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1. 10. 06:38

야곱의 귀향

(창세기 31:1-55)

 

타향살이가 힘든 이유는 타향에는 원초적 기억이 공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초적 기억은 어렸을 때 생성된다. 원초적 기억이 우리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어, 그 이후의 경험은 모두 상대화 된다. 캘리포니아의 타호(Tahoe)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어렸을 때 동네에서 처음 경험한 우물이나 저수지만 못하다. 우리는 어렸을 때 그 우물, 또는 저수지를 통해서 그것에 비친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얼굴을 아름다움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의 타호에 비친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얼굴은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원초적 기억을 불러올 뿐이다.

 

야곱에게도 이러한 원초적 기억이 있다. 그래서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귀향을 꿈꾼다. 다만, 원초적 기억에만 이끌려 귀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기억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기억에만 이끌려 귀향을 결심하면 현실 속에서 고통 당하기 십상이다. 원초적 기억의 자리로의 복귀(귀향)는 그만큼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고 은총이 필요한 일이다.

 

야곱은 형 에서의 위협을 피해 밧단 아람(하란) 땅으로 와서 20년을 살았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그는 외삼촌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매우 고단한 인생을 살았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40). 20년 동안 죽도록 고생한 야곱에게 중간중간에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섣불리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성실하게 자신의 삶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 야곱은 귀향을 결심한다.

 

우리는 야곱이 귀향을 결심하게 된 두 가지의 이유를 본다. 첫째는 야곱에 대한 라반과 그 아들들의 시기이다.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1) 야곱이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야곱의 삶의 자리에 어느 순간 시기와 질투가 넘쳐들었다. 야곱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정당하지 못하다. 오해다. 야곱은 라반의 소유를 빼앗은 적이 없다. 오히려 라반이 야곱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바라보는 라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2)

 

자신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삶의 자리가 불편해졌다고 야곱이 섣부르게 귀향을 결심한 것은 아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을 접한다.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3) 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가 되었음을 알려 주는 말이다. 삼촌과 사촌 형제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마음 불편한데, 하나님께서 야곱을 돌아보신다. 귀향을 결심한 야곱은 두 아내, 라헬과 레아를 불러 자신의 귀향 계획을 전한다. 그러면서, 장인 어른의 안색이 변한 것에 대하여, 이곳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열심이 일했음에도 자신이 당한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하소연한다. 남편의 귀향 결심과 이유를 들은 두 아내는 남편의 결정을 따르기로 한다.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16).

 

귀향을 결심한 야곱은 신속하게 행동하지만, 그 결심을 장인이자 삼촌인 라반에게 알리지 않고 시행하는 것은 참 의외이다. 그 의외의 행동이 또다른 긴장을 만들어낸다. 야곱은 아내들과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이끌고 고향인 가나안 땅으로 출발한다. 라반은 양털을 깎으러 멀리 떠나 있는 상태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야곱 일행이 떠난 지, 삼 일 후에나 이 소식을 듣는다. 야곱 일행이 기별도 없이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라반은 야곱 일행을 추격한다.

 

복잡한 심경을 마음에 품고 7일간 추격하여 야곱 일행을 따라잡은 라반은 야곱에게 따져 묻는다. 장인과 사위 사이의 갈등이 폭발을 한다. 라반은 야곱을 향하여 분노와 서운함을 쏟아낸다. 이에 맞서 야곱은 라반을 향하여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불평을 쏟아 놓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쏟아내는 분노와 불평만 보면 당장이라도 서로가 전쟁을 벌일 태세이다. 그런데 그들은 을 넘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온갖 분노와 불평을 쏟아내며 서로를 비난하면서도 이성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었다.


야곱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떳떳하지 못할 게 없다. 야곱이 라반에게 늘어놓은 불평은 라반의 정의롭지 못한 행동에 대한 저항이지, 신세한탄이거나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전혀 아니다. 또한 라반은 괴씸한 마음을 가지고 야곱을 해하려고 야곱 일행을 추격했지만, 추격 도중 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29).

