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같은 싸움: 참여구원
(빌립보서 1:29-2:8)
성경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다. 성경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를 담고 있긴 하지만, 성경의 세계는 현실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현실 세계는 찌그러진 원이지만, 성경의 세계는 완전한 원이다. ‘찌그러진 원’, ‘완전한 원’, ‘원’이라고 하는 본질은 같지만, 그 차원이 다르다.
현실 세계의 원을 보면, 온통 찌그러져 있어서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러나, 성경 세계의 원을 보면 찌그러져 있는 원이 활짝 펴져 온전한 원을 이루고 있어 마음이 좋다. 성경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두 현실을 산다. 이렇게 두 현실을 사는 것은 좋은 일일까, 아니면 참 어려운 일일까.
때로 우리는 ‘니고데모’가 되어 순진하게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한밤 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니고데모는 이때 ‘거듭난다/다시 태어난다(born again)’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요 3:3).
참으로 정직한 질문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정직. 참으로 지혜로운 질문이다.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지혜. 성경을 읽으며, 우리에게도 이러한 정직과 지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현실 세계와 성경의 세계를 동시에 살고 있긴 하지만, 우리는 현실 세계에 너무 젖어 있어 성경의 세계가 낯설기 때문이다. 미지의 세계와 같은 성경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그리고 성경의 세계를 이해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현실에만 파묻혀 버리고, 성경의 세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의 본문, 성경의 세계를 보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29-30).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고 싶으면 믿고, 안 믿고 싶으면 안 믿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인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고난을 받게 한다고 말한다. 은혜와 고난은 짝이 맞는 말이 아니다. 현실 세계에서 나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하면서 고난을 안겨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나쁜 놈’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성경의 세계에서는 현실 세계에는 없는 낯선 말을 한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의 여정을 말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됐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보니까 고난을 당하더라’고 말한다. 29절의 ‘고난을 당한다’를 30절에서는 ‘그와 같은 싸움’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싸움이 자신의 삶에 가득한데, 바울을 통해 빌립보교회 공동체는 그 싸움이 무슨 싸움이고 어떠한지, 바울의 삶과 증언을 통해서 목격한다. 그리고, 바울이 경험한 ‘고난’, ‘무엇에 대한 싸움’은 빌립보교회의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어떠한 것을 향해 ‘싸우게’ 한다는 것이다. 무엇에 대한 싸움일까? 이 싸움의 내용은 무엇일까?
우리는 ‘믿으면 구원 받는다!’라고 말하는 ‘대속구원’에 익숙하다. 위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은 굉장히 익숙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고난도 받게 한다”, “싸움을 하게 한다”라는 말에는 익숙하지 않다. ‘고난 받는다’, ‘싸움을 한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참여한다’라는 말인데, 우리는 이러한 ‘참여구원’에 대해서는 매우 낯설어 한다. 대속구원과 참여구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동전의 한 면만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대속구원만 보면서 구원 받았다고 만족해 하고 감사해 한다. 그렇다 보니, 우리의 삶에는 구원의 “감격과 평안”은 있는데, 바울이 말하고 있는 “고난과 싸움”이 없다.
우리는 요한복음의 기록 중에,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기도하신 일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요한복음의 기도는 우리가 다른 복음서에서 목격하는 소위 ‘겟세마네의 기도’가 아니다.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 기도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는 달리 아주 독특하게 예수의 마지막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지막 만찬 대신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긴 기도문을 싣고 있다. 그 기도의 핵심은 21절과 22절이 담고 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로 하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요 17:21-22).
10.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받기 바라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니고데모처럼 진지하게 질문해야 하는 지점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니고데모식으로 질문하면, “우리가 각자 다 몸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엄마 모태로 들어가서 샴쌍둥이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겁니까?” 현실 세계에 사는 우리는 성경의 세계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됨’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해서, 요한복음은 구원이라는 것을 ‘하나됨’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이, 우리가 서로 하나되고,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상태, 그 상태를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몸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생각이 다른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어려운 질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깨우칠 수 있다. ‘하나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의 질문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지혜가 합해지면, 우리에게 깨달음이 오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성육신(Incarnation)을 우리가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옮기면 ‘참여(participation)’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삶에 ‘참여’한 사건이다. 우리는 이 ‘참여’라는 말을 마음에 잘 품을 필요가 있다. 바로, 이 ‘참여’를 통해서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구원을 이루는데, 이 구원을 ‘참여구원’이라고 부른다.
