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
(출애굽기 3:1-15)
나는 요즘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으로 성경을 읽는다. 한국의 천주교와 개신교가 교회일치운동 차원에서 1977년 부활절에 <공동번역 성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공동번역 성서는 천주교와 개신교 측에서 사용되지 않고, 대한성공회와 정교회에서만 사용한다. 개신교는 대개 <성경전서 개정개역판>을 사용하고, 천주교도 2005년에 자체 번역한 <성경>을 사용한다. 그러나, <공동번역 성서>가 가진 의미는 참 값진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던 천주교와 개신교가 교회 일치 차원에서 번역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렇게 계속하여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것을 인식하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말씀의 제목도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가 읽는 성경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되어 있지만, 공동번역은 “내게 네 힘이 되어주겠다”로 되어 있다. 공동번역은 의역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좀 더 쉽게 문장이 읽힌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하는 것과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듣는 이의 입장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각 문장을 합해서 해석하면 이런 것이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나에게 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다.” 참으로 힘이나는 말씀이다.
모세의 이야기는 영감이 넘친다(inspiring하다). 그는 출생부터 남달랐다. 그의 출생을 보면, 그가 하나님 손에 붙들린 사람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나님 손에 붙들린 사람은 언젠가 하나님에게 크게 쓰임 받는다. 우리가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 손에 붙들린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손에 붙들린 사람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에겐 “시련은 있지만 실패는 없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왕궁에서 부러울 것이 없이 자란 모세이지만, 자아가 형성될 때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고(그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애굽의 왕자였다.), 살인사건에 휘말려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그는 왕자로서 왕궁에 살았지만, 결국 아무도 그를 몰라보는 광야로 쫓겨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여인(십보라)을 만나고 그 가정에 들어가 양치는 목자로 산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1절).
어느 날 모세는 양떼를 치다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떨기나무 가운데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나무가 타지 않았다. 주의 천사가 ‘불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 광경이 하도 신기하여 불꽃이 이는 떨기나무로 가까이 다가섰다. 가까이 다가서자, 음성이 들렸다. “모세야, 모세야!”
신비한 경험은 하나님이 말을 걸어오시는 순간이다. 세상에는 온갖 신비한 일들이 많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오신다. 병이 나으면, 그것은 신비한 일이다.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말을 거시는 순간이다. 우리는 병 나은 것만 신비하게 여기는데, 사실 거꾸로 병 드는 것도 신비한 일이다. 이뿐 아니라, 아픔을 겪을 때, 기쁨을 누릴 때, 안도의 숨을 쉴 때, 평안을 누릴 때,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수없이 많은 신비한 일들이 우리에게 발생한다.
중요한 것은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이다. 모세는 신비한 일을 경험했을 때 그곳에 가까이 다가섰다. 우리가 이런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뭔가 신비한 일이 벌어지면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아, 하나님이 나에게 말을 거시는구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들어봐야겠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서는 것이 중요하다.
모세는 불꽃이 일고 있으나 타고 있지 않는 떨기나무로 가까이 다가섰다. 거기서 모세는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모세는 왕궁에서 살면서 자신이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광야에서 목동으로 양을 치는 사람이 되고 나서 스스로 존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지 못했다. 그러한 모세의 마음은 2장에 나오는데, 그가 십보라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붙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게르솜의 뜻은 “내가 낯선 고장에 몸붙여 사는 식객이 되었구나”라는 뜻이다. “나는 나그네구나. 나는 아무런 존귀함이 없는 사람이구나”, 이런 한숨이 베어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의 그러한 생각이 뒤집히는 경험을 한다. 왕궁이 거룩한 곳, 존귀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 거룩한 곳, 존귀한 곳이다!
우리도 살면서 거룩한 곳, 존귀한 곳을 좇는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세상에서 거룩하다고 하는 곳, 존귀하다고 하는 곳에 다다르려고 엄청난 에너지를 쓴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 있었을 때 겉모습은 거룩하고 존귀했으나, 결국 그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He was nothing). 그러나, 그는 광야에서 나그네 되어, 남의 집에 식객으로 살아갔으나,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는 거기에서 뭔가 남다른 사람이 된다(He is something now).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거룩한 곳,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곳에서 신발을 벗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내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 신발 끈을 조여 맨다. 빨리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내가 있는 자리를 돌아보자. 나는 그곳에서 신발을 벗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거룩한 사람, 존귀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는 사람은 왕궁에서 사나 광야에서 사는 것처럼 척박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광야에서 사나 왕궁에서 사는 것처럼 거룩하고 존귀한 삶을 사는 법이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매우 이기적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하나님을 만나면 내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나,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사명자가 된다’는 뜻과 같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기 삶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마음이 나에게 들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진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다. 그래서 그는 신발을 벗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다. “하나님, 죽겠습니다. 왕궁에서 살던 내가 이렇게 광야에서 양이나 치는 존재로 하락했습니다. 나를 다시 왕궁으로 보내시면 안 되겠습니까?” 모세는 감히 그런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저 하나님이 두려워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어라!”(7절).