 

우리는 살면서 때로 갈등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이면에 흐르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야곱이 자신이 한 행동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면, 그리고 라반이 꿈 속에서 야곱을 해하지 말라는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이 둘 사이에 얼마나 끔찍한 일이 발생했겠는가. 그것도 장인과 사위 사이에. 한 집안의 몰락과 더불어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통해 펼치시려던 하나님의 꿈이 산산이 부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등이 발생했을 때, 그 갈등 자체에 압도당하여 인생을 그르칠 것이 아니라, 그 갈등과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라반과 야곱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라반과 야곱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택하고, 다툼이 아니라 조약을 맺는다.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43). 이들은 언약을 맺기 위하여 돌무더기를 쌓는다. 그리고 라반은 그 돌무더기를 여갈사하두다’(아람어 방언)이라 부르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Galeed)’(히브리어 방언)라고 부른다. 그 뜻은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이다.

 

증거의 무더기를 앞에 놓아두고 라반과 야곱은 언약을 맺는다. 그 언약의 내용은 이것이다.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49). 여기서 살핀다돌본다는 뜻이 아니다. 영어로 ‘watch’이다. , 너와 나 사이를 하나님이 지켜보신다는 뜻이다. 좀 더 공격적인 뜻으로 말하자면, 너와 나 사이를 감시하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라반과 야곱 사이의 무엇을 지켜보신다/감시하신다는 것인가?

 

라반은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야곱이 자신의 딸들을 학대하지 않고 잘 돌보는지 하나님께서 지켜보실 것이라 말한다. “만인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50). 둘째는 야곱과 자신 사이에 맺은 평화협정이 잘 지켜지는지, 하나님께서 지켜보실 것이라 말한다.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52).

 

여기서 재밌는 것은 라반이 야곱과 언약을 맺으면서 한 말들은 하나님을 이용한 협박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즉 이 말은, 내 딸들 박대하지 말고 잘 돌보며 살아라, 그러는지 안 그러는지 하나님이 지켜보시니까 잘 해라는 뜻이고, 우리가 맺은 평화협정이 잘 지켜지는지 아닌지 하나님이 지켜보시니까 평화를 잘 지키자는 협박 아닌 협박인 것이다. 아주 앙증맞은 협박이다. 지금 라반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 야곱이 내 딸들 박대하는지 아니면 잘 돌보는지, 감시해 주세요!” 그리고 주님, 우리가 맺은 불가침조약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해 주세요!”

 

야곱은 이 언약을 미스바라고 칭한다. ‘미스바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라는 뜻이다. 미스바라는 명칭이 유명해진 것은 사무엘 때문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이자 사사가 된 뒤, 블레셋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삼상 7:5). 우리는 흔히 이것을 미스바 기도회라고 부른다. 그 미스바 기도회에서 사무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 것은 회개였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삼상 7:6).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장소가 아닌 미스바로 모이게 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사무엘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보시니(watch)’, 그들이 블레셋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지켜보고(watch)’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스바에 모여 이스라엘이 한 일은 하나님의 시선을 다시 감지하고, 그동안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 섬겼던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야곱의 귀향은 고향인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물리적 귀향이기도 하지만, 야곱의 귀향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의 시선(watch)’으로 돌아가는 영적인 귀향이기도 하다. 우리는 쉽게 물리적 귀향을 꿈꾸고, 그것을 그리워 하지만, 그러한 귀향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야곱에게 귀향이 복된 이유는 나의 살던 고향으로 돌아왔기 때문이 아니다. 야곱에게 귀향이 복된 이유는 그의 귀향은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의 시선안에 있는, 그리고 그것이 회복된 귀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귀향을 꿈꾸면서, 물리적인 것만 생각할 뿐, 우리가 잊고 사는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의 시선으로의 귀향을 꿈꾸지 않는다. 삶이 어렵고 힘들고 지치거든, 단순히 물리적 귀향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은 언제나 사는 데 지쳐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의 돌보심으로의 귀향을 꿈꿔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다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든지,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어떤 귀향을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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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