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0. 29. 10:30

레아와 라헬의 경쟁

(창세기30:1-24)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은 야곱 인생의 역사가 담긴 이름이다. 엄마 태속에서부터 야곱은 치열한 경쟁을 시작했다. 장자로 태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형 에서에게 장자권을 빼앗긴 야곱은 못내 아쉬운 마음에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나와 야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출생 후에도 야곱은 호시탐탐 장자권을 형 에서에게로부터 빼앗아오기를 꿈꿨다. 그 꿈은 장성하여 이루어지는데, 배고파 죽게 된 형에게 팥죽 한그릇을 건네며 빼앗아온 장자권은 그의 삶을 평안하게 하기보다 고달픈 인생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장자권을 지니고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네로 피신하던 중, 벧엘에서 하룻밤 유숙하며 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야곱은 하나님께 장자권에 걸맞은 축복을 약속받는다. 그러나 그 이후 외삼촌네서의 삶의 여정은 고단하기만 했다. 가정을 꾸리기 위해 그가 한 고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쓰러움을 불러일으킨다.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외삼촌의 계략에 의해 외삼촌의 두 딸을 모두 아내로 얻게 된 야곱은 두 자매 간에 발생한 질투 때문에 아주 난처한 삶을 이어간다.

 

언니 레아는 야곱의 첫째 부인이었다. 그러나 레아는 원래 야곱이 원했던, 사랑했던 여인이 아니었던 터라, 남편 야곱에게 별로 사랑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러한 레아의 고통을 보시고 그녀의 태를 열어주셨다. 그리하여 야곱은 레아에게서 네 명의 아들을 얻는다. 그 네 명의 아들이 지니게 된 이름은 모두 레아의 남편에게서 사랑받지 못한 고통의 삶이 담겨 있다. 사랑받지 못해 고통의 나날을 보냈지만, 하나님은 레아의 고통을 신원하여 주시고, 넷째 유다의 이름에서 보듯이,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될 만큼 위로 받는다.

 

그렇게 레아의 고통이 사라지고 야곱 가정에 평안이 찾아오는 듯했으나, 이번에는 레아의 동생이자 야곱의 둘째 부인이었던 라헬의 고통이 시작된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1). “부녀회한 (怀)은 오월비상(五月)이라.”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음력 오뉴월이므로 양력으로는 7, 8월에 해당하는 한여름)에서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결연한 마음이 라헬에게서 보이는 진술이다.

 

자식이 없어 회한(怀)’을 품은 성경의 여성들이 몇 있는데,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가 있고, 엘가나의 아내였던 한나(사무엘의 엄마)가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라헬이 보이고 있는 이런 회한은 없다. 자식이 없는 것 때문에 라헬이 이렇게 전례없는 회한을 보이는 것은 언니 레아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 같다. 질투는 참 무섭다. 라헬의 회한이 얼마나 컸으면, 성경은 자식 없는 고통의 대명사로 라헬을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보면 헤롯의 영유아 살해사건을 기록하면서 자식 잃은 여인들의 마음을 라헬의 마음에 빗대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독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2:18).

 

성경의 시대는 우리가 사는 시대와 다르다.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지 않는 지금 시대의 눈으로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성경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 통용되는 상식과 윤리를 잠시 내려놓고, 성경의 시대로 들어가 그들의 상식과 윤리를 통해서 성경의 이야기를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성경 시대에나 통용되던 상식과 윤리를 가지고 우리가 사는 시대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큰 불행을 안겨준다. 그래서 성경은 해석작업을 반드시 해야한다. 해석작업을 하지 않고 성경을 읽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불성실한 성경읽기다.

 

본문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야기를 보면 두 자매의 질투에서 시작된 경쟁은 막장 아침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그들의 서릿발 날리는 경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되고 있는데, 그 기록은 다름 아닌 그들의 서릿발 날리는 경쟁으로 인해 태어난 7명의 아들의 이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야곱의 아들들에게 이름은 그냥 이름이 아니라 역사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처음 네 아들의 이름에는 레아의 고통의 역사가 담겨 있고, 두 자매의 경쟁 가운데 태어난 7명의 아들의 이름에는 그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승리의 기쁨 등 다채로운 경쟁의 역사가 담겨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해 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린 라헬은 자신의 회한을 달래보려고 묘안을 생각해 내는데, 자신이 곁에 두고 있던 몸종 빌하를 남편 야곱에게 준다.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3). 야곱은 라헬의 요청에 응하여, 그렇게 안 하면 라헬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빌하에게로 들어가 아들을 낳는다. 그렇게 낳은 아들의 이름은 이다. 라헬은 자신의 몸종을 남편에게 내어주어 아들을 낳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래서 이름을 으로 지은 것인데,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풀어주셨다이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억울했는지, 그래서 라헬은 죽을 만큼 힘들었던 그 심정을 이라는 이름에 고스란히 남긴다.