모세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참 대단하다. 모세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 같으나, 모세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모세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이다. 모세는 분명 왕궁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모세의 소망을 이루어 주신다. 그를 왕궁으로 돌려보낸다. 그런데, 모세를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로서 돌려보낸다. 이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모세’라는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져 냄’이다. 이제 그는 이집트 왕궁으로 돌아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는’ 사명을 받았다.
같은 곳에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왕궁으로 돌아가지만, 모세는 왕궁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일을 한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모두 그런 것이다. 사업체를 운영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회사를 다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회사를 다니는 것이다. 배우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배우가 되는 것이고, PD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PD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보냄을 받았다는 마음으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삶의 질은 같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놓아두고,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이곳은 거룩한 곳인가? 내가 신발을 벗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가? 나는 이곳에 내 발로 걸어 들어왔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왔는가?”
하나님을 만나면 두려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만, 그 말씀을 모두 듣고 나서, 보이는 인간의 반응은 모세가 보여주는 반응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어라!”(10절). 그랬을 때, “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사야 선지자 정도,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셨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했다.(사 6:8). 모두 모세와 같이 반응한다. “제가 무엇인데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겠습니까?”
우리는 너무 육적인 고뇌를 많이 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모든 기도가 그 고뇌에 대한 기도이다. 그러한 것은 이방인, 즉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 하는 기도인데, 우리는 그러한 기도를 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너무도 많이 소비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명을 받아, 그것 때문에 고뇌하는 영적인 고뇌를 해야 한다. 성경의 기도는 대부분 영적 고뇌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명’을 받게 되어 있는데, 그 사명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영적 고뇌를 보라. 나는 요나 선지자를 매우 좋아하는데, 그의 영적 고뇌가 너무도 크고, 그의 사역이 너무도 큰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요나, 얼마나 그 부르심에 영적 고뇌가 컸으면 하나님이 가라고 한 니느웨이 반대편인 다시스로 가기 위해서 배를 탔겠는가. 그의 영적 고뇌가 얼마나 컸으면, 그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3일동안이나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괴로움을 겪었겠는가. 그러나 결국 요나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니느웨로 가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한 것도 아니다. 그냥 대충대충 했다. 그런데, 얼마나 큰 역사가 일어나는가.
나는 영적인 고뇌가 큰 사람이다. 나에게 이런저런 육신의 어려움도 많이 있지만, 나는 그것을 가지고 고뇌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고뇌한다. 나와 친해졌는지 아닌지를 판가름 하는 기준은 ‘나의 영적 고뇌’를 느끼는지 아닌지에 있다. 나의 영적 고뇌를 느끼고, 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나와 가까이 지내는 것이고, 나의 영적 고뇌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나와 친해진 것이 아니다. 나는 영적 고뇌를 말로도 풀어내지만, 글로 많이 풀어낸다. 내가 출판한 책, 출판하려고 하는 책, 그리고 블로그의 글들(1,200개의 글들)은 모두 나의 영적 고뇌의 산물이다. 나는 여러분이 나의 영적 고뇌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영적 고뇌가 우리교회에 주시는 비전의 통로가 되기 때문 / 보냄받음)
나는 여러분이 육적인 고민에 휩싸여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러한 육적인 문제는 주님께서 이미 해결해주신 줄로 믿고, 영적인 고민에 휩싸여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나에게 하나님은 어떠한 분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떠한 분인지를 아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15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 왕궁으로 다시 돌려보내면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는 사명을 주시며, 당신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드러내신다. “나는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나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15절).
야곱은 이스라엘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낯선 존재가 아니라, 내 뼛속 깊이 새겨진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저 사람은 뼛속까지 000이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것은 ‘나는 뼛속까지 하나님의 자녀야! 나는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이야!’, 이런 고백인 것이다. 우리의 뼛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는가? (자녀들의 뼛속에 하나님의 숨결을 남겨주기 위해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노력하시라.)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는다는 것, 즉 하나님의 일을 대신해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영적 고뇌를 깊이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나는 매일같이 느낀다. “나는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지 않구나.” 그래서 나는 매일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예수가 십자가를 앞에 놓아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했을 때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예수님의 영적 고뇌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것과 같았다.
그러한 고뇌 가운데, 우리에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12절의 말씀이다.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역사하시겠다는 뜻이다.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며 너의 힘이 되어주겠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며 너의 힘이 되어주겠다”라고 약속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인 고뇌 가운데서도 우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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