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0. 7. 08:20

별미 인생

(창세기 27:1-4)

 

인생 말년에 이삭은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했다. 노안이 왔거나, 녹내장, 또는 백내장이 왔던 것 같다. 눈까지 안 보이니, 이제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루는 이삭이 에서를 불러 별미를 만들어 오게 한다. 이삭은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을 부르지 않았다. 이삭은 에서만 불러 별미를 만들어 오게 했다. 이삭이 에서를 편애했다는 뜻이다.

 

별미(savory food)란 먹으면 기분 좋아지는 음식을 말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삭은 먹으면 기분 좋아지는 음식을 먹고, 자신의 마지막 임무를 마치려 한다.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my soul may bless you before I die). 그러므로 이삭에게 별미란 먹으면 마음이 기쁘고 밝아지고 열려서, 넉넉한 마음으로 축복해 줄 수 있는 기력과 능력이 생기게 하는 음식을 말한다. 이런 게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별미.

 

마음껏 축복해 주기 위해서 별미를 찾고 있는 이삭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또는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다른 이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마음껏 내리시는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다른 이들이 마음껏 베푸는 호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상대방이 무엇을 별미로 생각하지 알아야 할 것이고, 다음으로 내가 가진 것으로 해야 할 것이고, 마지막으로 정성을 다해서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신앙인으로서 이것이 우리의 과제가 아닌가 싶다. 어떻게 하나님께 별미를 드릴 것인가? 하나님은 어떤 별미를 원하시는가? 우리는 이것을 성경에서 먼저 발견해야 할 것이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별미를 알려주고 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우리는 하나님께 축복 받기를 원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하나님께 소원을 아뢴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소원을 아뢰지 않아도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알고 계신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별미로 생각하시는 지를 생각해 보거나 살펴보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실 별미만 먼저 상상한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이 무엇을 별미로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삭은 에서가 잡아온 고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에서는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별미를 마련해 드리러 사냥을 나선다. 에서의 마음이 얼마나 짠했을까? 눈도 잘 보이지 않는 노인네가 별미를 찾고, 그 별미를 먹고 기력을 좀 회복해 본인을 축복해 주길 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짠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별미를 알고 있는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쁨이 더 이상 없는 그 시간에, 그 사람에게 (마지막)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별미, 그래서 기력을 조금 되찾게 해주어 (마지막) 함박 웃음을 지으면서 축복의 말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별미, 그런 별미를 우리는 서로 알고 있는가. 나는 탕수육을 좋아한다. 내가 탕수육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맛있어서가 아니다. 거기에는 추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탕수육을 먹을 때면 아버지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어릴 적, 아버지와 사우나 하고 나면 먹던 그 향수가 탕수육에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삭이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별미는 무엇이었을까? 마지막으로 먹고 축복권을 발동할 수 있는 별미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 별미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별미는 자신을 축복한 아버지 아브라함을 생각나게 하는 별미였을 것이다. 이삭은 그 별미를 먹고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아들을 축복해 주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렇기에 별미는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기억이고추억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별미가 인애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을 마음에 잘 새겨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을 가장 깊이 깨닫고 삶 속에서 철저하게 구현한 존재는 누구일까? 복음은 그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은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점철됐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통 거기에 집중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별미이고, 우리는 그 별미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다가설 수 있으며,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애(仁愛)는 영어로 ‘mercy’라고 표기한다. 보통 한국말로는 자비또는 긍휼이라고 한다. 인애(자비/긍휼)이란 엄마가 자신의 태에서 나온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마음을 뜻한다. 모성애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엄마가 자기 태에서 나온 자식의 생명을 끝까지 보호하기 원하는 것처럼 인애를 갖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명 뿐 아니라 이웃의 생명도 끝까지 잘 지킬 줄 아는 것이다. 인애는 한 마디로, 생명을 지극히 존중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가장 큰 계명 두 가지 중의 하나로 표현할 수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인애의 삶이었다.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주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Have mercy on me)”라고 부르짖으며 인애를 간청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간청에 응답하여 넉넉한 인애를 베풀었다. , 모든 생명을 자기 태에서 나온 자식 같이 사랑하셨다. 예수께서 이렇게 사신 것은 바로 이 인애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별미라는 것을 뼛속 깊이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을까? 아마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것이다. 또는 아직 잘 모르지만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어떤 유명인을 아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어떤 유명인을 안다고 말할 때, 그를 TV에서 보았거나 그래서 그의 얼굴을 아는 것을 말한다. 또는 그와 만나보았거나 대화를 나누어 보았거나 삶의 어떤 부분을 공유하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TV에서 보듯 볼 수 없고, 대화를 나누거나 하나님과 어떤 삶을 공유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일컬어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전적 타자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른 말로 경건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잠언서는 이렇게 말한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6). 하나님을 아는 것을 영어로 ‘acknowledgement of God’이라고 한다. ‘애그놀리지먼트는 책을 냈을 때 저자가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부분이다. 거기서 저자는 본인이 이렇게 책을 내게 된 것에 대한 감사를 전하면서, 책이 나오게 되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지하는 것,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의 결과는 감사로 나타난다. 인지, 인식, 인정하지 못하면 감사하지 못한다. 아무리 주변에서 잘해줘도, 인지, 인식, 인정하지 못하면 감사할 줄 모른다. 우리는 너무도 무심해서 이것을 잘 못하며 산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호의조차 인지, 인식, 인정하지 못하고 사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지, 인식,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뒤집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 하나님을 인지하고, 인식하고, 인정하고 싶다면, 우리는 우선 우리 주변 사람들, 특별히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인지하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다. 모두 감사할 일들이다. 엄마가 자식들에게 밥해주는 것은 당연한가? 그렇지 않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엄마가 차려준 밥상을 얻어먹는 자녀들은 엄마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 엄마를 인지하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살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노동으로 먹고 산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의 노동은 자연이 없다면 아무 것도 생산해낼 수 없다. 노동은 우리가 하는 것이지만, 그 노동이 결실을 가져오게 하는 자연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노동으로 많은 결실을 맺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노동의 결실을 맺을 수 있게 선물(은혜)를 먼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내 삶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겠다!” ?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생명)이 하나님께 별미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별미를 십자가 위에서 받으시고, 우리에게 마음껏 축복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로 산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처럼 별미 인생으로 만들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기쁘신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총(축복)으로 우리 자신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처럼 아름다운 삶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께 별미 인생이 되는 삶, 그 인생이 어찌 복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별미 인생이 되는 삶, 다시 말해, 생명을 지극히 존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돌볼 뿐 아니라 이웃을 돌보는 삶, 그리고 범사에, 모든 일에, 숨쉬는 순간마다 하나님을 인지하고, 인식하고, 인정하여, 입에서 감사가 끊이지 않는 삶, 그런 별미 인생을 사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대한 유산 (Great Legacy)  (0) 2020.10.19
복자  (0) 2020.10.12
어빌리티  (0) 2020.09.30
그와 같은 싸움: 참여구원  (1) 2020.09.23
불기둥과 구름기둥  (0) 2020.09.15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