 

몸종 빌하를 통해 아들을 낳았지만, 그래서 라헬은 어느정도 억울함을 풀었지만, 그래도 만족할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단 출생 이후 야곱은 라헬의 몸종 빌하를 통해 두 번째 아들은 낳는데, 그 아들의 이름은 납달리이다. 라헬은 두 번째 아들을 품에 안은 후 매우 흡족했던 모양이다. ‘납달리이름의 뜻은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이다. 라헬의 질투가 얼마나 심했는지, 그리고 그 질투를 통해서 촉발된 언니와의 경쟁에서 얼마나 이기고 싶었는지, 라헬의 속마음이 그대로 담긴 이름이다.

 

자식이 없어서 죽고 싶었던 라헬이 이제 본인의 뱃속에서 난 아들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의 통념으로 자신의 자식이라고 인정받았던 두 아들, 단과 납달리를 품에 안고 기뻐하고 있을 때, 또 하나의 거대한 질투의 그림자가 야곱의 가정을 덮었다. 다름 아닌, 레아의 질투였다. 처음 네 아들을 얻은 후, 출산이 멈춘 레아는 동생이 아들을 연달아 슬하에 두자, 이미 네 아들을 자신의 슬하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심이 발동하여 아들을 더 낳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신의 태가 열리지 않는 것을 알고 레아도 동생처럼 자신의 몸종 실바를 남편 야곱에게 준다. 그렇게 연달아 태어난 두 아들의 이름은 아셀이다. ‘복되다는 뜻을 지녔고, ‘아셀기쁘다는 뜻을 지녔는데, 이미 네 명의 아들을 둔 레아의 여유가 드러나 보이는 이름이다.

 

이렇게 하여, 두 자매 간의 서릿발 날리는 경쟁은 끝나는 듯하였으나, 그들의 경쟁은 멈출 줄 몰랐다. 하루는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들에 가서 합환채(Mandrake)를 꺾어온다. 그런데 그 합환채때문에 두 자매 간에 한바탕 소동이 또 발생한다. 합환채가 뭐길래. 그러나, 합환채가 무엇인지를 알고 나면, 그러한 소통이 일어날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합환채는 가나안의 산삼으로 불리는 약초이다. 지금이야 산삼만큼 좋은 약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산삼을 굳이 찾아 먹는 사람이 드물지만, 고대 시대에 산삼 같은 약초를 찾았을 때 그 효능의 이익을 보고자 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한 소동이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가나안의 산삼이라고 불리는 합환채는 산삼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비슷한 약효를 지니고 있었는데, ‘정력에 좋았다. 무엇보다 임신을 돕는 효능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자식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었던 두 자매 사이에 합환채 쟁탈전이 일어날 만했다. 누가 더 간절했을까? 자신이 직접 아이를 낳지 못했던 라헬이 더 간절했다. 그래서 라헬은 레아의 장남 르우벤이 발견하여 가져온 합환채를 갖고 싶어했다. 르우벤이 발견하여 자기의 엄마 레아에게 준 것임으로 원칙적으로 합환채는 레아의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라헬은 언니 레아에게 가서 당돌하게 합환채를 얻기 위한 (deal)’을 한다.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14).

 

레아가 순순히 내어줄 리 없다. 레아는 라헬의 청구에 발끈한다.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15절 전반). 거의 분위기가 막장 아침드라마에서 유명세를 탄 김치 싸대기를 날릴 분위기다.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라헬은 의기양양했다. 라헬은 언니 레아가 거절 못할 제안을 던진다.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15절 후반). 야곱의 부인들이자, 서로 자매였던 이 여인들의 대화를 보면, 야곱이라는 남자의 인생이 얼마나 고달팠을 지 이해가 간다.

 

남편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살았던 레아는 라헬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레아는 그렇게 해서라도 야곱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레아에게 측은지심이 생기는 장면이다. 라헬의 제안을 받은 레아는 합환채를 라헬에게 넘겨주고, 남편 야곱과 사랑을 나눌 기회를 얻는다. 그렇게 레아가 낳은 레아의 다섯 번째 아들의 이름은 잇사갈이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내게 그 값으로 주셨다이다. 잇사갈의 이름 속에도 어김없이 두 자매의 치열한 경쟁의 역사가 담긴 것이다. 그리고 잇사갈에 이어 레아는 자신의 여섯 번째 아들을 낳는데, 그 이름은 스불론이다. 여섯 번째 아들을 낳은 후 레아는 더 이상 라헬과 경쟁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매우 만족했던 것 같다. 스불론의 뜻은 후한 선물인데, ‘후한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브로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썼던 바로 그 단어이다. 레아는 여섯 번째 아들을 스불을 낳고 아주 흡족해 했으며, 이제 더 이상의 경쟁 없이 남편 야곱과 함께 평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리고 그 후에 레아는 더 이상의 아들을 낳지 못하고, 대신 딸을 낳는데, 그 딸이 바로 디나였다.

