에, 신적 섬김(디아코니아)을 하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마르다에게서 보는 것처럼 근심/염려에 노출되기 쉽다. 자신의 섬김이 세상을 바꾸는 줄, 전능감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교회 일을 하면서, 세상에 나가 사역을 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착각이다. 믿음이 없는 생각이다. 주님은 우리를 섬기러 왔지, 우리에게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마르다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너무 많은 일을 하다보니, 자신이 주님의 섬김을 받았다는 것을 까먹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헤세드) 안에 먼저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이 우리를 섬겨 주신 것이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이 역설적인 신앙에 머무는 것을 택하는 것이 좋은 것을 택하는 것이다.

 

마리아? 마르다? 우리는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며, 마리아의 신앙에 머물 것인가, 마르다의 신앙에 머물 것인가를 고민하면 안된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묻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공동체를 세우고 있으며, ‘좋은 것을 택하고 있는지를 묻는 이야기이다. 한 사람이라도 염려/근심에 사로잡히게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한다. 공동체를 점점 파괴하여 사람들을 염려/근심속으로 몰아넣는 세상에 맞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고 힘을 내야 한다.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여사역을 하면서, 자신이 먼저 주님의 섬김을 받았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주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여 불평을 쏟아 놓고 염려와 근심을 더하는 부족한 믿음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나를 먼저 섬겨주셨고, 주님께서는 나를 섬기러 오신 분이지 나의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는 믿음’, ‘이 좋은 것을 항상 선택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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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