‘참여’는 나 아닌 다른 존재와 ‘하나’가 되는 ‘통로’이다. 우리는 지금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참여’하는 행위를 통해 ‘하나’가 된다. 여러분과 내가 지금 ‘하나’이다. 지금 여러분은 내가 전하는 말씀선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공부에 참여하면 여러분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고, 참여하고 있는 서로서로가 하나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발행하고 있는 어떤 일, 그리고 교회에서 해야하는 어떠한 일들에 ‘참여’하고 우리는 그 참여를 통하여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다.
‘참여’가 이렇게 중요한 것인데, 우리는 ‘참여의 가치’를 너무 잃고 산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속구원’에는 익숙하나 ‘참여구원’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대속구원 받은 우리는 아주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니 이제 나는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자유인이고, 어떠한 일에 참여하고 안 하고는 나의 자유일 뿐더러, ‘참여’는 나의 구원과 별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보니,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고난과 싸움’이 없다. 우리는 그저 인생의 고난과 싸움을 말하고 경험할 뿐이다. 다른 말로, 우리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현실 세계에의 고난과 싸움을 경험할 뿐, 성경의 세계에 ‘참여’하여 그 참여로 인하여 받게 되는 ‘고난과 싸움’의 경험이 없다.
우리가 말씀에 ‘참여’하여, 성경의 세계에 참여하여 받게 되는 고난과 하게 되는 싸움은 무엇일까?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2:1). 이 진술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되면, 얻게 되는 ‘대속구원’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할 뿐 아니라, 우리를 ‘고난과 싸움’으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참여’이기 때문이다. 하나됨 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참여’로 인하여 우리가 받게 되는 고난과 하게 되는 싸움이 무엇인가? 마귀랑 싸우는 거? 아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이것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챌린지인가.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이게 되나? 안 된다. 우리는 얼마나 분열되어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가. 현실 세계에서 경험하는 것은 분열과 미움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자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게 되나? 우리는 얼마나 다툼과 허영으로 일을 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남을 우습게 여기는가? “You are better than me!”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어떻게든 상대방을 깎아내려 내 발 아래 굴복시키려는 게 이 세상의 현실 아닌가?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이게 되나? 우리가 우리 자신 일은 얼마나 살뜰하게 챙기는가?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일에는 얼마나 무관심한가? 다른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다가도 자신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가면 자기의 것을 지키겠다고 투쟁하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다.
성경의 세계는 현실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세상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대속구원까지에는 동의하고 감사하나, 현실 세계에는 없는 세상을 보여주시며, 현실 세계에서 성경의 세계를 구현해보라고, 현실 세계에서 성경의 세계를 살아보라고 부르시는, ‘참여구원’은 못들은 척, 못 본 척한다.
산길을 가던 순례자가 우연히, 안타깝게도 호랑이를 만났다. 순례자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저를 살려 주세요!” 그 순간, 호랑이도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셨을까? 호랑이가 순례자를 맛있게 잡수셨다. 만약, 순례자가 이렇게 기도했으면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까? “하나님, 저를 호랑이의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말도 안 되는 기도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의 세계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것을 말하며, 거기에 ‘참여’하라고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신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5-8).
우리의 삶에는 “싸움”이 많다. 그런데, 그 싸움은 대부분 분열과 미움 때문에 생겨난 싸움, “I am better than you”라고 말하며 상배방보다 우위에 올라 서려고 하면서 생긴 싸움, 남의 삶은 쳐다보지도 않고 내 이익만 추구하려다가 생긴 싸움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싸움이 있는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우리에게 이 싸움이 있는가? 호랑이를 만나면, “주님,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하기는 쉬워도, “주님, 오늘 제가 이렇게 호랑이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더러 자신의 삶에 ‘참여’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무엇보다, 우리는 ‘참여’의 가치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우리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는 거대한 일, 그런 거대한 참여는 할 수 없을지라도,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 보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참여’의 강력한 수단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바로 기도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식사 시간에 늘 이렇게 기도하셨다. “나눠져 있는 식구들과 온 교우들 식탁 위에도 풍성한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나도 식사기도 할 때마다 동일하게 기도한다. 그 기도를 통해서 나는 나눠져 있는 식구들의 식탁에, 온 교우들 식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그리고 참여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늘려가고 깊이를 더하면서 참여한다면, 우리는 대속구원 뿐 아니라 참여구원을 이루어, 완전한 구원을 이루게 될 것이라 믿는다. 현실 세계에서의 싸움이 아니라, 성경의 세계(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여, 그래서, 하게 되는 싸움, 그 싸움이 많아지는 복된 하늘 나라의 백성이 되시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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