 

이야기의 전개가 이쯤 되면, 우리는 궁금해진다. 남편을 언니에게 내어주고 합환채를 얻는 라헬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나안의 산삼을 먹은 라헬은 어떻게 되었을까. 합환채는 라헬에게 어떤 효능을 안겨주었을까. 총 열 명의 자식을 낳는 동안, 라헬이 직접 낳은 자식은 한 명도 없었다. 몸종 빌하를 통해 두 아들을 품에 안기는 했지만, 라헬의 소망은 무엇이었겠는가. 본인이 직접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합환채를 그토록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라헬은 그 합환채 덕분에, 또한 자신의 과감한 지혜와 행동 덕분에, 드디어 자신의 태를 통해 아들을 얻는다. 그렇게 치열하고도 처절한 경쟁의 끝에 태어난 아들이 바로 요셉이다.

 

요셉을 품에 안고, 라헬은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23). 열 명의 자식이 탄생하는 동안 본인의 태에서 난 자식이 한 명도 없었던 라헬은 질투를 넘어서 자신을 더 힘들게 했던 감정인 부끄러움을 느꼈다. 라헬은 질투와 부끄러움의 복잡한 심정 가운데 살았다. 그러나, 어렵게 어렵게, 정말 어렵게, 본인의 태를 통해 얻은 아들이었지만, 그래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라헬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자신의 태를 통해 직접 얻는 아들의 이름을 요셉이라 지어주는데,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 원하노라이다. 짧게 줄여, 요셉은 더함이라는 뜻이다.

 

라헬의 요셉 출산 이야기 이후로, 오랜 시간동안 더 이상의 출산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라헬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 자신의 태를 통해 낳은 첫째 아들의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어주었지만, 더함이라는 소망이 이루어지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라헬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그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된다. 사실, 이것은 아주 슬픈 예감이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의 거대한 민족, 하나님의 백성, 나라는 아주 신비한 방식으로 세워져 갔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은 야곱의 두 아내이자 자매였던 레아와 라헬의 시기심에서 비롯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세워져 갔다. 시기심이라는 감정, 부끄러움이라는 감정, 그리고 경쟁이라는 상황은 그렇게 긍정적인 감정과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아주 현실적인 감정이며 상황이다. 우리는 아주 많이, 시기와 부끄러움의 상태에 놓이며, 의지와 상관없이 경쟁에 휘말려 든다. 그게 인생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희로애락 가운데 들어오셔서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가신다. 이것은 굉장히 고무적이고 신비로운 역사이다. 하나님께 뭔가를 이루어 드리려는 인위적인 거룩한 행동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시기와 질투, 부끄러움과 경쟁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살아내려고분투하는 그 모습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통로가 되는 것을 본다.

 

성경은 레아와 라헬의 이 막장 아침드라마 같은 경쟁을 어떻게 평가할까? 그 평가는 공교롭게도 룻기서에 나온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어 드디어 보아스와 결혼하게 된 룻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묘사하며, 룻기의 저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4:11).

 

성경은 레아와 라헬의 경쟁을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사건으로 해석한다. 아주 인간적인 치열한 경쟁이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신묘한 지혜가 들어있었다는 평가이다. 레아와 라헬은 그들의 마음 속에 어떤 거룩한 마음이 있지 않았다. 그들 마음 속에 어떤 원대한 꿈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경쟁해서 아들을 낳음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을 이루어 드려야지!’라는 거룩한 마음과 꿈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들은 그저 시기심과 질투 때문에 경쟁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인간적인 행동인, 아주 현실적인 행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집을 이룬 사건이 되었다니!

 

우리는 이 신묘한 하나님의 신비에 큰 위로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은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니리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28-29)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수고와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오히려 많은 거룩한 부담감을 몸과 마음에 지니고 산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그러나, 레아와 라헬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시기와 질투, 그리고 치열한 경쟁은 그 거룩한 부담감을 진실로 내려놓을 수 있게 우리를 초대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주 존귀한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삶의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뜻때문에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때로는 시기와 질투가 나면 그대로, 경쟁하고 싶으면 그대로, 우리 인간의 현실을 그대로 살아도 된다. 왜냐하면,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너무 고통스러워 하거나 비참한 감정을 느끼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인생을 향유하며무소의 뿔처럼 그 길을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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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